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 년 (부제: 경우의 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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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모전참가작

온진
작품등록일 :
2024.05.10 01:15
최근연재일 :
2024.09.17 00:00
연재수 :
48 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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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588
추천수 :
127
글자수 :
132,112

작성
24.05.23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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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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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글자
8쪽

죽이기엔 너무 사랑스러운 햄망이

DUMMY

시간이 흘러 다쳤던 상처가 거의 다 나았다.


이제 걷는데 무리도 없었다.


나는 더 이상 가족들에게 아무것도 안 하고 얻어먹기만 하는 게 미안해서 견딜 수 없었다.


그래서 어느 날 아침, 벼르던 내가 말했다.


“진짜 이제 다 좋아진 것 같아요. 오늘부터는 식량 구하는 거 나도 도울 게요.”


내 말에 모두의 시선이 쏠렸다.


어머니가 아침을 준비하다 말고 성큼성큼 내게 다가왔다.


그리고는 내 턱에 붙여놓았던 오리새 가죽을 떼어내 상처를 살펴보고 허벅지 다친 데도 꼼꼼히 오래 살펴본 다음 말했다.


“그래. 이제는 괜찮겠다. 그래도 무리하진 말아라!”


살짝 미소를 지어보인 어머니가 다시 제자리로 돌아가 일을 시작했다.




수는 그때 동굴 안을 정리하고 있었다.


나를 힐끗 보고는 수가 넌지시 내게 물었다.


“아침 먹고 아빠가 어제 설치해 둔 덫 보러 갈 거야. 같이 갈래?”


“그래, 그러자!”


아버지는 수랑 내가 하는 대화를 듣고 있었던 듯 웃음을 지었다.


그 즈음 어머니는 오리새 가죽을 처리해서 여러 가지 물건을 만드는 일에 열을 올리고 있었다.


그 전날 밤에도 해진 아버지의 옷을 이리저리 살펴보더니 그 가죽으로 찢어진 부분에 덧대서 기우는 데 열심이었다.


‘덕분에 밤새 아버지의 나체를 봐야했지!’


그때를 생각하니 다시 오소소 소름이 돋았다.


여하튼 어머니의 바느질 덕에 여러 군데 구멍이 나서 살이 비쳤던 아버지의 옷이 훨씬 상태는 나아졌지만 심한 누더기 옷처럼 됐다.


"으음! 흐음! 좀 더 괜찮은 디자인을 생각해 봐야겠어. 뭘 더 덧대볼까?"




자신이 수선한 옷을 입은 아버지를 보더니 시무룩해진 어머니가 혼잣말을 했다.


하지만 만든 사람의 마음에 들던 말든 아버지는 그 옷이 몹시도 맘에 들었던지 어머니를 따라다니며 침이 마르게 칭찬을 했다.


“아니, 무슨 소리야? 이렇게 완벽한데···. 허허허! 이건 명품이야. 아암, 명품이지! 그, 뭐냐, 나XX보다 더 좋구먼, 머얼!”


그건 아버지가 명품이라고 생각하는 제일 좋은 브랜드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머니의 기분은 사실 조금도 나아지지 않는 것 같았다.


아침을 먹고 아버지는 자신의 옷을 보고 다시 한 번 어머니의 솜씨를 칭찬한 뒤 도구들을 챙겼다.


나와 수는 점심으로 훈제 고기와 말린 과일들을 어머니가 짜준 가방에 넣고 아버지와 함께 출발했다.


우거진 수풀을 조심히 헤치고 나무 위에서 돌아다니는 뱀들과 도마뱀들, 그리고 큰 곤충들에 주의하면서 우리는 천천히 앞으로 나아갔다.


그리고 중간 중간 멈춰서 큰 이파리에 물이 고여 있으면 오리새 가죽 물통에 물을 채워 넣었다.


그 물통은 어머니의 야심작이었다.




숲은 여전히 습하고 더웠다.


앞서가던 아버지가 갑자기 한쪽 팔을 들어올렸다.


수와 나는 그 수신호에 멈춰 섰다.

아버지는 전에 했던 것처럼 큰 나무에 다가가 할퀸 자국을 살펴보고 냄새를 맡았다.


그리고 곧 말했다.


“그레이가 지나간 자리야. 보니까 지나간 지 꽤 된 것 같다. 그래도 혹시 모르니까 천천히 주의해서 가보자!”


아버지가 말하는 그레이는 우리가 머무는 지역의 최상위 포식자를 말하는 것이었다.


아버지도 멀리서만 딱 한 번 본적이 있는데 그놈은 짙은 회색빛 털을 가지고 있다고 했다.


길이가 7미터는 돼 보이고 높이가 아버지만큼 일거라고 했으니까, 아마 크기가 불곰보다도 클 거라는 수의 예상이었다.


아버지가 본 느낌으로는 호랑이나 표범 비슷하다고 덧붙였다.


‘아마 고양이과 동물들의 후손이겠지!’


직접 마주친다면 과연 내가 그놈에게서 도망칠 생각이나 할 수 있을까 하는 의문이 문득 들었다.




아버지와 수는 주위를 열심히 살피며 걸으면서도 나를 잊지 않고 살뜰히 챙겼다.


동굴에서 출발한지 꽤 시간이 지나 내가 슬슬 힘이 들 때쯤, 드디어 덫을 설치해 둔 곳에 도착했다.


그 덫은 아버지가 대나무를 잘라 묶어서 사과박스만한 상자로 만든 것이었다.


덫 안에 먹을 것을 두고 작은 동물들이 들어와 먹이를 건드리면 입구가 닫히는 원리로 돼 있었다.


우리가 덫에 다가가자 통 안에 엎드려 있던 털 뭉치가 ‘우다다다’ 소리를 내며 사방으로 뛰어다녔다.


그 모습이 마치 햄스터를 열배쯤 확대해 놓은 것 같았다.


그것은 뛰어다니며 그 똘망똘망한 예쁜 눈을 이리저리 굴리고 있었다.


‘아아! 제기랄! 어떻게 저렇게 귀엽고 사랑스러운 것을 죽이지?’


속으로 당황한 나는 쭈뼛거리며 창을 들고 천천히 햄망이에게 다가갔다.


녀석은 자신의 죽음을 직감했는지 넓적한 이빨, 서너 개를 드러내며 나를 위협하려는 듯 요란한 소리를 냈다.


‘끼요욕! 끼욕!’


그 모습마저 너무나 사랑스럽고 또 안쓰러웠다.




덫 위에서 창으로 햄망이를 조준하고도 주저하면서 여전히 찌르지 못하고 있는 나를 참다못해 성큼성큼 다가온 수가 내 창을 같이 잡고 ‘푸욱’하고 찔러 넣었다.


곧바로 찍소리도 못 내고 그 녀석은 죽어버렸다.


그 순간 창이 녀석의 몸을 통과하는 느낌이 내 손에 그대로 전해져 왔다.


큰 충격에 빠져 그대로 창을 잡고 얼어있던 내게 수가 단호하게 말했다.


“살려주면 우리가 굶어야 돼. 어차피 죽여야 되는 거라면 망설이지 말고 죽여. 그래야 고통도 덜 해!”


“응? 으응! 아아, 미안!”


순간 나는 수에게 더없이 부끄러운 생각이 들었다.


내가 동굴에서 쉬고 있는 동안 동생은 나를 먹이기 위해 돌아다니며 이런 내키지 않는 살생을 해왔을 텐데 내가 너무 안일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버지와 수는 덫을 열고 죽은 햄망이를 꺼내서 익숙하게 손질했다.


그리고 덫을 깨끗하게 정리한 뒤 미끼를 두고 그것을 다시 설치했다.


“저기, 수야! 잡은 것 내가 들게. 이리 줘!”




나는 미안한 마음에 얼른 나서며 말했다.


수가 나를 보고 고개를 끄덕인 후, 아버지에게서 햄망이를 받아서 내게 줬다.


그리고 우리는 한두 군데 더 미리 설치해 둔 덫을 돌아봤다.


하지만 첫 번째, 햄망이말고는 별다른 소득이 없었다.


갑자기 엄청나게 배가 고파졌다.


내가 지치고 힘든 걸 눈치 챘는지 우거진 수풀을 한참 지나서 넓은 바위가 있는 곳에 다다르자마자 아버지가 말했다.


“인제 여기서 잠깐 쉬자.”


우리는 그곳에서 싸 온 점심을 먹었다.


오랜만에 나와서 돌아다닌 탓인지 음식을 꽤 많이 먹었는데도 쉽게 허기가 사라지지 않았다.


‘와! 진짜 사냥은 정말 쉽지가 않구나!’


나는 새삼 아버지와 수가 대단하게 느껴졌다.




음식을 먹고 잠시 쉰 우리는 잠깐 냇가에 들러서 대충 손질했던 햄망이를 씻었다.


아버지가 털을 벗겨내자 그 사랑스러웠던 햄망이는 그냥 고기가 됐다.


그래도 꽤 토실토실 살이 올랐었던지 양이 꽤 돼 보였다.


이정도 소득이라도 있어서 정말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사냥감을 손질하는 아버지를 보고 있던 수에게 내가 말했다.


“저기, 수야! 다음 덫에 뭐라도 잡혀 있으면 이번엔 나 혼자 해볼게. 그때는 진짜 아까처럼 망설이지 않을 거야!”


“응! 잘 할 수 있을 거야. 나도 처음에는 그랬어. 오빠도 곧 괜찮아질 거야!”


수가 따듯하게 나를 응원해줬다.


‘하아! 나에게 실망하지 않았구나!’


정말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곧 우리는 다음에 살펴볼 덫을 향해 걸어갔다.


가는 길에는 여러 가지 열매가 있어서 나는 아버지와 수가 먹어도 안전하다는 열매를 따먹으면서 갔다.


어떤 열매는 과육이 많지만 달지 않고 또 어떤 열매는 과육이 많지 않아도 꽤 달았다.


이 녀석, 베이컨은 어느 샌가 또 나타나 열매를 열심히 따먹던 내 옆에 찰싹 달라붙어 다녔다.


그 녀석은 아무 열매나 주는 건 다 게걸스레 받아먹었다.



이 작품은 어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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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 아버지와 노랑이들 24.05.26 71 2 7쪽
16 환상의 맛, 코코넛 게 24.05.25 70 4 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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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죽이기엔 너무 사랑스러운 햄망이 24.05.23 78 3 8쪽
13 우연히 발견한 부싯돌 24.05.22 82 3 6쪽
12 오해를 풀고 베이컨과 다시 친해지다 24.05.21 84 3 6쪽
11 온몸을 던져 구명지은을 갚다 24.05.20 85 3 6쪽
10 단란하고도 어색했던 온천탕에서 만난, 오리새 24.05.19 98 3 6쪽
9 원수 같던 동생 놈이 목숨을 살려줬다 24.05.18 109 3 7쪽
8 육식초 24.05.17 116 5 7쪽
7 만 년 후, 눈물의 재회 24.05.16 128 6 8쪽
6 불의 발견 +1 24.05.15 135 3 7쪽
5 먼저 깨어난 아버지와 베이컨 24.05.14 148 6 8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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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자, 이제 출발이다 +1 24.05.12 151 4 9쪽
2 세상 살기 너무 힘들다 +1 24.05.11 173 7 11쪽
1 쥐구멍엔 볕 뜰 날이 없다 +1 24.05.10 229 6 1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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