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탁이 있어요
루케오가 이끄는 우베르군 기병 전력은 우헬 사막으로 접어들었다.
“폐하, 지금이라도 속도를 늦추시고 보병대와 보조를 맞추시는 게 어떻겠습니까?”
마카르스카 공작이 다시 또 속도를 늦출 것을 건의했다.
참전 경험이 많은 우베르의 기사들은 알고 있었던 것이다.
로그넘의 기만 유인 전술이 얼마나 무서운지를.
알면서도 당할 정도라 원정군 참모들은 추격을 멈추고 서서히 진군할 것을 계속해서 진언해 왔다.
그러나 루케오는 이번에도 듣지 않았다.
그는 어릴 때부터, 라티시아 탈환에 실패했다는 말을 늘 듣고 자랐다.
그러다 보니 우베르의 귀족, 영주, 지휘관들은 무능하다는 생각이 확고하게 자리 잡고 있었던 것이다.
직접 원정을 떠나기로 결심한 것도 그래서였다.
무능한 귀족들에게 맡겨서는 계속 패하기만 할 것이기에 직접 로그넘을 멸망시키기로 한 것이다.
그에게 있어 패하지 않고 실력을 증명한 지휘관은 아노니무스 경뿐이었다.
“경들이 뭘 걱정하는지는 잘 알고 있소. 유인에 당할까 봐 걱정하는 것 아니오? 하지만, 우리가 천천히 가면 적이 대비할 시간이 넉넉해진다는 걸 알아야지.
로그넘의 다른 지역 주둔군이 모두 모이면 감당할 수 있겠소? 한데 모이기 전에 각개격파 해야 하오.”
틀린 말은 아니었다.
“더 속도를 높이시오. 그래서 라티시아에서 달아났던 로그넘 기마대 먼저 때려잡으시오. 놈들이 우리를 유인하려는 지점에 도착하기 전에 우리가 먼저 놈들을 잡으면 되는 것이오.”
자신만만한 루케오의 태도는 지휘관들에게도 영향을 미쳤다.
게다가 라티시아에서 대승을 거둔 여운이 아직 가시지 않았고 그로 인해 로그넘 치하에 있던 민족들이 우베르군 앞에 무릎을 꿇는 모습을 보았다.
우베르군은 그 어느 때보다 자신감과 용기로 가득 차 있었다.
우베르군이 지나간 자리는 로그넘 전사들의 시신이 나뒹굴었다.
로그넘 전사들은 일사불란하게 퇴각하는 것도 아니었다.
많은 희생자를 남기고 겨우겨우 달아날 뿐이었다.
그야말로 혼비백산하여 사방으로 뿔뿔이 흩어졌다.
잠도 못 자고, 제대로 먹지도 못하고, 동료들의 시신을 수습하지도 못한 채 겨우 달아나는 로그넘 전사들을 보면서 우베르의 기병들은 더욱 자신감에 찼다.
우베르의 기사와 기병들은 사나운 바람처럼 로그넘 전사들을 뒤쫓아 우헬 사막 안쪽으로 점점 깊숙이 들어갔다.
그것이 목숨을 건 기만 유인 전술이라는 것을 알아차리지 못했다.
기만 유인 전술이 맞다 해도 신경 쓰지 않았다.
“다 죽이면 그만이야!”
루케오의 자신감에 다들 푹 빠졌다.
***
호르츠는 로그넘이 자랑하는 기만 유인 전술을 극한까지 구사했다.
원래부터 로그넘의 기만 유인 전술은 실제인지 기만술인지 구분하기가 쉽지 않아 이를 상대하는 적들이 모두 속아 넘어갔는데, 이번에 호르츠는 아버지의 복수를 위해 불나방처럼 처절하게 덤벼들면서도 전력의 약화로 결국 막대한 희생을 치르고 달아나는 모습을 실감나게 연출해 낸 것이다.
그 결과 루케오가 이끄는 우베르의 기병 전력을 우헬 사막 한가운데에 있는 오아시스 마을까지 끌고 들어올 수 있었다.
“적은 어디 있지?”
루케오가 주위를 두리번거리며 물었다.
사막 한가운데 있는 오아시스가 그림처럼 아름다웠다.
우베르군 정찰병들이 말을 타고 작은 바위산을 올라갔다.
그러다 발견했다.
호르츠가 이끄는 로그넘의 기마병들이 사방으로 흩어져 달아나는 모습을.
우베르의 정찰병들은 혹시나 적의 원군이 나타날까 봐 긴장했지만,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애초에 적이 숨어 있을 곳이 없었다.
숨어 있다 해도 작은 바위산뿐이라 우베르의 대군을 상대할 만한 대규모 병력이 숨어 있을 수가 없었다.
사방을 둘러보아도 보이는 것은 황량한 사막과 지평선 그리고 아지랑이뿐이었다.
그런데 그 사막의 지평선 너머에서 일렁이는 아지랑이를 뚫고 무언가가 나타나기 시작했다.
오아시스 마을이 있는 바위산을 목표로 사방에서 로그넘의 기마대가 다가오고 있었던 것이다.
“적이다!”
지평선 너머에서 대기하고 있던 로그넘의 세 개 지역 사령부의 기마대가 거대한 포위망을 좁히며 다가와 오아시스 마을 주위로 집결하고 있던 우베르의 기병대를 덮쳤다.
로그넘의 기병들이 쏘아 대는 화살이 뜨거운 해를 가릴 정도로 하늘을 뒤덮었다.
맑은 오아시스가 피로 물들어 붉게 변했다.
***
로그넘군의 기마대는 우베르군 정찰대의 눈을 피하기 위해 애초에 멀리, 지평선 너머에 자리 잡고 있었다.
그리고 우베르군이 지형지물에 기대에 저항하지 못하도록 주변이 허허벌판인 오아시스로 유인했다.
게다가 로그넘의 기마병은 말을 타면서 활을 쏘는 데 능했다.
접근하기 전에 이미 막대한 피해를 입히고 시작하기 때문에 질 수가 없는 싸움이었다.
우베르군은 로그넘과 창칼을 맞대기도 전에 화살에 맞고 우수수 쓰러졌다.
“폐하! 서쪽 포위망이 그나마 헐겁습니다. 길을 뚫겠습니다!”
근위대가 루케오를 보호하여 달아나기 시작했다.
그러자 사령부가 달아나고 각 영지군이 그 뒤를 이어 도망쳤다.
서쪽 포위망이 헐거운 데는 이유가 있었다.
도망칠 구멍을 전혀 주지 않고 공격하면 죽기 살기로 싸우기 때문에 일부러 달아날 틈을 준 것이다.
서쪽으로 달아나는 우베르 기병대를, 로그넘 전사들은 끈질기게 추격했다.
애초에 로그넘 기마대는 우베르군이 올 때까지 쉬고 있었던 반면, 우베르 기병대는 호르츠를 쫓아 우헬 사막을 쉬지 않고 달려온 터라 먼저 지칠 수밖에 없었다.
말이 쓰러지는 경우가 속출했다.
보급도 휴대용 식량과 물주머니 하나가 고작이었다.
병사들도 픽픽 쓰러졌다.
“차라리 반전하여 싸워라!”
루케오가 악에 받쳐 소리쳤다.
그러나 로그넘군은 정면으로 싸워 주지 않았다.
우베르군이 달려들면 물러나며 화살을 쏘았고, 달아나면 쭟아와 화살을 날렸다.
쓰러지는 것은 항상 우베르의 기병이었다.
루케오조차 눈먼 화살에 맞을 정도였다.
7만에 달하던 우베르의 기병대는 우헬 사막을 벗어나기 직전까지 3천도 남지 않았다.
그나마 코르삭 백작이 이런 일을 대비해 뒤로 빼놓았던 병력이 우베르 왕을 잡기 위해 최후의 일격을 가하는 로그넘군을 옆에서 벼락같이 들이쳐 장군의 목을 벤 덕에 추격 속도가 조금 늦어져 3천이라도 살아남을 수 있었다.
그 3천도 완전히 생존한 것이 아니었다.
로그넘군이 넓게 포위망을 유지하며 계속 추격해 오고 있었던 것이다.
굶주리고 상처 입은 우베르군의 처절한 도주가 계속되었다.
로그넘군은 그 사실을 알면서도 화살에 맞은 맹수가 스스로 쓰러지기를 기다리는 냉정한 사냥꾼처럼 거리를 두고 이따금씩 화살을 날릴 뿐 돌진해 오지 않았다.
성급하게 마무리하려다 역공에 당하는 일을 반복하지 않으려는 것이었다.
도주와 추격이 계속되던 어느 날, 화살에 맞은 루케오가 제대로 된 치료를 받지 못해 고열에 시달리다 쓰러졌다.
“폐하께서 쓰러지셨다는 이야기가 밖으로 나가지 않게 하라!”
코르삭 백작이 근위대에 신신당부했다.
그러나 계속해서 달아나던 군대가 이동을 멈추고 방어진을 구축하자 아군과 적군 모두 변고를 눈치 챘다.
우베르군의 사기가 땅에 떨어지고, 로그넘군은 시도 때도 없이 도발하며 코앞까지 쳐들어왔다.
“보병대의 진군 속도를 생각해 볼 때 아군까지 그리 멀지 않았을 것 같은데 서둘러 합류하는 게 낫지 않겠소?”
“폐하께서 이러하신데 어떻게 움직인단 말이오? 게다가 이미 포위망이 단단하여 뚫기도 어렵소.”
“그럼 이대로 앉아서 죽기만을 기다리자는 말이오?”
“이래 죽으나 저래 죽으나 죽기는 매한가지요. 차라리 이 바위산을 산성 삼아 버티는 것이 도망치다 화살에 맞는 것보다 더 낫소.”
“뭐가 낫다는 말이오?”
“로그넘 놈을 하나라도 더 죽일 가능성은 이쪽이 더 높다는 뜻이오!”
지휘부에서 갑론을박이 이어졌으나 결론을 내리지 못했다.
이름 모를 바위산에서 우베르군은 명령이 떨어지기를 기다리며 하루하루 버텼다.
그러던 어느 날, 한밤중에 누군가가 우베르군 진영에 나타났다.
보초병이 깜짝 놀랐다.
“누구냐!”
“나는 아노니무스다. 폐하께 내가 왔다고 보고하고, 어서 안내하라.”
파울이 부관 로비고만 데리고 로그넘 전사로 변장하여 포위망을 뚫고 나타난 것이다.
***
루케오가 힘겹게 눈을 떴다.
“폐하, 정신이 드십니까?”
루케오가 놀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내가··· 죽은 건가? 아노니무스 경이 보이다니······.”
“아닙니다, 폐하. 제가 왔습니다.”
“정말이오? 와 준 것이오?”
“예.”
“그렇다면 안심이구려. 이제··· 적들을 쳐부술 일만 남았어.”
루케오의 말을 파울이 차분하게 받았다.
“적을 쳐부수는 일은 나중에 하시고 일단 여기서 벗어나야 합니다.”
“여기? 여기가 어디요?”
“우헬 사막 서쪽입니다. 지금 포위되어 있습니다. 조금만 더 가면 아군이 있습니다. 거기까지만 가면 로그넘 기마대도 더는 공격하지 못할 것입니다.”
“포위······?”
루케오가 아직 정신을 차리지 못하자 파울이 냉정한 목소리로 말했다.
“폐하께서는 화살에 맞으셨습니다. 아군 기병대는 고작 3천 남았다고 하더군요. 적은 10만 이상이라고 합니다.”
“······!”
“솔직히 말씀드리면 포위를 뚫고 달아나는 것도 어렵습니다. 하지만, 폐하를 이대로 로그넘의 수중에 넘어가게 둘 수는 없습니다.
그건 폐하만의 문제가 아니라 우베르의 존망이 달려 있기 때문입니다.”
로그넘과 지난 50여 년 동안 전쟁을 해 왔지만, 왕이 죽거나 포로가 된 적은 없었다.
만약 루케오가 적의 수중에 떨어진다면 우베르의 사기는 바닥으로 떨어질 것이다.
죽더라도 시신은 우베르군이 확보해야 했다.
루케오는 무슨 뜻인지 알아들었다.
“로그넘을 멸망시키려다가 우베르를 멸망시키게 생겼군.”
루케오가 희미하게 웃으며 농담을 했지만, 아무도 웃지 않았다.
“아노니무스 경의 뜻대로 하시오.”
“알겠습니다, 폐하!”
파울은 여분으로 벗겨 온 로그넘족 전사의 옷을 루케오에게 입히고 말에 태웠다.
휘청휘청했지만, 어쩔 수 없었다.
말에서 떨어지지 않도록 몸을 말에 꽉 묶었다.
코르삭 백작이 파울에게 말했다.
“어려운 일을 맡겨 미안하네.”
아들이 그렇게 된 데에도 책임이 있다고 생각했기에 코르삭 백작은 파울을 차마 볼 수가 없었다.
“그런 말은 하지 마. 나중에 보세.”
“음!”
옛 악마 기사들은 짧게 작별 인사를 나누었다.
***
코르삭 백작이 이끄는 우베르의 기병대 생존 병력 3천이 어둠을 틈타 일제히 뛰쳐나갔다.
초원 곳곳에 펼쳐져 있던 로그넘군 숙영지들이 순식간에 밝아지더니 곧바로 추격 병력이 쏟아져 나왔다.
우베르의 기사와 기병들은 똘똘 뭉쳐 로그넘 기마대를 돌파했다.
그야말로 가공할 파괴력이었다.
기병 돌진의 위력은 우베르군이 훨씬 우위에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로그넘 기마대는 결코 약하지 아니었다.
정면 대결을 피하면서 에워싸듯 달리며 활을 쏘았다.
“화살에 맞는다고 바로 뒈지는 놈은 없다! 화살은 몸으로 버티는 거야! 나를 따르라!”
로그넘 기병을 뚫는 데는 기병 돌진만 한 것이 없음을 코르삭 백작은 잘 알고 있었다.
평소에는 로그넘군이 응해 주지 않기 때문에 못 하지만, 고작 횃불에 시야를 의지하는 캄캄한 밤이고 삼면을 포위하고 있어서 방향만 틀면 적과 충돌할 수 있었다.
우베르군 기병대는 로그넘군과 거칠게 충돌하며 서쪽으로 계속 달렸다.
“놓치지 마라! 우베르의 왕을 반드시 잡아야 한다!”
로그넘 기마대가 집요하게 추격했다.
그들 가운데 파울과 로비고, 그리고 우베르의 왕 루케오가 있다는 것을 아무도 알아차리지 못했다.
파울은 로그넘군과 함께 우베르 기병대를 추격하다가 슬그머니 방향을 돌려 동쪽으로 이동했다.
사방이 로그넘군이라 안심할 수가 없었다.
가끔 로그넘군 기마 정찰병을 만나면 파울이 로그넘 말로 위기를 넘기고는 했다.
그렇게 해서 세 사람은 해가 뜰 무렵 우헬 사막까지 도망쳤다가 남쪽으로 내려가 대로가 아닌 길로 천천히 서쪽으로 이동했다.
“안심할 수는 없습니다. 로그넘의 정찰은 무척 꼼꼼하니까요. 서둘러야 합니다.”
파울의 말에 루케오는 식은땀을 흘리면서도 고개를 끄덕였다.
그들은 계속해서 서쪽으로 달렸다.
견디지 못한 루케오가 정신을 잃고 축 늘어지고 말았다.
말에서 떨어지지 않게 몸을 말에 묶어서 충격이 더 많이 가는 자세라 파울은 할 수 없이 루케오를 자신의 뒤에 태우고 끈으로 꽉 묶었다.
“폐하, 조금만 더 참으십시오.”
“······.”
“폐하!”
“아직··· 안 죽었으니··· 소리 지르지 말아요.”
파울은 안심하고 계속 말을 달렸다.
그런데 갑자기 루케오의 머리가 어깨 위로 툭 떨어지는 것이 느껴졌다.
“폐하!”
“아노니무스 경······.”
루케오가 희미한 목소리로 말했다.
“예!”
“아노니무스 경과··· 함께해서··· 참으로 영광이었소. 어릴 때부터··· 꿈꿔 왔는데··· 우베르의 수호 영웅을··· 직접··· 만날 줄은··· 몰랐거든.”
파울은 순간 울컥했다.
“말씀을 아끼십시오, 폐하!”
그러나 루케오는 이미 다른 사람의 말이 들리지 않았다.
“그래서 말인데···, 부탁이 있어요. 꼭··· 들어줘야 합니다, 아노니무스 경.”
“······예!”
“우베르를··· 지켜 주세요. 그리고··· 불쌍한 카시아도······.”
그 말을 끝으로 루케오는 더 이상 아무 말도 없이 축 늘어졌다.
파울은 루케오를 등에 묶은 채로 계속해서 달렸다.
아들이 죽었다고 생각하고 세상을 완전히 등지려던 악마 기사는, 맹목적으로 자신을 좋아한 철부지 왕의 마지막 부탁을 거절할 수가 없었다.
죽은 루케오를 등에 진 파울은 부관 로비고와 함께 거친 초원을 질주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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