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 여행자의 생존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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울프21
그림/삽화
E-soul
작품등록일 :
2024.08.02 11:20
최근연재일 :
2024.08.28 11: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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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8.12 12: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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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쪽

타임 012. AD 2179 (삽화)

DUMMY

세상은 멸망했다.


세상은 멸망했다고 배웠다.


하지만, 세상이 왜 멸망했는지. 무엇 때문에 멸망했는지에 대해선 여전히 의견이 분분했다.


점점이 흩어져 문맥을 이해하기도 힘든 옛 기록 또는 유물을 수집 정리한 이들은 멸망에 대해 다음과 같이 이야기했다.


사람이 아닌 것들이 사람의 행색을 하고 세상을 뒤덮었다.

정화의 불꽃이 세상을 뒤덮었다.

44일간 물이 세상을 점령했고 다리 달린 것, 날개 달린 것 모든 것이 사라졌다.

한순간에 일어났고, 한순간은 영원이 되었다.


‘그날’ 또는 '쇼크웨이브' 등으로 불리는 인류 멸망의 날.


몇몇의 선지자만이 아이들과 함께 살아 남았고, 재앙을 피해 지저에 자리를 잡았다.


그리고.


최초의 조상은 아이들에게 말했다.


“아들아, 딸들아. 반드시 고향을 되찾아 찬란했던 빛의 세상을 너희들에게 돌려 주리라!”


최초의 조상은 결연한 표정으로 희망을 이야기 했다.

하지만.

결국, 분통한 표정을 감추지 못한 채 조용히 눈을 감았다.


찬란하고 밝은 빛의 세상이 아닌, 어둡고 희미한 불빛 속에서.


아이는 어른이 됐고 아이를 낳았고, 그 아이가 어른이 되고 다시 아이를 낳고, 아이는 어른이 되어 아이를 낳았다.


아이가 어른이 되길 수십, 수 백을 반복했고, 버겁고 힘든 시절을 지내면서도 선대의 유지를 절대 잊지 않았다.


비간(非間)에 빼앗긴 조상의 들녘, 우리의 고향을 되찾아야 한다.


언제고 때가 되면.

어둡고 음습하고 침침하고 배고픈 세상이 아닌, 찬란하고 포근하고 따사로우며 허기짐 없는 세상이 오리라.


인류가 다시 지상에 나온 건 지금으로부터 97년 전.


두려움을 이겨낸 소수의 모험가, 영웅들이 이뤄낸 쾌거이며 지상 복귀의 시작점이다.


엄청난 방사능과 대기권을 파고드는 강렬한 우주선, 태양풍은 다시 한번 인류를 파멸로 몰아넣었지만.


‘우리는 언제나 방법을 찾아낼 것이다.’


누가 언제 남겼는지 모를 ‘격언’을 주춧돌 삼아 인류는 기어이 지상 진출에 성공했고 도시를 재건했다.


그렇게, 우리는 조상의 옛 땅을 되찾았다.


나는 재건 도시를 만들어 낸 노동자의 후손이자, 지저가 아닌 지상에서 태어나 찬란한 삶을 만끽 중인.


스카이 돔 117의 2급 거주민 ‘한상진’이다.



*



손발이 덜덜 떨렸다.


인류가 알고 있는 옛 역사는 단절된 기억이고 조각난 전승이다.


몇 줄의 기록을 삐뚤삐뚤 이어 붙이고 이리저리 기워내 겨우 완성한 문장들.


어쩌면 이런 거 아니었을까. 이랬을 수도 있겠지-라고 정리한 것이 ‘역사’이며 우리는 그걸 배우고 익혔다.


그런데, 지금 이곳.

언제 만들어졌는지도 모를 의문의 지하 벙커에서 ‘그날’ 대한 단초를 발견해 버렸다.


최초의 조상이자, 마지막 조상으로부터 이어진 오래된 격언.


‘우리는 언제나 방법을 찾아낼 것이다.’


나는.


이 말이 어디서 유래된 것인지 알아버렸다.


아니, 어쩌면 저 때도 저 말을 격언 삼아 켜켜이 버텨냈는지도 모르겠다.


interstellar(별과 별 사이-2014)


소수의 생존자가 지저로 숨어 든 것과 달리, 몇몇의 인류는 우주 저편에서 생존을 이뤄냈다.

아, 이 얼마나 놀랍고 충격적인 기록인가.


“interstellar. 성간 우주로 이주한 것이 2014년....”


올해는 2179년.


“숫자만 따져본다면, 165년 전이지만.”


아무리 들여다봐도, 아무리 생각해 봐도.


“165년 전이 아니야.”


절대 아니다.

아니, 165년밖에 되지 않았을 리 없다.


165년 전이면, 아버지의 아버지의 아버지의 아버지의 아버지 시절이다.


그리고 그날은 아버지의 아버지의 아버지의 아버지의 아버지에게도 아버지의 아버지의 아버지의 아버지의 아버지보다 더 오래된 옛 적에 일어난 일이다.


그런데 겨우 165년? 190년? 200년?

넉넉하게 생각하고 최대한 양보를 해도 시간상으로 역사적으로 말이 되질 않는다.


"표기가 같다고 의미마저 같다는 건 아니잖아."


그날 이후라는 의미로 사용하는 AD(after day)가 아니라, 기억은커녕 기록도 없는 고대에 쓰던 다른 의미의 AD라면?


그래! 그래야 말이 된다. 그래야 이해가 된다.


“모두가 멸망, 재난, 재해, 비극을 예시하거나 탈출의 역사를 기록한 자료들.”


플레이어가 별과 별 사이를 토해내며 다음 자료를 넣어 달라고 입을 벌렸다.


벙커 자료실에 발을 들인지, 48시간째.


눈은 터질 듯 쓰렸고 붉게 핏발이 섰다. 따끔거리다 못해 눈물이 줄줄 흘렀지만, ‘예언서’를 향한 내 손은 멈출 줄 몰랐다.


남은 자료를 마저 확인하고, 혹시 놓친 게 있나 싶어 다시 보고, 도저히 믿기지 않아 몇 번이고 다시 돌려 봤다.


그렇게 식음을 전폐한 채 자료의 껍데기를 쓴 고대 예언서에 몰두하고 있는데, 등 뒤에서 누군가 버럭 소리를 질렀다.


“자네 미쳤나!”


“네?”


“이런 젠장. 집에 돌아간 줄 알았는데, 여기 이러고 있을 줄이야!”


며칠을 기다려도 모습을 드러내지 않자, 대머리 노인은 상진을 찾기 시작했다.


어렵게 찾은 적합자인데, 이대로 포기하기엔 너무도 아까웠기 때문이다.


그런데 아무리 메시지를 보내봐도 대답이 없자, 집에 사람을 보내기까지 했다.


혹시나 하는 생각에 자료실까지 내려왔는데, 반송장 상태로 저러고 있을 줄이야.


“네?”


몽롱한 표정으로 대머리 노인을 바라봤다.


“이런 멍청이 같으니라고, 이러다 죽는다고!”


무슨 이야기를 하는 거지? 내가 왜 죽어?


“네?”


“이 사람아, 아무리 충격을 받아도 그렇지. 여태껏 이러고 있으면 어떻게 하나!”


멍청이처럼 네? 네? 거리다가 ‘충격을 받아도’라는 말에 정신 번쩍 들었다.


“여기···. 이 자료들. 아니, 예언서들!”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정체를 묻고 따지려는데, 머리가 핑 돌면서 눈앞이 캄캄해졌다.


“이런! 이 박사. 가서 진아 좀 데려와. 오면서 물, 아니지. 영양 주사 좀 챙겨오게.”


“알았네. 잠시만 기다리게!”


어이없는 표정으로 상진을 바라보고 있던 이영환은 다급히 몸을 돌렸다.



*



끊겼던 의식이 희미하게 돌아오는데, 옆에서 소곤소곤 대화 나누는 소리가 귓가에 흘러들었다.


눈을 뜨고 일어날까 하다가, 들려오는 소리가 심상치 않았기에 모르는 척 그대로 자세를 유지했다.


“이거 참. 황당해 죽겠네.”


대머리 노인 목소리다.


“자네가 할 소리는 아니지 않나?”


이영환 박사?


“내가 뭐?”


“쯧쯧쯧. 건망증이 와도 단단히 왔네. 자네도 그 사람 아니었으면 여기 자료실에서 굶어 죽을 뻔 했다던데?”


“크흠. 굶어 죽긴 누가!”


"그나저나, 일주일이나 그 안에서 어떻게 버틴 거야?"


"안쪽에 화장실 있지 않나. 수도 시설이 연결 되어 있으니. 그거라도 마시면서 버텼겠지."


"쯧. 미련하기는."


“됐고. 이제 어쩔 거야? 상태를 보아하니, 안에 있던 기록들 모조리 뒤져 본 것 같던데.”


“음....”


대머리 노인이 고민하는 소릴 냈다.


“방법이랄게 있나. 평소 하던 대로 해야지.”


하던 대로?

대머리 노인 말투에서 어딘지 위험한 냄새가 났다.


“기절하기 전 분위길 보면, 묻고 싶은 말이 가득해 보이던데....”


이영환 박사는 하던 대로 하는 것보다, 다른 방법을 찾아 보는 게 어떻겠냐는 뉘앙스다.


“진실을 받아들이면 다행이지만, 그렇게 못한다면 별수 없지 않나. 총독부에 이곳 유물이 알려지기라도 하는 날엔 무슨 일이 벌어질지. 굳이 설명하지 않아도 알지?”


두 노인 대화 사이로 목소리가 하나가 끼어 들었다.


“여기까지 10년이 걸렸어요. 세컨드 임팩트가 멀지 않은 지금. 냉정할 땐 냉정해야죠.”


아, 까칠한 이 목소리.

입에 걸레 물고 다니는 성격 파탄 후드티다.


후드티는 다시 말을 이었다.


“자료실 방문자의 운명은 정해져 있습니다. 함께 하거나. 아니면 지하 9층 벙커 끝 방에서 조용히 잊혀지거나. 여태껏 한 번도 어긴 적 없는 이곳의 규칙 아니었나요?”


지하 9층?

벙커 끝 방에서 잊혀져?


이런 젠장, 말이 좋아 잊혀지는 거지.

그냥, 죽이겠다는 말이잖아!


후드티 말에 방법을 찾아보면 어떻겠냐던 ‘친절한’ 이영환 박사도 별 말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하긴, 이젠 돌이킬 수도 없고. 남은 시간도 얼마 없으니. 이것저것 사정 봐주며 일을 할 상황도 아니긴 하지. 적합도만 놓고 본다면, 아까운 인재지만. 그렇다고 우리 모두가 위험해 질 수는 없는 일이니.”


이영환 박사 말을 끝으로 주변이 조용해졌다.


한참을 그렇게 누워 있다가 조심스럽게 눈을 떴는데.

이영환 박사와 눈이 딱 마주쳤다.


정확히 말하자면, 대머리 노인도 입에 걸레문 후드티도 말 없이 자신을 내려보고 있었다.


오우, 씨발! 깜짝이야!


내심 크게 당황했지만, 아무것도 모르는 척.

으음... 신음을 흘렸다.


“상진 군. 그러지 않아도 되네."


말투가, 마치.

자네 아까부터 깨어 있었지 않나. 하는 느낌이다.


순순히, 네. 깨어 있었습니다. 이럴 수는 없다.


셋이서 주고 받은 대화 내용을 유추해 보건 데, '노예처럼 부려 먹거나' 그게 아니라면 '저 먼 곳에 던져버리고 죽을 때까지 모른 척' 하거나.


내 의사와 무관하게 강제적으로 둘 중 하나에 당첨될 예정임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네? 무슨 말씀이신지.”


나는 무슨 말인지 모르겠다는 듯 눈을 껌뻑였다.


대머리 노인과 이영환 박사, 후드티는 약속이나 한 듯 ‘쯧!’ 혀를 찼다.


입을 열고 말을 한 것은 아니지만.

‘이놈 이거. 안 되겠는데?’ 하는 느낌이었고 그와 동시에 기분이 싸해졌다.


후드티가 허리춤에서 60cm가량의 칼을 뽑아 들었다.


뭐야, 허리춤에 그런 걸 왜 가지고 다니는 건데?


칼날이 날카로운 예기를 뿜으며 목에 와 닿았다.


젠장!

후드티 너!


급히 머리를 굴려 어떻게 반전이라도 꾸려볼까 했는데.


아무것도 모르는 척하려다 진짜 아무것도 모르고 죽게 생겼다.

삽화7-시간 여행자의 생존법.jp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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