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하러 왔습니다
먼저 갑작스러운 피바람에 놀라 두려움에 떨고 있는 사람들을 진정시켜야 했다.
“투리스 민병대입니다. 도적 떼를 소탕한 것이니 안심하세요.”
그러자 어떤 사람이 용기 내서 물었다.
“우리를 구하러 온 겁니까?”
코르삭은 애초에 도적 떼를 소탕하기 위해서 왔을 뿐 잡혀 있는 사람들을 구하는 것은 목적이 아니었다.
그래도 겸사겸사 구해서 돌아가는 것 정도는 염두에 두고 있었다.
글라드나 보트로에서 잡혀 온 사람들은 집으로 돌려보내고 학정을 피해 투리스로 가려고 자고라 백작령을 탈출한 사람들은 투리스로 데려가는 일이 어렵지는 않기 때문이다.
그런데 사람이 이렇게나 많을 것이라고는 전혀 생각지 못했다.
이들이 전부 데려가는 것은 가능하지도 않았고, 권한도 없었다.
그러나 이들을 다시 이곳에 두고 갈 수는 없었다.
“여러분을 구하러 왔습니다.”
“아아!”
사람들이 그제야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비쩍 마른 얼굴에 눈물을 적시는 사람도 있었다.
“여러분이 협조를 해 주셔야 합니다. 그래야 빨리 이곳을 벗어날 수 있어요.”
“무얼 협조하면 되겠습니까?”
“먼저 어디 출신인지 확인하겠습니다. 글라드 출신 있습니까?”
몇 사람이 쭈뼛쭈뼛 손을 들었다.
“보트로 출신 있습니까?”
이번에도 비슷한 숫자가 손을 들었다.
“나머지 분들은 다 자고라 출신입니까?
“아닙니다. 자고라 출신도 있지만, 대부분은 라티시아 난민들입니다.”
비교적 덜 마른 남자 한 명이 나서서 말했다.
겉모습과 행색을 볼 때 최근에 들어온 것 같았다.
“그렇군요.”
코르삭은 자신을 올려다보고 있는 사람들을 둘러보고 말했다.
“이 숲에는 여러 개의 농장, 목장, 벌목장이 있습니다. 우리 군대는 도적놈들을 수색, 추적하고 또 적의 공격에 대비해야 해서 잡혀 있는 사람들을 모두 챙길 수가 없습니다. 여러분들이 다른 작업장을 돌며 일단 사람들을 풀어 주세요. 그리고 식사 같은 것도 알아서 해결하세요.”
그때 그 남자가 물었다.
“지금 바로 이곳을 빠져나가는 게 아닙니까?”
“이름이 뭡니까?”
“페스카입니다.”
“페스카 씨, 말했듯이 우리는 여러분을 모두 챙길 여유가 없습니다. 며칠 동안이라도 밥을 잘 먹고 잘 쉬어서 힘을 내야 합니다. 우리는 부축해 주지 못해요. 길만 안내할 거예요. 여러분 스스로 숲을 통과할 겁니다. 알겠습니까?”
“예.”
“자 그러면 우리 병사들이 여러분을 다른 작업장으로 안내할 테니 가서 사람들을 풀어 주고, 혹시라도 숨어 있는 도적을 찾으면 우리 병사에게 알리고, 밥 잘 먹고, 푹 쉬고 있으라고 하세요.”
“예!”
이번에는 더 많은 사람들이 더욱 힘을 내서 대답했다.
“그리고 이왕이면 출신지별로 모여 있는 게 좋겠어요. 그래야 집으로 빠르게 데려다 줄 수가 있죠.”
코르삭의 말에 한 사람이 두려운 목소리로 물었다.
“자고라로 돌아가고 싶지 않습니다.”
“그럼 어디로 가고 싶습니까?”
“다른 영지로 보내 주시면 안 됩니까?”
“그건 안 됩니다.”
코르삭이 단호하게 말하자 그 사람은 사색이 되었다.
“제발!”
“어느 영주도 받아주지 않을 겁니다. 자고라 백작과 척을 지고 싶지 않을 테니까요.”
“아!”
“자고라를 탈출한 사람들도 그래서 투리스로 가고 싶다고 한 것 아닙니까?”
“그러면 투리스로는 보내 주십니까?”
“그렇게 하죠.”
그제야 자고라 출신들이 안심했다.
“라티시아 출신들은 어떻게 되는 겁니까?”
이번에는 페스카가 물었다.
“인원이 얼마나 되는지, 사람들의 의견이 무엇인지 알아야 대답할 수 있겠군요.”
“그런가요?”
“네. 그러니 서둘러 주세요.”
“알겠습니다.”
페스카는 확실히 다른 사람들과 달랐다.
주도적으로 사람들에게 역할을 분담하고 할 일을 설명했다.
사람들도 그에게 묻고 그의 의견을 따랐다.
이 무리의 리더 역할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사람들이 다른 작업장으로 떠난 뒤에도 그는 코르삭 옆에 남았다.
“왜 안 가고 여기 있죠?”
“대장님의 질문에 대답할 사람도 하나 있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페스카는 똑똑하기까지 했다.
코르삭은 고개를 끄덕이고는 그와 함께 다른 작업장으로 이동했다.
“라티시아 출신들이 어쩌다 여기로 오게 된 거죠?”
코르삭의 질문에 페스카가 이야기를 시작했다.
***
“플로스의 난민촌은 포화 상태입니다. 천막이 더 들어설 자리도 없죠. 그런데 난민들은 꾸준히 들어오고 있습니다.”
라티시아에서 최초로 피난민이 들어온 것은 무려 50여 년 전.
그때 피난민들은 전쟁이 끝나면 돌아간다는 생각이었지 우베르에 이토록 오래 체류하게 될 줄은 몰랐다.
라티시아인 모두가 피난을 떠난 것도 아니었다.
그런데 로그넘이 저항한 라티시아의 도시 사람들을 모조리 죽이고 도시를 불태우는 사건이 벌어지면서 피난민이 급격히 늘어났다.
그야말로 수백만 인구 전체가 피난을 떠난다는 소문이 돌 정도였다.
이후 로그넘이 라티시아 전역을 점령하고 우베르가 요새를 건설하여 세 개의 대로를 차단하면서 피난민은 대로를 통해 우베르로 들어오지 못하게 되었다.
그러나 그 이후에도 라티시아 탈출은 계속되었다.
우베르와 라티시아를 잇는 세 개의 대로로는 들어오지 못하지만, 북쪽의 험준한 산을 넘고 남쪽으로 내려가 거친 바다를 건너 우베르로 들어온 것이다.
우베르로 들어온 난민은 전국으로 흩어졌다.
왕국 차원에서 모두 감당하는 것이 불가능했기에 영주들이 수용해서 백성으로 삼아 힘을 기르는 것을 허용했다.
그리하여 라티시아의 난민은 우베르 왕국 곳곳에 자리를 잡게 되었다.
그러나 영주들이 난민을 받는 데는 한계가 있었다.
집과 농경지, 일자리가 난민을 위해 마련되어 있을 리는 없기에 힘이 세고 부유한 몇몇 영주들을 제외하면 모두가 난민을 꺼려했다.
난민은 천덕꾸러기, 골칫덩어리가 되었다.
갈 곳이 없는 난민들은 우베르 수도 플로스로 모였다.
일자리도 플로스에 많고, 구걸이나 도둑질도 플로스에서 하는 것이 그나마 성공 가능성이 높았기 때문이다.
플로스에는 라티시아 탈환을 위한 병력 모집이 자주 있었기에 난민들은 거기에 응하는 경우도 많았다.
고향을 되찾는 일인 데다가 병사가 되면 최소한 밥은 주고, 운이 좋으면 전리품도 챙기고 기사가 될 수도 있기 때문이었다.
그리하여 라티시아 난민들은 전쟁터에서 무수히 죽어 나갔다.
그럼에도 난민촌은 늘 붐볐다.
난민의 아이들이 태어났고, 새로 라티시아에서 탈출한 사람들이 흘러들어 왔기 때문이다.
“집과 땅을 준다고 이주민을 모집한다고 하더군요.”
“누가 말입니까?”
“아직도 똑똑히 기억합니다. 프라우스 상회입니다.”
“프라우스 상회라고요?”
“예. 프라우스 상회. 다들 혹했죠. 답답하고 더러운 난민촌에 신물이 났으니까요. 조건이 너무 좋으면 사기일 수도 있는데 들어 보니 이해가 되더라고요. 플로스에서 상당히 떨어져 이주민을 구하기가 쉽지 않다는 거예요.”
빌어먹어도 대도시가 낫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많기 때문에 플로스에서 멀리 떨어진 곳이라서 조건이 좋다는 말이 수긍이 되었다는 것이다.
“이주도 마차에 태워 편하게 이뤄졌어요. 밥도 꼬박꼬박 주었고요. 다들 내 땅에서 농사를 지어 굶지 않고 빌어먹지 않아도 된다는 희망에 들떠 있었지요. 마지막에 배를 타기 전까지만 해도 말입니다. 배에서 내리자마자 지옥이 시작되었습니다.”
그날을 떠올리는 페스카의 눈이 시뻘겋게 충혈되었다.
“남자와 여자를 분리한다고 가족을 떼어 놓고, 아기가 너무 어리면 돌보는 데 시간을 뺏긴다고 아기를 뺏어 갔습니다.”
“예?”
아기를 빼앗다니, 믿을 수 없는 이야기였다.
“당연히 반발했지만, 죽을 만큼 두드려 맞고 며칠 동안 밥도 안 주고 가둬 놓으니 어쩔 수 있나요? 배에서 내린 이후로는 줄곧 이 꼴로 살았지요.”
“빼앗아 간 아기는······?”
코르삭은 설마설마하며 물었다.
“빼앗자마자 아기 엄마가 보는 앞에서 강에다 던져 버리더군요.”
배에서 내린 이주민들은 그 모습에 충격을 받았다.
이곳이 어떤 곳인지 더 자세한 설명이 필요하지 않았다.
그 한 장면으로 충분했다.
아기를 잃은 엄마와 아빠가 몸부림을 쳤지만, 선착장을 에워싼 도적 떼를 당해낼 수 없었다.
미치거나, 시름시름 앓다 죽거나, 서럽게 적응해 나갈 뿐이었다.
도착하자마자 그 장면을 목격한 사람들은 끔찍한 공포가 뼛속 깊이 각인되어 반항하지 못했다.
어차피 밥을 죽지 않을 만큼만 주고 늘 족쇄가 채워져 있어 반항해도 바로 제압되었지만.
이야기를 들은 코르삭은 피가 거꾸로 솟는 것 같았다.
도적들뿐 아니라 이 숲의 주인이라는 자고라 백작과 난민들을 꼬드겨 이곳으로 보낸 프라우스 상회 놈들을 모두 찢어 죽이고 싶었다.
들끓는 분노를 도무지 가라앉힐 수가 없었다.
한참 후에 코르삭이 물었다.
“프라우스 상회에 대해 아는 게 있습니까?”
“나중에 사람들에게 물어보니 어떤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습니다.”
페스카는 의지가 강한 사람이었다.
반드시 복수하겠다고 다짐하며 조심스럽게 사람들에게 물어 작은 단서라도 모아 왔던 것이다.
“프라우스 상회는 재무대신 블라트 백작이 실질적인 주인인 것 같습니다.”
“재무대신 블라트 백작?”
“예. 난민들이 마차를 타고 여기까지 오는 동안 상회 놈들이 나누는 대화를 들은 게 있는데 그걸 종합해 볼 때 확실한 것 같습니다.”
“재무대신씩이나 되는 자가 변방의 악덕 영주한테 난민을 팔아먹는단 말인가요?”
“그 이유까지는 저도 모릅니다.”
“재무대신 블라트 백작!”
코르삭은 그 이름을 잊지 않기 위해 다시 한번 되뇌었다.
일면식도 없고 이름 자체를 처음 들어본 사람이지만, 그가 이 일에 개입한 것이 맞다면 반드시 응징하리라 결심했다.
도적 떼의 주인인 자고라 백작은 더 말할 필요도 없었다.
도저히 용서할 수가 없었다.
***
어둠이 깔리기 직전.
플로스 외곽의 난민촌 근처 한적한 곳에 마차 한 대가 서 있고 그 주변에는 기세가 날카로운 기사들이 무장이 드러나지 않는 차림으로 경호하고 있었다.
카시아가 라티시아 대공의 사람들이 접근하는 것을 막기 위해 외가에 부탁해 데리고 있는 기사들이었다.
마차 안에서는 카시아가 두 남자를 만나고 있었다.
중년인은 라티시아 출신 난민들로 이루어진 정보 조직을 이끌고 있는 제르모.
젊은이는 도서관에서 카시아를 만나 그녀를 지지하게 된 궁내부의 관리 스키엔트였다.
이들은 오래전부터 난민촌에서 일어나고 있는 사건 하나를 추적하다가 상당히 주목할 만한 결론에 도달하여 만나게 된 것이다.
스키엔트가 말했다.
“재무대신은 난민촌의 동쪽 구역을 상업 지구로 만들려고 합니다.”
플로스는 로그넘과의 전쟁 이후에도 계속해서 성장해 가고 있었기에 재무대신이 새로운 상업 지구 부지를 확보하려는 것은 이상한 일이 아니었다.
문제는 그 방법과 과정이 비정상적이라는 것이다.
공식적인 정책 발표와 집행을 거치지 않고 깜깜이로 진행하고 있었다.
“확인해 보니 그 땅을 대리인을 통해 야금야금 사들이고 있었습니다.”
제르모가 말했다.
난민촌의 땅값은 매우 쌌다.
더럽고 지저분하고 범죄율이 매우 높은 데다 전쟁이 언제 끝날지 몰라 난민들이 이 땅을 언제 떠날지 기약이 없기 때문이다.
난민촌의 땅을 사서 난민들을 몰아내고 상업 지구로 개발하면?
엄청난 부를 거머쥐게 된다.
“연루되어 있는 자가 누구죠?”
카시아의 질문에 스키엔트가 대답했다.
“플로스에 사는 백작 이상의 고위 관료 귀족들은 거의 다 엮여 있는 것 같습니다.”
수도에서 그 큰 사업을 혼자서 해 먹는 것은 불가능한 일.
카시아의 머리가 바쁘게 돌아갔다.
플로스의 고위 관료 귀족들은 왕의 측근들로 집안 대대로 라티시아를 통하는 상행단을 운영하여 재산이 아주 많았다.
당장 가능할지도 모르는 일이기는 하지만, 이들을 실각시켰을 때의 득과 실을 따져 보지 않을 수 없었다.
아직 왕자와 결혼한 것이 아니라서 당장 결론이 나지 않았다.
“난민들은 어떻게 됐죠?”
카시아가 물었다.
“난민을 실은 마차를 추적하기는 했는데 마지막에 배를 타고 가는 바람에 어디로 가서 어떻게 지내는지는 파악하지 못했습니다. 다만 소문으로 미루어 볼 때 자고라 백작이 아주 혹독하게 부리는 것 같습니다.”
제르모가 대답했다.
“정확히 알아보고 어려움에 처해 있다면 구할 방법을 생각해 보세요. 고향을 잃고 불쌍하게 살던 사람들이 귀족들의 농간에 어려움에 빠지는 것을 내버려둘 수는 없습니다.”
“알겠습니다, 공주님.”
“스키엔트 경은 고위 관료들의 동향을 계속 파악해 주세요. 더 지저분한 일을 하고 있을지도 모르니까요.”
“예, 공주님.”
두 사람은 공손히 인사하고 마차를 나갔다.
“후유!”
혼자 남은 카시아는 한숨을 내쉬었다.
강력한 군사력을 지닌 우베르 왕국은 왜 50년 동안 라티시아를 탈환하지 못했을까?
왕궁에 점점 가까이 다가가다 보니 그 이유를 조금은 알 것 같았다.
썩은 곳이 너무 많았다.
그 부분을 도려내야 우베르는 온전히 제 힘을 낼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그 일을, 어쩌면 자신이 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가죠.”
“예.”
카시아를 태운 마차가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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