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대영제국에 괴식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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낑깡깽
그림/삽화
매일 저녁 8시
작품등록일 :
2024.07.24 05: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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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9.19 19: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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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8.05 2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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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쪽

변장의 대가

DUMMY

왕자님은 마치 백일 휴가가 취소된 신병처럼 낙담하셨다.


와, 하늘이 무너지는 표정이라는 걸 난생 처음 봤다. 대체 그 놈의 치킨이 뭐라고 저렇게까지 절망하는 거야?


하지만 안 되는 건 안 되는 거다. 물론 한식 마스터의 노하우로 어떻게 잘 비벼보면 가능할 것 같긴 한데, 그건 내 자존심이 용납치 않았다.


내가 아무리 치트 치는 요리사라도 내 요리에 대한 자부심은 강하다. 우리 레스토랑이나 베이커 가였다면 현대 조미료를 마음껏 써서 최고의 맛을 냈겠지만, 여기선 밑장 빼다 걸리면 진짜 손모가지가 날아갈 수 있었다.


게다가 저 공작님, 암살 위협에 시달리신다며. 그럼 당연히 먹을 것도 조심하시겠지. 아마 애쉬포드 경이 준비한 재료가 적었던 것도 그런 이유 때문이 아닐까 싶었다.


왕족의 직속 요리사나 시종들은 전부 해외의 대역에게 딸려갔을 테고, 이곳에서 먹을 수 있는 음식은 호위역들이 만들어주는 거나 사다 주는 것들뿐.


아무리 평소 검소하신 콘월 공작님이라도 왕족으로서 살아온 기본적인 입맛이 워커 클래스의 그것과 같진 않을 터.


이런저런 불만족이 점점 쌓이다가, 그런 상황에서 내 치킨 앤 칩스를 갑자기 맛보면서 팡 하고 터져나간 거지.


사실 나 같아도 못참을 것 같긴 해. 십년 동안 군만두만 먹다가 치킨 뜯은 격 아냐.


그래서 그런가 나도 모르게 마음이 약해졌다.


"공작 전하, 혹시 이런 건 어떠신지요."

"응? 뭔가?"

"내일 밤 8시 반, 수리를 핑계로 식당 영업을 조금 일찍 마치겠습니다. 9시 쯤 오시면 최고의 치킨 앤 칩스를 맛보실 수 있을 겁니다. 이렇게 하면 공작 전하께서 제 레스토랑에 방문하시더라도 아무도 눈치채지 못하겠지요."

"아아, 그렇게 해 줄 수 있겠나? 이거 괜스레 미안하군."


무리는 맞다. 이 시대 런던 고급 레스토랑들은 현대보다 브레이크 타임이 길었고, 저녁 식사는 더 늦게 시작했다. 모두 애프터눈 티 때문이었다.


보통 상류층의 애프터눈 티는 오후 4시부터 6시 사이가 일반적. 케이크 같은 무거운 디저트와 차로 배를 채운 젠트리들이 현대 한국인들처럼 6시부터 저녁밥을 먹을 리 없지. 그래서 런던 레스토랑의 저녁 영업 시간이란 보통 7시에서 9시 사이를 일컬었다.


그리고 레스토랑에 오는 손님들은, 대부분 최고의 서비스를 받기 위해 미리 예약을 한다. 전화기가 아직 널리 보급되지 않은 시대라 예약은 주로 직접 방문 아니면 하인을 통해 신청서를 제출하는 방식.


만약 레스토랑을 30분 일찍 닫는다면, 애매한 시간대에 예약된 손님들의 일정을 조정하거나 다른 날짜로 돌려야 한다. 평판에 조금 타격이 갈 지도 모르고.


하지만 그럴 만한 가치는 충분했다. 아니, 왕자님이잖아. 앞으로 몇년 뒤일진 모르겠지만 언젠가 대영제국의 왕이 되실 분, 당연히 기회가 될 때 잘 보이는 게 맞지 않을까?


저녁 시간을 아예 스킵하는 것도 아니고, 손님들을 30분 일찍 내쫓는 정도인데 문제라도?


"실례했군. 블랙우드 경, 애쉬포드 경. 쟝 군을 레스토랑까지 바래다 주게나. 쟝 군, 그렇다면 내일 밤을 기대하겠네."

"기대하셔도 좋습니다. 최고의 시간을 예약해 드리겠습니다."

"참으로 듣기 좋은 말이군. 자네의 헌신을 내 기억하겠네."


팅.


공작님이 튕기신 금화 한 개를 난 다시 잽싸게 낚아챘다.


뭐··· 이러다가 진짜로 왕자님께 코가 꿰이는 건 아니겠지? 설마, 아닐 거라 믿는다.


잠시 뒤, 난 두 기사 양반과 참으로 어색한 마차 여행을 즐겼다.




###




늦은 밤.


식당에 돌아오니 내 사무실을 더비 백작님, 헨리 씨, 에디스가 점거하고 있었다. 에밀리는 보이지 않는 걸 봐서 돌아간 것 같고.


그리고 우리의 더비 백작님은, 한 눈에 봐도 수상쩍은 표정을 짓고 있었다. 난 이 민폐쟁이 더비셔인을 째려 봤다.


"크흠, 달이 참 밝군. 내일 아침은 안개가 덜 낄 모양일세."

"백작 각하, 이미 사방에 안개가 가득 찼습니다만."


홈즈 시리즈에서도 이런 날 꼭 누군가가 칼에 찔리곤 하던데, 그게 오늘이 아니라는 법 있나?


아무튼 백작에 대한 의심은 뒤로 미루고, 나는 에디스를 돌아봤다. 그녀는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헨리 씨와 함께 매상표를 정리하던 중이었다.


잠깐, 그거 원래 내 일 아니었어?! 이젠 공동 사장인 내 자리까지 넘보는 거야? 야심이 가득한 아가씨일세.


하지만 난 지금 그녀에게 볼 일이 있었다.


"에디스 아가씨, 부탁드릴 게 있습니다."

"어머, 부탁이라니요? 쟝 님께서 저에게 부탁을 하시다니, 신기하네요."


나는 한숨을 내쉬었다. 내가 계획하는 일을 처리하려면 그녀가 꼭 필요했다.


"내일 밤 제 은사가 오십니다. 맛있는 음식을 대접하고 싶은데, 혹시 도움을 받을 수 있을까요? 사례는 충분히 하겠습니다."

"저는 아무래도 상관 없지만, 할아버지께서 허락해 주셔야 하지 않을까요? 할아버지?"

"더비 백작가의 귀중한 손녀를 사사로이 활용하려면 그에 상응하는 대가를 치러야 할 걸세. 아무리 자네라도 예외는 없네."

"사정이 좀 있습니다. 먼 길 오신 분이라 정말 최고의 대접을 해 드려야 하거든요. 그런데 백작님, 혹시 '요크'에서 온 제 편지 못 보셨습니까? 문 앞에 두었다고 했는데, 보이지 않네요."


멈칫.


"흠, 편지? 그런 건 못 봤네만··· 그런데 다시 곰곰히 생각해보니 자네는 우리 에디스의 요리 스승이 아닌가? 예외는 만들라고 있는 법이지. 수련이라 여기고 하루 정도는 대가 없이 도와주거라, 에디스."

"네, 할아버지."


범인을 잡았다. 아니, 애초에 티를 그렇게 너무 많이 내시면 어찌하시려고요? 국가 보안이 걱정되는데요.


잠깐, 그럼 저번에 '미리 손을 써놨으니 걱정 말게' 했던 말이··· 베이커 가의 경찰 얘기가 아니었어?


생각해보니 왕자님 호위로 바쁜 기사님들이 내 뒤나 캐고 다닐 이유가 없지.


내 주변에 나에 대해 가장 잘 알고 있는 사람이 있잖은가.


나는 눈앞의 스파이를 노려보며 속으로 이를 갈았다.


"크흐으음! 콜록콜록. 헨리 군, 자네 얼마나 독한 향수를 뿌리고 다니는 건가? 숨이 다 막힐 지경이로군!"

"예? 이건 4711 콜로뉴(*Eau de Cologne, 최고급 남자향수)인데요, 저번에 백작님께서 헤롯츠(*Harrods, 상류층 전용의 고급 백화점)에서 추천해 주셨던···."

"그건 됐고, 캐나다 금광 건에 대해서 중요한 이야기가 있네! 잠깐만 귀를 빌려 주게나!"

"어어···?"


백작님이 헨리 씨를 질질 끌고 밖으로 나가자, 에디스 아가씨와 나만 어색하게 남아 버렸다.


"이상하네요, 할아버지께서 갑자기 왜 저러실까요···? 아무튼 제가 정확히 어떻게 도와드리면 되나요?"

"내일 저녁 식당 마감을 30분 정도 앞당겨, 8시 반에 종료할 예정입니다. 손님은 9시 전후로 도착하실 예정인데, 제가 준비한 메인 디쉬에 어울릴 에피타이저와 디저트 아이디어가 떠오르질 않네요. 혹시 도와주실 수 있을까요?"

"으음, 어려운 부탁은 아니네요? 무슨 큰일이라도 생긴 줄 알았잖아요."


큰 일은 맞지. 다만 그녀가 아직 모를 뿐.


아무튼 공작님께서는 치킨 앤 칩스를 기대하고 오시겠지만, 그래서야 장사까지 미루고 대접하는 의미가 없었다.


이미 치킨 앤 칩스를 몇번이나 맛보셨다지 않는가. 추가 보너스 포인트를 받을 수 있을지도 불분명한 상황.


원래 사람의 감정은 전혀 생소하고 낯선 경험을 할 때 호기심으로 두근거리는 법. 나는 공작님께 평생 회고할 만한 기억을 선사해 주고 싶었다. 그래야 나중에 이 요리가 생각났을 때 내게 떡고물이라도 하나 더 던져 줄 테니까.


열심히 일했는데 꼴랑 포인트 5점짜리에서 끝나면 내 기분이 쫌, 거시기하겠지?


게다가 아직도 내 시야 한편에 맴돌고 있는 이것.


【 일반 퀘스트: 특별한 음식으로 명사들을 감격시키기 (1/99회차)】


이 시대 영국에서 왕자님만큼 유명한 인물이 또 있을까? 매일같이 해외순방 기사가 신문에 오르내리는데.


이건 내게도 기회였다. 퀘스트를 완료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


될 지 안될지는 모르겠지만, 일단 최선을 다해보는 거지. 그게 지금까지 내 삶의 방식이었다.


"에피타이저는 메인 디쉬를 고려해서 선택하는 게 좋지 않을까요? 혹시 힌트를 주실 수 있나요? 저도 함께 고민해볼게요."

"음··· 일단 치킨 앤 칩스로 시작할 생각입니다. 다만, 양은 조금 줄일 거예요. 그리고 메인 디쉬는 세 가지를 준비하려고 합니다."


이쯤 되면 눈치챘을 거다.


그렇다, 내가 계획한 건 바로 시식단 2탄!


치킨 앤 칩스, 경양식 돈까스, 소갈비찜을 한데 묶은 '한식 대마왕 3종 세트'!


이 조합으로 무너지지 않은 외국인을 본 적이 없다. 토종 한국인이라도 이 메뉴 앞에선 손을 들 수밖에 없을 걸.


하지만 난 양식이 아닌 한식 요리사. 한 상 가득 차려지는 한식에는 순서대로 먹는다는 코스 요리의 개념이 없다.


그래서 에피타이저와 후식은 에디스의 도움을 받으려는 거다. 평생 귀족가에서 자란 귀족 아가씨에, 본인 스스로도 제과제빵의 10년 경력자. 지금 내가 의지할 수 있는 건 이 사람밖에 없었다.


"전부 고기 종류인가요? 그러면 좀 부담스러울 수 있으니 식전에 월도프 샐러드(Waldorf Salad)를 내보는 건 어떨까요?"

"월도프 샐러드?"

"아, 사과와 견과류를 섞고 드레싱하는 샐러드인데··· 런던에선 아직 흔하지 않은 요리라 생소하실 수도 있겠네요. 잠시만요, 재료가 있으니 제가 한 번 보여 드릴게요."


그녀는 잠깐 자리를 떠났다가, 상큼한 향기를 풍기는 샐러드 그릇을 들고 바로 돌아왔다.


아삭하게 썰린 사과 조각, 연한 크림 드레싱, 잘게 다져진 호두와 포도알, 그리고 샐러리.


아, 이거? 나도 뷔페에서 몇 번 본 기억이 있다. 이름은 몰랐지만, 이 시대에도 먹고 있었구나. 하긴.


"맛이 어떠세요?"


두말할 것 없이 좋았다. 역시 백작이 자랑할 만한 솜씨였다.


"음, 조화로울 것 같네요. 충분합니다. 식전에 속을 잘 달래 줄 수 있겠습니다."

"후식은, 생소한 것보다는 익숙한 맛의 디저트가 좋을 거예요. 메인 디쉬의 여운을 부드럽게 마무리해줄 수 있어야 하니까요. 트라이플 정도면 어떨까요?"

"트라이플! 그것도 좋은 아이디어네요."


역시 베테랑 제빵사답게 도움이 된다. 다음에도 비슷한 일 있으면 또 시켜 봐야지.


이렇게 월도프 샐러드, 치킨 앤 칩스, 경양식 돈까스, 소갈비찜, 트라이플의 황금 조합이 완성되었다.


이건 무조건 된다.


이게 안 되면 그 사람의 미각을 의심해 봐야 한다. 분명 미각상실증에라도 걸렸을 테니, 즉각 정신병원에 입원시켜야겠지.


왜 정신병원이냐고? 내 요리를 먹고 감탄하지 않으면 정신과 진료도 필요할 테니까. 왜? 뭐? 암튼 그렇다고.




###




다음날, 약속한 시간이 되자 내 레스토랑 앞에 시커먼 묵색의 마차 한 대가 정차했다.


그리고 그 안에서 카이저 수염을 멋지게 기른, 중년의 신사 한 명이 인버네스 코트(*Inverness coat, 홈즈가 주로 입었던 옷)의 케이프를 멋지게 휘두르며 등장했다.


변장하신 왕자님이었다. 홈즈 시리즈를 너무 많이 읽으신.


작가의말

인버네스 코트가 뭐냐면, 어깨에 망토 절반 정도 되는 케이프가 달린 코트입니다. 명탐정 홈즈가 걸치고 다닌 갈색의 외투가 인버네스 코트입니다. 왕자님이 아무래도 홈즈가 되고 싶으셨던 모양입니다.


그리고 헨리 씨가 뿌렸다는 향수는 4711 오 드 콜로뉴라고 하는 건데, 나폴레옹이 뿌린 걸로도 유명한 향수로, 역사가 벌써 200년이 넘었다고 합니다.


아무튼 일연 승급 기념으로 연참합니다. 재밌으셨다면 선작 꼭 눌러 주세요. 댓글도 부탁드려요. 댓글이 진짜 힘이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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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 편지 +20 24.08.08 12,546 385 12쪽
17 대형사고 +20 24.08.07 12,524 384 1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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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 신메뉴 +12 24.08.03 13,520 390 12쪽
11 새로운 크루 +16 24.08.02 13,709 384 13쪽
10 백작가의 아가씨 +8 24.08.01 13,867 356 13쪽
9 벨그라비아의 대저택 +9 24.07.31 14,031 383 13쪽
8 더비 백작 +11 24.07.30 14,303 390 13쪽
7 디스커버리 호의 여행 +16 24.07.29 14,876 403 12쪽
6 식당 개업 +25 24.07.28 15,232 427 11쪽
5 젠트리와의 만남 +9 24.07.27 15,713 403 13쪽
4 치킨 앤 칩스 +15 24.07.26 15,868 451 11쪽
3 아서 코난 도일 씨의 친구 +17 24.07.25 16,703 444 1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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