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을 세워 죄를 덜라
투리스 요새까지 그리 멀지 않은 곳에서 코르삭 일행과 투리스 기사단은 이른 저녁을 먹기로 했다.
모두가 식사 준비를 하는 사이에 에퀴타스가 기사단의 백장들을 불러 모았다.
민병대 측에서는 코르삭과 불카르가 참석했다.
“먼저 민병대장의 이야기를 듣고 회의를 시작한다.”
에퀴타스의 말에 코르삭이 모여 있는 기사단 간부들을 죽 훑어보았다.
전에 트베리에게서 보호비를 갈취한 적이 있는 울가리스는 알아보았지만, 다른 기사들은 처음 보는 사람들이었다.
기사들의 공통점이라면 오랫동안 집에 들어가지 못해 다들 무척 꾀죄죄하다고 눈빛이 날카롭다는 것이었다.
“민병대장 코르삭입니다. 카멜리 성을 떠나올 때 중앙군의 고위 참모에게서 그냥 흘려들을 수 없는 중요한 이야기를 듣게 되어 기사단장님께 말씀드렸는데, 그에 대해 여러분들에게 다시 말씀드리겠습니다.”
기사들이 매섭게 쳐다보는 가운데 코르삭이 이야기를 시작했다.
“오크가 전쟁을 일으켰습니다. 저는 정확히 모르지만 수백 년 만이라고 하더군요. 그런데 공교롭게도 로그넘족이 대군을 일으켜 우베르 요새 앞에 대군을 집결시키고 있다고 합니다. 이것이 과연 우연일까요? 중앙군 참모에 따르면 로그넘과 오크가 손을 잡았을 가능성이 있다고 합니다.”
약초꾼, 채집꾼이 들려준 이야기라고 하는 것보다 이렇게 하는 편이 추가 설명이 필요 없어서 좋았다.
아니나 다를까 기사들의 눈이 똥그래지고 집중력이 올라갔다.
“게다가 중앙군 참모는, 수백 년 만에 오크를 통합시켜 대군을 이끌고 쳐들어온 대단한 오크가 과연 과거에 패했던 역사를 그대로 답습할지 의문이라고 하더군요. 어떤 식으로든 패배를 반복하지 않고 반드시 승리할 방법을 가지고 왔다고 생각하는 것이 오크와의 전쟁을 대하는 올바른 자세가 아니겠느냐고 했습니다.”
코르삭은 설득력을 높이기 위해 적당히 가공했다.
“그래서 생각해 봤습니다. 내가 오크 왕이고 과거 조상들이 투리스 요새를 공격하다 망한 역사를 알고 있다면 똑같은 일을 반복할 것인가? 그렇게 하지는 않겠죠. 반드시 이길 수 있는 방법을 준비할 겁니다.”
오크가 반드시 이길 수 있는 방법.
“제가 생각할 때 오크의 필승 전략은 압도적인 병력으로 요새를 포위한 채 가둬 놓고 기다리는 겁니다. 요새 안의 인간이 다 굶어 죽을 때까지요. 그러면 병력 피해도 없습니다. 그런데 이 방법에는 큰 문제가 있습니다. 오크 병력이 너무 많아 식량 공급이 어렵다는 겁니다. 과거에 비해 오크의 식량 생산 능력이 높아졌다거나 운반 기술이 크게 발전했다는 증거도 없습니다.
그렇다면 식량 수급 상황은 과거와 비슷하다고 할 때 전쟁 시작 세 달 안에 요새를 함락시켜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예전과 마찬가지로 오크는 대규모 아사 사태를 맞이할 테니까요. 요새 전면의 오크는 절망의 평원으로부터 꾸준히 보급을 받는다고 해도 요새 후면으로 넘어온 오크는 다 죽는 겁니다.”
요새 후면의 오크가 죽어 나가면 인간 측은 자연스럽게 포위가 풀린다.
인간의 승리, 오크의 패배가 되는 것이다.
“세 달 안에 요새를 반드시 함락시킬 수 있는 방법이 무엇일까요?”
코르삭이 기사들을 둘러보자 저마다 머리를 쥐어짰다.
“그런 게 있다면 요새는 예전에 함락되지 않았을까?”
울가리스가 말했다.
코르삭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죠. 투리스 요새를 함락시키는 건 굉장히 어려운 일입니다. 과거에 비해 병력이 많이 줄었다 해도 말입니다. 높은 성벽을 넘기 어렵고, 투석기와 다연발 쇠뇌의 화력이 무시무시하니까요.
그런데 오크가 로그넘과 결탁했을 가능성이 있다는 말을 듣는 순간, 저는 잊고 있던 일이 떠올랐습니다.“
코르삭을 쳐다보는 기사들의 눈이 반짝였다.
“몇 달 전에 광부 조합의 의뢰로 곡괭이 200자루와 램프, 기름, 밧줄, 삽, 갱도 버팀목, 수레, 수통, 식기 등 광산 작업에 필요한 물품 일체를 공급하는 일을 한 적이 있습니다. 이후 식자재도 꾸준히 공급했습니다. 그런데 그 일을 조합에 부탁한 광부가 로그넘족 탈영병입니다.”
“뭐?”
“매흐라는 이름의 로그넘족 탈영병이 로그넘족 노예들을 사들여 투리스 요새 전면 검은 숲 안쪽 폐광을 개발하고 있었던 겁니다. 많은 양의 식자재와 물품을 운반해 달라고 해서 들어 주었습니다.
그때는 그런가 보다 했는데 지금 와서 생각해 보니 확실히 의심스러운 구석이 있습니다.”
오크는 로그넘과 결탁했다.
오크 왕은 로그넘이 약속한 필승의 비법을 가지고 전쟁을 시작했다.
투리스는 로그넘족 탈영병도 주민으로 받아 준다.
15년 전에 투리스의 주민이 된 로그넘족 탈영병은 로그넘족 노예 – 전쟁 포로 - 들을 구입하여 투리스 요새에서 그리 멀지 않은 검은 숲 안의 폐광을, 전쟁이 일어나기 직전에 대규모로 개발하기 시작했다.
사실 정확히 언제부터 개발을 시작했는지는 알 수 없다.
아주 오래된 일인지도 모른다.
“그때는 광부의 집념이라고 생각했는데, 어쩌면 로그넘 측이 오크의 승리 비책을 준비하고 있었던 것인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음!”
코르삭의 이야기를 들은 기사들은 무거운 침음을 흘렸다.
“땅굴이란 말인가?”
울가리스가, 혼잣말인지 묻는 말인지, 중얼거렸다.
“지상에서 공격하는 것으로는 함락시키기 어렵다면 지하로 공격하는 것을 택할 수도 있겠죠. 오크가 검은 숲에서부터 땅굴을 파고 들어온다고는 생각하기 어려울 테니까요.
게다가 10만 명이 주둔하던 시절이 아닌 고작 6천 명의 병사가 매일매일 힘겹게 성벽 위에서 싸우고 있을 때 오크가 땅굴로 들어온다면 투리스 요새에는 치명적이죠.”
코르삭이 대답했다.
“투리스 요새를 정찰할 것이다. 성이 함락되었다면 어차피 의미가 없고, 여전히 전투가 벌어지고 있다면 그 광산으로 가서 확인해 볼 것이다. 땅굴이 아니면 다행이고, 땅굴이 맞다면 땅굴 작전을 막아야겠지.
다른 의견이 있는 사람은 지금 말하라.”
에퀴타스의 말에 울가리스가 손을 들었다.
“확인해 볼 가치가 있는 것 같습니다. 다만, 요새 전면 검은 숲으로 들어간다는 건 오크 대병력 뒤로 들어간다는 뜻인데, 들어가는 거야 우격다짐으로 들어간다 해도 나올 수가 없는 것 아닙니까? 작전이 어떻게 됩니까?”
투리스 요새를 구하는 일이라 해도 목숨을 던지는 임무에 나서고 싶지는 않았던 것이다.
에퀴타스가 말했다.
“요새가 무사하다는 것이 확인되면 들키지 않도록 오크 병력을 빙 돌아서 광산에 접근한다. 운이 나쁘면 오크와 대규모 접전이 벌어질 수도 있겠지. 포위될 수도 있을 테고. 그럴 때를 대비해 요새에 작전을 알리고 지원 사격을 요청할 것이다. 불벼락 작전을 실시할 수도 있다.”
불벼락 작전.
투리스 요새의 투석기 사거리는 검은 숲 경계선을 훌쩍 넘어간다.
최악의 경우 불붙인 공을 발사해 검은 숲을 태우는 것도 투리스 요새의 수비 계획 중 하나였다.
그 피해와 이후의 영향을 가늠하기 어렵고, 이 작전까지 실시하지 않아도 승리해 왔기 때문에 지금까지 실행한 적은 없었다.
“알겠습니다.”
울가리스 외에는 질문하는 사람이 없었다.
땅굴을 확인하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는 것을 다들 수긍했기 때문이다.
그러자 이번에는 에퀴타스가 기사들에게 물었다.
“백장들 중 한 명은 기사들을 이끌고 요새로 가서 이 소식을 전해야 한다. 누가 갈 것인가?”
극히 위험한 임무였다.
오크의 두꺼운 포위망을 돌파하여 요새로 무사히 들어갈 가능성은 거의 없었다.
광산 임무와 보고 임무, 어느 쪽이 더 위험할까?
그것을 가늠하기는 어렵지만, 확실한 것은 보고 임무를 맡는 쪽이 먼저 죽을 가능성이 높다는 것이다.
그때 코르삭이 말했다.
“민병대원 중에 들키지 않고 조용히 움직일 줄 아는 자가 있습니다. 아까운 기사 100명을 위험에 몰아넣느니 그 사람에게 맡겨 보시는 게 어떨까요?”
“들키지 않고 조용히 움직일 줄 알아? 무얼 하는 자인데?”
코르삭은 에퀴타스의 질문에 솔직히 대답하지 않고 희미하게 웃으며 말했다.
“투리스에 오기 전에 남의 집 담을 넘던 자입니다. 실력이 괜찮습니다.”
암살자보다는 도둑이라고 하는 편이 더 나았다.
“그래?”
에퀴타스는 100명의 기사를 허무하게 잃느니 실력 좋은 도둑에게 맡겨 보기로 했다.
“좋다.”
그는 코르삭에게 그 사람을 불러오게 한 뒤 보고서를 작성하기 시작했다.
***
녹스는 전투를 같이 치르며 친해진 민병대원들과 소리 죽여 이야기를 나누면서 식사 준비를 하고 있었다.
그 모습이 즐거워 보였다.
코르삭이 그런 녹스를 조용히 따로 불렀다.
“임무가 있다.”
“뭐요?”
“오늘 밤 요새를 포위하고 있는 오크들을 뚫고 요새 안으로 들어가서 사령관님께 기사단장님의 보고를 전하는 거야.”
녹스가 어이없다는 얼굴로 코르삭을 쳐다보았다.
“오크가 40만이라며?”
“투리스 요새 쪽은 20만이다. 20만을 다 상대할 것은 아니니까 몇백에서 몇천 마리만 통과하면 될 거야.”
“허! 내가 투명 망토라도 가지고 있다고 생각하는 거요? 날 대체 뭘로 아는 거요?”
코르삭이 짧게 대답했다.
“밤바람.”
녹스의 표정이 굳었다.
코르삭이 독약과 해독제로 얽매인 자신의 현재 상태를 일깨우려 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밤바람처럼 아무에게도 들키지 않고 원하는 곳에 닿을 수 있다고 해서 가진 이름 아니야?”
다행히 독약과 해독제로 위협하는 것 같지는 않았기에 녹스는 피식 웃었다.
“오크는 돌파해 본 적이 없는데?”
“이번에 해 보는 거지, 뭐.”
“남 일이라고 너무 쉽게 말하는 거 아니오?”
그러자 코르삭이 진지하게 말했다.
“쉽게 결정한 게 아니야. 나는 못 하는 일이고, 누가 가장 잘할 수 있을까 생각해서 나온 거지. 당신이 안 하면 기사 100명이 돌파해야 해. 전에 카멜리 상행단이 돌파에 성공했을 때랑은 다를 거야. 오크들도 이미 겪어 봤으니까. 카멜리 성에서 패한 오크 병력이 먼저 와서 보고했을지도 몰라. 아마 기사 100명 다 죽을 거야.”
“흠!”
“남은 기사들과 민병대도 위험한 임무에 투입될 거야. 어느 쪽이든 위험하지. 하지만, 당신이 무사히 보고만 해 주면 우리 중 몇 명이라도 살 가능성이 생겨.”
“······.”
“우리가 그 일을 하지 않으면 투리스 요새 안에 있는 사람들은 다 죽을지도 몰라.”
“······.”
“당신은 나와 아기를 죽이러 왔지?”
왜 그 이야기를 다시 꺼내는 걸까?
역시 위협하려는 걸까?
“아기를 살려 줘.”
코르삭의 말을 들은 녹스는 가슴에서 무언가가 울컥 치솟았다.
플로스 최고의 암살자였던 자신이 암살에 실패하고 붙잡혀서 이런 일이나 떠맡고 있는 것이 한심하고 화가 나기도 했지만, 그보다 단 한 번도 독약과 해독제로 위협하지 않고 진심으로 부탁하는 코르삭의 모습에서 마음속에 있는 무언가가 움직인 것이다.
“젠장! 누가 안 한 대? 어차피 오크가 점령한 땅에서는 나도 살 수 없으니 어쩔 수 없이 하는 거요.”
녹스는 괜히 퉁명스럽게 말하고 코르삭을 따라 에퀴타스에게 가서 보고서를 받았다.
그리고 분실에 대비해 보고서의 주요 내용도 들었다.
그 이야기를 듣고 그는 정말로 위험한 상황, 중요한 임무라는 것을 알았다.
만약 코르삭의 추측이 사실이고 이 임무에 실패할 경우 투리스 지방은 물론 우베르 왕국 북서부는 최소 40만의 오크에 쓸려 나갈 것이고, 그 여파로 로그넘의 침공에 제대로 대응하지 못할 것이다.
반대로 이 임무에 성공한다면 투리스와 우베르 왕국을 구한 영웅이 될 것이다.
우베르 사람 대부분이 모른다 할지라도.
“까짓! 해 보죠, 뭐.”
늘 누군가의 목숨을 앗아가기 위해 밤바람이 되었던 녹스는 코르삭의 딸 이에라시아, 투리스 그리고 우베르 왕국을 구하기 위해 어둠을 틈타 바람처럼 오크 진영으로 숨어들었다.
한편 투리스 요새를 멀리서 정찰한 에퀴타스는 요새 곳곳에서 여전히 전투가 일어나는 것을 보고 아직은 함락되지 않았다는 것을 알았다.
최악의 상황은 아니었다.
“가자!”
에퀴타스가 이끄는 투리스 기사단과 코르삭의 민병대는 오크에게 들키지 않고 광산으로 가기 위해 캄캄한 숲을 빙 돌아갔다.
***
보고를 마친 우지마가 무릎을 꿇은 채 대기하고 있었다.
왕은 잔인한 오크.
잘못하면 반드시 벌을 준다.
우지마는 두려웠지만, 떨지 않았다.
에레부 마쿠차가 한참 후에 입을 열었다.
“패배에서 배우는 오크는 훌륭하다. 어차피 다른 작전은 부차적인 것, 그곳으로 들어가 성을 함락시켜라. 공을 세워 죄를 덜라!”
우지마는 뛰어난 장군.
죽일 수는 없었던 것이다.
“인간의 거대한 성채를 반드시 왕께 바치겠나이다!”
우지마가 절하고 일어났다.
그리고 오르그 오크 부대를 이끌고 떠났다.
가장 먼저 요새로 들어가 숨 쉬는 인간을 모두 부술 것이다!
- 작가의말
마가99 님, 후원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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