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움까지는 견뎌 본다
숲속에 있는 여러 비밀 사업장에 오랫동안 흩어져 살던 가족들은 눈물의 재회를 했다.
어릴 때 헤어진 자식이 성인이 되어서 상봉하는 경우도 있었다.
물론 그 사이 모진 학대와 질병으로 사망하여 가족을 만나지 못한 경우도 많았다.
끔찍한 일이었다.
가족을 찾지 못해 울부짖는 사람들을 보며 코르삭은 다짐했다.
이 일에 가담하거나 개입한 자들을 결코 용서하지 않겠다고.
“페스카 씨.”
“예!”
“사람들을 조직해서 인원 파악하고, 아직 가족을 찾지 못한 사람들이 가족을 찾을 수 있도록 도와주시겠습니까?”
페스카는 이 엄혹한 곳에 살면서도 가족들의 소식을 파악하고 있을 정도로 수완이 좋아서 금방 부인과 두 아들을 다시 만날 수 있었다.
“알겠습니다.”
그는 코르삭이 시킨 일만 하는 것이 아니었다.
건물별로 인원을 적당히 분산하고 식사 당번을 정해 사람들이 혼란에 빠지지 않도록 했고, 이곳을 벗어날 때를 대비해 건강 상태에 따라 사람들을 세 부류로 나눠 놓기까지 했다.
자기 몸 하나는 가눌 수 있는 사람 - 중
스스로 몸도 가누기 어려운 사람 - 하
남을 도울 수 있는 사람 - 상
그리하여 ‘상’으로 하여금 ‘하’를 돕고 민병대원들을 안내하도록 했다.
민병대원들만으로는 이 넓은 장소를 다 수색하는 것이 사실상 불가능했기에 코르삭은 그의 도움을 기꺼이 받아들였다.
페스카 덕에 이곳에서 강제 노역을 하던 사람들이 안정을 찾아가는 것을 보고 코르삭은 프라이바드가 있는 곳으로 갔다.
프라이바드는 도망친 도적들을 추살하고 생포한 도적들을 고문해 정보를 캐고 있었다.
그가 코르삭을 보고 물었다.
“사람들은 어쩌고?”
“일을 잘하는 사람이 있어서 맡기고 왔습니다. 인원 파악 하고, 헤어진 가족 찾아 주고, 식사하고, 휴식을 취하라고 했습니다. 여긴 어떻습니까?”
“최대한 추살하기는 했지만, 모두 잡지는 못했다고 봐야지.”
“그런가요?”
“그렇게 생각하고 계획을 짜야 하네.”
최악의 경우를 상정하고 계획을 수립해야 최악의 사태를 막을 수 있다.
“알겠습니다.”
“그것보다 알아낸 게 있는데, 이놈들은 한 달에 세 번씩 배가 들어온다고 하네. 육로는 순찰할 때나 가축을 대량으로 몰고 갈 때 외에는 사용하지 않는다는군.”
“그럼 다음 배는 언제 들어옵니까?”
“7일쯤 뒤에.”
“도적이 하나도 달아나지 못하도록 모두 잡았다 해도 7일 뒤면 놈들이 알게 된다는 말이죠?”
“그렇지. 배를 억류하면 하루 이틀 시간을 더 벌겠지만, 길어 봐야 열흘이지. 열흘 뒤에는 군대가 온다고 봐야 해.”
“육로로 도적이 달아났다고 하면 어떻게 될까요?”
“여기서 자고라 백작령까지 숲을 통과해 가면 이틀, 병력이 이동하는 것은 더 시간이 걸리니까 오륙일, 최소 7일 걸리겠지.”
“어쨌든 7일에서 10일 뒤에는 자고라 백작령에서 군대가 온다는 거네요.”
“그렇게 보고 계획을 짜야지.”
실제로는 달라질 수 있다.
비가 많이 내리거나 이곳 사정을 파악하기 위해 정찰대를 먼저 보낸다면 자고라 백작군과 마주하는 시간은 좀 더 뒤로 미뤄질 것이다.
어쨌든 7일로 잡고 계획을 세워야 했다.
“여기 사람들을 데리고 숲을 벗어날 수 있을까요?”
코르삭의 질문에 프라이바드가 눈살을 찌푸렸다.
“몇 명인지는 파악했나?”
“최소 4천입니다.”
어디까지나 어림짐작이었다.
페스카가 파악을 마치면 그보다는 늘어날 것 같았다.
“사람들의 상태는? 걸어서 숲을 벗어날 수 있겠나?”
“모두 파악한 건 아니지만, 사람들의 건강 상태를 상중하로 나눴을 때 2, 7, 1 정도 비율이더군요. 숲을 빠져 나가는 데만 최소 이틀, 길면 며칠 더 걸릴 테니 쉽지 않겠죠.”
“먹을 것도 챙겨야지.”
“후유!”
“숲을 빠져나간다고 끝이 아니야. 만약 추격 병력이 계속 따라온다면 어떡할 텐가? 우리 병력보다 훨씬 많다면? 탈출하다 죽는 사람이 더 생길 수도 있어.”
코르삭은 가슴이 답답해졌다.
“사람들을 두고 가는 게 맞아.”
자기 몸 하나 겨우 건사하는 사람이 4천 명 이상.
그들을 데리고 이 숲을 빠져나가는 것도 쉬운 일이 아닌데 성난 군대가 추격해 온다면 엄청난 피해가 생길 것이다.
그럼에도 코르삭은 그들을 차마 두고 갈 수가 없었다.
악마의 손아귀에서 벗어났다고 눈물을 흘리던 사람들을 다시 팽개치고 갈 수는 없었다.
나중에 다시 온다는 보장도 없었다.
자고라 백작은 분명 이곳의 방비를 더 튼튼히 할 테고, 투리스 사령관이 이곳을 공격하는 것을 우선순위로 하리라고 장담할 수도 없었다.
투리스군은 오크의 공격을 받던 여섯 개의 성을 확실히 구원하고, 투리스 지방에 떠도는 오크 잔당을 소탕하고, 배후 영지들을 탈환하는 것이 최우선 과제였다.
기사단 병력은 이미 그 임무를 위해 떠났고, 요새 주둔군은 전후 수습을 하느라 바빴다.
그러니 우선순위에서 당연히 밀리게 된다.
“지금 데려가야 합니다.”
코르삭이 단호히 말했다.
“이유를 말해 보게.”
“여기 다시 와서 구출에 성공한다는 보장이 없습니다. 그리고 투리스군이 북서부 영지 장악을 언제 본격적으로 시작할지 모릅니다. 시작한다 해도 자고라 백작령이 첫 번째가 된다는 보장이 없죠.
그런데 지금 저 사람들을 데리고 탈출한다면 투리스 사령관을 움직일 수가 있습니다.”
“무슨 말인가?”
“투리스가 우베르 북서부를 장악하는 것은 솔직히 명분이 부족합니다. 배후 영지를 차지하는 것도, 그동안 물자 공급 의무를 제대로 하지 않아서 응징한다고 하는데, 그 사유라면 왕국에 정식으로 그 문제를 올려서 따져야죠. 배후 영지를 점령하는 것도 정당성이 부족한데 북서부 땅 전체를 장악하는 것은 더 말할 필요가 없습니다. 왕국이 로그넘과 싸우는 틈에 힘을 기르려는 불충한 신하일 뿐입니다.
그런데 이번 건으로 자고라 백작을 응징하는 것은 정의로운 일이죠.
우베르 왕국 전역에 흩어져 사는 수백만 라티시아 난민들과 힘없는 백성들이 사령관님을 지지할 것입니다.
겸사겸사 오크를 막기 위해 병력 동원 체계를 바꿀 필요가 있어서 우베르 북서부를 통합한다고 하면, 내심 불쾌하다 해도, 국왕은 크게 나무라지 못할 것입니다.”
“이 사건을 투리스 사령관의 우베르 북서부 장악 명분으로 삼겠다는 건가?”
“예!”
투리스 사령관은 악덕 영주를 물리치고 고통에 신음하는 라티시아 난민과 백성들을 구출한 영웅이 된다.
분명히 투리스군을 움직일 만하다.
코르삭은 그렇게 생각했다.
프라이바드가 잠시 생각하고는 말했다.
“투리스 사령관이라면 분명 자네 뜻대로 움직일 것 같군. 그런데 말이야.”
“······?”
“윗사람들은 아랫사람이 멋대로 자신을 휘두르는 걸 결코 용납하지 않아.”
“예?”
“자네는 투리스 사령관한테 자고라 백작을 공략하라는 명을 받은 것도 아니고, 라티시아 난민을 구하라는 임무를 받은 것도 아니야. 자네 스스로 판단해 이 일을 벌였고, 자네가 저 사람들을 구하는 게 옳다고 생각해서 구하기 위해 사령관을 이용하려는 거지.
권한을 벗어난 일을 하면서 그를 이용하는 게 아닌가?
결과적으로 이익이 된다 해도 불쾌할 수밖에 없어.”
맞는 말이었다.
“이래서 옛날부터 높은 사람들이 똑똑한 부하를 싫어한다는 말이 있는 거야. 윗사람을 휘두르려 하거든. 똑똑한 부하가 빨리 죽는 이유지.”
“······.”
“사령관이 통이 큰 사람이라면 경고 정도로 그치겠지만, 그렇지 않다면 미움을 받을 수 있어. 최악의 경우에는 죽을 수도 있다는 걸 명심해. 그래도 하겠나?”
코르삭은 고민했지만, 그 시간은 길지 않았다.
이 불쌍한 사람들을 두고 갈 수는 없었다.
그리고 이렇게 만든 놈들을 반드시 응징해야 했다.
코르삭이 결연히 말했다.
“미움까지는 견뎌 보겠습니다.”
그러고는 이내 히쭉 웃으며 말했다.
“죽이려 한다면 도망쳐야죠. 그때는 꼭 도와주세요.”
그 말에 프라이바드도 심각한 표정을 풀 수밖에 없었다.
“그래! 사령관이 죽이려 한다면 절망의 평원으로 달아날 수 있게 길을 안내해 주겠네.”
프라이바드의 말을 듣고 안심한 코르삭은 편지 세 통을 써서 정찰대 대원들에게 건네며 맡겼다.
“이건 글라드 남작, 이건 카멜리 자작, 그리고 이건 사령관님께 보내는 거예요. 우리 목숨이 달려 있으니 최대한 빠르게 이 편지를 전해야 해요.”
“알겠습니다, 대장님!”
정찰대가 떠났다.
***
프라이바드는 오랜 강제 노역으로 심신이 피폐해진 사람들이 몸을 추스르는 동안 탈출 계획을 세웠다.
코르삭과 불카르는 자고라 백작령 방면을 감시했다.
녹스는 선착장을 지키며 배가 들어올 경우를 대비했다.
페스카는 사람들을 무리 짓고, 각 무리마다 책임자를 정하고 식량을 배분했다.
그렇게 하루하루 시간이 지났다.
7일은, 오랜 세월 비쩍 곯은 몸이 예전으로 돌아가기에 충분한 시간은 아니었지만, 탈출을 결행해도 괜찮겠다는 생각이 들도록 몸을 회복시켜 줄 정도는 되었다.
선두에는 민병대원들이 길을 이끌었다.
지난 7일 동안 소 떼를 끌고 다니며 다져 놓았기에 길이 선명히 나 있었다.
그 뒤로 6천여 명의 사람들이 비장한 눈빛으로 따라갔다.
긴 행렬이 완전히 사라질 때까지는 한참이 걸렸다.
“자! 그럼 소 차례인가?”
“예.”
소 떼가 움직였다.
건강 ‘상’인 사람들이 각 목장에서 엄청난 수의 소들을 몰고 나오기 시작했다.
7일간의 휴식으로 몸이 좋아진 건강 ‘중’인 사람들에게 건강 ‘하’인 사람들을 맡기고 소 떼 몰이에 ‘상’을 동원한 까닭은 단지 소가 탐나서가 아니었다.
어쨌든 소 떼가 모두 떠난 뒤로 민병대가 맨 후미에서 따라갔다.
***
민병대가 떠나고 얼마 지나지 않았을 때 강을 거슬러 올라온 커다란 배 두 척이 선착장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그런데 배에는 병력이 가득 타고 있었다.
자고라 백작의 군대였다.
이윽고 배가 선착장에 닿자 뱃사람들이 뛰어내려 밧줄로 배를 선착장 기둥에 묶었다.
“빨리 내려!”
지휘관의 날카로운 명령에 병사들이 부리나케 하선하기 시작했다.
바로 그때 매복해 있던 민병대원들이 선착장에 미리 쌓아 놓은 짚더미와 배를 향해 불화살을 날렸다.
“적이다!”
“겁먹지 말고 잡아! 몇 놈 되지 않는다!”
“침착하게 불을 꺼!”
약간의 피해가 있었지만, 배가 완전히 타지는 않았고 대부분 무사히 하선했다.
그 사이에 민병대원들은 모두 달아났다.
선착장으로 들어온 자고라 백작군은 비밀 사업장을 통과했다.
“텅 비었습니다!”
“쫓아! 방금 전까지 우리를 공격했으니 멀리 가지는 못했을 것이다.”
자고라군은 계속해서 나아갔다.
그러나 중간중간 숲속에서 날아온 화살에 병사들이 목숨을 잃었다.
“우리 진군을 늦추려는 술책이다! 적은 얼마 되지 않는다. 이동해!”
자고라 백작군은 추격의 고삐를 늦추지 않았다.
한편 자고라 백작령 방면의 숲에서도 군대가 나타났다.
배에서 내린 병력보다 규모도 훨씬 크고 기사들도 포함되어 있었다.
자고라 백작이 직접 끌고 온 병력이었다.
침입한 적이 수천 명이라는 도적의 말에 당장 동원할 수 있는 병력을 모두 끌고 온 것이다.
도적들이 몰살당한 개활지에 도착했을 때 자고라 백작과 병사들은 깜짝 놀랐다.
도적들의 시체가 머리 가죽이 벗겨지고 배가 열려 내장을 쏟은 채 기둥에 매달려 있었던 것이다.
그 처참한 모습에 구역질을 하는 병사도 있었다.
이것은 프라이바드가 한 짓으로 과거 로그넘이 저항한 적에게 한 일을 따라한 것이다.
“겁먹을 것 없다! 그게 바로 적이 노리는 바다! 놈들의 수가 많다면 쓸데없이 이런 짓을 할 리가 없지. 가자!”
자고라 백작은 병력을 이끌고 나아갔다.
처음 본 농장도, 그다음 목장도 텅 비어 있는 것을 확인한 그는 분노로 몸을 떨었다.
얼마나 많은 시간과 노력을 들여 이곳을 만들었던가!
주변 영주들이 눈치 채지 못하도록 비밀리에 힘을 길러 북서부 먼저 제패하고 중앙으로 나아가겠다는 원대한 꿈이 하루아침에 무너졌다.
용서할 수가 없었다.
“감히 내 것을 건드려? 누군지 몰라도 뼈까지 씹어 먹어 주겠다!”
자고라 백작군은 달아난 자들의 흔적을 따라 숲속으로 들어갔다.
***
민병대 정찰대는 빠르게 말을 달려 글라드 남작의 성으로 갔다.
편지를 받아 본 글라드 남작이 깜짝 놀라며 말했다.
“이게 대체 말이 되는가? 나는 모르는 일이라고 분명히 전하게!”
자고라 백작에게 맞서는 건 죽겠다는 말이나 마찬가지였다.
“도적 떼를 소탕해 달랬더니 대체 무슨 짓을 한 거야?”
정찰대는 할 수 없이 카멜리 자작의 성으로 말을 달렸다.
그런데 카멜리 자작은 성에 없었다.
코르삭의 조언에 따라 투리스 사령관에게 충성을 맹세하러 떠났던 것이다.
결국 정찰대는 투리스 요새로 말을 달렸다.
중간에 카멜리 자작을 만나 편지를 전하기는 했지만, 그보다 중요한 것은 사령관에게 편지를 전하는 것이었다.
정찰대원들은 잠도 자지 않고 말을 달려 마침내 투리스 요새에 도착해서 편지를 전하고 쓰러졌다.
편지를 읽어 본 사령관 뷔페스는 책상을 강하게 내리쳤다.
쾅!
“이놈은 대체 뭘 하고 다니는 거야?”
“왜 그러십니까?”
참모장이 궁금해하자 뷔페스는 코르삭의 편지를 그에게 넘겼다.
빠르게 내용을 읽은 참모장이 신음을 흘리며 말했다.
“안 갈 수가 없군요.”
“망할 자식! 오면 혼쭐을 내주려고 했더니 그새를 못 참고 나를 불러? 혼내려면 직접 오라는 거야 뭐야? 오냐, 이놈의 새끼, 세상 무서운 줄 모르는구나! 다리몽둥이를 부러뜨려 주마! 야, 발테스!”
“예!”
“기사단, 전부 불러!”
“기사단은 에퀴타스가 데려가서 요새에 남아 있는 기사는 저를 포함해 열두 명뿐입니다.”
“그거면 됐어. 가자!”
“예? 열두 명이서요?”
“나까지 열셋이야!”
“진심이십니까?”
“자고란지 고자란지 하는 더러운 새끼를 죽이는 데 그 정도면 충분하지!”
“알겠습니다!”
투리스 사령관 뷔페스는 참모장 발테스를 포함해 기사 열두 명을 데리고 카드쿠스 숲을 향해 씩씩대며 말을 달렸다.
그의 분노가 자고라 백작을 향한 것인지 코르삭을 향한 것인지는 알 수 없었다.
- 작가의말
부산김아재 님, 후원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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