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왕을 잡았더니 세상이 망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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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명수
작품등록일 :
2023.12.01 17:08
최근연재일 :
2024.01.15 02: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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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12.18 20: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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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마숭배자

DUMMY

인간의 영혼은 씨앗으로 비유할 수 있다.

어떠한 가능성을 지닌 채로 남아 있는 고순도의 결정체.

어떠한 환경에서 자라나느냐에 따라 발현되는 가능성의 색채가 달라진다.

그렇기에 인간의 영혼이 꽃피우는 심상은 저마다 고유한 풍경을 그려나간다.

엘카만 가문의 초대 가주는 이렇게 말했다.

최후의 순간, 주마등처럼 과거가 스쳐 지나간 이후 마지막으로 마주하게 되는 장면이 있다고.

그것이 바로 자신이 살아온 인생 속에서 영혼이 꽃피운 심상 세계라고.

심상 세계는 자신의 색채를 가장 잘 드러내면서도 동시에 무의식적으로 스스로가 안식을 취할 무덤으로 정한 장소라고 말이다.


‘내가 선택한 무덤은 눈보라가 몰아치는 설원이었다. 아무런 구원도, 기다림도 존재하지 않는 시련의 공간이지.’


살이 엘듯한 칼바람에 머리가 흩날렸다.

나는 고요한 표정으로 눈앞의 적들을 바라봤다.

갑작스럽게 일변한 풍경에 당황하는 기색이 역력하다.


“뭐, 뭐야 이건!”

“장소가 바뀌었어!”

“저 마법사의 짓인가?”


평범한 이들이 심상 세계를 경험해봤을리 없다.

본래 서열 높은 악마들이 써먹던 고위 마법이니까.

인간 마법사 중에서 이것을 제대로 구현 가능한 건 엘카만 가문 뿐이다.


“다들 죽고 싶지 않으면 가만히 있어라. 여기는 내 절대 영역이니까.”


함부로 덤벼드는 걸 막기 위해 미리 경고를 보냈다.

내 의지로 구현된 심상 세계인만큼, 작은 목소리로 말해도 모두의 뇌리에 각인되었다.


“절대 영역이라, 과연 그렇군요. 이건 전부 당신이 술식으로 만들어낸 환상이었군요.”


잠시 움츠리고 있던 아들러가 씨익 웃었다.

녀석은 뭔가 믿는 구석이 있는지, 가만히 있지 않고 앞으로 걸어 나왔다.


“까불면 죽인다고 했다. 건방지게 굴지 마라.”


재차 경고하며 나는 아들러의 모습을 훑어봤다.

솔직히 말해서 전력이 어느 정도인지는 잘 모르겠다.

다만, 신경 쓰이는 것이 있다면 녀석의 사념이 지나치게 어둡다는 사실이다.

그래서 처음 마주쳤을 때도 신경 쓰였는데, 이런 상황이 되고 보니 조금 알 것 같았다.


‘내가 제약을 걸고 있는데도 여유롭게 움직이는군. 평범한 녀석이 아니다.’


생각해보니 아들러는 가장 먼저 현장에 도착한 귀족 출신의 지휘관이었다.

귀족층에 악마 숭배자가 있을 거라 추측 중인 상황에서는 매우 의심스럽지 않을 수 없다.


‘벌써 마족과 계약을 맺은 것인가? 아니면 흑마법사의 술식으로 체질 개선을 한 건가?’


어느 쪽인지는 지금부터 알아보면 될 일이었다.

다만, 희생자가 다량 발생하면 안 되므로 미리 손을 써두기로 했다.


‘애초에 그것을 위해 심상 세계를 전개한 거다.’


구석에 있는 마법진이 희생자들을 제물로 바치는 걸 막을 필요성이 있었다.

귀찮은 마물이 소환되거나 하면 놈들의 계략에 넘어가는 셈이다.

그래서 병사들의 발목은 묶어두되 죽이진 않는 방법이어야 했다.


“운이 좋은 줄 알아라. 원래대로라면 전멸시켜도 상관없었다.”


콰득 하는 소리와 함께 한 병사의 발목이 그대로 얼어붙었다.

장창을 들고 최전방에 있던 녀석이었다.


“어, 어어?”


놀라서 움직이려 해보지만, 이미 늦어 있었다.

이어서 다른 병사들도 눈 깜짝할 사이에 발목을 잡혔고, 적진은 혼란에 빠졌다.


“빙결 마법에 당했어!”

“저 마법사의 짓이야!”

“어서 얼음을 부숴!”

“안돼, 아무리 내려쳐도 부서지지 않아!”


이쪽에서 보자면 오합지졸이 아닐 수 없었다.

그만큼 성벽 내부에 실력 있는 마법사가 드물다는 증거다.

마물이 우글거리는 변방이다 보니, 미래가 없다고 생각하고 다들 떠난 것 같았다.


‘뭐, 나도 딱히 이곳에 미련은 없다만.’


여기에서 벌어지는 일들은 나와 관련이 조금 있었다.

그동안 직접 물어볼 기회가 없었는데, 이제야 대화 상대를 제대로 만난 기분이다.


“배후에서 마물을 움직이려는 이유가 뭐지? 이쯤 되면 말해줄 때도 되지 않았나?”


음험한 표정으로 웃는 아들러를 향해 물었다.

부하들이 속수무책으로 당하는 상황에서도 녀석은 여유로운 모습을 유지하고 있었다.


“글쎄요. 제가 그것까지 알아야 할 이유가 있을까요?”


혐의를 인정한다기엔 미묘한 답변이었다.

능글맞은 것도 그렇고, 여러모로 상대하기 짜증 나는 타입이다.

나는 다시 한번 물었다.


“이번 계획에 가담하긴 했지만, 핵심적인 인물은 아니란 의미인가?”

“당신의 질문에 답변해야 할 의무는 없습니다. 정 궁금하다면, 힘으로 굴복시켜보시죠?”


대단한 자신감이었다.

역시 이 녀석, 무언가 믿는 구석이 있어 보인다.


‘설령 그렇다 해도 내 발밑에서 놀아나는 수준이겠지만.’


감당하지 못할 힘을 갑자기 손에 넣게 되면 자만심이 커지기 마련이다.

지금까지 그런 녀석들을 수도 없이 상대해왔다.

그리고 결과는.


“보나 마나 이쪽의 승리다. 너 따위는 네가 걸어온 길의 일 할조차 못 미치니까.”


말을 마침과 동시에 공격 마법을 퍼부었다.

허공에 생성된 푸른 불꽃이 무더기로 날아들며 아들러를 덮친다.


“크읏!”


순간 아들러의 표정에서 여유가 사라졌다.

예상대로 녀석은 여전히 내 정체를 모르고, 그저 실력이 뛰어난 마법사라고만 여긴 듯하다.


“왜 그러나? 먼저 호기를 부린 건 네 쪽이었는데 말이야.”


나는 무표정하게 폭격이 멎은 지점을 바라봤다.

아들러는 한쪽 무릎을 꿇은 채, 거친 호흡을 몰아쉬고 있다.


‘그걸 막아냈군. 지쳐 보이지만 상처는 별로 입지 않았어.’


얼마 전에 쓰러뜨린 고대 마물, 베르투스보다도 강하다는 이야기였다.

녀석이 어떻게 내 공격을 막아냈는지는 확실히 지켜봤다.

암흑 결계.

녀석은 악마들이 사용하는 마법을 사용하고 있었다.


“크큭. 크크큭.”


아들러가 낮은 목소리로 웃었다.

그 모습이 음험해서 주위의 병사들도 벙찐 표정으로 그를 바라봤다.


“질문을 바꾸겠다. 네놈들은 악마 소환에 성공했나?”


지금 중요한 건 바로 마족이 강림했는지의 여부였다.

하지만 아들러는 이번에도 제대로 답변하지 않겠지.

우선은 녀석을 확실히 제압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니면 적당히 도망칠 기회를 주고 뒤쫓던지.’


현재로서는 후자가 더 나은 선택지라는 생각이 들었다.

오늘 밤에 계획이 본격적으로 진행되는 것 같으니, 도망치더라도 다른 조력자가 있는 곳으로 향할 터다.

만약 그렇게만 된다면 이번 사건의 원흉이 되는 녀석들을 일망타진할 수 있었다.


“악마 소환에 성공했느냐고요? 크큭, 답변을 거절합니다. 그딴 건 직접 알아보지 그래요?”


움츠리고 있던 아들러가 몸을 일으켰다.

슬그머니 뒷걸음질을 치는 것이, 빠져나갈 구멍을 찾는 모양이다.

이대로는 무리일 테니 조금 도와주기로 했다.


“이런, 하룻밤 만에 연속으로 상급 마법을 썼더니 유지력이 부족하군. 곤란하게 되었는걸.”


정말로 난감한 표정을 지으며 심상 세계를 해제했다.

그러자 설원의 풍경이 사라지며 주위가 원래대로 되돌아온다.


“크큭, 제 생각이 맞았군요. 그 흑마법은 한 번에 넓은 범위의 대상을 끌어들이는 대신 마나 소모량이 엄청날 겁니다. 아무리 당신이라 해도 계속 이러는 건 무리겠지요.”


이것이 연기인 줄도 모르고, 아들러는 잘도 지껄여댔다.

물론 전혀 근거가 없는 이야기는 아니다만, 베르투스를 비교적 손쉽게 해치운 터라 여유가 아직 있는 상태였다.


“도망치지 마라. 아직 해야 할 이야기가 더 있다.”

“당신이라면 계속 자리를 지키고 있을 건가요? 정면승부로 승산이 없으면 다른 방법을 찾는 게 정상입니다.”


아까의 공격을 받아내면서 뼈저리게 느낀 듯하다.

나하고 제대로 붙으면 목숨을 부지하기 어렵다는 사실을.

아들러가 꽁무니를 빼는 걸 보며 나는 희미하게 웃었다.


“이제 올라와도 좋아.”


일단은 지하 통로에서 대기 중이던 일행을 불러모았다.

일행은 다리가 얼어붙은 채로 꼼짝 못 하는 병사들을 보며 난색을 보였다.


“결국, 치안 유지대까지 건드리게 되었구먼요.”

“은밀하게 활동하며 정보를 모으는 게 임무였는데.”

“계속해도 되는 걸까요? 자칫하면 마크셔 대장님의 입장이 곤란해질지도.”


하지만 걱정할 것은 없었다.

일부 귀족이 불온한 음모를 꾸미며 성벽 도시 전체를 위험하게 만들고 있단 정황은 충분하다.

이곳이 성벽 수비대의 관할구역은 아니긴 하지만, 그건 내부 협력자의 도움을 받으면 해결된다.


“슬슬 나타날 때가 되었는데.”


여신의 가호를 받아, 과거의 진실을 들추어볼 수 있는 수녀가 있었다.

그녀라면 지금까지 벌어지는 일들을 어느 정도는 파악했을 터다.

잠시 기다리고 있자, 높은 첨탑 위에서 목소리가 들려왔다.


“저를 기다리고 계셨나요? 시로네.”


검은 면포를 둘러쓴 수녀였다.

검은 성녀, 아델레.

그녀가 스태프를 양손에 든 채 내려다보자 나는 비로소 마음이 놓였다.


“조금 늦었군요, 수녀님. 악마 숭배자들이 활개 치는 밤인데요.”

“저는 모든 과거를 볼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여신님께서 허락하신 장면을 예정된 시기에 목도할 뿐이지요.”


그렇다고는 해도, 내겐 그녀의 가호가 필요했다.

사실상 내가 성벽 도시에 남아있는 주된 이유라고 봐도 무리가 일 것이다.

아무튼, 긴 말은 필요없었다.


“일부러 도망치게 두었습니다. 함께 따라가시겠습니까?”

“물론이에요. 그에게서 악마의 잔향이 짙게 배어 나와서 제가 쉽게 추적할 수 있습니다.”


과연, 악마 숭배자를 처리하는 일은 성직자의 전매특허였다.

첨탑 위에서 뛰어 내려온 아델레는 우선 구석의 불순한 마법진부터 해제했다.

새롭게 합류한 그녀를 향해 나는 먼저 가란 제스처를 취했다.


“자, 그럼 앞장서시죠.”


지금부터는 사냥개가 먹잇감을 뒤쫓을 차례였다.


***


악마 숭배자는 어디에나 있었다.

죽음의 그림자가 드리운 빈민가에도.

온갖 진귀한 물건과 각계각층이 오가는 상업지구에도.

화려한 양식의 건축물이 늘어선 귀족의 주거지역에도.

인간의 왜곡된 욕망이 도사리는 곳이라면 장소를 불문하고 말이다.


‘영생을 얻고 싶달지, 죽은 사람을 되살리고 싶달지.’


혹은 분에 넘칠 정도로 막대한 권력을 얻고 싶달지.

알고 보면 뻔한 레파토리였다.

하지만 인간의 욕심은 끝이 없고 언제나 같은 실수를 반복한다.


투둑.


천장에서 기분 나쁜 이물질이 떨어졌다.

지금 우리가 향하고 있는 곳은 다름아닌, 본성의 지하감옥이었다.

온갖 흉악한 죄수들을 가둬놓고 고문하거나 방치하는 장소.

단언하건대 성벽 도시에서 가장 음험하고 악의가 도사리기 좋은 곳이었다.

이곳의 담당자는 치안 수비대장인 아들러 카진스키.

외부의 왕래가 뜸한 점을 이용하여 녀석은 여기서 뭔가를 벌이고 있었다.


“벌써 시작된 것 같군요.”


앞장서던 아델레가 씁쓸하게 중얼거렸다.

그러자 라일라가 불안한 표정으로 질문한다.


“무엇이 말인가요?”


그녀도 대충은 사건의 진상을 예상하고 있었다.

여기까지 와서 그것을 모를 사람은 없을 것이다.

단지, 믿기 어려운 상황에 대한 확답이 필요할 뿐이었다.


“악마 소환의식. 잘은 몰라도 오랫동안 정성을 들여 준비해온 것 같아요. 조심하는 편이 좋을 겁니다.”


아델레는 당부의 말을 전한 후, 더욱 걸음을 재촉했다.

그런 그녀를 갑자기 멈춰 세운 것은 다름 아닌 같은 성직자였다.


“시스터 리에리아? 이곳에서 뭘 하고 계신 겁니까?”


갈색 머리칼의 수녀는 길목을 막아선 채 아무 말도 없었다.

나는 다시 나서야 할 때임을 직감했다.


“잠시 물러나시지요, 수녀님. 저건 당신이 알던 시스터가 아닙니다.”


확인을 해보일 겸 푸른 불꽃을 날려보냈다.

그러자 암흑 결계가 펼쳐지며 위협을 곧바로 무력화시킨다.


“이곳을··· 지나게 내버려둘 순··· 없다···”


영혼을 빼앗긴 채 조종당하는 수녀가 더듬더듬 말했다.

이윽고 어둠 속에서 수많은 마수가 뻗어 나오더니, 우리를 덮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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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5 숲속의 악마 24.01.12 12 1 12쪽
34 에리나 브르타니엔 24.01.11 15 1 12쪽
33 환영의 숲 24.01.10 14 2 1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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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 성벽 밖으로 24.01.05 16 1 11쪽
29 유리우스 제르가딘 24.01.04 21 1 12쪽
28 정예 인원을 뽑았다 24.01.03 20 1 12쪽
27 협상을 해보자 24.01.02 22 1 12쪽
26 알현실에 불려갔다 23.12.30 26 1 12쪽
25 부하를 팔아먹었다 23.12.29 21 1 12쪽
24 재각인 23.12.28 25 2 12쪽
23 할 일은 해야 한다 23.12.27 23 1 12쪽
22 귀찮은 일은 싫다 23.12.26 23 2 13쪽
21 리제 에스터리츠 23.12.25 25 2 12쪽
20 지하 고문실의 독대 23.12.23 28 2 12쪽
19 사라진 왕녀 23.12.22 26 2 12쪽
18 오래된 기억 23.12.21 36 3 12쪽
17 악인은 심판 받는다 23.12.20 34 3 12쪽
16 구원받지 못한 자 23.12.19 30 3 11쪽
» 악마숭배자 23.12.18 32 3 12쪽
14 밤은 깊어간다 23.12.16 30 3 11쪽
13 고대 마물 23.12.15 27 3 12쪽
12 비밀 통로 23.12.14 31 3 12쪽
11 도둑 길드 23.12.13 30 3 11쪽
10 초승달 밤의 도둑고양이 23.12.12 42 3 14쪽
9 진위 조사대 23.12.11 41 3 12쪽
8 유도 질문 23.12.09 43 4 12쪽
7 야간 습격 23.12.08 45 4 1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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