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왕을 잡았더니 세상이 망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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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명수
작품등록일 :
2023.12.01 17:08
최근연재일 :
2024.01.15 02: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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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12.11 20: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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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위 조사대

DUMMY

마크셔의 제안은 파격적이었다.

보통 훈련소에 입대하는 신병은 한 기수에 30~40명 남짓.

그중에서 부관은 많아야 1~2명 뽑는다.

그것도 실력이 있는 인재가 들어온 경우에 한해서 말이다.

적합자가 없거나 하면 당연히 아예 뽑지 않고 넘어간다.

그러니 부관을 6명이나 동시에 뽑겠다는 것이 놀라울 수밖에 없다.


“진심으로 한 말일까요? 저는 솔직히 믿기 어렵네요.”


침대에서 뒹굴던 카린이 의구심을 내비쳤다.

그녀는 잠시 우리가 있는 숙소로 놀러와 있는 상태였다.


“글쎄. 사정은 잘 모르겠지만 마크셔는 함부로 입을 놀리는 타입이 아니야.”


최소한, 자신의 언행에 책임감을 느끼는 지휘관이었다.

그리고 이번 기수에 괜찮은 인재가 제법 있기도 했다.

타르샤. 데커. 이실롯.

각자 특화된 재능이 다르고 앞으로의 성장 가능성이 충분하다.


“최근 마물의 연이은 침공으로 부관들도 사상자가 많았다고 들었어요. 그래서 평소보다 더 많이 뽑는 거 아닐까요?”


라일라가 자기 생각을 말했다.

나는 그녀가 의자에 앉아 읽고 있는 동화책을 물끄러미 바라봤다.


“그건 어디에서 난 거니?”

“숙소 안에 작은 도서관이 있었어요. 마음대로 빌려볼 수 있다길래 한 권 가져왔어요.”

“어디 보자, 오래된 전설을 다룬 이야기구나.”


별 생각없이 삽화를 보다가 멈칫했다.

그것은 다름 아닌 7인의 영웅을 그린 초상화였다.

구체적인 복장과 시대적 배경을 고려하면 대략 3백여 년 전으로 보인다.


‘9회차의 모험이었으려나.’



당시에도 마왕을 봉인하는 데는 성공했었다.

다만, 그 결과를 위해 불가피한 희생이 조금 있었지.

워낙 예전 일이라 세간에서는 진실을 잘 모를 터였다.


“왜 그러세요?”

“음? 아니야. 너는 이중에서 누구를 가장 좋아하니?”

“으음. 저는 이분이요.”


내 질문에 라일라는 손가락으로 구석의 한 인물을 가리켰다.

나는 의외라는 표정을 지었다.


“어째서? 당연히 성녀 쪽일 줄 알았는데.”

“이분은 항상 조용히 활약하시니까요. 자신의 공로를 다른 동료에게 넘기고 배후에서 지켜보기만 하세요. 마치 그림자처럼.”

“그게 이유야?”

“네, 인정받지 못하는 역할을 떠안고서도 묵묵하게 자신을 희생하는 모습이 멋져요. 동료들의 휘광에 가려진 비운의 영웅이라고나 할까. 그래서인지 이름도 제대로 전해지지 않네요.”


라일라가 설명하는 인물은 바로 나였다.

검성이나 성녀 같은 이들과 달리 들러리 취급이나 받는 영웅.

300여 년이 흐른 시점이라 당시의 나는 환영술을 부리는 흑마법사 정도로만 기억되고 있었다.


‘씁쓸하군.’


사실 이런 건 지금까지 별로 신경 쓰지 않았었다.

어떻게든 결과만 좋으면 상관없다고 생각했으니까.

그저 최선의 결과에 도달하는 것에만 모든 노력을 기울였다.


‘하지만 어째서인지 이번에는 실패하고 말았지.’


누군가의 음모로 세상은 왜곡되었고, 7인의 영웅은 뿔뿔이 흩어졌다.

그것이 나의 잘못인지는 아직 모른다.

하지만 확실한 것은 10회차의 이번 여정 또한 제대로 마무리 지어야만 한다는 사실이다.

후세에 인정받고 싶어서라기보단, 비운의 영웅은 나 혼자만으로 족하다는 생각에서였다.


“어, 그러고 보니 생김새가 많이 닮았네요. 시로네 님하고 이분하고.”


뒤늦게 유사점을 알아챈 라일라가 입을 벌렸다.

칙칙한 흑발.

멍한 분위기의 푸른눈.

조금 왜소한 체구와 가녀린 손발.

존재감을 최대한으로 가리기 위해 걸친 회색 로브.

예나 지금이나 달라진 건 거의 없는 듯하다.


“잠깐 바람 좀 쐬고 올게.”


대답 대신 나는 문밖으로 걸음을 옮겼다.


***


방책 위에 올라 황량한 대지 너머를 바라보고 있는데, 누군가가 다가왔다.


“당신이 앞으로 우리를 이끌 리더라면서요?”


눈가에 흉터가 있는 금발 여성이었다.

이름은 타르샤.

남쪽의 상업 구역에서 제법 이름을 떨쳤던 여도적이라고 들었다.


“그렇긴 한데, 불만 있나?”

“딱히 그런 건 아닌데, 조금 불안해서요. 당신처럼 어린 소년에게 우리 목숨을 맡겨야 한다는 사실이요.”


타르샤는 내 실력을 가늠해보러 온 모양이었다.

실력이 있는 마법사란 이야기는 들었겠지만, 직접 눈으로 확인하기 전엔 못 믿는 타입 같다.


“남들이 목숨 걸고 전면전을 할 때 배후에서 지원이나 해주는 마법사는 리더로서 못마땅한가 보지?”

“뭐, 그런 부분도 솔직히 조금 있기는 하지요. 하지만 정말 궁금한 건 당신의 정체예요.”


타르샤는 허리춤에서 단검을 꺼내 들더니 가볍게 묘기를 부렸다.

그러다가 동작을 멈추고 단검의 끝을 내게로 겨눠보인다.


“당신처럼 흑발에 흰 피부를 지닌 자는 이쪽 지역에 흔치 않아요. 아니, 아예 없다고 봐도 될 정도죠.”

“그게 문제가 되나?”

“뭐, 외모로 차별한다는 의미는 아니예요. 단지, 당신이 외지인일 가능성이 높다는 거죠.”


무슨 말인지 알 것 같았다.

이국적인 생김새의 외지인이 수상할 정도로 마법을 잘 다룬다면 의심의 대상이 될 법하다.

때마침 마물의 침공이 격해지는 추세이기도 하고 말이다.

바깥 사정을 모르고 한동안 성벽 안에서만 살던 사람이라면 내게 거부감을 느끼는 것도 이상하지 않다.


‘흑마법사에 대한 인식이 원래도 좋지 않긴 했어.’


원소 마법을 다루는 정통적인 마법사와 달리, 사변적인 즐거움을 추구하는 이미지가 있다.

산제물을 바쳐서 악마 같은 존재를 소환하려 한달지. 뭐 그런 것들 말이다.

실제로 그런 놈들이 있기는 하지만, 그건 흑마법의 극히 일부분에 불과했다.


‘얼마 전에 식당에서 실력 행사를 했던 걸 보고 흑마법사라고 짐작한 모양이야.’


원소 마법도, 신성 마법도 아닌데 묘한 술식을 쓴다면 대체로 흑마법사로 인식하는 경향이 있다.

하지만 내게는 익숙한 시선일 뿐이다.

앞에서 건방지게 까불어대면 지그시 밟아줬고, 더는 덤벼들지 않았지.

이번에는 어떨지 궁금했다.


“내가 외지인인 건 맞아. 조금 수상해 보이는 부분도 있겠지. 하지만 그 정도로는 시비를 걸기엔 조금 부족할 텐데?”

“인정해요. 출신이 어디든 실력만 있으면 알아주는 게 요새 업계 분위기니까.”

“업계라는 건 네가 전에 몸담았던 도둑 길드를 말하는 건가?”

“뭐, 그렇다고 해두죠. 아무튼, 어디 실력 좀 보여줘 봐요. 공손하게 양해를 구하는데 꼴사납게 이대로 물러나지는 않겠죠?”


타르샤는 다시 한번 도발적인 포즈를 취해 보였다.

신축성 있게 달라붙는 재질의 노출도 있는 옷.

그녀의 탄력적인 몸매가 과감하게 드러나 보인다.

나는 피식하고 웃었다.


“명색이 상관이라서 먼저 공격하려면 허락이 필요하단 건가?”

“그러면 어떻게 해요? 불시에 급습하는 편이 실력을 알아보기엔 더 확실하긴 하지만, 자칫하면 영창을 간다고요?”


단검을 한 손으로 돌리며 고양이처럼 요사하게 웃는다.

한쪽 눈으로 윙크하는 타르샤를 향해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좋을 대로 해. 여자라고 봐주진 않을 테니 후회는 하지 마.”

“그것 참 듣던 중 반가운 소리군요!”


말을 마친 타르샤의 모습이 일순간 자취를 감췄다.

멋모르는 일반인의 눈에는 분명 그렇게 보였을 것이다.

배후를 노리고 도약해오는 움직임이 무척이나 재빨랐으니까.


‘하지만 마법사의 인지 능력은 일반적인 수준을 상회하지.’


더욱이 나는 7인의 영웅 중 한 명이었던 존재였다.

내가 연구했던 분야의 흑마법에서만큼은 정점에 서 있었고, 기본적인 소양 정도는 차고 넘친다.


‘확실히, 성벽 내부엔 실력 있는 마법사가 드문 것 같군.’


그렇지 않다면야 이런 식으로 무모하게 기습을 해올 리 없다.

나는 고개도 돌리지 않은 채, 위협이 감지되는 방향으로 수호 결계를 펼쳤다.


카랑!


날아들던 단검이 비명을 내지르며 튕겨 나간다.


“크읏!”


급습에 실패한 타르샤가 인상을 구겼다.

직접 보지는 않았지만 분명히 그랬다.

시시각각으로 변하는 타르샤의 심상이 뇌리를 스치며 그녀가 어떻게 반응하는지 알려주고 있었다.


“상대가 마법사니까 스피드로 압도하면 된다는 생각이었을 테지? 하지만 그건 실력이 대등한 경우의 이야기야.”


나와 타르샤 사이엔 100년의 세월로도 어찌할 수 없는 간극이 있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그녀가 별 것 아니란 이야기는 아니다.

내게 도전하긴 무리지만, 타고난 재능은 평범한 수준을 상회한다.

대담하게 덤벼든 점을 높이 사서 너무 심한 짓은 하지 않기로 했다.


타앙!


검지로 가볍게 쏘아낸 마력탄이 타르샤의 복부에 직격했다.

높이 도약한 채로 허공에 떠 있던 타르샤는 눈을 크게 떴다.


“허업!”


그녀로서는 반응하기 어려울 정도로 빠른 속도였을 것이다.

애초에 눈에 보이지도 않으니 피하려는 생각조차 하지 못했겠지.

마력탄은 적당히 무력시위를 해야 할 때 내가 즐겨 쓰는 공격 마법이었다.


“어때, 스피드는 아무래도 내가 우위인 것 같지?”

“···!”


타르샤는 복부를 움켜잡고 신음하다가 절묘하게 착지했다.

고양이처럼 생긴 관상답게 민첩성은 나쁘지 않은 편이다.


“어때, 더 해볼 생각이야?”


방책 위에 선 채로 나는 아래쪽을 내려다봤다.

자존심에 상처를 입은 고양이는 낮게 울기만 할 뿐, 다시 덤벼들려 하지 않는다.


“생각보다 좀 하네요, 당신. 아직 어린 나이인데 어떻게 그런 실력인 거죠? 천재라도 되나요?”

“뭐, 성벽 너머의 세계는 넓다고만 해둘게.”

“조금 재수 없긴 하지만, 인정은 하도록 하죠. 당신을 겉모습으로만 판단해선 곤란하다는 걸.”


압도적으로 이긴 것치곤 평가가 박하군.

그래도 타르샤하고는 나름의 서열정리가 끝난 것 같다.

문제는 아직 2명이 더 남았다는 사실이지만.


“여어, 이런 곳에서 한 판 붙고 계셨구먼. 누님은 다친 데 없어?”


턱수염을 기른, 불량한 느낌의 사내가 다가왔다.

이름은 데커라고 했었지.

보고서에 의하면, 그는 북쪽의 공업지대 출신이다.

주특기는 총검술.

특수 제작된 권총과 세이버를 동시에 사용하는 것이 그의 전매 특허였다.


“너도 서열정리를 하러 온 건가? 기왕 시작한 김에 도전장을 받아주지.”

“아아, 됐습니다요. 누님이 졌으니 실력은 확실한 거겠죠. 이래 봬도 저는 합리적인 스타일이랍니다.”


데커는 그럴 생각이 없다며 고개를 한사코 저었다.

그런 그의 뒤쪽으로 백발의 청년이 나타난다.

이실롯.

서쪽의 슬럼가 출신인데, 보기 드문 기공사였다.

기공사는 손에 착용하는 무구인 너클만으로 전장을 누비는 격투가 계열이다.


“여기에 모인 셋 중에서는 네가 그나마 더 강한 편이구나, 이실롯.”


이들이 싸울 생각이 없어 보였기에 나는 알아서 서열정리를 해주었다.

그러자 움츠리고 있던 타르샤가 발끈하며 나를 노려본다.


“뭐어? 그걸 어떻게 눈으로만 보고 알 수 있단 거죠?”


나에게 진 건 인정하지만, 다른 녀석들하고는 직접 대련해보기 전엔 모른다는 의미다.

더 설명해주기 귀찮았기에 나는 이실롯을 바라봤다.


“그렇다는데? 너는 어떻게 할 거야?”

“그녀가 더 강한 걸로 해두겠습니다. 일단은요.”


이실롯은 불필요한 마찰을 피하는 성격 같았다.

그런 점에서 데커하고 비슷하지만, 속세와는 멀리 떨어진 수도승 같은 분위기가 있다.

반면, 데커는 속세의 쾌락은 전부 누리려고 하는 방탕아 기질의 사내다.

품에서 연초 하나를 꺼내더니 대뜸 타르샤에게 권한다.


“누님, 한 대 피우실래요? 여기로 끌려오기 전에 몰래 숨겨둔 건데, 공업지대에서는 제법 인기 있는···”

“면상에 주먹 꽂아 넣기 전에 물러나라. 세 발짝 뒤로.”


벌써부터 작업을 하려다 퇴짜 맞고 어깨를 으쓱한다.

실랑이를 벌이는 두 남녀를 보며 나는 관자놀이를 짚었다.


‘실력은 나름 있는 편이지만, 동료로서의 상성이 좋지 않군.’


큰 문제는 아니었다.

그건 앞으로 차차 맞춰가면 될 일이다.

잘 될지는 모르겠지만 말이다.


“싸우지 말고, 앞으로 잘해보자 제군들.”


작전 실행일은 바로 다음날.

내일부터는 성벽 도시에 도사린 음모를 캐기 위해 은밀히 떠난다.

무엇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을지는 두고 볼 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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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왕을 잡았더니 세상이 망함 연재란
제목날짜 조회 추천 글자수
36 숲속에서의 대화 24.01.15 13 2 12쪽
35 숲속의 악마 24.01.12 12 1 12쪽
34 에리나 브르타니엔 24.01.11 15 1 12쪽
33 환영의 숲 24.01.10 14 2 12쪽
32 추방된 자들 24.01.09 16 1 12쪽
31 황무지에서의 전투 24.01.08 18 1 11쪽
30 성벽 밖으로 24.01.05 16 1 11쪽
29 유리우스 제르가딘 24.01.04 21 1 12쪽
28 정예 인원을 뽑았다 24.01.03 20 1 12쪽
27 협상을 해보자 24.01.02 22 1 12쪽
26 알현실에 불려갔다 23.12.30 26 1 12쪽
25 부하를 팔아먹었다 23.12.29 21 1 12쪽
24 재각인 23.12.28 25 2 12쪽
23 할 일은 해야 한다 23.12.27 23 1 12쪽
22 귀찮은 일은 싫다 23.12.26 23 2 13쪽
21 리제 에스터리츠 23.12.25 25 2 12쪽
20 지하 고문실의 독대 23.12.23 28 2 12쪽
19 사라진 왕녀 23.12.22 26 2 12쪽
18 오래된 기억 23.12.21 36 3 12쪽
17 악인은 심판 받는다 23.12.20 34 3 12쪽
16 구원받지 못한 자 23.12.19 30 3 11쪽
15 악마숭배자 23.12.18 32 3 12쪽
14 밤은 깊어간다 23.12.16 30 3 11쪽
13 고대 마물 23.12.15 27 3 12쪽
12 비밀 통로 23.12.14 31 3 12쪽
11 도둑 길드 23.12.13 30 3 11쪽
10 초승달 밤의 도둑고양이 23.12.12 43 3 14쪽
» 진위 조사대 23.12.11 42 3 12쪽
8 유도 질문 23.12.09 43 4 12쪽
7 야간 습격 23.12.08 45 4 1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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