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만간
기이한 상황이 벌어졌다.
투리스 요새와 6개의 성 앞으로는 여전히 오크들이 나타나지 않은 가운데 뒤쪽에는 오크의 출현 빈도가 나날이 높아지고 있었다.
투리스 지방의 마을들은 진즉 요새와 성으로 주민 철수가 이루어졌고, 마을보다 규모가 큰 타운에도 결국 주민 철수 명령이 떨어졌다.
요새와 성을 우회하여 투리스 후방에 나타난 오크들은 습격하거나 교란할 인간의 타운과 마을이 없자 집결하여 배후 영지 공격에 나섰다.
투리스보다 그 배후 영지인 바르나, 트로바, 엔스가 오크와의 전쟁을 먼저 시작하게 된 것이다.
바르나, 트로바, 엔스의 영주들은 투리스 사령관에게 도움을 요청했다.
<투리스는 애초에 인간의 땅으로 오크가 쳐들어오지 못하게 막는 방파제 역할을 하도록 만들어졌다. 투리스군이 전멸한 것도 아닌데 오크가 우리 땅으로 쳐들어오다니, 이게 어찌된 일인가? 투리스군은 즉시 출동하여 우리 땅을 공격하고 있는 오크들을 일소하길 바란다. 그것이 맡은 바 소임을 다하는 자세일 것이다.>
투리스 사령관은 엔스 백작의 서신을 보고 코웃음을 쳤다.
“제 놈이 내 상전이야? 울고불고 매달려도 시원치 않을 판에 아직도 정신을 못 차렸군. 받아 적어.”
“예!”
부관이 사령관의 답신을 받아 적을 준비를 마쳤다.
“그 방파제는 왕국이 병력을 빼 가면서 이미 구멍이 숭숭 난 지 오래다. 10만 주둔군이 2만으로 줄어들었다. 따지려면 나 말고 국왕 폐하한테나 따져. 그리고 그동안 투리스 병력이 줄어들어 상당한 이익을 챙기지 않았나? 무려 8만 명분의 군량을 착복하지 않았느냔 말이야. 그걸로 군비 증강을 했으면 이번 오크 공격 정도는 충분히 막고도 남을 테니 알아서 해 봐.”
듣고 있던 참모장이 간했다.
“사령관님, 오크의 주력 병력을 막기에도 병력이 부족하여 도울 수 없으니 인근 영지들에 도움을 청하라고 간단히 보내시면 될 것을 굳이 그렇게까지 하셔야겠습니까? 나중에 문제가 될 수 있습니다.”
“그동안 나한테 한 짓을 생각하면 아직도 분이 안 풀려. 이제 좀 후련하군. 야, 부관! 고치지 말고 그대로 보내. 알았어?”
“네, 사령관님!”
참모장은 한숨을 내쉬었다.
투리스의 사자는, 늘 그런 것은 아니지만, 기분파여서 내키는 대로 하는 경향이 있었다.
부하들과의 관계에 있어서는 장점이 되는 경우가 많다고 긍정적으로 생각하기로 했다.
그 또한 엔스 백작에게 이렇게 되갚아 주는 사령관의 태도에 시원함을 느꼈던 것이다.
바르나와 트로바의 영주들은 엔스 백작처럼 무례하게 구원 요청을 하지는 않았다.
엔스의 영주는 백작, 바르나와 트로바는 남작이었기 때문이다.
큰형을 믿고 까불던 동네 꼬마들이 큰형이 자신들을 도울 수 없는 상황이라는 것을 알고 납죽 엎드리는 모양새였다.
그러나 투리스는 이미 보급 기능을 상실한 두 영지를 도울 여유가 없었다.
“여기는 참모장 말대로 답신을 보내.”
“알겠습니다!”
마지막으로 카멜리 자작령.
그곳은 아직 오크로부터 접경 다리를 지켜 내고 있었고, 지금도 수십 대의 마차가 오륙일에 한 번 꼴로 식량을 공급하고 있었다.
식량 자체도 중요하지만, 병사들과 주민들에게 투리스 요새가 고립되지 않았다는 사실을 일깨워 주어 두려움을 덜고 안정감을 제공한다는 것이 더 중요했다.
“카멜리에는 남은 기사 200을 마저 투입해. 카멜리를 지킨다.”
원래 사령관의 구상에는 카멜리를 지키는 것이 들어 있지 않았다.
배후 영지 네 곳이 전부 오크의 수중에 떨어지면, 나중에 오크를 물리치고 나서 자신이 차지할 생각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카멜리로부터 꾸준히 식량과 생필품이 들어오는 것이 주민들의 동요를 막는 데 상당한 기여를 하고 있다고 판단해 카멜리는 지키기로 한 것이다.
“알겠습니다. 그러면 기사단장에게 독립 작전권을 부여하시겠습니까?”
기사들이 모두 요새 밖으로 나갔을 때 요새가 포위되면 기사들에게 명령을 하달할 수가 없었다.
그때를 대비해 요새 밖에서 필요한 작전을 자율적으로 수행하도록 독립 작전권을 부여하고, 장기간 단독으로 활동할 수 있도록 숙영지와 보급 기지도 곳곳에 마련해 두었다.
투리스는 그동안 병력이 크게 줄었음에도 오크를 막아내기 위한 방파제로서의 역할을 소홀히 해 오지 않았던 것이다.
“독립 작전권 부여한다. 기사단장 불러.”
“예!”
잠시 후 기사단장 에퀴타스가 찾아와 침착한 표정으로 사령관 뷔페스 앞에 한쪽 무릎을 꿇었다.
사령관이 단검 하나를 에퀴타스에게 하사했다.
검 손잡이에 수많은 나무들이 빽빽하게 새겨져 있었다. 투리스를 상징하는 검은 숲이었다.
“에퀴타스.”
“예.”
“카멜리에 목숨 걸지 마. 너의 임무는 그것보다 중요하니까.”
“알겠습니다.”
“살아서 보자고.”
“예.”
검은 숲 단검을 받아 든 에퀴타스는 사령관에게 여느 때와 다름없이 평온하게 군례를 마치고 나갔다.
“흥! 재미없는 인간 같으니라고. 좀 더 비장하게, 눈물을 글썽일 것까지는 없지만, 반드시 임무를 성공시키고 돌아오겠노라고 각오를 다지면서 뜨겁게 눈을 마주친다던가 하는 게 없단 말이야.”
사령관이 투덜대자 참모장이 말했다.
“저런 사람이라는 걸 알고 뽑으셨잖습니까.”
언제 어디서나 침착한 인물.
감정의 동요를 전혀 보이지 않는 인물.
감정적인 사령관과는 반대되는 인물.
그래서 뷔페스가 직접 기사단장 자리에 앉혔다.
“누가 뭐래? 그나저나 오크 주력 부대는 언제 도착하지?”
투리스 후방에 나타난 오크들은 어디까지나 별동대.
최소 20만이라는 오크 본대는 아직 코빼기도 보이지 않았다.
먼저 후방을 교란시키고 투리스의 병력이 후방 진압을 위해 빠지기를 기다렸다가 움직이려 한다는 것이 참모부의 추측이지만, 어디까지나 추측일 뿐이었다.
오크 본대가 왜 움직이지 않는 것인지 투리스 사령부는 그 이유를 모르고 있었다.
“곧 움직일 것입니다.”
“그 곧이 언제냔 말이야?”
사령관은 투리스 요새와 6개 성에 주력 병력을 묶어 둔 채 후방의 혼란을 지켜볼 수밖에 없어서 무척 답답했다.
***
트베리 상회는 오크와 싸우며 상행을 계속해 나갔다.
상행을 거듭할수록 무언가가 추가됐다.
오크의 투석, 투창 공격으로부터 말을 보호하기 위해 마부와 사냥꾼들이 만든 조악한 말 투구, 말 누비옷, 합판을 덧댄 마차 벽, 마부를 보호하기 위해 만든 마부 갑옷.
마부 갑옷은 몸에 입는 갑옷이 아니라 마부석에 나무판자로 천장과 벽을 만들어 마부가 쏙 들어가서 눈만 내놓고 마차를 몰 수 있게 만든, 집 같은 것이었다.
프랑크가 처음 만들었는데 다른 마부들이 점점 따라하여 트베리 상행단의 모든 마차에 설치돼 있었다.
코르삭은 쿠왕이와 끄억이에게도 투구나 누비옷을 착용시키려 했으나 성질이 고약한 녀석들이 발버둥을 치며 거세게 저항하는 바람에 포기했다.
그러나 쿠왕이가 다치거나 죽으면 큰일이라서 여러 가지 시도를 하다가 간혹 전마들이 착용하는 사슬 갑옷은 시원하여 얌전히 있는 것을 발견하고 전투가 벌어지면 사슬 갑옷을 덮어 주었다.
그러면 전마라도 된 듯 쿠왕! 하고 포효하며 좋아했다.
코르삭은 마차에 벽을 설치하고 커다란 화살집에 쇠뇌살을 가득 채워 벽에 걸어 두었다.
그리고 예비로 쇠뇌 두 자루를 거치해 두었다.
그렇게 하고 카멜리로 가서 밀가루, 통밀, 채소, 치즈, 장기 보관이 가능한 햄을 잔뜩 사서 실었다.
광산에 공급할 식량이었다.
광부들이 물 대용으로 마시도록 값싼 카멜리 포도주도 많이 구입했다.
그리고 각종 채굴 장비와 곡괭이도 주문해 가져갔다.
시세의 세 배를 받을 수 있으니 오크가 요새를 포위할 때까지 계속해야 했다.
그렇게 짐을 잔뜩 싣고 투리스로 돌아가는데 투리스 쪽에서 기사들이 달려오는 모습이 보였다.
“어? 기사들은 접경 다리에 있었는데 어떻게 된 거지? 200명 정도 되는 것 같은데 저 정도면 투리스 요새의 기사들이 모두 밖으로 나온 것 아니야? 그래도 되나?”
불카르가 중얼거렸다.
“요새에서 당장 전투가 벌어지는 게 아니니까 접경 다리를 지키라고 보냈나 보지.”
코르삭의 말에 불카르가 고개를 끄덕였다.
기사단장 에퀴타스가 상행단을 스쳐 지나가다 홀로 멈춰서 물었다.
“트베리 상회인가?”
엄밀히 말하면 트베리 상회의 마차는 열네 대뿐이지만, 굳이 그렇게 따질 필요는 없었다.
“예!”
불카르가 큰 소리로 대답했다.
“카멜리 쪽은 별일 없나?”
“접경 다리에서 전투가 자주 일어납니다. 이번 상행에서는 안 일어났지만, 늘 있는 편이죠. 그리고 강의 얕은 지점을 건넌 오크들이 카멜리의 마을들을 습격하고 있다는 소문을 듣기는 했습니다. 직접 본 적은 없지만요.”
코르삭이 침착하게 대답하자 에퀴타스가 코르삭이 타고 있는 마차로 다가와 물었다.
“요즘 카멜리 성의 분위기는 어떤가?”
“주민들이 불안해하기는 하지만, 접경 다리 최초 습격 때부터 카멜리군이 적극적으로 대응하고 병력 소집을 적시에 한 결과 큰 혼란은 없습니다.”
에퀴타스는 답변의 내용뿐 아니라 침착하고 군더더기 없는 답변 형식이 마음에 들었다.
“자네가 코르삭이로군.”
“저를 아십니까?”
“그럼. 트베리 상회의 호위대장 아닌가?”
코르삭은 어리둥절했다.
‘내가 호위대장이라고? 그렇게 소문이 났나?’
트베리 상회에 그런 직함은 없었다.
굳이 호위대장을 꼽으라면 탈타르였다.
그가 상회단 호위를 맡은 사냥꾼들을 모두 통솔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탈타르와 그의 아들들은, 코르삭이 트베리 상회의 호위 책임자이고, 트베리에게 자신들을 고용하도록 했으며, 카멜리 영주에게 인정을 받아 결속패를 지니고 있어 카멜리 병사들이 존중해 줄 뿐 아니라, 사냥꾼들이 어려워하는 프라이바드와 왠지 편한 사이인 것 같아 암묵적으로 전체 호위의 대표라고 인정하고 있었다.
“아기를 안고 다니는 호위가 자네 말고는 없지 않나?”
코르삭은 그것만으로도 눈에 띄었다.
“하하! 그렇긴 하죠.”
“어쨌든 투르스와 카멜리를 오가며 문제가 생기거나 도움이 필요하거나 이상한 점이 보이면 언제든지 말하게.”
“그러죠.”
“그럼 또 보세.”
“네! 다치지 마세요!”
앞서 가는 기사들을 향해 말을 달리며 에퀴타스는 저도 모르게 미소를 지었다.
‘다치지 말라니, 우리 집 애들도 어렸을 때나 했지 이제 안 하는 소리를 처음 보는 녀석에게서 다 들어보는군.’
그는 자신이 다치게 되리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죽지나 않으면 다행이었다.
그래도 다치지 않고 다시 가족을 만나게 되기를, 아기를 가슴에 품고 있는 저 젊은 아빠를 다시 만나 다치지 않았노라고 말하게 되기를, 아주 잠시나마 빌어 보았다.
한편 멀어지는 에퀴타스를 보고 코르삭이 말했다.
“요새가 포위될 날이 머지않은 것 같군.”
“응? 그걸 어떻게 알아?”
마차 옆에서 거대한 창을 어깨에 걸치고 걸어가던 불카르가 물었다.
“기사 500명이 다 요새 밖으로 나왔단 말이야.”
“그게 어쨌다는 거야?”
“기사 500명은 내가 알기로 투리스 요새에서 가장 강력한 전투 병력이야. 그 병력을 전부 다 빠졌으니 요새의 전투력은 약해졌겠지. 오크로서는 요새를 공격하기에 최적의 때가 된 거지.”
“아!”
불카르가 감탄했다.
어디까지나 인간이 알고 있는 정보에 기초한 추측일 뿐 오크가 그 정보를 알고 있다는 근거는 없었지만, 불카르의 눈에는 코르삭이 무척 똑똑해 보였다.
어쨌든 그들은 진짜 전쟁이 머지않았다고 생각하며 투리스 요새로 돌아가고 있었다.
그런데 요새로 들어가기 전에 숲에서 괴인이 나와 행렬이 멈추었다.
옷인지 나무껍질인지 알 수 없을 정도로 온몸에 풀과 이끼가 잔뜩 묻어 있는 모습.
자잘한 나뭇가지와 낙엽이 붙어 있는 기다란 머리칼.
나무 정령이나 나무 요괴를 닮은 그는 바로 프라이바드였다.
오크의 동태를 살피러 간다던 그가 돌아온 것이다.
“오크의 왕이 좌우 부족을 복속시켰다. 이제 북쪽 부족 하나만 남기고 모두 정복한 것이지. 조만간 오크 대군이 쳐들어올 것이다.”
투리스 사령부도 파악하지 못한 정보를 가지고 돌아온 프라이바드는 그 말을 하고 쓰러져 잠들어 버렸다.
코르삭은 그의 상태를 살피더니 크게 이상이 없는 것을 확인하고는 마차에 싣고 갔다.
Comment ' 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