투리스의 사자
커다란 탁자 위에 검은 숲과 그에 닿아 있는 절망의 평원, 그 반대편에 접해 있는 투리스 지방과 배후 영지들이 펼쳐져 있었다.
투리스 지방에는 투리스 요새와 6개의 성, 11개의 타운이 모형으로 제작되어 있었고 요소요소에 초소가 표시되어 있었다.
검은 숲과 맞닿아 있는 절망의 평원에는 오크 부대 모형이 놓여 있었는데, 특정 지점이 아니라 그야말로 숲 가장자리 전체에 길게 포진해 있었다.
투리스 사령부 참모장을 맡고 있는 기사 발테스가 말했다.
“최소 20만입니다. 얼마나 더 늘어날지는 알 수 없습니다.”
이미 알고 있는 내용이지만, 무거운 공기가 사령부 지휘관들을 짓눌렀다.
“검은 숲 지대의 지형과 이동 난이도를 고려할 때 이중 절반은 폭이 좁은 투리스 요새로 향할 것이고 나머지 절반은 6개의 성을 공격할 것입니다.
최근 오크들의 움직임을 볼 때 우리 군과의 접촉을 피해 요새와 성을 크게 돌아서 투리스 후방을 교란하려는 시도를 할 것으로 보이지만, 행군과 보급의 어려움으로 인해 그 수가 많지는 않을 것입니다.
많아야 1, 2할 정도 될 것입니다.”
깊은 숲을 통과하는 것은 인간뿐 아니라 오크에게도 쉬운 일이 아니다.
특별히 훈련된 병력만이 가능한 일인 것이다.
그러나 20만의 1, 2할이라 해도 2만, 4만이다.
투리스 주둔군 전체가 2만임을 감안할 때 오크 별동대의 규모가 투리스군 전체를 넘어서는 것이다.
물론 인간과 오크의 전투력을 단순히 숫자로만 평가할 수는 없었다.
개체의 육체적 능력은 일반적으로 오크가 인간보다 우위에 있지만, 강인한 훈련과 전투를 거듭한 개체 - 그러니까 인간 기사와 험상 오크 간의 대결은 대등하거나 기사가 다소 우위에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었다.
더욱이 잘 훈련된 집단 간의 교전에 있어서는 인간이 앞서는 것으로 나타났다.
전쟁은 혼자서 하는 것이 아니라 집단 간의 대결.
수가 적어도 이길 수 있는 것이다.
게다가 오크는 두꺼운 어깨와 뭉툭한 손가락이라는 신체 특성상 활을 정교하게 다루지 못한다. 발사 무기라 해 봐야 투석이나 투창 정도였다.
맞붙어 싸우기 전에 이미 크게 손해를 보는 것이다.
무엇보다 인간에게 유리한 점은, 인간이 수비를 한다는 것이다.
인간은 중요한 지점에 요새와 성을 건설해 수비하고 오크는 그 지점을 공격한다.
인간에 비해 월등히 앞선다는 투지(鬪志)는 요새와 성을 공격하는 오크에게 막대한 피해를 입혔다.
이러한 특징들을 고려하면 20만 대 2만은 인간에게 암울한 숫자가 아니었다.
그러나 문제는 오크도 머리를 쓴다는 것이다.
투리스 지방은 매우 넓고, 요새와 타운 외에도 여러 마을들이 있었다.
오크가 요새와 성만 공격한다면 모를까 그 마을들을 유린한다면 2만 병력으로 모두 지키는 것은 불가능했다.
게다가 숲을 이동하는 것이 어렵다지만, 불가능한 일은 아니다.
오크가 요새와 성을 공격하지 않고 크게 우회하여 배후 영지들을 친다면 투리스의 병력만으로 야전에서 오크 대군을 상대하는 것은 무척 어려운 일이다.
“최근에 이런 제보가 있었습니다.”
참모장 발테스는 코르삭이 보상부에 제출했던 제보 문서를 꺼내 읽기 시작했다.
짧은 글은 아니지만, 간결하게 핵심을 잘 표현하여 길다는 생각이 전혀 들지 않았다.
내용은, 오크가 투리스와 배후 영지들을 잇는 보급로를 끊고 투리스 요새를 포위한다면 쉽게 무너질 수 있으니 보급로를 지켜야 한다는 것과 이번 사태를 제대로 해결하지 못해 왕국 북서부가 오크에 의해 유린되면 로그넘에 의해 왕국이 멸망할 수도 있다는 것이었다.
투리스 사령관은 참모장의 보고를 받아 미리 알고 있어 태연했지만, 다른 지휘관들은 처음 듣는 내용에 크게 놀랐다.
기사 하나가 물었다.
“보급로가 끊길 가능성이 있습니까?”
발테스가 답했다.
“지금으로서는 알 수 없습니다. 다만, 투리스 요새는 6천 병력으로 10만 오크를 상대해야 하는 상황이라 보급로의 안전을 확보하기 위해 병력을 밖으로 돌릴 여유가 거의 없다는 것입니다.”
“흐음!”
보급로를 지키려고 병력을 빼서 돌리다 요새가 함락되면 그야말로 최악의 상황이다.
“그나마 보급로를 지키기 위해 움직일 수 있는 병력은 신속하게 이동할 수 있는 기사들일 텐데 전부 다 동원할 수는 없으니 300을 보급로 확보에 투입할 것입니다.”
투리스 요새는 워낙 중요한 곳이라 기사가 500여 명이나 있었다.
그렇다고 그들을 다 보급로 확보 임무에 투입할 수는 없었다.
정찰, 소탕, 요새 방어 임무에도 기사들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기사 울가리스, 피데스, 투모르, 타키스. 이상 네 명은 각각 80명의 기사들을 이끌고 카멜리, 바르나, 트로바, 엔스를 잇는 도로를 확보하는 임무를 재량껏 수행합니다.”
네 개의 배후 영지와 연결되는 도로를 순찰하고, 적을 찾고, 섬멸하고, 유지하는 일을 각각 기사 80명만으로 알아서 하라는 뜻이었다.
80명이서 해결하지 못하면 지휘관의 판단에 따라 지원을 요청하거나 후퇴를 할 수도 있지만, 어쨌든 추가 병력을 투입하기는 어렵다는 것이다.
참모장의 말은 곧 사령관의 뜻이었다.
울가리스, 피데스, 투모르, 타키투스가 힘차게 대답했다.
“알겠습니다!”
이후에도 참모장은 전쟁에 대비한 조치들을, 때로는 설명하고 때로는 지시해 나갔다.
“오크 부대가 본격적으로 이동을 시작하면 마을과 타운의 주민들을 요새와 성으로 대피시킵니다. 혼란에 빠지지 않도록 치안 유지에 만전을 기해야 할 것입니다.”
“투석기 부대는 오크가 요새를 둘러싸기 전까지 매일 사격 훈련을 실시하여 명중률을 높이고, 훈련 장면을 주민들에게 공개하여 불안감을 떨치도록 합니다.”
“화살 제작 공장에 주민들 수를 대폭 늘립니다.”
“시장에 식량과 물자를 충분히 공급하고 사재기 행위를 엄벌합니다.”
참모장의 이야기가 끝나자 시종일관 잠자코 듣고 있던 투리스 사령관 부페스 루테인 백작이 거대한 몸을 일으키고는 처음으로 입을 열었다.
“강아지들이 떼로 몰려온다고 겁을 먹는 사자는 없다. 옛날이나 지금이나 투리스는 오크들의 무덤이 될 것이다. 그리고 그대들은 이 나라와 인간을 지킨 영웅으로서 그에 합당한 명예와 권세를 누리게 될 것이다.”
거인의 포효 같은 사령관의 말에 기사들은 두려움과 불안감이 깨끗이 씻겨 내려가는 것 같았다.
“한데 모여서 할 일도 없잖아? 남아서 노가리나 까지 말고 그만 가서 각자 할 일들이나 해.”
대수롭지 않다는 듯 무심하게 기사들을 돌려보내는 사령관의 태도는 부하들을 안심시켰다.
“예, 사령관님!”
기사들이 힘차게 예를 올리고 처음과 달리 가벼워진 걸음으로 회의장을 벗어났다.
남은 것은 사령관과 참모장뿐이었다.
“안 나가고 뭐 하나? 할 말 있어?”
사령관의 시선에 참모장이 그를 쳐다보고 말했다.
“사령관님, 오크의 규모는 최소 20만입니다. 30만이 될지 40만이 될지 알 수 없습니다. 우리는 2만 남짓. 투리스 요새에 겨우 6천입니다. 아무리 우리에게 유리한 점들이 있다 해도 병력비가 너무 안 맞습니다.”
“또 그 얘기인가?”
사령관이 눈살을 찌푸렸다.
공기가 일순 무거워졌다.
참모장은 잠시 주춤했지만, 하려던 이야기를 멈추지 않았다.
“배후 영지의 영주들에게 지원군을 보내라고 하셔야 합니다. 부족한 병력으로는 아무리 훌륭한 요새라도 제 기능을 발휘할 수가 없습니다.”
“흥! 나더러 그 버러지 같은 놈들에게 먼저 숙이라는 건가?”
사령관이 버럭 소리를 질렀다. 그야말로 사자가 으르렁거리는 듯했다.
참모장은 간이 오그라드는 것 같았으나 기어이 할 말은 했다.
“지금 그게 중요한 게 아니잖습니까! 투리스가 무너지면 이 나라가 망합니다!”
사령관이 참모장을 물끄러미 바라보다 씩 웃으며 말했다.
“자네의 이런 점이 좋아. 나한테도 할 말은 하거든.”
비바람이 몰아치다 갑자기 날씨가 맑아진 것 같은 사령관의 변화에 참모장은 대응하기 어려웠다.
“예?”
“버러지 같은 놈들에게 숙이고 말고는 중요한 게 아니야.”
“그럼 왜 지원 요청을 안 하시는 겁니까?”
“자네와 나는 보는 게 달라. 자네는 투리스의 안전을 본다면 나는 그 너머를 본다.”
“······?”
“오크들이 어리석다지만 투리스 요새를 계속 공격하다 수백 년 동안 제대로 된 우두머리도 생기지 않을 만큼 시원하게 망했으면 투리스 요새를 함부로 공격해서는 안 된다는 교훈 정도는 뼈에 깊숙이 새겨져 있다고 봐야지. 놈들은 투리스 요새를 공격하지 않고 배후 영지들을 타격하여 투리스를 고립시키려 할 것이다.”
“······!”
참모장은 깜짝 놀랐다.
오크의 행보에 대한 사령관의 생각은 자신보다 훨씬 과감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그 우려를 영주들에게 알려 미리 대비하게 하심이······.”
“내가 왜?”
“예?”
사령관은 장난스러운 태도를 지우고 진지하게 말했다.
“우베르는 투리스가 오크를 성공적으로 막아 준 덕에 크고 강한 나라가 될 수 있었다. 부유한 라티시아를 집어삼키고 다들 떵떵거리며 살았지. 그런데 그 부가 투리스에도 돌아왔나? 투리스 덕에 잘 살게 된 것이면서 그 고마움도 모르고 저희들끼리 잘 먹고 잘 살았지. 투리스는 오크들과 드잡이하는 야만의 땅이라면서 말이야.
그러다 로그넘이 쳐들어왔다. 우베르 놈들은 그 동쪽 야만인 놈들을 물리치지 못하고 80년 동안이나 휘둘려 왔다. 소중한 투리스의 병력을 빼 갔으면서도 찔끔찔끔 소모하는 데 그치고 말았지.
이제 그 멍청한 짓거리도 그만 두게 할 때가 되지 않았나? 대체 이 나라를 어디까지 망쳐 놓을 셈이냔 말이야?
그래서 내가 나설 것이다.”
사자의 결심!
참모장은 침을 꿀꺽 삼켰다.
“그런데 모든 일에는 명분이 필요해. 투리스 병력을 이끌고 가면 이 나라가 무너져. 먼저 배후 영지들을 칠 수도 없어. 지탄을 받을 테니까.
마침 오크가 쳐들어온다. 놈들은 배후 영지를 쳐 투리스 요새를 고립시키려 할 거야. 배후 영지들은 쓸리고 말겠지. 오크를 상대해 본 적이 없으니 오크를 보자마자 오줌을 찔끔찔끔 쌀 거야.
그때 내가 오크들을 쓸어버리고 배후 영지들을 구원할 것이다. 무능한 버러지들에게 영지를 돌려주는 일은 없어.
내가 투리스와 네 개의 영지를 차지하고 우베르 북서부의 패자가 될 것이다!
그런 뒤 제대로 된 투리스 군을 이끌고 로그넘 놈들을 물리쳐 이 나라를 구할 것이다!”
참모장 발테스는 사령관의 장대한 포부에 몸이 오들오들 떨렸다.
다름 아닌 반역을 꿈꾸는 것이 아닌가!
그러나 한편으로 가슴이 벅차올랐다.
변방 투리스가 이 나라의 중심이 된다!
그리고 사령관 부페스 루테인이라면 충분히 가능하다!
그는 늑대나 승냥이가 아닌 사자이기 때문이다.
“발테스, 투리스 너머를 봐라.”
“예!”
참모장은 기합이 가득한 목소리로 힘차게 대답했다.
사령관이 숨기고 있던 자신의 포부를 들려주었다 하여 투리스 방어의 어려움은 조금도 줄지 않았다.
달라진 것은 오직 참모장 발테스의 마음가짐뿐이었다.
그는 사자가 자잘한 어려움들을 신경 쓰지 않고 성큼성큼 나아갈 수 있도록 하기 위해 무슨 짓이든 하겠다고 마음먹었다.
***
밤바람이 투리스 요새에 와서 처음 느낀 것은 지독한 전쟁의 냄새였다.
주민들의 얼굴에는 불안감이 깃들어 있었고, 병사들의 말과 행동에는 날카로운 살기가 어려 있었다.
“하필 와도 요상할 때 왔나 보네. 내 팔자가 그렇지 뭐.”
의뢰를 받으면 전쟁터까지 찾아가 표적의 목숨을 끊기 때문에 딱히 상관은 없지만, 따끔따끔한 기운들이 그의 예민한 감각을 방해하기는 했다.
“자, 어디서부터 찾아볼까?”
어린 아기와 젊은 아빠.
이 요새 안에 없다면 투리스 전역을 누벼야 하는데, 그러기에 투리스는 꽤 넓고 낯선 사람이 쉽게 눈에 띄는 배타적인 곳이었다.
그는 일단 신분 등록부터 하고 임시 신분증을 발급받았다.
이름은, 녹스 아니마.
임시 신분증을 받은 밤바람, 아니 녹스는 새로 들어온 주민을 위해 투리스에서 제공해 준 임시 숙소로 들어갔다가 날이 저물자 바람처럼 담을 넘어 투리스 요새 안을 조용히 누비고 다녔다.
코르삭이 아기와 함께 트베리 상회의 마차를 타고 투리스 요새로 들어온 것은 녹스가 신분 등록을 한 다음 날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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