653화 천자론
653화 천자론
“대인, 슬슬 가셔야 합니다.”
바깥에서 자신을 찾는 목소리에 명나라 병부시랑 오삼계는 딱딱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이며 자리에서 몸을 일으켰다.
전에 소득 없이 끝난 회담과 달리 이번 회담은 아마도 구체적인 향방이 정해질 공산이 높았다.
이제 조선 사람들이 왔으니 그저 파하고 미루는 것으로는 끝나지 않게 되었기 때문이었다.
적어도 화친인지 전쟁인지 정도는 정해질 터, 오삼계는 애써 일렁이는 마음을 달래며 가슴을 쓸어내렸다.
‘아무리 조선이 진심이라고 한들 달라지지 않는다. 이미 싸우고 싶은 사람 두 사람이 체면으로 인해 기다렸을 따름이다.’
아무리 조선이 용을 쓰더라도 전쟁은 계속된다.
이것이 오삼계의 예상이었다.
허나 그 예상은 회담장에 도착하여 마주한 얼굴로 인해 바로 흔들리기 시작했다.
“어, 어째서?”
“병부시랑께서는 어디 몸이라도 아프시오? 마치 못 볼 걸 본 얼굴이외다.”
못 볼 걸 보기는 했다.
지금 대답한 사람의 얼굴, 아니 그가 여기에 있다는 사실 자체가 그러했으니 말이다.
그러한 일은 상대로 분명 알 터인데 그는 능청맞게 웃으며 안부를 물을 따름이었다.
“아무래도 근래에 공사가 다망하니 기력이 허해진 모양이군. 내 남양에 사람을 보내어 몸보신하라고 돼지와 닭이라도 거하게 잡아 오게 하리다.”
“······정왕 전하의 호의에는 감사하나 지금 상황에 어찌 저 한 몸을 위하여 사사로이 인력이며 재물을 쓰게 하겠습니까. 마음만 감사히 받도록 하겠습니다.”
예의를 갖추어 거절하는 말에 웃음을 감추지 못하고 연신 이야기하던 사람, 순나라 정왕 이자성은 고개를 끄덕였다.
“정말 훌륭한 마음가짐이오. 오늘 회담 역시 그러한 자세로 임하실 거라고 생각하니 참으로 든든하기 그지없소이다.”
이자성이 그리 말하며 먼저 가겠다고 하듯 걸음을 옮겼다.
그 모습을 보며 오삼계는 생각했다.
당신은 여기에 있으면 안 된다, 그렇게 말이다.
‘설마하니 생각이 바뀌어서 저들에게 사과할 생각이라도 들었단 말인가?’
“대인, 이건 위험하지 않겠습니까? 우리와 번국들의 뜻이 다르게 보일 수 있습니다.”
동행한 부관 우승조의 말에 오삼계는 슬쩍 주변 눈치를 보더니 목소리를 낮추어 일렀다.
“말을 조심하게. 이곳은 이미 적진이나 다름이 없어.”
“······!”
오삼계의 충고에 우승조는 제 입을 손으로 막으며 사방을 살폈다.
다행히 그들을 보는 이들이며 귀 기울이는 이들은 보이지 않았으며, 보이는 이들이라고는 조선 사람들로 보이는 일꾼들이며 병사들뿐이었다.
우승조와 함께 그걸 확인한 오삼계는 진중한 얼굴로 말을 덧붙였다.
“돌아가는 상황을 보아서 내가 적당히 장단을 맞출 것이네. 그것으로 충분할 것이야.”
이는 반쯤은 기대에 가까우나 한없이 현실에 가까운 기대였다.
이를 증명하듯 회담장에 모두가 모인 후에 상황은 대화 내용은 전과 다름이 없이 흘러갔다.
마치 새로이 참석한 사람들이 존재하지 않는다고 하듯 말이다.
이는 그저 비유가 아니라 얼추 현실에 맞는 표현이기도 했다.
이자성을 비롯한 순나라 사람들은 물론이요 조선 사람들 역시 아무런 말을 내지 않겠다고 하는 것처럼 입을 굳게 다물었기 때문이었다.
심지어 이자성에 이르러서는 순나라에 대한 사과를 요구하는 말에도 대답하지 않으니 그것조차 오삼계가 대신하여 말하게 되었다.
‘이 거북한 상황은 대체 뭐란 말이냐.’
그러나 그것이 좋은가 하면 당연히 그렇지 않았다.
그저 불쾌하고 거북하여 기분이 나쁠 뿐이니 한겨울 북방에서 전력으로 뛰어서 땀이 가득 났지만 벗을 수 없는 상황이나 한여름에 아무리 가벼이 입어도 겉에 진득하니 내려앉은 습기의 옷을 떨칠 수 없는 상황에 비슷했다.
아니, 어느 의미 그보다 찜찜하고 불쾌했다.
“명나라와 청나라의 이야기는 잘 들었습니다.”
그리고 그 불쾌함이 더는 치솟기 어려울 정도로 강해졌다 싶은 순간, 조선의 세자가 나섰다.
“주장하는 바는 잘 알겠습니다. 지극히 당연한 이야기며 양보할 수 없는 것들을 논하는 것도 알겠습니다. 허나 그렇기에 저는 안타까우며 암담함을 느낍니다.”
‘무슨 요설을 하려고 이리도 서론이 길단 말인가.’
이미 나오는 말을 요설로 단정하여 적대하나 이어지는 말은 그러한 각오며 단단함도 잠시 흔들릴 정도로 당황스러운 말이었다.
“조선은 지쳤습니다.”
“그게 무슨?”
당황스러워 저도 모르게 입으로 소리를 낸 오삼계를 향해 조선의 세자의 시선이 돌아온다.
그 시선을 마주한 오삼계는 한층 더 당황했다.
거기에 슬픔과 안타까움이, 탄식에 가까운 감정이 실려있음을 알아보았기 때문이었다.
‘화친하지 않는 게 그리도 감상적으로 변할 일이던가? 그들의 일도 아니지 않던가.’
“이 자리에 계신 분들이 아시는지는 모르나 잘 알지 못한다고 가정하고 말하고자 합니다. 조선은 줄곧 천자의 덕을 흠모했습니다”
천자의 덕을 흠모하였다.
이 말에 오삼계는 물론이고 자리한 이들 모두의 미간이 좁혀졌다.
“그저 말뿐인 덕이 아니라 실제로 은을 입었기 때문이니, 우리는 이를 재조지은이라고 불렀습니다.”
재조지은(再造之恩).
이 네 글자를 들은 순간 사람들은 조선이 무엇을 말하고자 하는지 알았다.
그리고 그걸 안 순간 사람들의 얼굴에는 저마다 감정이 깃드니 그 감정은 천차만별이었다.
“하여 은을 갚고자 하였으며 그 때문에 사치하며 제대로 나라 돌보지 않던 패주를 끌어내리기도 했습니다.”
조선의 과거를 논하는 말에 사람들은 일단 들어보자는 얼굴이 되어서 다음 말을 기다렸다.
오삼계 역시 다르지 않았으니, 무엇이 될지는 모르지만 저 말의 끝에는 터무니없는 것이 나올 것이라고 느꼈기 때문이었다.
때때로 그런 것은 나오지 않기 전에 막는 것이 마땅하나 그럴 수 없다면 드러날 때까지 기다리는 것이 마땅했다.
그 실체를 모르고 막고자 하면 자칫하면 수레를 막고자 하는 사마귀 꼴이 되기 십상인 것이다.
“이후 전쟁을 통하여 의리를 지키며 없이 하고자 하나 천자를 흠모하는 마음은 여전하고 여전하였습니다. 하여 조선은 생각을 바꾸었습니다. 다음 천자를, 진정 덕으로 통치하는 자가 나타나기를 기다리자고 말입니다. 헌데 여전히 천자는 없으니 조선은 이제 기다리기 지쳤습니다.”
천자가 없다.
이 말에 오삼계는 분노하며 놀랐다.
더는 참기 어려울 정도였으니 그는 바로 입을 열어서 따지고자 하였다.
그러나 그보다 앞서서 입을 열어 외치는 이가 있으니 다름 아닌 청나라 친왕으로 자리한 성친왕 아이시기오로 요토였다.
“조선은 지금 무슨 말을 하는 건가? 황상께서 계승하는 일을 도왔거늘 어찌 그런 망발을 하는 거요!”
“청나라 황상께서 지고한 자리에 있음은 부정하지 않으며, 그분께서 선대를 이어 황제 자리에 앉음이 마땅하다고는 생각합니다. 허나 그분은 황제지 천자가 아니십니다.”
“천자가 황제다!”
“천자는 황제가 아닙니다.”
정면에서 반박한 조선의 세자는 사람들을 둘러보더니 물었다.
“황제를 최초로 칭한 것이 언제며 누구인지는 모두가 아실 거라고 생각합니다.”
“진나라 시황제.”
소리내어 대답한 것은 예친왕 아이신기오로 도르곤이니 그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을 이었다.
“그럴듯한 궤변이야. 황제는 전국시대 이후에 탄생하였다. 그러나 천자는 그전에도 있었지. 허나 이제 황제는 곧 천자다.”
“예친왕께서 그리 말씀하시니 의외입니다.”
“의외라고?”
도르곤이 묻는 말에 조선의 세자는 웃으며 대답했다.
“청나라 황실처럼 수많은 지배자의 칭호를 가진 이가 없거늘, 그렇게 말씀하시니 말입니다.”
“천자 역시 칭호의 하나에 불과하다, 그 말인가?”
“크게 보면 그러하나 으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적어도 조선은 그렇게 생각합니다.”
“······전에도 생각했지만 그대들은 정말 독특해.”
다소 순화하여 말하니 조선의 세자는 그저 웃었다.
“일단 들어보지. 어디 한번 계속해 보게. 자네가 조선왕을 대리한다면 이곳에서 누구든 그대를 존중할 의무가 있다.”
도르곤은 그렇게 말한 후에 사방에 눈을 부랴리며 말을 덧붙였다.
“조선왕은 청나라 친왕 가운데 가장 존귀하다. 하여 황상 말고는 누구도 앞서지 못하니, 그대 역시 여기서 가장 높고 귀하다.”
이는 발언권과 지위를 인정함과 동시에 자신들에게 더 가까움을 드러내는 말이기도 했다.
그를 잘 알아들은 오삼계는 이맛살을 찌푸렸으나 조선의 세자는 별생각이 없는 모양이었다.
아니면 지금 이 정도는 대수롭지 않게 여겼든가 말이다.
“계속하겠습니다. 하여 천자와 황제가 같은 사람일 때는 길었으나, 그 양자가 뜻하는 바는 다르며 무게도 다릅니다. 본디 주나라 시절 천자가 왕이라 칭하고 오패는 자신들 공이라 칭하였던 것이 이를 드러냅니다.”
“조선의 세자께서는 천자라는 칭호가 황제라는 칭호보다 무겁다, 그렇게 말씀하시는 겁니까?”
더는 가만히 있기 어려워 물은 오삼계에게 조선의 세자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습니다. 말했듯, 천자라는 칭호는 오래전부터 있었습니다. 황제보다도 더 오래되었고, 천하를 다스리는 자들은 누구도 그 중요성을 부인하지 않았습니다. 시황제가 굳이 천자라는 말을 포기하지 않고 황제라는 말을 덧붙였음을 생각하면 이는 분명합니다.”
범람하는 왕들보다 나음을, 더 높고 대단함을 주장하기 위해 황제를 칭했다.
그러나 전에 있던 천자라는 칭호를 버리진 않았으니 분명 조선의 세자가 하는 말도 일리는 있었다.
하지만 이러한 생각은 해본 적이 없는 것이니 오삼계는 아직도 끝나지 않은 말을, 아직 보지 못한 끝에 나타날 것을 여전히 두렵게 여겼다.
“이러한 점을, 시황제의 예시를 생각하면 두 칭호가 뜻하는 바는 명백합니다. 천자는 천하를 다스리는 사람을 말하는 것이며, 황제는 천하를 정복한 자를 이르는 것입니다.”
“정복하여 얻으면 누구나 다스릴 수 있다.”
못마땅한 얼굴로 요토가 말하나 그 말에 대한 반박은 의외로 도르곤의 입에서 나왔다.
“성친왕의 말은 틀리지 않다. 허나 조선의 세자가 하는 말은 아마도 이것이겠지. 황제는 모든 걸 정복하여 다스리고자 하는 자며, 천자는 그와 달리하여 천하를 다스리고자 하는 자다.”
“조선에서 생각하는 정의도 그에 비슷합니다. 앞서 했던 말에 비추어 이르자면, 황제는 사방을 힘으로 정복하고자 하는 자라면 능히 칭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천자는 반대로 천하를 힘이 아닌 방식으로 다스리고자 하는 자라고 할 수 있습니다.”
여러 정의를 내린 후에 조선은 조금 전에 했던 말, 침묵을 지키다가 가장 먼저 입에 담았던 말로 돌아갔다.
“조선은 그러한 천자를 기대하며 덕치가 있는 천자를 따를 것을 바랐습니다. 명나라가 그러하길 바랐으며, 청나라가 그러하길 바랐습니다. 허나 실로 안타깝고 슬프게도 이곳에서 제가 본 것은 천자가 아니라 황제를 목표하는 이들이었습니다.”
말을 맺으며 조선의 세자가 그 눈을 소매로 훔치며 눈물을 드러내니 사람들은 생각했다.
정녕 미친놈이 아니면 대단한 연기자가 아닐 수 없다고 말이다.
“조선은 인의학을 새로 일으켰으니, 이는 사람다움을 근본으로 하여 유학을 발전하며 변해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중심되는 것만 제하면, 사람다움을 제하면 모든 것은 바뀔 수 있습니다. 하여 이제 생각하니, 천하 역시 그러하다고 생각합니다. 부디 여러 나라에서 오신 분들은 이를 생각하여 진중하게 고려하여 주시기 바랍니다.”
“재밌는 말씀은 잘 들었습니다. 헌데 중요한 내용이 없는 거 같습니다.”
나서서 말한 것은 아직도 입을 열지 않고 있던 이자성이니 그의 말에 조선의 세자는 말하라고 하듯 시선을 향했다.
그에 이자성은 자리에서 일어나서 물었다.
“무엇을 어떻게 하고자 하는 겁니까?”
“간단합니다.”
간단하다고 말한 조선의 세자는 천천히 입을 열었다.
그리하여 나온 말은 분명 간단했다.
하지만 그 파장은 작지 않았으니, 오삼계는 그 말을 듣는 순간 저도 모르게 두 눈을 질끈 감았다.
“천자가 없다면, 대신할 이가 필요합니다.”
Comment ' 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