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 여행자의 생존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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울프21
그림/삽화
E-soul
작품등록일 :
2024.08.02 11:20
최근연재일 :
2024.08.28 11:10
연재수 :
29 회
조회수 :
68,9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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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자수 :
121,980

작성
24.08.27 11: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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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쪽

타임 028. 정신 줄 꽉 잡고, 원 모어!

DUMMY

베리어가 해제되고 바닥에 발을 딛었다.


처음 도착했을 땐, 정신 차릴 틈도 없이 오류니, 붕괴니 해서 메뚜기처럼 이리저리 뛰어다니기에 바빴는데.


마음을 비우고 때를 기다리니 주변을 둘러보는 것도 자연스럽게 여유가 배었다.


붕괴까지 남은 시간은 1분 20초.


쓱- 천장을 올려봤다.


붕괴 조짐 따위 전혀 보이지 않는다. 헐거운 나사가 풀리고 먼지라도 날리는지 꼼꼼히 살폈지만, 진짜 아무 낌새도 없다.


다른 건 몰라도 이거 하나는 확실했다.


‘나 하나 정도론 붕괴 규모의 재난은 일어나지 않아.’


벌레 하나 잡겠다고 여길 붕괴시킨다?

시간선 입장에서도 가성비가 나오지 않는다고 보는 거겠지.


접속기를 통해 들어갔던 카피 공간을 떠올려 봤다.


뭐가 뭔지 몰라 어리바리 덜렁거린 이유도 있지만, 시간차를 이용하든 버티기를 시전하든 어떻게든 죽음에 이르는 설계가 이어졌던 걸 생각하면.


확실히 현실 세계는 여러 면에서 집요함이 떨어지는 느낌이다.


물론, 이곳에서 탈출하고 뭐가 됐든 변화를 일으키려 든다면 상황이 달라질 것이다. 시간선 입장에선 역사를 뒤트는 행위 자체가 자신의 존립을 위협하는 것으로 보일 테니까.


하지만, 그저 숨만 쉬고 조용히 살아 있는 것 정도는 별다른 위협이 되지 않는달까. 시간선도 이 정도는 문제가 없다는 듯 무난히 넘어가는 느낌이다.


‘나 하나 정도는 흔한 벌레 등급이지만, 여럿이 한데 모이면 전염병 등급으로 위험도가 올라가는 거겠지. 공장을 붕괴시켜서라도 싹을 자르려는 걸 보면....’


결국, 여길 안전하게 빠져나가려면 다른 사람들이 도착하기 전이어야 한다는 의미고 누군가와 동행을 하기보단, 철저히 혼자 움직여야 안전도가 올라간다는 뜻이다.


아직은 모든 게 추론에 불과하지만, 이런저런 여러 데이터가 쌓이게 되면 이곳에서 살아가는데 꽤 신뢰성 높은 정보가 될 것이다.


안전지대로 확인된 경로를 따라 공장 내부를 어슬렁거리다 철문을 동여멘 쇠사슬 비슷한 걸 찾아냈다.


양손에 쥐고 ‘흡!’ 힘을 썼지만, 끊어지기는커녕 꼼짝도 하지 않는다.


죽음을 반복할수록 조금씩 강해지고는 있지만, 아직은 한 참 더 죽어야 한다는 소리다.


정진아가 회의 탁자를 아귀힘만으로 뜯어내던 장면이 떠올랐다.

비교할 만한 게 있나 싶어 주변을 둘러보는데, 천장에서 삐걱거리는 소리가 났다.


‘이서연은 머리가 깨져서 죽었을 것이고, 다른 이들은 놀라서 입을 벌리고 있겠네.’


와르르르르! 쿠앙! 꽝!


여지없이 천장이 무너졌다.


*


내정된 죽음 앞에 여유롭게 거닐 수 있는 시간 1분 40초.


평소라면 딱히 계산할 이유도 없는 저렴한 시간이지만, 죽음을 앞둔 자의 최후의 만찬이라 생각하니. 생각보다 이것저것 할 게 꽤 많다.


내심 1분 40초라는 시간이 이렇게 긴 시간이었나 싶을 정도다.


문득, 사람이 살면서 가장 많이 하는 낭비는 ‘시간’이라는 생각도 들었다.


무의미하게 흘려보내고, 별다른 생각 없이 흘려보내는.

의미 없이 써 버리는 시간이 너무 많다는 걸 깨달았달까.


쇠사슬 테스트는 잠시 미뤄두고 공장 끝 철문이 아닌. 다른 쪽 공간을 살피기 시작했다.


쪽문 또는 쥐구멍이 있다면 굳이 쇠사슬 끊기에 도전하지 않아도 되기 때문이다.


“거참, 하나 정도는 만들어두지. 공장이 진공 밀폐 용기도 아니고. 더럽게 꼼꼼하게 만들었네.”


투덜거리며 주변을 둘러보는데, 천장 비틀리는 소리가 흘러든다.


“벌써 도착한 건가?”


1분 40초가 꽤 긴 시간이라 생각했는데, 이렇게 뭔가 하고자 하면 때론 더럽게 짧은 시간이다.


*


와, 2분이다.


세상에나! 정말 상상도 못했다.

내가 꼴랑 2분에 이렇게 흥분할 날이 올 줄은.


“스물네 번이나 죽었는데, 겨우 2분이라니. 정말 가성비 안 나오는 짓이네.”


이번엔 공장 나들이에 나서지 않고 바닥에 주저 앉았다.


주변을 둘러보는 것도 중요하지만, 이번엔 외적 환경이 아닌 내적 정보에 대한 정리가 필요했다.


“스테이트(state). 데이터를 로드할 수 있는 기능이라고 했는데.”


눈알에 주삿바늘을 찔러 넣으며 빠르게 지껄인 탓에 자세히 듣지는 못했지만, 양자 정보를 획득해 몸을 구성하는데 필수 요건이라고 했던 것 같다.


그리고 뭔가 더 있었던 것 같은데....


“상태 확인이라고 했던가?”


‘state’라는 단어 자체가 ‘상황, 상태에 대한 정보 또는 현상’이라는 중의적 의미로 사용된다. 때로는 이걸 뭉그려트려서 ‘조직, 단체, 기관’ 넓게는 국가 등의 의미로 사용하기도 한다.


“당연히 내 몸을 국가나 단체로 인식한다는 말은 아닐 것이고.”


몸의 다른 분위가 아닌, 눈에 state를 이식하고 박아 넣었을 땐, 분명히 이유가 있었을 것이다.


대충 어디든 찔러 넣어도 되는 거였다면, 굳이 불편하고 고통스럽게 눈에 주삿바늘을 들이댈 이유가 없으니까 말이다.


‘로드, 복구, 확인···. 시신경 연결.’


권 박사가 했던 말, 단어, 용도를 집약해 봤다.


상황을 유추해 보건데, state는 시공간 전이에 사용되는 1회성 소모품이 아니라 인벤처럼 꾸준히 기능하는 어플리케이션이라고 ‘예상’ 해 볼 수도 있다.


롤백 후, 리와인드 되면서 몸이 복구되는 과정에 state가 영향을 미칠텐데 이게 일회성이었다면 복구 자체가 불발로 끝났을 거다.


문제는 스테이트가 인벤처럼 영구 작동형 아이템이라도 이걸 어떻게 사용하고 운용해야 하는지 전혀 모른다는 거다.


생각해 보니. 스테이트는 둘째치고 인벤 사용법도 모르긴 마찬가지다.


“젠장, 아무리 급해도 사용법 정도는 알려 주고 보낼 것이지.”


권 박사야 이쪽에 건너와서 다른 사람에게 설명을 들으면 된다고 했지만, 도착과 동시에 압사할 예정이었다는 걸 누가 예상이나했겠는가.


혼자서 투덜거려봤자, 의미 없는 짓이라 이런저런 방법을 떠올리며 테스트에 들어갔다.


“상태 확인. 스테이트 로드. 로딩 스테이트. 내 몸 확인. 몸 상태 확인.”


1차 실행 방법으로 이런저런 단어를 조합해 봤지만, 아무런 반응이 없다.


그렇다면 말이 아니라 물리적 자극이나 제스쳐를 사용해 볼 차례다.


눈을 슬쩍 건드려 보기도 하고, 툭툭 때려보기도 했지만, 스테이트와 관련된 어떤 정보도 출력이 되지 않는다.


설마 하면서도 혹시나 하는 마음에 손가락으로 눈을 찔러 봤다.


“악! 씨발! 씨발!”


제기랄. 변화는커녕, 눈알만 터질 뻔했다.


눈알이 터져도 롤백하면 그만이라고 생각하다니!


정진아에게 성격파탄났냐며 비아냥거렸는데, 이젠 내가 미쳐가는 모양이다.


눈물을 줄줄 흘리며 괜한 짓에 대한 후회를 하고 있는데, 전자기 베리어가 반짝거리며 줄줄이 소환됐다.


“벌써, 죽을 시간인가···.”


눈을 매만지며 허공을 올려다봤다.


이서연이 당황한 표정으로 추락하는데, 그 모습에 내심 짠한 생각이 들었다.


자신이야 롤백을 통해 정보 업데이트라도 하고 있지만, 이서연 입장에선 매번 날벼락 맞는 기분일 테니까.


잠시 눈이 마주치는가 싶었는데, 꽈득! 하며 머리가 깨졌다.


아무리 헤어진 여친이라지만, 미워하는 마음이 꽤 있다지만.

저렇게 흉하게 죽는 모습을 바란 적은 한 번도 없었는데···.

피를 흘리며 죽어가는 모습을 보고 있노라니, 기분이 영 좋지 않다.


우르르릉! 꽈직! 쿵!


공장이 천둥 치는 소리를 내며 와그작 폭삭 내려앉았다.


*


정진아가 부서트렸던 회의 탁자와 비슷한 물건을 찾아다녔다.


쇠사슬은 여전히 꼼짝도 하질 않으니, 테스트 조건을 하향 조정한 셈이다.


“이거면 비슷하려나.”


꽤 단단히 보이는 나무 선반이 눈에 띄자, 곧바로 테스트에 들어갔다.


선반 귀퉁이를 잡고 ‘으압!’ 기합을 내 질렀다.


“끄으!!!”


이까지 악물고 귀퉁이를 부서트리는 데 집중했지만, 선반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크허. 제기랄!”


부서질 기미가 보이지 않자, 손에 힘을 풀고 물러섰다.


“빌어먹을. 정진아는 도대체 몇 번이나 죽은 거야?”


서른 번을 죽고 롤백했는데도 정진아가 보여준 퍼포먼스엔 근처도 가질 못하고 있다.


“접속기 사용 횟수가 하루 최대 5회라고 했던가.”


롤백 서른 번과 접속기 사용 서른 번을 동일시 한다면. 정진아는 지금 내 상태에 도달하는데 3일 남짓 걸렸다는 의미다.


“정진아가 꼴랑 3일만 접속했을 리 없잖아.”


한 달이면 150회. 두 달이면 300회. 반년간 접속을 했다고 치면 최소 900회. 다른 말로는 900번 넘게 죽었다는 뜻이다.


시공간을 넘어가서 역사를 바꾸겠다고 망상을 품을 정도면 그 이상 접속해서 힘을 길렀을 것이다.

겨우 탁자 귀퉁이 부서 트리는 정도가 정진아가 가진 힘의 전부는 아닐 테니까.


어쨌든, 엇비슷한 힘이라도 가지려면 최소 천 번은 죽어야 정진아 꼬랑지라도 잡을 수 있다는 의미다.


어차피 방법이 그것밖에 없다면.

독하게 마음먹고 천 번을 죽을 수도 있다고 치자. 그런데 자신은 정진아와 달리 문제가 하나 있다.


정진아는 시간에 구애 없이 접속기를 사용했지만, 자신은 죽을 때마다 인저리타임이 늘어난다.


천 번쯤 죽었다고 가정하면.


리와인드 된 인저리타임은 대략 83분. 1시간 20분 정도 공백이 난다.


여백 없이 바로바로 죽어도 천 번을 죽으면 까마득한데, 자신은 매번 죽기 전에 죽음을 기다리는 사망전희(死亡前戲)를 가져야 한다는 뜻이다.


인저리 타임은 탈출 준비를 할 수 있는 시간이면서, 시한부 인생만이 느낄 수 있는 기괴한 딜레마를 선사한다.


죽음을 반복하면서 육체적 능력은 향상되고 있지만, 정신적 영역은 사포로 갈아대는 것처럼 꾸준히 마모되는 느낌이다.


이러다 감정적으로 결여된 무감각한 인간이 되면, 이건 이것대로 살아도 산 게 아닌 것 같은 희한한 상태가 될 수 있다.


지극히 정상적인 정신 상태로 남은 생을 즐기며 살고 싶지, 정신이 망가져 광인으로 살고 싶지는 않기 때문이다.


저쪽에선 우울증 때문에 자살 욕구에 시달렸는데, 여기선 전혀 다른 형태의 우울증에 시달리게 생겼다.


자신과 상황은 다르지만.


정진아 그것도 이래서 성격파탄이 난 건가?


“니미럴!”


죽지 않기 위해 이쪽으로 넘어왔는데, 죽지 않기 위해 계속 죽어야 한다고?


인생은 한 치 앞을 알 수가 없다더니.

어이가 없어 웃음조차 안 나온다.


네버엔딩, 원 모어 다잉이라니...


한상진! 정신 줄 꽉 잡고 죽자.

살아도 산 게 아닌 것처럼 된다면 그건 비간과 다를 바가 없는 거잖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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