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자비한 심판
덜컹이는 마차 위.
“빠, 빠.”
이에라시아가 코르삭을 보고 소리 냈다.
아직 아빠라고 정확히 부르지는 못하고 입을 뻥긋하는 수준이지만, 잘 들으면 아빠라고 부르는 것 같기도 했다.
코르삭은 피로가 싹 사라지는 듯한 기분을 느끼며 이에라시아를 안기 위해 팔을 내밀었다.
그러나 갓난쟁이 어린 딸은 코르삭에게 안기지 않고 몸을 틀어 볼가 품에서 떠나지 않기 위해 버둥거렸다.
코르삭은 서운함이 밀물처럼 밀려왔다.
오늘이 처음이 아니라서 못 견딜 정도는 아니지만, 좀처럼 익숙해지지 않았다.
“이에라시아, 아빠 해 봐. 아빠. 아빠.”
볼가가 다정하게 말했다.
“빠, 빠.”
이에라시아가 다시 입을 뻥긋거렸다.
코르삭은 기분이 풀렸다.
그는 친밀도가 함께한 시간과 밀접히 관련되어 있다는 것을 이에라시아를 통해 절절히 깨닫고 있었다.
볼가와 스탄을 데려오기 전에는 이에라시아를 항상 안고 다녔기 때문에 몰랐는데, 오크와 싸우느라 볼가가 돌보는 시간이 늘자 아기의 태도가 어느새 달라져 있었다.
지금도 물론 다른 사람이 가까이 올 때처럼 울거나 거부감을 보이면서 낯가림을 하는 것은 아니지만, 볼가가 있으면 볼가 품에 안기지 그에게 안기지 않았다.
함께하는 시간이 줄어들면 줄어들수록 딸이 자신에게 안기려 하지 않을 것이다.
그럼에도 딸과 함께하는 시간은 점점 줄어들 수밖에 없었다.
투리스에서의 안정적인 삶과 카시아를 구할 힘을 얻기 위해서는 일을 많이 해야만 하기 때문이다.
일을 많이 하면 딸은 지금보다 더 안기지 않으려 할 것이다. 그렇다고 딸이 자신에게 서슴없이 안기는 모습을 보기 위해 일을 덜할 수는 없었다.
코르삭은 어쩔 수 없이 둘 중 하나를 택해야만 했다.
“아빠 갔다 올게. 언니, 오빠랑 잘 놀고 있어.”
“빠, 빠, 빠, 빠.”
이에라시아가 소리를 내며 코르삭을 향해 손을 뻗었다.
코르삭은 그 작고 귀여운 손을 조심스럽게 쥐었다가 놓고는 마차에서 내렸다.
***
민병대는 글라드 남작령 쪽 카드쿠스 숲 외곽에 도착했다.
마차가 진입하려면 억지로 진입할 수 있는 오솔길이 있기는 했지만, 기본적으로 마차가 들어갈 수 있는 길이 아니었다.
“정찰 먼저 하고 나머지는 여기서 휴식하는 게 좋겠군.”
“그러죠.”
프라이바드의 말에 코르삭은 민병대에 휴식 대기 명령을 내리고 정찰을 맡을 대원들, 프라이바드, 불카르, 녹스 그리고 길잡이 스르모와 함께 숲으로 들어갔다.
민병대의 주축은 사냥꾼이었다.
검은 숲에서 오크를 추적하고, 탐색하고, 유인하고, 함정을 파는 몬스터 사냥꾼.
그들은 숲에서 소리와 냄새를 풍기지 않으면서 은밀하게 이동하고 주위의 특이한 점을 빠르게 포착할 줄 아는 능력자들이었다.
덩치가 큰 불카르조차 어릴 때부터 이런 일을 해 왔기에 따로 가르칠 필요가 없었다.
녹스는, 분야는 달라도 은밀함과 치명적 공격에 독보적인 능력을 지니고 있었기에 데려왔다.
이쪽 분야에 가장 약한 사람이 바로 코르삭이었다.
“지휘관이 모든 걸 직접 할 필요는 없지만, 어떻게 하는지는 알아야 해. 내 뒤를 따라오게.”
“예.”
프라이바드는 코르삭에게 자신이 아는 모든 것을 가르치려 했고 코르삭은 기꺼이 따랐다.
악마 기사로 13년, 검은 숲과 절망의 평원을 오가며 오크의 동태를 살펴온 약초꾼, 채집꾼으로 20년.
프라이바드는 독보적이었다.
그는 신발을 신지 않고, 특별히 위장을 하지 않고도 숲속을 빠르고 조용히 걸을 수 있었다.
그도 무게가 있는 존재인지라 무른 땅을 밟으면 푹 꺼질 때가 있었지만, 애초에 무른 땅을 밟는 경우가 거의 없었다. 그래서 발자국이 남지 않았다.
발을 딛기 전에 내딛을 자리를 이미 파악하고 있으며 미처 파악하지 못하고 발을 디딘 곳도 즉시 반응하여 흔적을 최소화했다.
그리고 그 역시 부피가 있는 존재인지라 나무들 사이나 덤불숲을 지날 때 스치고 지나갔지만, 몸이 역방향으로 걸리지 않도록 순간적으로 몸을 살짝살짝 틀어 소음을 최소화했다.
그래서 그가 풀숲을 지나갈 때는 바람이 불어 풀들이 서로 잎을 비비는 것 같은 소리만 났다. 의식하지 않으면 모를 정도였다.
코르삭은 단기간에 프라이바드의 몸놀림을 절대 따라할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프라이바드도 그것을 익히라는 뜻으로 데려온 것이 아니었다.
이동할 때 주의할 점과 움직임의 원리, 정찰시에 대원들의 역할 분담, 이 일을 잘하는 대원과 그렇지 못한 대원의 차이점 등을 파악하고 적재적소에 인원을 투입하는 능력을 기르도록 하기 위함이었다.
어쨌든 코르삭과 대원들은 길잡이 스르모의 안내로 조심스럽게 카드쿠스 숲 깊숙이 들어갔다.
그런데 자고라 백작의 숲속 비밀 사업장 규모가 상상 이상이었다.
도적 떼에 잡혀 있다가 탈출한 길잡이 스르모도 깜짝 놀랐다.
그는 자신이 배치된 노역장에만 있었기에 전체 규모를 알지 못했던 것이다.
숲에 불을 질러 만든 거대한 농장이 무려 넷이나 되었고, 나무를 벤 자리에 가축을 풀어 키우는 거대 목장도 세 개나 있었다.
벌목장 또한 군데군데 있었는데 베어 낸 나무는 소와 사람들이 강가로 끌고 가 강물에 띄워 보냈다.
가장 놀라운 것은 선착장이었다.
상당히 큰 배가 닿을 수 있는 커다란 선착장에서 사람과 물자를 실어 나르고 있었던 것이다.
“이거, 영지에서 달아나는 주민들을 붙잡아 노역시키는 수준이 아닌 것 같은데? 인근 영지의 주민들을 납치해 부리는 수준도 아니야. 배로 사람들을 실어 이리로 보내고 있어.”
프라이바드는 숲속 비밀 사업장으로 외부에서 사람들을 계속해서 공급한다고 판단했다.
그런데 규모만 놀라운 것이 아니었다.
노역하는 사람들의 몰골이 정말로 처참했다.
밥을 주기는 하는지 사람들은 피골이 상접한 상태였고, 달아나지 못하도록 족쇄로 묶여 있었다.
용변도 정해진 시간에 한꺼번에 보아야 했고, 잠도 짐승처럼 한데 모여 자도록 했다.
코르삭은 멀리서 지켜보는 것만으로도 끔찍하고 화가 나서 몸이 부들부들 떨렸다.
“제가 있을 때보다 훨씬 더 커지고 더 가혹해진 것 같네요.”
스르모의 말에 프라이바드가 대꾸했다.
“적은 감시병으로 많은 인원을 감시하려면 먹을 걸 조금만 줘서 힘을 빼고 가혹하게 다룰 수밖에.”
확실히 강제 노역을 하고 있는 사람들 수에 비해 감시하는 도적들의 수가 그리 많지 않았다.
무장한 도적 떼와 일을 지시하는 감독들을 모두 합쳐도 800명 정도.
그에 반해 붙잡혀 있는 사람들은 몇천 명은 되는 것 같았다.
어쨌든 장소와 건물의 위치, 도적 떼의 규모와 감시 방법, 주변 지리 등을 파악한 정찰대는 조용히 돌아왔다.
그러고 나서 지도를 그리며 작전을 세웠다.
“두 곳을 틀어막아야 한다. 선착장과 자고라 백작령으로 가는 길.”
선착장에서는 배를 타고 달아날 수 있었다.
굳이 노를 젓지 않고 물살의 방향대로 흘러가면 자고라 백작령에 닿는다.
육로는 더 말할 필요도 없었다.
어느 쪽이든 도적들이 달아나 자고라 백작군을 데려오면 이번 작전은 실패하게 된다.
프라이바드는 그것을 방지하기 위해 도적의 탈출을 막는 것을 목표로 했다.
다른 말로 몰살.
“우리가 북쪽에서 도적들을 공격하면 놈들은 결국 남동쪽으로 달아나게 된다. 대부분은 흩어져 숲을 지나 자고라 백작령으로 가려 할 거야. 우리는 중간중간 길목을 막아 놈들이 한데 모여 달아나게 할 거야. 깔때기로 들어가는 것처럼 말이지. 그렇게 해서 이쪽 개활지로 나오게 해. 이곳에 다연발 쇠뇌를 배치해서 한꺼번에 쓰러뜨린다.”
프라이바드는 마차 열 대에 장착해 놓은 다연발 대형 쇠뇌를 떼어서 들고 가도록 했다.
크고 무거운 물건을 들고 숲을 통과하는 것은 힘든 일이지만, 300여 명으로 800명을 소탕하려면 이 정도 어려움은 감수해야 했다.
구체적인 작전을 수립한 뒤 프라이바드는 휴식을 취하도록 했다.
“충분한 휴식과 든든한 식사가 뒷받침되지 않으면 승리할 수 없다. 푹 쉬고 내일 일찍 출발한다.”
“예.”
코르삭과 민병대는 푹 자고 나서 다시 숲으로 들어갔다.
***
코르삭이 1개 중대를 이끌고 3번 - 편의상 붙인 번호 - 목장을, 불카르가 1개 중대를 이끌고 4번 농장을 북쪽에서 포위하듯이 공격했다.
도적 떼는, 보초병이 있기는 했지만, 노예들이 달아나지 않는지 감시하는 것이 목적이지 외부 침입자를 신경 쓰는 감시 체계가 아니었다.
게다가 미리 보초의 위치를 파악하고 제거한 뒤에 들어갔기 때문에 갑자기 나타난 민병대를 보고 도적들은 혼란에 빠졌다.
“야! 막아!”
“어디서 온 놈들이야?”
“도망쳐!”
“우리 편 더 불러!”
그럼에도 워낙 사업장의 규모가 큰 탓에 민병대가 파악하지 못한 곳에서 도적들이 삼삼오오 모여 조직적으로 저항하기 시작했다.
“뭐 하는 놈들인지 몰라도 늑대 밥으로 만들어 주지! 조져라!”
그러나 그렇게 한데 모인 것이 그들에게는 불운이었다.
불카르가 거대한 해머로 형체도 알아보지 못하도록 짓이기고, 코르삭 또한 힘을 아끼지 않고 목을 날려 피 분수를 뿜어내게 하자 놈들은 공포에 사로잡혀 달아나기 시작했다.
민병대는 작전대로 도적들을 남동쪽으로 달아나게 포위하며 나아갔다.
그렇게 2번 목장, 3번 농장, 벌목장들 순으로 도적들을 몰고 갔다.
불카르와 코르삭을 막을 수 있는 실력자는 없었다.
민병대는 눈 먼 화살에 맞지 않도록 방패로 몸을 가린 채 대오를 갖춰 전진했다.
“강한 군대는 칼을 잘 쓰는 군대가 아니야. 대오가 흐트러지지 않는 군대가 강한 군대다. 싸우지 않고도 적을 두려움에 떨게 하려면 줄을 착착 맞춰서 움직여야 해.”
코르삭은 프라이바드에게 들은 말을 떠올리며 중간중간 민병대원들을 다그치는 것을 잊지 않았다.
“좌우로 줄 맞춰! 흐트러지지 마!”
그런데 도적들 가운데 일부가 선착장에 매여 있는 보트를 떠올리고 그쪽으로 달아났다.
그러나 그곳에도 이미 활과 쇠뇌를 든 민병대 1개 소대가 있었다.
게다가 녹스가 이곳에 있었다.
그는 무시무시한 화살과 쇠뇌 살을 피해 선착장 옆 건물로 붙어 안도의 한숨을 내쉬고 있는 도적의 곁에 어느새 나타나 목에 바람구멍을 내고 사라졌다.
녹스와 민병대 1개 소대가 선착장을 완벽하게 지키고 있는 사이에 코르삭과 불카르는 1번 농장까지 밀어붙였다.
도적들은 견디지 못하고 백작령 방면으로 달아났다.
“백작님께 알려라. 강한 적이 수천 명이나 쳐들어왔다고! 아니다. 내가 알릴 테니 너희는 내가 원군을 이끌고 올 때까지 버텨라!”
두목이 명령을 내리고 남동쪽 숲으로 달아나기 시작했다.
당연하게도 그의 부하들 또한 명령을 지킬 생각이 전혀 없었다.
“야! 너희는 여길 지켜! 난 두목을 안전하게 모셨다가 돌아올 테니까!”
“나는 두목에게 물어볼 게 있어서 갔다 올 테니까 지키고 있어!”
그런 식으로 와르르 무너져 달아났다.
도적들은 힘없고 구속된 노예들에게나 강했지 코르삭과 불카르가 이끄는 훈련된 병력 앞에서는 전혀 힘을 쓰지 못했다.
숲은 경계가 없어서 도적들이 마구 흩어져 달아났지만, 요소요소에 배치해 둔 대원들이 활을 쏘고 창으로 찌르자 놀란 토끼처럼 이리저리 날뛰다 프라이바드가 의도한 대로 개활지로 모여 달아나기 시작했다.
오랫동안 불쌍한 사람들 위에 무자비하게 군림해 온 도적들에게 무자비한 심판이 내려졌다.
“발사!”
다연발 대형 쇠뇌 열 대가 일제히 120발의 대형 화살을 발사한 것이다.
강력한 힘으로 발사된 대형 화살은 앞사람을 관통해 뒷사람까지 꿰뚫었다.
“화살 장전!”
쇠뇌 오른쪽과 왼쪽에서 대원들이 대형 화살을 여섯 발씩 빠르게 장전했다.
“준비된 사수, 계속 발사!”
슉슉슉슉슉슉!
푹푹푹푹푹푹!
“으악!”
“끄억!”
순식간에 개활지가 사형장이 되었다.
수많은 도적들이 꼬치가 되어 쓰러지고, 죽지 않은 자들이 고통스러운 비명을 질렀다.
여기까지 몰이를 해 온 코르삭은 그 광경에 소름이 돋았다.
도적들에 대한 연민은 전혀 없었다.
정찰과 작전 수립과 실행을 제대로 했을 때 어떤 결과가 나타나는지 확인한 데서 오는 경이로움이었다.
푹푹푹푹푹푹!
무시무시한 대형 화살들이 도적들을 연거푸 고슴도치로 만들고 있었다.
대형 쇠뇌 사이사이에 배치된 대원들도 차분하게 표적을 사살해 나갔다.
일방적인 처형의 시간은 한참 동안 이어졌다.
“사격 중지!”
프라이바드의 명령에 다연발 대형 쇠뇌가 멈추었다.
피비린내와 도적들의 신음 소리 속에서 민병대원들은 짜릿한 승리의 희열을 느꼈다.
그러나 끝이 아니었다.
“다 잡은 게 아니다. 숨어 있는 놈, 다른 길로 달아난 놈을 잡아라! 하나라도 달아나면 적의 원군이 올 것이다! 움직여!”
민병대원들은 처음에 계획된 대로 적을 수색하고 추격하기 위해 움직였다.
그 사이 코르삭은, 도적들이 달아나는 모습을 보면서도 달아날 힘이 없어 그 자리에 털썩 주저앉아 어찌할 바를 모르고 있는 사람들을 만나러 갔다.
비쩍 마르고 곯은 사람들.
궁금한 것이 아주 많았다.
- 작가의말
g1221_jyhwa3946 님, 후원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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