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획보다 빠르게
투리스의 사자는 자신에게 달려드는 자고라의 날파리들을 귀찮다는 듯이 흩어 버리고 오로지 자고라의 날파리 우두머리를 향해 직진했다.
본능적으로 위험을 감지한 자고라의 기사단장이 코르삭을 팽개치고 그를 향해 마주 달리며 검을 휘둘렀다.
두 마리의 말이 교차한 직후 두 사람의 검이 목표를 향해 날아갔다.
자고라 기사단장의 검이 뷔페스의 목에 닿기 전에 뷔페스의 검이 먼저 기사단장의 팔뚝을 강하게 베어 갔다.
갑옷 덕에 잘리지는 않았지만 무시무시한 힘에 뼈가 부러지며 팔이 기이하게 꺾여 뒤로 튕겼다.
손에서 빠져나간 검이 허공을 날았다.
“크흑!”
자고라의 기사단장이 이를 악물고 팔을 덜렁거리며 기사단을 지휘하려 했지만, 사령관의 뒤를 따라오던 참모장 발테스가 다친 짐승을 사냥하는 영악한 맹수처럼 기사단장의 목을 베고 지나갔다.
이윽고 투리스와 카멜리의 기사들이 날카로운 일격을 가하며 자고라의 기사들을 스쳐 지나갔다.
“컥!”
“으악!”
뷔페스는 뒤쪽의 상황은 안중에도 없다는 듯 곧바로 코르삭에게 다가가 말을 세우고 여기저기 피를 흘리고 있는 골칫덩어리를 찬찬히 살폈다.
마치 아빠 사자가 허락 없이 집을 나가 다친 새끼 사자를 데리러 와서 관찰하는 것 같았다.
이윽고 그가 입을 열었다.
“다친 데는?”
코르삭은 위기의 순간에 나타나 구해 준 사령관이 거인처럼 커 보였다.
“없습니다!”
싸우는 와중에 여러 곳을 베였지만, 전장에서 치명상을 입지 않았으면 안 다친 것이다.
실제로 아픈 줄도 몰랐다.
“그래?”
“예.”
“그럼 빨리 말을 타고 따라와! 네가 일으킨 문제, 네가 해결하라고, 이 자식아!”
뷔페스는 고함을 빽 지르고는 적의 주력이 민병대와 싸우고 있는 곳으로 달려갔다.
“아, 알겠습니다!”
코르삭이 큰 소리로 대답하고 가까이 있던, 주인 잃은 말을 타고 뷔페스의 뒤를 따라갔다.
여전히 수에서 열세였지만, 일말의 주저함도 없이 홀로 적의 대군을 향해 달려가는 뷔페스의 넓은 등을 보니 질 것 같지가 않았다.
바람을 가르며 말을 달리는 이 순간이 가슴 벅차게 좋았다.
잠시 후 자고라의 기사들을 물리친 투리스와 카멜리의 기사들이 발테스의 지휘로 두 줄로 달려와 뷔페스 뒤로 바짝 붙었다.
코르삭은 자연스럽게 발테스와 나란히, 뷔페스 바로 뒤에 자라했다.
발테스가 코르삭에게 소리쳤다.
“이봐, 사고뭉치!”
“예?”
“이따가 사령관님이 몇 대 때려도 반항하지 마라!”
코르삭이 잠시 고민하다 물었다.
“아플까요?”
발테스가 피식 웃으며 말했다.
“뒈지게 아프지.”
두 사람은 잠시 웃다가 이내 굳은 얼굴로 앞을 보고 달렸다.
뷔페스를 필두로 30이 채 안 되는 기사들이 보병 3천을 돌파하기 시작했다.
미리 대비만 했다면 충분히 저지할 수 있는 병력.
그러나 자고라 백작군은, 좀처럼 무너지지 않는 투리스 민병대를 둘러싼 채 공격하느라 응집력이 깨진 상태로 등을 보이고 있었다.
기사들의 돌파에 자고라 백작군의 전열이 와르르 무너졌다.
적진을 가르고 나간 뷔페스는 반전하여 밀집이 약한 지점으로 절묘하게 다시 진입해서 보병대의 정신을 쏙 빼 버렸다.
“흩어지지 말고 대열을 정비하라! 적 기사는 몇 안 된다! 충분히 막을 수 있다!”
자고라 백작이 고함을 지르며 전열을 정비해 보려 했지만, 절묘한 뷔페스의 돌파로 자고라 백작군은 바사삭 부서져 버렸다.
기마 부대는 소수라도 보병대 진형이 무너질 수 있다는 것을 코르삭은 가슴 떨리게 깨달았다.
불카르가 민병대의 선두에서 다가오는 적을 계속해서 짓이기는 바람에 기가 질려 있던 자고라의 병사들은 기사들의 잇따른 돌파에 전의를 완전히 상실하고 달아나기 시작했다.
“멈춰라! 적은 얼마 되지 않는다! 달아나는 놈들은 목을 베겠다!”
자고라 백작이 고래고래 소리쳐도 소용없었다.
결국 그 역시 살아남은 기사 몇 명과 함께 달아났다.
그러나 달아나는 것도 때가 있는 법, 보병과 뒤엉키다 보니 말이 속도를 내지 못했다.
결국 그를 호위하던 기사들이 투리스의 기사들에게 죽고, 혼자 도망치던 그는 뒤따라와 몸을 던진 코르삭에 의해 생포되고 말았다.
말에서 떨어져 몇 바퀴 구르고 고통스러운 신음을 흘리고 있는 자고라 백작의 몸을 짓누르며 코르삭이 말했다.
“아파? 이게 아파? 당신이 아프게 한 사람들은 어떤 고통을 겪었는지 알아? 그들이 당한 고통을 똑같아 겪어 봐.”
“이놈! 내가 누군지 아느냐? 자고라 백작이다! 넌 누구이기에 이리도 방자하게 구는 것이냐? 죽음이 두렵지 않느냐?”
코르삭은 콧방귀를 뀌었다.
자고라 백작을 당장 죽이지 않는 것은, 투리스 사령관이 이 자리에 도착했기에 결정 권한이 그에게 있고, 철저한 조사와 심문으로 사건의 진상을 밝혀 이번 일의 정당성을 확보하기 위함이었다.
“곧 죽을 사람을 두려워하지는 않아.”
코르삭은 다른 민병대원에게서 밧줄을 받아 자고라 백작을 꽁꽁 묶고, 시끄러운 입을 막기 위해 재갈을 물렸다.
그 사이 프라이바드는 대원들에게 소리치라고 지시했다.
“자고라 백작이 잡혔다! 싸움이 끝났다! 항복하면 벌하지 않는다!”
민병대원들이 반복하여 소리쳤다.
이미 숲까지 도달한 자고라의 병사들은 그대로 달아났지만, 아직 숲까지 달아나지 못한 병사들은 그 자리에 멈춰서 눈치를 살피기 시작했다.
프라이바드는 다시 외치게 했다.
“집까지 숲을 통과해서 돌아갈 생각인가? 그러다 굶어 죽는다. 오크한테 죽을지도 모르지.”
자고라 백작령을 출발해서 여기까지 오는 데 7일이 걸렸다.
물론 적의 지연작전 때문에 추격이 늦어진 것이 큰 원인이기는 했지만, 식량 없이 돌아갈 생각을 하니 앞날이 캄캄했다.
자고라 백작도 잡힌 마당에 위험하게 숲으로 달아나느니 항복해서 평지 길로 돌아가고 싶었다.
자고라 백작령의 병사들이 무기를 버리고 털썩 주저앉기 시작했다.
그 광경을 바라보던 뷔페스가 참모장에게 솔직한 심경을 털어놓았다.
“이거 우리 민병대가 맞아? 너무 잘하는 거 아니야?”
싸움도, 전후 처리도 상상 이상이었다.
고작 3백여 명으로 열 배나 많은 적을 상대로 버티는 것을 넘어 항복을 시켰다.
발테스가 유심히 민병대를 살피더니 민병대를 지휘하는 사람이 특이한 행색을 하고 있는 사람이라는 것을 알아냈다.
그리고 머리를 쥐어짜 그가 누구인지 알아냈다.
발테스는 허허벌판임에도 누가 들을세라 뷔페스에게 몸을 기울여 속삭이듯 말했다.
“사령관님, 저기 민병대에 그가 있는 것 같습니다.”
“그라니?”
“20년 전에 요새 안에 불을 질렀던······.”
“······!”
뷔페스는 깜짝 놀라 프라이바드를 뚫어져라 바라보았다.
워낙 행색이 지저분해 알아볼 수가 없었지만, 그가 확실하다면 이 결과도 이해가 되었다.
뷔페스는 말을 몰아 프라이바드에게 다가갔다.
프라이바드도 뷔페스가 오는 것을 보았다.
민병대원들이 자리를 비키고, 발테스가 긴장한 채 검자루에 손을 대고 뒤에서 지켜보는 가운데 뷔페스가 먼저 입을 열었다.
“그때 그 사람이 맞소?”
프라이바드가 어색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맞소.”
“조용히 산다더니 너무 요란한 것 아니오?”
“오크가 날뛰어서 할 수 없이 나온 것뿐이오.”
뷔페스가 고개를 끄덕였다.
“오크가 사라지면 다시 조용히 사는 것이오?”
“오크를 완전히 소탕하려면 먼 것 같은데?”
“그러니까 만약에 말이오, 만약에.”
프라이바드는 잠시 생각하다 고개를 저었다.
“그건 어렵겠소.”
그러자 뷔페스가 눈살을 찌푸리며 말했다.
“약속을 어길 셈이오?”
“약속을 어기는 건 아니오. 앞으로도 사고 치는 일 없이 조용히 살 것이오. 다만 혼자 쓸쓸이 지내지는 않을 생각이오.”
“민병대에서 대장 노릇을 하면서 말이오?”
프라이바드가 고개를 젓고는 코르삭을 바라보며 말했다.
“민병대 대장은 저 녀석이지 않소? 나는 저 녀석 말동무나 하고 아기랑 놀아 주다 잠시 돕는 것뿐이오.”
“저 녀석이 말동무? 진심이오?”
“재밌지 않소? 나는 마음에 들던데? 당신도 마음에 들어 하는 줄 알았소만······.”
“크흠!”
“나는 신경 쓰지 마시고 하던 대로 하시오. 이제 와서 부귀영화를 바라고 이러는 건 아니니까. 진심으로 말동무나 해 주고 아기나 보며 살 것이오.”
뷔페스는 무슨 말인가 더 하고 싶었지만, 꾹 참고 돌아섰다.
그동안 코르삭이 세운 공이 사실 프라이바드 때문이었나 싶은 생각이 들었다. 그렇다면 이해가 되었다.
그때 뒤에서 프라이바드가 말했다.
“내가 저 녀석을 도운 건 사실이지만, 모든 일은 저 녀석이 한 것이오. 내가 없다고 생각하고 판단해도 무방하오.”
뷔페스는 속으로 욕을 했다.
‘귀신같은 인간!’
마음까지 들여다보는 듯한 놀라운 능력에 치가 떨렸다.
뷔페스가 투리스 사령관이 되기 한참 전인 20여 년 전, 그는 촉망받는 기사였다.
누가 투리스 요새 안에 있는 건물에 불을 질렀는데 병사들이 제압하지 못한다는 이야기를 듣고 출동했다.
많은 기사와 병사들이 그를 제압하려 했지만, 실패했다.
건물이 불타는 것을 보고 미쳐 버린 듯 눈이 완전히 뒤집힌 그는 악마 그 자체였다.
무기 사용 명령이 떨어졌음에도 그를 제압하지 못하고 병사와 기사들이 오히려 쓰러졌다.
뷔페스도 그 당시 부상을 당했다.
창칼에 옷이 찢어져 드러난 그의 몸은 소름이 끼칠 정도였다.
사람 몸에 어쩌면 그렇게 많은 흉터가 있을 수 있는지 놀라웠다.
그를 제압한 것은, 기사들이라기보다 가족들이었다.
가족의 목소리를 들은 그가 저항을 포기한 덕에 체포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는 어떤 고문에도 입을 열지 않았다.
감옥에 갇혀 지내는 게 편한 사람처럼 아무 말도 없이 살았다.
뷔페스는 그의 정체가 너무나 궁금했다.
그러나 말을 하지 않자 죽이는 게 낫다고 건의했다.
그러던 어느 날, 그의 남동생이 사망했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그는 처음으로 입을 열었다.
“편지 한 통만 쓰게 해 주십시오.”
그는 편지를 썼고, 한참 후에 답장이 도착했다.
그에게가 아니라 당시 투리스 사령관에게.
<그는 로그넘에 의해 이 나라가 무너지지 않도록 몸과 마음을 다 바쳐 희생한 영웅이니 설사 그가 죽을죄를 지었다 할지라도 풀어 주도록 하라.>
놀랍게도 우베르의 국왕이 친서를 보낸 것이다.
뷔페스는 극구 반대했지만, 사령관은 결국 그를 풀어 주었고 나중에 뷔페스에게 설명해 주었다.
“그는 악마 기사다.”
“그게 뭡니까?”
“악마에게 영혼을 바쳐 이 나라를 구한 기사들이지.”
사령관의 설명을 들은 뷔페스는 그에 대해 존경과 연민의 마음을 갖게 되었지만, 그렇다 해도 범죄를 저지를 권리는 없다고 생각했다.
풀려난 그는 동생을 죽인 자를 잔인하게 죽였다.
출동한 뷔페스가 말했다.
“난 당신을 체포할 권한이 없소. 하지만, 한 번만 더 이런 짓을 하면 내가 당신을 죽이고 감옥에 가겠소. 알았소?”
“앞으로 조용히 살 것이오.”
그는 약속을 지켰다.
마을을 떠나 검은 숲에 집을 짓고 혼자 살면서 가끔 약재를 팔거나 생필품을 구할 때만 요새에 들렀다.
그러다 그마저도 마을 사람에게 부탁하고 전혀 찾아오지 않았다.
그래서 뷔페스는 그에 대해 잊었다.
“하아!”
20년 전, 프라이바드에게 찔린 상처가 다시 아파 오는 것 같았다.
“젠장! 이러면 저 자식도 내 마음대로 못 패는 것 아니야?”
뷔페스가 코르삭을 노려보며 중얼거렸다.
몇 대 시원하게 패고 기강을 바로 세우려 했는데 프라이바드가 그를 좋아한다는 걸 알았으니 결행하기가 쉽지 않았다.
“야! 발테스!”
“예!”
사령관의 기분이 썩 좋지 않다는 것을 눈치 챈 발테스가 빠릿빠릿하게 대답했다.
“글라드 남작하고 카멜리 자작한테 병력 보내라고 해. 이대로 곧장 자고라 백작령부터 점령한다.”
“글라드 남작은 아직 충성 맹세를 하지 않았는데요?”
“제일 가깝잖아! 안 오면 글라드 먼저 쓸어버리고 그 병력 차지해서 자고라로 가겠다고 해!”
뷔페스가 버럭 소리쳤다.
“알겠습니다!”
발테스가 큰 소리로 대답하고 기사 하나에게 사령관의 명령을 글라드에 전하라고 지시했다.
순서는 계획과 크게 달라졌지만, 어찌됐든 코르삭 덕분에 투리스의 우베르 북서부 장악은 매우 빠르게 진행되었다.
- 작가의말
부산김아재 님, 후원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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