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당히 포효하는 사자가 되어라
그닉족을 찾아가는 여정은 쉽지 않았다.
라티시아는 전역이 로그넘 치하에 있었기 때문에 라티시아를 벗어날 때까지는 여러 차례 로그넘군 - 로그넘의 명령을 받는 라티시아인으로 구성된 군대 포함 - 과 마주쳤는데, 때로는 상행인 척 속이고 때로는 싸우며 위기를 벗어났다.
라티시아를 완전히 벗어난 뒤로는 땅이 척박하고 지세가 험해 농사짓기 부적합한 땅이 나타났는데 그곳에 사는 거친 부족들의 습격을 받았다.
과거 라티시아가 교역으로 큰 부를 쌓던 시절에 라티시아의 용병 노릇을 하던 부족들이었다.
지금은 로그넘의 보조군 노릇을 하거나 도적이 되어 근근이 살아가고 있었다.
그런 중소 부족들의 영역을 돌파하고 나니 비로소 그닉족의 영역이 나타났다.
라티시아에 비교적 가까운 중소 부족들의 땅보다 훨씬 거칠고 척박하며 서늘한 땅.
이 땅을 지나 계속 가면 바닷가가 나오는데 예로부터 바다사자와 바다코끼리의 가죽, 고래 기름, 왁스, 말린 생선, 단단한 목재 등이 유명했다.
그닉족의 땅에는 그런 교역 품목도 있었으나 그것이 나는 지역은 매우 한정적이라 대부분은 매우 가난했다.
그래서 그닉족 사람들은 대대로 약탈로 살아갔다.
과거에는 부유한 라티시아를 습격했으나 우베르가 라티시아를 합병하면서 그닉족 토벌을 시작한 뒤로는 살기 위해 바다로 나가게 되었다.
바다로 나가 해적이 되거나 상인이 되지 않은 그닉족은 우베르의 보조군이 되어 여러 전쟁에 투입되었다.
그러다 로그넘이 라티시아를 점령한 뒤로 우베르와 단절되었다.
파울 일행은 그닉족의 땅으로 들어선 뒤에도 많은 그닉족 도적 떼와 싸우며 그닉족의 영혼의 고향 나비아에 도착했다.
여정이 험난했던 만큼 그들의 행색은 무척 지저분했다.
오랫동안 깎지 않아 덥수룩한 수염, 계속된 싸움으로 더러워진 옷.
“이 꼴로 가면 외교 사절이 아니라 거지 떼로 볼 테니 강가에서 옷을 빨고, 목욕도 하고, 머리와 수염도 정리하는 게 좋겠습니다.”
파울의 말에 루케오가 승낙했다.
“그러죠.”
일행은 강가로 가서 일찍 야영 준비를 하고 교대로 목욕과 빨래, 이발과 면도를 했다.
루케오는 호위 기사가 머리칼과 수염을 손질해 주었으나 목욕까지 부탁할 수는 없어서 옷을 훌떡 벗고 파울의 뒤를 따라 강물로 들어갔다.
“아으!”
물이 얼음장처럼 차가워 비명이 절로 나왔다.
씻기 싫었으나 나이 많은 파울이 물속에 앉아 머리를 담그고 비벼서 감는 것을 보고 차마 못 하겠다고 할 수 없어 그를 따라 물속에 앉아 머리를 비비다가 그가 일어나는 순간 잽싸게 일어났다.
촤아~!
물이 요란하게 뒤집히는 소리에 파울이 루케오를 쳐다보자 루케오가 자랑스럽다는 표정으로 말했다.
“내가 아노니무스 경보단 좀 더 오래 있었다고요!”
“그러십니까?”
파울은 별다른 반응 없이 그 말만 하고 밖으로 나가 목욕 전에 빤 옷들을 들고 모닥불 옆으로 가서 돌 위에 펼쳐 두었다.
루케오도 파울을 그대로 따라했다.
루케오는 파울과 함께하는 이 여행이 무척이나 신기했다.
어릴 때부터 듣던 악마 기사 이야기.
이야기 속의 주인공과 긴 여행을 떠나는 기분이었다.
그는 호위 기사들이나 다른 귀족들과 달리 자신의 비위를 맞추려는 태도를 조금도 보이지 않았다.
필요한 이야기만 하고, 질문을 해도 귀찮다는 듯 짧게 대답하고 끝이었다.
전설 속 영웅처럼 그는 못하는 것이 없었다.
전투와 지휘 능력이야 말할 것도 없고 야영도 잘하고, 요리도 잘했다.
아는 것도 많았다.
심지어 그닉족 말도 할 줄 알았다.
애초에 그가 없었다면 이 작전은 불가능했으리라는 생각이 들었다.
모닥불 가에서 벌거벗고 앉아 있는 그의 몸에 가득한 흉터는 절로 두려움과 존경심을 불러일으켰다.
여태껏 이런 사람을 만난 적이 없었던 루케오는 저도 모르는 사이에 어미 오리를 따라다니는 새끼오리처럼 파울을 졸졸 따라다니고 있었다.
불 옆에 두었던 옷은 금방 말랐다.
파울과 루케오는 옷을 입고 저녁을 먹었다.
거친 빵, 딱딱한 육포, 싸구려 포도주.
보잘것없는 음식이었지만, 예전과 달리 루케오는 투정하지 않았다.
영웅에게 부끄러운 모습을 보일 수는 없었기 때문이다.
식사를 마치고 루케오가 말을 걸었다.
“아노니무스 경, 궁금한 게 있는데요.”
“말씀하십시오.”
“그 흉터들은 다 언제 생긴 겁니까?”
“말하고 싶지 않습니다.”
단호한 파울의 대답에 그의 부관 로비고와 왕자의 호위 기사들이 오히려 당황했다.
그러나 정작 루케오는 그리 놀라지 않았다.
쓸모없는 질문에는 순순히 대답하지 않는 것이 영웅을 더 영웅답게 만들어 주었기 때문이다.
루케오는 얼른 화제를 돌렸다.
“아노니무스 경, 그닉족에게 무엇을 약속해야 할까요?”
이번 질문은 쓸모가 있었기에 파울은 기꺼이 대화에 응했다.
“왕자님 생각은 무엇입니까?”
“그닉족이 원하는 것을 줘야겠지요.”
“그게 뭡니까?”
“오면서 보니까 듣던 대로 땅이 농사에 적합하지 않은 것 같더군요. 식량을 준다고 하면 되지 않을까요?”
예전부터 그닉족은 먹을 것이 부족해 약탈하는 삶을 살아왔다는 것 정도는 루케오도 알고 있었던 것이다.
“식량을 준다고 할 때 어떻게 준다는 겁니까? 매년 일정량의 식량을 준다는 것인지, 식량을 구입할 수 있도록 교역을 허락한다는 것인지, 아니면 농사가 가능한 땅을 그닉족에게 넘겨준다는 것인지 생각을 해 봐야지요.”
루케오는 식량을 준다고만 생각했지 그 방법에 여러 가지가 있다는 것까지는 미처 고려하지 못했다.
“그걸 지금 정해야 합니까?”
“좋은 질문입니다. 지금 정해서는 안 되지요.”
루케오는 정말 몰라서 물어본 것인데 칭찬을 들을 줄은 몰랐다.
어쨌든 칭찬을 들으니 기뻤다.
“왜 지금 정하면 안 됩니까?”
“그닉족의 상황을 전혀 모르니까요. 저들이 우리에게 병력을 지원해 줄 형편이 되는지, 병력을 동원한다면 얼마나 동원할 수 있는지, 지금의 지도자가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파악하고 협상을 하면서 그에 맞춰 우리가 대가로 무엇을 줄 것인지 맞춰 나가야 합니다.”
“아하!”
“그닉족인 야만족입니다. 이게 무슨 뜻인지 아십니까?”
“거칠고 잔인하다는 말 아닙니까?”
너무 빤한 이야기에 파울이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맹수는 크고 건장한 초식동물 대신 병들고 약한 새끼를 사냥합니다. 약한 녀석을 잡아먹는 데 일말의 거리낌도 없습니다. 그게 바로 야만입니다.”
약육강식을 당연하게 여긴다.
“우리가 처음부터 뭐든 퍼 주겠다는 낮은 자세로 나간다면 우리를 약하게 보고 더 큰 것을 요구할 겁니다.”
루케오는 파울의 말을 대강은 이해했지만, 정확이 어떻게 하라는 것인지는 몰랐다.
“우리가 아쉬운 건 사실 아닙니까? 큰 걸 약속해야 한다면서요?”
“아니죠. 그건 야만적인 사고방식이 아닙니다.”
“······?”
“큰 걸 주겠다고 약속은 하지만, 우리가 아쉽다는 것을 드러내지 말고 강하게 밀어붙여야 합니다. 너희가 주인의 지시를 따른다면 굶주리지 않게 은혜를 베풀어 주겠다는 태도로 말입니다.”
“아!”
“야만족을 대할 때는 철저히 힘으로 찍어 눌러야 합니다. 그 옛날 그닉족이 라티시아를 끊임없이 쳐들어온 까닭은 라티시아가 그들을 완전히 제압할 힘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반면 우베르는 저들을 철저히 밟았기에 저들이 우베르에 숙인 것입니다.”
루케오는 이제 확실히 이해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파울이 말했다.
“우리가 아쉬운 처지라는 것은 우리도 알고 저들도 압니다. 그러나 결코 티를 내서는 안 됩니다. 백만의 늑대에 둘러싸여도 결코 위축되지 않고 당당히 포효하는 사자가 되십시오. 그러면 백만의 늑대가 사자 앞에 엎드릴 것입니다.”
파울의 말을 듣고 루케오는 가슴이 떨렸다.
자신이 어떤 왕이 될지 처음으로 확실한 목표를 갖게 되었다.
“그런 왕이 되어 보겠습니다, 아노니무스 경!”
루케오가 힘차게 다짐했다.
그닉족 영웅의 땅 어느 강가에 달과 별이 환하게 떠 있었다.
***
나비아에서 대족장을 찾아가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우베르의 왕자를 자처하는 이방인이 그닉족의 숱한 습격을 물리치고 대족장을 만나러 가고 있다는 소식을 들은 대족장이 전사들을 보내 마중한 것이다.
루케오 일행은 그들의 호위를 받으며 나비아 최대 도시 포스그룬에 도착했다.
그러나 환대는 없었다.
그들은 어느 초원에 세워진 몇 채의 천막으로 안내되었다.
“우베르의 왕자님이시다. 대족장은 언제 만날 수 있나?”
파울이 그닉족 말로 물었다.
“대족장님은 바쁘시다. 기다려라.”
전사들은 그 말만 반복했다.
초대하지도 않았는데 온 것은 그들이었기에 기다릴 수밖에 없었다.
파울은 그들을 감시하는 그닉족 전사에게 다른 것을 물었다.
“나르손 일족 중에 크누트의 아들 라그나르를 아는가?”
그닉족 전사가 깜짝 놀라며 물었다.
“당신이 나르손의 번개 전사를 어찌 아는가?”
“전우다.”
“전우?”
이해할 수 없는 이야기였다.
파울도 굳이 더 설명하지는 않았다.
“옛 전우인 파울 막심이 찾아왔다고 전해 주겠나?”
“파우르 마크시므?”
“참을성 강한 여우가 찾아왔다고 말하면 된다.”
“참을성 강한 여우?”
“그렇게 말하면 알 것이다. 그런데 그는 지금 어떻게 지내나?”
“나르손 일족을 이끌고 있다.”
“족장이 되었군.”
“그렇다.”
“어쨌든 부탁한다.”
“알았다.”
그렇게 대답한 전사는 잠시 고민하다 주위를 둘러보고는 조심스럽게 말했다.
“대족장님은 아무나 만날 수 없다.”
“무슨 뜻이지?”
“자격을 증명해야 한다.”
파울이 고개를 끄덕이고는 말했다.
“알고 있다. 알려 줘서 고맙다.”
그닉족 전사가 떠나고 파울은 일행을 모아 조용히 말했다.
“오늘 밤 습격을 받을 수 있으니 다들 잠자지 말고 깨어 있도록 해.”
루케오가 깜짝 놀라 물었다.
“그게 무슨 말입니까, 아노니무스 경?”
“그닉족 대족장은 우리를 만나 줘야 할 이유가 없지요. 왕자님을 만났다는 사실을 로그넘에 들키면 괜히 의심을 사고 로그넘군의 공격을 받을 수 있습니다. 게다가 왕자님이 진짜 왕자인지 아닌지도 확인할 길이 없습니다. 차라리 없애는 게 그닉족으로서는 깔끔하지요.”
“그걸 알면서 왕자님을 데려왔다는 말인가?”
루케오의 호위 기사가 버럭 화를 냈다.
“그럴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은 했지. 처지를 바꿔 생각해 봐. 우베르의 왕이, 그닉족 대족장의 첫째 아들이 찾아왔다고 하면 바로 만나 주겠나?”
“······.”
“야만족에게는 야만족만의 방식이 있다. 습격을 받고도 살아남으면 만나 줄 것이다. 대족장을 만날 자격이 있는 것이지.”
다들 어이가 없어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그때 파울의 부관 로비고가 물었다.
“습격해 온 그닉족을 죽여도 됩니까?”
외교적으로 문제가 되지 않겠느냐는 뜻이었다.
가장 필요하고도 현명한 질문이었다.
“당연하다. 죽이려고 했으면 죽음도 감수해야지.”
“젠장! 대족장인지 뭔지 면상 한 번 보기 어렵네. 톡톡히 대가를 치르게 해 주겠어!”
루케오가 각오를 다지자 그의 호위 기사들도 이 문제에 대해 더는 언급하지 않았다.
기사들은 최대한 자연스럽게 행동하라는 파울의 말에 따라 평소대로 밥을 먹고 잘 준비를 했다.
시간이 흐르고 마침내 우베르인들이 들어 있는 천막의 등불이 하나씩 꺼졌다.
휘잉~
북방의 바람 소리가 요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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