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93화, 낭인부대와 전투
낭인곡(浪人谷), 서쪽 사천과 서장(티벳) 경계에 있는 깊은 계곡에 자리 잡고 있는 낭인들의 세계.
웅장한 삼 층 기와집을 중심으로 오십여 채의 통나무집들이 옹기종기 모여 있었다.
식당과 기녀가 있는 술집, 일용잡화를 파는 점포는 물론 각종 병장기를 파는 대장간, 노름방까지 생활에는 전혀 불편이 없는 곳이었다.
이곳에 오는 낭인들은 누구나 받아들였고 거절하는 법이 없었다. 심지어 그 사람의 역량에 따라 돈도 꾸어주었는데 담보는 자신의 목숨이었다.
물론 꾼 돈을 갚으면 언제라도 떠날 수 있었다. 그렇지만 한번 이곳에 발을 들여놓은 자는 결코 떠나는 법이 없었다.
이들은 세상에 나가봤자 벌레 보듯 무시당하기 일쑤였으니 이곳만큼 살기 좋은 곳이 없다는 것을 피부로 느끼고 있었다.
이곳의 곡주는 권한이 막강해서 곡주의 말은 바로 이곳의 법이었다. 검수귀(劍樹鬼) 설악귀가 곡주가 된 것은 십여 년 전이라고 하나 무림에 잘 알려지지 않은 인물이었다.
그의 과거 또한 알려진 바가 없어서 별호와 이름도 낭인곡에 와서 바꿨다는 소문이 나돌았다.
검수(劍樹)라는 별명은 불교에서 말하는 가지, 잎, 꽃, 과실이 모두 칼로 되어 있다는 지옥의 나무를 말한다.
그만큼 온몸이 칼로 무장된 귀신같은 자이니 그의 무공을 미루어 짐작할 만하였다.
정의니 도덕이니 협의라는 말은 이들에게 한낱 개소리에 불과했다. 그날그날 마음 내키는 대로 살고, 원하는 것이 있으면 무슨 짓을 해서라도 탈취하는 것이 일상이었다.
언제 죽을지 모르는 인생, 목숨을 담보로 즐기는 삶, 단지 원하는 것은 인간의 본초적인 욕망 그 자체였다.
미로와 같은 계곡의 틈을 비집고 낭인곡으로 들어온 채이평은 급히 곡주를 만나러갔다.
“안색을 보니 좋은 소식은 아닌 것 같은데···.”
설악귀의 말에 채이평이 고개를 숙이며 떠듬거렸다.
“찻집을 차린 놈들의 무공이 상상을 불허했습니다. 아무래도 암적인 존재임이 분명합니다. 무슨 방도를 마련해야 합니다.”
설악귀는 아무 말 없이 채이평을 쳐다보더니 나직이 말했다.
“그놈들과의 일을 더도 덜도 말고 있는 대로만 자세히 말해보아라.”
채이평은 벌레 씹은 표정으로 자초지종을 조근조근 말했다.
낭인곡 입구에는 채이평의 뒤를 미행해온 두성이와 마동탁과 초대봉이 굵은 고목 뒤에서 낭인곡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어림잡아도 삼백여 명 이상이 모여 사는 것 같았다.
“이들의 본거지를 알았으니 오늘은 이만 물러갑시다. 아무래도 우리 편 사람들을 빨리 모아 이들을 감시해야겠습니다.”
“우리 오봉방에서도 인원을 차출하겠습니다.”
“지금의 상황으로 볼 때 찻집을 운영하는 추명성과 우리들 일행이 저들의 목표가 될 것 같습니다. 우리도 대비를 해야겠군요.”
두성이와 두 사람은 낭인곡을 뒤로하고 좌우에서 하늘을 떠받친 듯, 우뚝 솟아있는 절벽 밑의 좁은 길을 빠져나왔다.
다음날 사명명이 네 소녀를 데리고 찻집에 나타났다.
마동탁은 평소 여자들에 대해선 별 관심을 두지 않았는데, 다정스런 모습에 교태까지 잘잘 흐르는 사명명을 보고 얼굴이 붉어졌다.
두성이는 일행들과 함께 차를 마시며 지금의 상황에 대해 말했다.
낭인곡에서 두성이 일행들을 노리고 있다는 것, 대마혈궁이 서서히 움직이고 있다는 것과 찻집 내부에 첩자가 있다는 것 등을 자세히 설명해주었다.
뒤이어 정찰대주 홍조심과 정찰대가 들어와 구석에 자리를 잡았다. 두성이는 가볍게 눈인사를 하고 그들 옆에 앉았다.
그때 악공 중에 얼후를 연주하는 도심조가 슬그머니 찻집을 빠져나가는 것을 목격하고 사명명의 제자 모요요가 그 뒤를 쫓아 나갔다.
도심조는 상점들을 기웃거리며 걸어 다녔다. 장신구를 파는 노점에서 비녀를 흥정하더니 상인에게 동전을 쥐어 주고 자리를 떴다.
옆자리의 노점상에서 과일을 구경하던 모요요가 손톱 밑에 숨겨둔 미혼향을 튕겨 장신구 파는 상인을 기절시켰다.
스르르 무너져 내리는 노점상인을 부축한 모요요는 재빠르게 상인의 주머니를 뒤져 조그맣게 접힌 쪽지를 손에 넣었다.
찻집으로 돌아온 모요요는 접힌 쪽지를 두성이 앞에 내밀었다. 쪽지를 펴서 읽어본 두성이가 고개를 끄덕였다.
쪽지에는 ‘놈들이 세력을 모으고 있음.’이라고 짤막하게 적혀있었다.
두성이는 도심조를 별실로 불렀다. 도심조는 잔뜩 겁먹은 얼굴로 조심스럽게 들어왔다.
두성이는 아무 말 없이 쪽지를 내밀었다. 도심조는 안색이 하얗게 질려 부들부들 떨며 그 자리에 꿇어앉았다.
“제발 목숨만 살려 주십시오, 놈들이 제 딸을 인질로 잡아놓고 협박하는 바람에 어쩔 수 없이···.”
도심조는 이마를 콩콩 찧으며 용서를 구했다. 두성이는 도심조에게 사는 곳을 묻고 홍조심에게 사실을 확인하라고 말했다.
“네 말이 사실이라면 더 이상 죄를 묻지 않겠다. 그러나 우리 명령을 따른다면 딸을 구해줄 것이다.”
도심조는 지옥에서 부처님을 만난 듯 눈물 콧물이 범벅된 얼굴로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이제 첩자를 이용해 저들을 구렁텅이로 몰아넣는 일만 남았다.
도심조가 사는 마을로 가서 염탐한 결과 도심조의 말은 사실이었다. 두성이는 홍조심에게 낭인곡의 위치를 알려주었다.
“절대로 안으로 침입해 놈들과 부딪치지 말고, 그곳을 빠져나오는 자들을 암습해 그들이 부여받은 임무가 무엇인지 정확히 파악하길 바랍니다.”
“명심하겠습니다.”
홍조심은 절대로 감정에 휩싸이지 않고 냉철한 이성과 재빠른 판단으로 대원들의 목숨을 지켜왔다.
점심때가 되자 장신구를 팔던 노점상인이 찻집에 들어와 악공들에게 노래 한 곡을 신청했다. 악공들 앞에서 차를 마시는 객들이 많았다.
듣는 이의 애간장을 녹이는 얼후 소리는 그날따라 다른 악기들보다 빼어났다. 연주가 끝나자 노점상인은 악공들에게 수고했다면 일일이 동전을 쥐어 주었다.
노점상인 찻집을 나가자 악공 도심조가 쪽지를 두성이에게 건네주었다. ‘상황을 다시 보고하라.’는 내용이었다.
두성이는 도심조에게 ‘놈들은 오늘 밤, 사천당가 습격!’이란 쪽지를 건네주었다.
허름한 농부로 변장한 두성이가 봇짐을 짊어 메고 찻집을 나섰다.
그 뒤를 멀리서 마동탁과 초대봉이 쫓아갔고 다른 길로는 사명명과 제자들이 따라왔다.
사천당가의 웅장한 대문 앞에서 농사꾼으로 변장한 두성이가 당치평을 기다리고 있었다.
당치평이 급하게 대문을 나와 두성이를 알아보고 손짓을 하며 안으로 들어갔다. 두성이는 줄레줄레 그 뒤를 따라갔다.
당치평은 많은 고루거각 중 한곳의 문을 열고 들어오라고 손짓했다.
“공자, 갑자기 무슨 일이십니까?”
“낭인의 무리들이 이곳을 습격한다는 첩보를 입수했습니다.”
“네에? 낭인의 무리들이라니, 금시초문입니다.”
“어쩌면 놈들이 당가를 보호한다는 명목으로 몰려올지도 모릅니다.”
“그렇담, 가주를 뵈러 갑시다. 가주께서는 공자를 만나보길 원했으니까요.”
“잠시 후 제 일행들이 올 테니 시끄럽지 않게 잘 부탁드립니다.”
당치평이 제자에게 손님들을 영접하라고 일렀다. 두성이는 보따리에서 옷을 꺼내 갈아입고 당치효와 함께 가주를 만나러 대전으로 들어갔다.
자신들을 위기에서 구해준 두성이가 들어오자 가주인 독수무흔 당치황이 활짝 웃으며 두성이를 맞았다.
“가주님, 처음 뵙겠습니다. 후배 장두성이 인사 올립니다.”
두성이가 공수를 하고 고개 숙여 인사를 하자 당치황도 같이 고개를 숙이며 맞절을 하였다.
“장 공자, 뭐라고 감사의 말씀을 드려야할지···. 자, 자리에 앉으시지요.”
대전에는 당가의 장로들과 요직에 있는 제자들이 있었다.
두성이는 현재 돌아가는 상황을 간략하게 말하고 낭인들이 쳐들어 올 경우에 대비한 계책을 의논하였다.
마동탁과 초대봉, 그리고 사명명과 여 제자들이 안내를 받고 들어왔다. 당가의 장로들은 마동탁의 기세가 범상치 않음에 모두 입을 떡 벌리고 놀랐다.
그리고 뒤따라온 사명명과 여 제자들의 미모를 보고는 눈이 휘둥그레졌고, 벌린 입에선 침까지 흘릴 지경이었다.
이건 마치 하늘에서 선녀가 뚝 떨어져서 하늘하늘 걸어오는 것 같아 눈이 어지러웠다.
꽃향기가 주위로 퍼지면서 속되지 않은 아름다움에 교태까지 줄줄 흘러내렸다. 주위에 있던 당가의 사내들은 모두 오금이 저리고 애간장이 타 들어갔다.
어둠이 내리기 시작하자 마동탁의 오봉방에서 정예군 삼십여 명이 도착했고, 염룡채의 번쾌수가 날랜 부하들과 낭인살수 오십여 명을 데리고 왔다.
뒤이어 불새단의 홍조심이 삼십여 명의 정찰대를 데리고 나타났고, 행동대주 육강수가 삼십여 명의 부하들과 함께 도착했다. 두성이의 일행만 해도 백오십여 명이나 되었다.
홍조심이 두성이에게 경과를 보고했다.
“단장님, 놈들 중 선발대 이십 명이 먼저 출발했고 뒤를 이어 본대 삼백여 명이 이리로 오고 있습니다.
놈들의 선발대는 사천 경계지역에서 모두 처리했습니다.”
“낭인곡의 우두머리도 같이 왔습니까?”
“선발대를 족쳐서 물어보니 곡주 검수귀 설악귀는 그곳에 남아서 승전보를 기다리고 있다고 합니다.”
“그곳에 남아있는 낭인들은 얼마나 될 것 같습니까?”
“설악귀는 당가와 힘을 합해 우리 편 용사들의 씨를 말리고, 기세를 몰아 청성산으로 쳐들어간다고 했으니 남은 놈들은 이삼십 명에 불과할 것입니다.”
두성이는 가주 당치황과 의논하여 당가의 세력은 안에서, 두성이의 세력들은 밖에 숨어 있다가 낭인부대가 들어오면 양쪽에서 협공하기로 결정했다.
어둠이 깔린 당가, 갑자기 불길이 일면서 병장기 부딪치는 소리가 밤하늘에 울려 퍼졌다.
넓은 마당 구석에 있는 창고에 불이 붙어 훨훨 타오르는 가운데 당가의 무인들과 홍조심, 육강수의 부하들이 고함을 지르며 서로 칼부림하고 있었다.
이는 사전에 의도된 바로 소리만 요란했지 실제로 다친 사람은 없었다.
잠시 후, 천지가 떠나갈 듯 우렁찬 함성을 내지르며 어둠을 뚫고 낭인들이 물밀 듯이 쳐들어왔다.
Comment '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