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을 휘두를 줄 아는
카멜리, 바르나, 트로바, 엔스.
투리스의 이 배후 영지들은 투리스가 오크에 의해 뚫렸을 때 2차 저지선 역할을 하도록 성이 크고 튼튼하게 지어져 있었다.
그래서 이번에 오크의 공격을 받았음에도 함락되지 않고 버틸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배후 영지들의 더 큰 역할은 투리스가 군사 활동에만 전념할 수 있도록 식량과 물자를 공급하는 것이었다.
옛날 가장 많을 때는 20만, 그 이후에도 꾸준히 10만의 병력이 주둔해 있었던 투리스에, 왕국에 내야 할 세금을 투리스에 공급하는 형식으로, 식량과 물자를 공급해 왔다.
그만큼 투리스의 배후 영지들은 다른 영지들에 비해 인구도 많고 산물도 많았다.
그럼에도 로그넘의 침공으로 투리스의 병력을 라티시아 방면으로 돌려 투리스 주둔군이 2만으로 줄었을 때 8만 명분의 물자를 착복하는 욕심을 부렸다.
투리스 사령관은 그 일을 용서할 수가 없었다.
배후 영지의 영주들은 투리스의 기사와 병사들이 목숨을 걸고 깊고 어두운 검은 숲으로 들어가 오크를 수색하고 교전을 벌이는 동안 안전한 후방에서 편안하게 살아왔다.
로그넘의 침공으로 급해진 왕국에서 투리스 주둔군을 라티시아 방면으로 돌린 것은 이해하지만, 줄어든 병력을 대체하기 위해 투리스 사령부는 몬스터 사냥꾼에게 포상하는 제도를 도입했고 이를 뒷받침할 재정이 필요했다.
그런데 세금 제도를 악용해 자기들 배만 불린 것이다.
이제 그 죄의 대가를 받을 차례였다.
“바르나의 영주는 사망한 것으로 보입니다. 자기만 살겠다고 피난 행렬에서 떨어져서 엔스로 먼저 간다고 했는데 도착하지 않은 걸 보면 말입니다.”
“수고를 덜었군.”
“트로바의 영주는 오크와 싸우다 죽었다고 합니다.”
“그나마 사람답게 죽었구먼.”
“부인과 아직 성년이 안 된 자식들이 있습니다.”
“오크가 나오는 변방에서 위험하게 살지 말고 플로스에 가서 편히 지내라고 해. 남편은 갔어도 자식들 목숨은 살려야지.”
적절한 위협과 설득은 참모장의 몫이었다.
“알겠습니다.”
“그럼 엔스 백작 하나 남았나?”
“예!”
“사람들 많은 곳으로 모시고 나와. 정중하게.”
발테스가 불안한 표정으로 물었다.
“어쩌시려고요?”
“어쩌긴 뭘 어째? 대화하려는 거지, 대화.”
“지금 엔스 성에는 북서부 영주들이 거의 다 있습니다. 거칠게 다루시면 반감을 살 겁니다.”
“나 거친 사람 아니야. 부드러운 대화를 좋아한다고,”
“······.”
“지금 바로 데리고 나오란 말이야!”
뷔페스가 으르렁거리듯 말했다.
“알겠습니다!”
참모장이 재빨리 나가 사람들이 많이 오가는 광장으로 엔스 백작을 데려왔다.
“투리스 사령관이 여기서 나를 보자고 했단 말인가? 할 말이 있으면 직접 오지 않고······.”
엔스 백작은 못마땅한 기색을 숨기지 않았다.
투리스 덕에 목숨을 구한 것은 맞지만, 애초에 투리스에서 오크를 잘 막았다면 엔스 성이 싸움에 휘말릴 일은 없었다.
투리스가 제 역할을 다하지 못하여 이 지경이 된 것이다.
게다가 투리스 사령관은 자신과 마찬가지로 백작.
그런데 그는 이름 없는 가문 출신으로 바닥을 박박 긴 덕에 사령관 자리에 올라 직위에 함께 붙는 백작이 된 단승 백작이었다.
가문 대대로 백작인 자신의 품격에는 절대 미치지 못했다.
그런 주제에 사람을 오라 가라 하니 기분이 영 좋지 않았던 것이다.
성 안을 활개치고 다니는 투리스의 기사들과 난민들도 꼴 보기가 싫었다.
오가는 병사와 주민들이 영주가 왜 나와 있는지 의아해하며 힐끗거리는 것도 불쾌했다.
바로 그때 멀리서 거구의 사나이가 검을 빼들고 다가오는 모습이 보였다.
투리스 사령관 뷔페스였다.
뷔페스는 엔스 백작을 보자마자 검을 빼 들고 달려오며 소리쳤다.
“이 죽일 놈!”
성난 코끼리가 돌진하듯 무시무시하게 달려들었다.
깜짝 놀란 엔스 백작이 저도 모르게 달아나려다 넘어지고, 엔스 성의 기사들이 다급히 검을 들어 주인 앞을 막아섰다.
그러거나 말거나 뷔페스는 엔스 백작을 향해 무지막지한 힘으로 검을 내리쳤다.
엔스의 기사들이 검을 들어 막았으나 튕겨 나갈 정도였다.
엔스의 다른 기사들이 검을 뽑아 달려오고 병사들은 투리스 사령관을 향해 활을 겨누었다.
그 모습을 보고 투리스의 기사들도 검을 뽑아 달려왔다.
코르삭과 불카르, 페크투스도 그들 중에 있었다.
“이게 무슨 짓이오? 미쳤소?”
엔스의 기사 하나가 뷔페스의 검을 막으며 버럭 소리를 질렀다.
엔스의 주민과 피난민들은 성 안에서 칼부림이 나는 줄 알고 바들바들 떨었다.
뷔페스가 주저앉아 있는 엔스 백작을 노려보며 호통 쳤다.
“이놈! 네놈 때문에 죽은 백성과 병사들을 어찌할 것이냐? 집을 잃은 사람들, 이 땅에 남아 있는 오크들 때문에 앞으로도 집에 못 가고 거지꼴로 지내야 하는 피난민들, 농사를 지을 수 없는 농민들, 마차를 탈 수 없는 상인들, 숲에 들어갈 수 없는 약초꾼들···, 그들의 생계는 또 어떡할 것이냐?”
쩌렁쩌렁 울리는 목소리가 성 전체를 뒤흔들었다.
“대체 뭔 소리를 하는 거요?”
엔스 백작이 겁먹은 목소리로 물었다.
“배후 영지들이 마땅히 투리스에 보내야 하는 물자를 제대로 공급했다면 투리스는 오크의 공격을 사전에 완벽히 막아냈을 것이다. 그런데 네놈들이 그 더러운 아가리에 그 귀한 재물을 털어 넣는 바람에 이 지경이 된 것 아니냐?
투리스의 기사들은 다른 영지 기사들의 2할만 받으면서도 40만에 달하는 오크와 싸워 결국 물리쳤다.
투리스의 병사들은 겨우 밥만 먹으면서도 죽어라 싸워 40만 오크를 몰아냈다.
네놈들이 줄 것을 제대로 주었다면 더 나은 장비와 더 많은 병력으로 결코 오크가 투리스를 넘어 이 땅까지 쳐들어오는 일은 없었으리라!
죽은 이들은 누가 책임질 것이며 앞으로도 이 땅을 떠돌 오크는 누가 몰아낼 것이냐?”
다른 영지의 영주들, 기사들뿐 아니라 엔스 성의 기사, 병사, 백성들도 투리스 사령관의 분노에 공감하고야 말았다.
그들에게 엔스 백작은 투리스에 보내야 할 물자를 착복하여 일을 이 지경으로 만든 죄인이었다.
그렇게 생각할 수밖에 없는 것이, 그들은 열흘 전에 투리스군이 보여준 숭고함과 강인함을 두 눈으로 직접 목격했다.
바르나와 트로바의 주민과 병사들을 살리기 위해 그야말로 목숨을 걸고 싸운 투리스군.
그런 투리스군의 사령관이 하는 말이라 믿지 않을 수가 없었다.
거의 모든 사람들이 엔스 백작을 차갑게 노려보고 있을 때 페크투스가 흥미롭다는 듯이 소곤거렸다.
“오호! 투리스 사령관님은 사람을 휘두를 줄 아는 분이로군요.”
“그게 무슨 말이죠?”
코르삭이 물었다.
“사령관님의 눈을 보면 별로 흥분하지 않았어요. 검을 휘두른 건 단지 주목을 끌기 위함일 뿐이에요. 극적인 효과를 내는 거죠. 애초에 검으로 엔스 백작을 해치울 생각이 없어요. 그렇게 하면 이번에 함께 온 다른 영주들이 사령관님을 두려워하지 않겠어요?
이 상황을 만들어 놓고 엔스 백작의 죄를 공표해 버리면 오크에 대한 두려움과 적개심이 극에 달한 사람들은 엔스 백작을 절대 용서하지 않을 거예요.
사람들의 지지를 등에 업고 엔스 백작을 심판하는 거죠.
보세요. 엔스의 기사와 병사들도 얼떨결에 검을 들었을 뿐 백작을 위해 싸우려고 하지 않잖아요.
그야말로 원하는 대로 사람들을 움직이는 거죠.
저게 바로 정치예요.”
다른 사람들은 거구의 뷔페스가 다짜고짜 검을 휘두르는 것을 보고 힘만 세고 야만적이고 무모하다고 말할지 모르지만, 페크투스는 그가 매우 영리하고 계산적이고 정치력이 뛰어난 인물임을 금방 간파해 냈다.
코르삭은 사령관이 배후 영지의 영주들을 제거하려 한다는 것을 이미 알고 있었다.
그래서 사령관에게 미움 받을 각오를 하고 자신과 인연이 있는 카멜리 자작을 구한 것이다.
그런데 제거가 이런 방식일 줄은 몰랐다.
“죽이는 게 아니었구나.”
코르삭이 중얼거렸다.
그 말을 들은 페크투스가 말했다.
“공포로 다스릴 게 아니라면 함부로 죽여서는 안 되죠. 그런 통치자는 오래 못 가요.”
코르삭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때 뷔페스가 엔스 백작에 대한 처분을 내리고 있었다.
“네놈은 죽어 마땅하나 국왕 폐하께 처분에 맡기겠다. 다시는 이 땅으로 돌아오지 마라.”
영지를 빼앗고 추방한 것이다.
“이렇게 느슨하게 처리해도 괜찮을까요? 백작 정도 되면 힘센 친인척도 많을 텐데? 그리고 만약 국왕께서 엔스 백작의 손을 들어 주면 어떡하죠?”
영지를 빼앗긴 영주가 목숨만이라도 살려 줘서 고맙다고 생각할 리 없었다.
깊은 원한을 품고 복수하려 할 것이다.
땅을 되찾고 투리스 사령관을 응징하기 위해 모든 노력을 다할 것이다.
쉽게 말해 원수를 풀어 주는 셈이었다.
“저 한 사람을 죽여서 두려움에 떠는 잠재적 배신자 수십 명을 만드는 것보다는 낫잖아요.”
북서부의 영주들은 아직 투리스 사령관에게 진심으로 충성하는 것이 아니다.
엔스 백작을 가혹하게 처리하면 그들이 동요할 것이다.
“그리고 어느 친인척이 목숨 걸고 싸워 줍니까? 적당히 위로하고 같이 욕하다 끝나겠죠.”
투리스 사령관에게 무기를 겨눌 사람은 없다.
자기 일도 아니고 친척 일이라면 더더욱.
“국왕 폐하도 마찬가지예요. 로그넘과 전쟁 중인데 북서부를 적으로 돌리겠어요? 나라 망하자는 것도 아니고. 진상 파악 하고, 권고하고, 시간 보내는 거죠.”
“음!”
코르삭은 많은 생각이 들었다.
힘이 없으면 자신의 것을 지킬 수가 없다.
왕도, 친인척도 도움이 되지 않는다.
‘정말로 힘이 있어야 하는구나!’
힘을 길러 카시아를 돕겠다는 생각도 사실은 추상적인 것이었다.
오랜 세월 대대로 물려받은 땅을 하루아침에 빼앗기는 엔스 백작을 보니 누구도 넘볼 수 없는 힘을 길러야겠다는 생각이 강하게 들었다.
‘애초에 그런 힘이 있었다면 카시아와 헤어지는 일도 없었겠지.’
힘을 길러야겠다는 강렬한 의욕과 더불어 의문도 들었다.
엔스 백작이 투리스에 잘못한 일이 있더라도 이런 식으로 땅을 빼앗는 것은 사실 옳은 일이 아니다.
힘으로 남의 재물을 강탈하는 도적과 다를 바가 없었다.
강자에게 소중한 것을 빼앗겨도 하소연할 데가 없고 도움을 받을 수 없는 세상.
‘옳지 않다.’
코르삭은 힘을 어떻게 써야 옳은지, 어떤 세상이 좋은 세상인지에 대한 고민을 막연하게나마 시작하게 되었다.
엔스 백작 일가가 사람들의 차가운 시선 속에서 초라하게 떠나는 모습을 보면서.
***
“카드쿠스 숲으로 돌아가 보겠습니다.”
코르삭은 뷔페스에게 작별을 고했다.
카드쿠스를 비운 지 너무 오래되었기 때문이다.
아기가 아빠 얼굴을 기억하지 못할까 봐 벌써부터 걱정이 되었다.
잔류 오크 문제가 아직 남아 있었지만, 사령관이 북서부 병력을 모두 거느리고 소탕할 것이기 때문에 그리 걱정하지는 않았다.
애초에 이번까지만 참여하면 푹 쉬게 해 주겠다고 사령관이 직접 말했기에 붙잡을 명분이 없었다.
“알았다. 엔스 정상화를 맡겨 볼까 했더니······.”
뷔페스가 입맛을 다시며 말했다.
코르삭은 그 말이 진담일 것이라고는 생각지 않았다.
엔스는 백작령.
카드쿠스 숲과는 차원이 다른, 중요한 땅이었다.
이 땅을 자신이 맡으면 투리스의 위계질서가 와르르 무너진다.
그럼에도 사령관이 자신을 그만큼 좋게 보고 있다는 말이라 고마운 마음이 들었다.
“그냥 보내기가 정 아쉬우시면 트라운 산의 포도주나 몇 병 주십시오.”
“뭐? 그게 뭔데?”
“엔스 백작령의 트라운 산 일대에서 나는 포도주가 맛이 좋다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거든요.”
“그래? 포도주를 즐기는 줄은 몰랐구나.”
“즐기는 건 아닌데요?”
“그럼 왜?”
“그걸 팔면 살림에 좀 도움이 될까 해서요. 카드쿠스에는 아직 아무 것도 없어서······.”
코르삭의 말에 뷔페스가 피식 웃었다.
이번 북서부 통합전에서 최고 수훈을 세운 코르삭이 고작 돈 몇 푼을 벌겠다고 맛 좋은 포도주를 달라고 하다니 어처구니가 없었던 것이다.
그와 동시에 자신의 부하들이 아직도 곤궁하게 지내는가 싶어 마음이 무거웠다.
“조금만 기다려라. 가져오라고 해서 몇 상자 실어 줄 테니까.”
뷔페스는 정말로 트라운 산 일대에서 나는 최고급 포도주를 코르삭에게 하사했다.
그뿐 아니라 그곳에 있는, 양조장이 딸린 포도 농장 하나도 코르삭에게 선물했다.
“가져가고 싶을 때 가져가라.”
코르삭은 뷔페스의 마음씀씀이에 괜스레 콧날이 시큰했다.
“감사합니다. 다음에 부발루스 뿔과 힘줄을 가지고 올 때 뵙겠습니다.”
코르삭은 불카르, 프라이바드 등과 함께 카드쿠스 숲으로 떠났다.
투리스 민병대와 카드쿠스 순찰대가 수십 대의 마차를 타고 따라왔다.
한편 페크투스는 뷔페스가 이끄는 북서부군 참모부에서 본격적으로 일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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