즐거운 힙투비: 마지막 하이크란트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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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antaray12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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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8.13 14: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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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8.27 07: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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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화 - 축복의 시간(3)

DUMMY


“세상에....! 저 사람이 어떻게 여기를?”

“...........?”

때 아닌 행인의 수상쩍은 행동을 확인한 일레이네의 입에서 나직한 비명이 터져 나왔다. 동시에 크운카의 고삐를 쥐고 있던 거대한 남자의 고개가 카이난이 숨어있는 수풀을 향해 날카롭게 돌아섰다.

-들켰다!

카이난은 상대가 자신과 같은 종족이라는 사실에 놀라움을 느낄 사이도 없이 그가 자신만큼이나 귀가 밝다는 사실에 (당연하다면 당연하다. 이것은 종족의 특징이니까.) 낭패감으로 더욱 몸을 숙였다.

그러나 몸을 숨긴 보람도 없이 코를 킁킁거리고 귀를 쫑긋 세우며 수풀을 향해 움직이는 하이크란트-크페스터스의 반응에 흙바닥에 새겨진 발자국을 살피고 있던 사내가 고개를 들었다.

“얌전히 있어, 이 미련한 곰탱이 놈아! 뭐야, 뭘 본거야? 아니...들은 것인가? 네 녀석은 귀가 밝으니까.”

-틀렸어. 더 이상 숨는 것은 불가능하다.

확신을 가지고서 자신들이 숨어있는 곳으로 다가오는 크페스터스의 반응에 절망감으로 가슴이 조여든 카이난이 일레이네를 바라보자 (그녀를 안고 자신의 걸음으로 동족의 능력을 피해 달아나는 것이 가능할까?) 오히려 그녀가 침착하게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리고는 가만히 있으라는 눈짓신호를 주며 크게 목소리를 높였다.

“그 짐승을 다가오지 않게 하세요! 로카 백인장(百人將)! 무서워서 나갈 수가 없잖아요!”

-일레이네!

카이난은 사내를 향하여 소리를 내며 용감하게 길로 나아가는 그녀의 행동에 훌떡 뛰어오를 만큼 놀라면서도 차마 그녀를 제지하지도, 따라가지도 못한 채 풀숲에 몸을 웅크리고 있었다.

그런 그녀의 당당한 모습을 발견한 사내의 얼굴에 놀라움과 음흉한 미소가 올라와 입가에 걸렸다.

“이거, 이거 – 고결하신 일레이네 시녀님이 확실하시군요. 이 길을 지나갔으리라는 예측에 발자국을 확인하고 있던 중입니다만 무사하셔서 다행이오.”

사내의 느물거리는 미소에 일레이네는 도도하고 차가운 표정을 지어보이며 (그런 차가운 표정은 카이난으로서는 처음 보는 모습이었다.) 두터운 망토로 몸을 감쌌다.

“다행이랄 것이 있나요? 저는 신성한 정령원에서 밤을 새워 기도를 올리고 돌아오는 것일 뿐입니다. 오히려 저를 겁먹게 한 것은 당신과 저 흉물스러운 짐승의 존재에요. 이 어두운 새벽에, 다가오는 낯선 이의 존재에 겁을 먹고 풀숲으로 숨을 정도로 당신은 저를 두렵게 만들었어요. 대체 왜 나를 추격해 온 것이지요? 백인장인 당신은 마땅히 왕도에 있어야 하지 않나요?”

-백인장(百人將).

풀숲의 카이난은 비로소 사내의 잔뜩 멋을 부린 차림새가 군인의 옷차림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100명의 부하를 부리는 페테브란트 왕의 장교인가... 자신의 동족인 하이크란트를 개처럼 끌고 다닐 법한 신분이라고 생각을 하며 그는 몸을 도사렸다.

여전히 자신의 동족인 하이크란트 –지금은 가축에 불과한 크페스터스의 눈동자가 자신 쪽으로 고정되어 있기 때문이었다.

“왕비님의 시녀인 당신도 왕도인 샴 베스타에 있어야 할 몸이시지. 그런데 이렇게 먼 정령원을 찾아오지 않으셨나, 그럼 나도 휴가를 받을 수 있다는 뜻이오. -오히려 내가 묻고 싶은 것은 앞으로 2주면 다시 왕비님이 행차를 하실 이곳을 왜 굳이 당신이 먼저 찾아오느냐는 것이지.”

“무슨 말을 하고 싶으신 건가요?”

“나도 들은 귀가 있어서 말이야. 평소 독실한 국교의 신들을 모시는 아인로테님이 어째서 기도 요양은 정령원으로 오시는가, 게다가 전에 행차에서 부상을 당했다는 당신이 그럼에도 정령원을 구석구석 쑤시고 다녔다는 시녀들의 수군거림이 있더군. 그것은 마음이 어딘가 딴 곳에 있다는 뜻이 아닌가?”

“무슨 음흉한 상상을 하는 것인가요, 천한 사람!”

의미심장한 시선으로 눈을 가늘게 뜨며 턱을 매만지는 남자의 말에 노여움이 가득한 눈빛으로 일레이네가 꼿꼿이 허리를 세우고 그를 노려보았다.

“마치 아인로테님이나 내가 정령원의 사제들을 상대로 불순한 목적이라도 가지고 있는 것처럼 말을 하는군요! 그런 불경하고 천한 상상을 하다니, 용서받지 못할 일이에요! 아인로테님께 보고를 해서 당신의 무례함을 벌하겠어요!”

“이크크... 미천한 백인장의 신분인 내 세치 혀가 무례를 범했소이다. 나라고 고귀하신 이 나라의 왕비님께서 기도나 외우며 비실거리는 정령사제들 따위를 상대로 연애행각을 벌인다고는 생각하지 않소이다. 더군다나 온 나라의 기대를 받고 있는 아기님을 회임하신 상태에서 말이오. 하지만 당신은 어떠실까... 예를 들어 저기 저 풀숲에는 대체 누가 숨어 있는 것이지?”

“.............!”

“곰탱아! 물어!”

-찰나의 순간이었다.

줄곧 이쪽을 노려보며 으르렁거리는 동족의 시선과 움직임에 숨을 쉬는 일조차도 멈추고 있던 카이난은 주인의 명령이 떨어짐과 동시에 날아오르다시피 덤벼드는 상대의 거대한 체구를, 그리고 벌려진 입에서 드러난 이빨을 가까스로 피해냈다.

인공적으로 줄칼로 갈아놓은 것일까, 입을 벌린 동족의 이빨은 보통 인간의 것이 아니라 짐승의 그것처럼 날카롭게 날이 세워져 있었다.

“꺄아아악!”

갑작스러운 공격에 공포에 질린 일레이네의 비명이 터져 나온다. 아마도 카이난이 무지막지한 공격에 당했다고 생각을 한 모양이다.

“저는 괜찮습니다!”

카이난은 그렇게 그녀를 안심시키기 위하여 외치며 나무를 등지고 방어태세를 취했다. 새삼 눈앞에 드러난 동족의 거대한 체구가 두려움으로 다가온다. 자신보다 족히 20헤벤(약 25센티)은 더 크고, 몸무게도 30하루스(약 36킬로그램)는 족히 더 나가 보이는 거구의 사내를 상대로 싸워본 경험은 없다. 아니, 솔직하게 말을 하자면 누군가와 싸워본 경험 자체가 카이난은 없었다.

지금껏 정령원에서 가장 키와 덩치가 큰 인물로써 다른 사제들이 지시하는 대로 따르기만 해왔던 카이난은 누군가를 상대로 주먹질을 하는 자신을 상상조차 해본일이 없었다.

하지만 이대로 나와 같은 (아마도 더 강할 것이 분명한) 동족에게 순순히 당할 수도 없어. 왜냐하면 하이크란트가 가축의 지위로 떨어져서 아무런 전투기술을 배우지 못했다손 칠지라도 그 힘과 스피드는 평범한 인간의 것일 수가 없을 테니까.

그는 잔뜩 긴장한 기색이 그대로 드러나는 자신의 표정에 득의만면한 웃음을 머금고 있는 백인장을 노려보며 정령술을 펼치기 위한 방어 자세를 취했다.

“수도복을 입고 있군. 보기에는 강력한 전사처럼 보이는데 겉보기와는 달리 연약한 정령사제라는 건가? 하.... 요 앙큼하신 시녀님께서 새벽이슬을 맞으며 정령원을 드나드는 이유를 이제야 알겠군.”

“용서하지 않겠어요, 로카 백인장! 정령사제님에 대한 모욕과 무례는 왕비님이 절대로 용서하지 않으실 거예요!”

파랗게 질린 낯빛으로 온몸을 던져 상대의 앞을 가로막으며 일레이네가 카이난을 지키기 위해 외쳤지만 로카라는 이름의 백인장의 손이 한 발 앞서서 그녀의 여린 팔을 휘어잡았다.

“그러면 나는 정령사제와 정분이 난 왕비 시녀의 행실에 대해서 왕궁의 기강이 흐트러졌다고 주장을 하도록 하지. 이것 봐, 일레이네. – 사내를 고르는 눈이 형편이 없군. 사내는 힘을 팔뚝에 두어야지 대가리에 두는 존재가 아니야. 머릿속에 글자를 쌓아둔다고 그것이 힘이 되지는 않는단 말이야.”

“...그분을 놓아주시오.”

백인장의 손에 잡혀 아픔과 혐오감으로 얼굴 근육을 일그러뜨리는 일레이네를 향해 손을 뻗으며 카이난은 억눌린 분노로 말을 이었다.

“당신이 군인이라면 왕비의 시녀에게 예를 갖추시오.”

“그런 말은 나에게서 이 여자를 힘으로 빼앗고 나서 하는 법이다, 사제 – 덩치가 크군... 이 곰탱이와 같은 크페스터스라고 해도 믿을 정도야.”

턱으로 자신의 가축- <곰탱이>라고 부르는 존재를 가리키며 백인장이 천천히 카이난의 커다란 덩치를 눈으로 훑더니 흥미로운 듯 입 꼬리를 말아 올렸다.

“그러고 보니 사제, 페테브란트 사람이 아니지? 어디서 왔나? 대 사막 남쪽의 일가르족이 덩치가 크고 힘 좀 쓴다고 들었는데 그런 거냐?”

“...그렇다고 해둡시다.”

카이난은 나직하게 으르렁거림이 들리는 순간, 땅을 박차고 날아드는 동족의 공격을 다시 한 번 피하면서 동시에 앞으로 몸을 날려 백인장의 손에서 일레이네의 팔을 잡아채었다.

“...........!”

순식간에 여인의 몸을 빼앗겨버린 백인장의 얼굴에서 능글맞던 미소가 싹 사라진다. 그는 놀라우리만치 재빠른 카이난의 움직임에 노여움을 숨기지 않고서 명령을 내렸다.

“저 놈을 물어뜯어, 곰탱이! 죽여라!”

“사제님!”

일레이네의 외마디 부름과 동시에 카이난은 그녀의 몸을 안아들고 땅을 박차고 올랐다. 아슬아슬한 차이로 동족의 짐승처럼 날이 세워진 이빨이 그의 수도복에 감싸인 다리를 스치고 지나간다.

-농담이 아니야. 저 이빨에 물리면 아무리 두꺼운 거죽을 가진 나라도 살이 찢겨나가고 말테지.

평소 날이 서있는 칼날도 쉽게 침범을 하지 못하는 자신의 바위 같은 살갗이지만 상대는 자신과 같은 힘과 능력을 가진 하이크란트다. 저 단단한 턱의 힘이라면 바위라도 뚫고 말 것만 같다.

“이곳에서 잠시 기다려 주세요.”

“죄송해요. 사람을 피하셔야 하는 사제님이 저 때문에....”

숲으로 뛰어들어 울라한 폭포의 주홍빛 물결이 세속의 냇물과 섞이는 지점까지 내어 달린 카이난은 수풀사이로 솟아오른 하얀 바위위에 일레이네를 내려놓았다. 그리고는 자책으로 일그러진 그녀의 눈물어린 눈동자를 눈이 부시게 올려다보며 고개를 가로 저었다.

“아닙니다. 이건 제가 자초한 일입니다.”

“사제님...”

차가운 새벽의 공기에도 온기를 잃지 않은 자신의 뺨에 와 닿는 일레이네의 손은 얼음장처럼 식어있다. 하지만 그 손에 체온을 나누어줄 틈도 없이 빠르게 추격해오는 동족의 움직임에 그는 재빨리 그녀와의 거리를 벌리며 주문을 외웠다.

“숨어있는 힘 속에 잠든 이여, 눈을 떠서 나의 부름에 답하시오, 위대하신 바람의 누아여- 불꽃의 이그리여 – 자비의 미소를 멈추시고 그 손에 내 손을 더해주시오....”

인간의 이기심은 오랜 세월, 외우기 힘들고 발음하기 어려운 태고의 언어 믓삼을 오로지 전투에 용이하게 사용하기 위하여 연구에 연구를 거듭했다. 그리하여 오늘날 대륙의 공용어로 번역되어진 믓삼어는 전투주문에 있어서만큼은 혁혁한 성과를 올리고 있었다.

그의 주문과 함께 대기에 흩어져 있던 정령의 힘이 거미줄처럼 그의 손안으로 모여든다. 카이난은 평범한 사람의 눈에는 보이지 않는 힘의 그물을 덤벼드는 거대한 그림자를 향해 뻗으며 외쳤다.

“알레카르삼 누아! 이그리 피아! -불꽃의 바람이여, 타올라라!”

“크으으으으!”

거대한 힘으로 카이난의 어깨를 파고들던 동족의 무시무시한 손 아귀힘이, 그리고 이빨만큼이나 날카롭게 날이 세워진 손톱이 순식간에 투명한 화염에 휩싸인다. 그리고 화염에 더해진 바람의 힘에 의해 단단한 바위와도 같은 피부가 쩍쩍 갈라지며 붉은 선혈을 토해냈다.

“큭.....”

카이난은 정령마법의 힘에 휩싸이고서도 자신의 어깨를 짓누르는 상대의 힘에 고통을 삼키며 다리를 뻗어 동족의 몸을 차 올렸다. 동시에 자유를 찾은 오른쪽 주먹을 뻗어 상대의 관자놀이에 일격을 가했다.

“크르륵....”

강력한 화염에 휩싸이고도 몇 걸음이나 비틀거리며 이동을 하던 그가 이윽고 뇌에 충격이 전달된 것일까, 무릎을 꿇으며 기절을 한다. 어깨에 가해진 고통을 감싸 쥐고서 재빨리 몸을 일으킨 카이난은 바람을 가르는 소리에 반사적으로 옆으로 돌아섰다.

츄릿- 뺨을 스치고서 한 대의 화살이 지나간다. 그리고 또 다시 날아드는 한 대. 그것은 손을 뻗은 카이난의 손에 의해 잡혀 부러져 나간다.

“맙소사, 네 놈은 대체...!”

어느 사이 그들을 추격해와 화살을 날린 백인장의 입에서 믿어지지 않는다는 중얼거림이 터져 나온다. 그러나 그의 놀라움과 의혹이 가득한 눈동자는 곧 이어 날아든 카이난의 주먹에 의해 곧 의식을 잃어버리고 말았다.

....설마 죽은 것은 아니겠지?

카이난은 무너지는 백인장의 몸을 받쳐 들고서 재빨리 숨을 확인했다. 마지막 순간에 할수 있는 한 주먹에서 힘을 빼기는 했는데. 그리고 얼굴이 아니라 복부를 치기는 했는데 괜찮은 것일까?

-죽여라.

“..........”

입에서 볼꼴사나운 침을 흘리며 기절한 백인장의 몰골을 내려다보는 카이난의 머릿속 한구석에서 냉정한 이성이 외치는 소리가 들린다.

-둘 다를 죽여서 냇가에 묻어버려라.

이성은 난생처음 자신의 모습을 발견해버린 외부인을 죽여서 자신의 존재를 감추라고 명령을 내리고 있었다.

하지만 카이난은 그러한 명령에는 차마 따를 수가 없었다. 무수한 가축의 목숨을 앗아 온 그이지만 사람을 죽인다는 생각은 해본 적이 없었다. 하물며 아무리 자신의 목숨을 위협했다고는 하지만 한 명은 동족이다.

“...........”

그는 아직도 채 사그라지지 않은 불꽃으로 인해 온몸에 연기를 뿜어내고 있는 –아울러 무수한 바람의 자상으로 인해 피를 흘리고 있다 – 동족의 몸을 안아 올려 백인장과 함께 나란히 길옆의 풀숲에 눕혀 놓았다.

자세히 들여다보니 얼굴도 주름이 깊고 희끗희끗한 머리카락도 제법 눈에 띈다. 아무래도 이미 노화가 진행되고 있는 – 어림잡아 자신보다 대 여섯은 더 많은 나이로 보이는 하이크란트의 모습이다.

....나도 곧 이렇게 늙어가게 되는 것일까?

그는 미래의 거울을 들여다보듯 처음 만나는 동족의 얼굴을 가만히 들여다보았다. 물론 자신은 그에 비하여 키와 덩치도 작고 뼈대도 훨씬 약할 것이다. 이 바위 같은 얼굴이 하이크란트의 전형이라면 나는 정말 하이크란트처럼 보이지 않을지도 모르겠어.

그는 새삼 자신의 얼굴을 손으로 더듬으며 백인장이 말을 했던 <일가르>족을 떠올렸다.

앞으로 곤란한 일을 겪으면 그냥 일가르족이라고 둘러대는 편이 나을 수도 있겠다. 나는 그 사람들처럼 피부색이 검지는 않지만 어차피 대륙 북부의 사람들은 일가르족을 만난 적이 거의 없을 테니까 말이다.

“사제님, 사제님 괜찮으신 거예요?”

두 사람을 길에 가까운 수풀 속에 눕혀두고 냇가의 바위로 돌아온 그를 불안함으로 입술을 뜯고 있던 일레이네가 반색을 하며 맞아들였다.

“저는 괜찮습니다. 하지만 저 하이...크페스터스도, 백인장도 치료를 받아야 할 겁니다. 백인장의 경우는 내장을 심하게 다쳤을 거예요.”

“내버려두세요, 그런 무례한....! 왕궁에서도 얼마나 저에게 집적거렸는지 몰라요. ...잔인하고 비열한 남자에요. 출세를 위해서 가여운 전쟁난민들을 마구 죽이는 것도 서슴지 않는 남자에요. 이대로 사람들이 발견하지 못하게 내버려두면....”

“그럴 수야 없지요.”

카이난은 자신의 이성과 같은 말을 입에 올리는 일레이네의 냉정함에 회의적으로 고개를 흔들며 조용히 말을 이었다.

“당신이나 저 사람은 왕도에서 왔습니다. 행여 모습이 보이지 않으면 마을 전체가 나서서 찾으려고 들 것이라는 말입니다. 마을 사람들에게 발견되어서 치료를 받게 해야지요. 마을로 돌아가시면 그의 구원을 청하세요. 그래야 당신에게도 누가 되지 않을 것입니다. 당신께 무례한 행동을 했기에 정령원의 사제와 싸움을 했노라고 솔직하게 말을 하세요. 이 마을 근처에서 에루나크 정령원의 사제들은 일종의 신성불가침의 존재니까 제 정체만 탄로 나지 않으면 그들도 더 캐고 들지는 않을 겁니다.”

...물론 저 백인장이 내 정체를 캐고 드는 것은 또 다른 문제이지만.

욱씬 – 어깨에서 느껴지는 통증에 그는 자신의 왼쪽 어깨를 내려다보았다. 두터운 양모로 만든 천을 뚫고 피가 배어 올라오고 있다. 아무래도 동족의 힘에 의해 꽤나 심한 멍이 들고 날카로운 손톱에 피부가 찢어진 모양이다.

“피가 나오고 있어요!”

“신경 쓰지 마세요. 대단치 않은 상처입니다.”

그의 시선을 따라 움직이다 핏자국을 발견하고서 불안으로 흔들리는 일레이네의 눈동자를 향해 미소를 지으며 카이난은 어깨를 움직여 자신이 멀쩡함을 보여주었다.

“그보다 가장 걱정이 되는 문제는 저 백인장이 정령원을 찾아 저의 존재를 떠들어대며 보복을 하려들지도 모른다는 것입니다.”

“감히 그러지는 못할 거예요.”

속내를 드러내는 그의 염려에 일레이네는 단호한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그가 눈을 뜨면 <유학을 온 정령사제도 이기지 못하는 사내>라고 제가 모질게 모욕을 줄 것이니까요. 그러면 그 치졸한 남자는 자존심이 상해서 저를 증오하고 미워할지언정 감히 당신을 찾아 나서지는 못할 거예요. 정말 자신이 일개 정령사제에게 당했다는 소문이 사실이 되어서 파다하게 퍼질 것이 분명한데 감히 그런 엄두도 내지 못할걸요? 제 말이 틀림없을 테니 믿어보세요. 물론 전 이 사실을 왕비이신 아인로테님께 빠짐없이 이르겠어요. 아인로테님은 자신의 체면을 생각하셔서도 당신의 시녀이신 제가 겪은 일을 그냥 넘기지 않으실 거예요. 약속해요. 절대로 사제님께 피해가 가지 않도록 하겠어요.”

“...죄송합니다. 제가 당신을 마을근처에 까지 멋대로 모시고 내려오지만 않았어도...”

“왜 사제님이 사과를 하시는 거예요? 애초에 제가 찾아오지 않았으면 이런 일은 생기지도 않았을 거예요. 사과는 제가 드려야지요.”

우울하게 고개를 숙이는 카이난의 턱을 향해 손을 뻗으며 일레이네가 다정하게 미소를 머금었다.

“오랫동안 사람을 피해오신 사제님이 이일로 낭패를 겪지 않기만을 바랄뿐이에요. 저는 그러기 위해서 필사적으로 노력을 할 것이고요.”

“...어둠이 물러가고 있습니다.”

자신의 턱에 와 닿는 차디차게 식은 그녀의 손을 조용히 잡아 온기를 나누어 주며 카이난은 쓸쓸하게 중얼거렸다.

그랬다. 어느새 어둠이 물러가고 푸른빛으로 다가온 새벽이 수풀의 그림자를 몰아내고 있었다. 그리고 그것은 두 사람이 이제 헤어져야 할 시간임을 알려주고 있는 것이다.

“오늘과 같은 별의 날을 두 번만 더 참고 보내면 저는 다시 이곳으로 올 거예요.”

생각만으로도 가슴이 뛰는 희망을 약속하며 일레이네가 미소를 짓는다. 그녀의 눈부신 미소에 마주 미소를 지으며 카이난은 그녀를 안아 올려 숲속을 달렸다. 그리고 푸른 새벽의 그림자가 채 물러가기 전에 마을에서 가장 가까운 경계에 내려놓았다.

“그럼 사제님... 부디 다시 만날 때까지 평온하세요.”

“부디 조심하십시오. 그리고 저 백인장을 항상 경계하십시오.”

헤어짐이 아쉬워서 잡은 손을 한참동안 놓지 못하던 일레이네가 겨우 몸을 돌려 마을로 사라지자 (그럼에도 몇 번이나 뒤를 돌아보았다.) 카이난은 숲속의 그림자에 몸을 의지하여 냇가로 다시 이동을 한 후 절벽을 타고 오르기 시작했다.

빙글빙글.... 비로소 혼자가 되자 뒤늦게 온갖 상념이 밀려온다.

난생처음 마주친 동족, 난생처음 자신의 존재를 위협해온 세속의 군인....그리고 사랑스러운 일레이네.

....떠나야 할 것 같아.

그는 자신의 마음속에서 뚜렷이 떠오르는 생각에 밀려오는 고통으로 이를 악물었다.

그녀가 아무리 자신을 감싸준다고 해도 만일 자신의 존재가 드러난다면... 그것이야 말로 정령원 전체에 악몽을 심는 것이나 다름이 없는 일이다.

정령원에 미칠 왕의 분노를 피하자면 자신이 떠나야 한다. 다시 한 번 세상에서 모습을 감추어야만 한다.

분명히 히가도 말씀하셨었지. 진즉에 나를 이 나라 밖으로 도망을 시킬 생각이었다고.

떠나야 해. 평생을 살아온 정령원을 떠나, 따듯한 화덕이 있는 조리장과 콘타오른을 떠나, 히가를 떠나, .....그녀에게서 멀어져야 해.

“으.....”

마음의 고통을 대변하듯 상처 입은 왼쪽 어깨가 통증을 호소한다.

카이난은 잇새로 고통스러운 신음을 흘려내며 벼랑을 오르고 또 올랐다.

......................................................................................................<계속>



작가의말

코로나 19에 다시 걸려버렸습니다. 괴롭네요. 여러분들은 건강유의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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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 22화 - 여기사, 소녀를 만나다 (3) 24.09.11 6 0 23쪽
22 21화 - 여기사, 소녀를 만나다 (2) 24.09.10 6 0 25쪽
21 20화 - 여기사, 소녀를 만나다 (1) 24.09.09 8 0 23쪽
20 19화 - 샴.베스타의 학살 (3) 24.09.06 8 0 23쪽
19 18화 - 샴.베스타의 학살 (2) 24.09.05 6 0 21쪽
18 17화 - 샴.베스타의 학살 (1) 24.09.04 6 0 25쪽
17 16화 – 전조(前兆) (3) 24.09.03 5 0 23쪽
16 15화 – 전조(前兆) (2) 24.09.02 5 0 23쪽
15 14화 – 전조(前兆) (1) 24.08.30 6 0 28쪽
14 13화 - 축복의 시간(5) 24.08.29 8 0 20쪽
13 12화 - 축복의 시간(4) 24.08.28 7 0 26쪽
» 11화 - 축복의 시간(3) 24.08.27 8 0 20쪽
11 10화 - 축복의 시간(2) 24.08.26 7 0 24쪽
10 9화 - 축복의 시간(1) 24.08.23 6 0 25쪽
9 8화 - 시녀 일레이네 (4) 24.08.22 5 0 24쪽
8 7화 - 시녀 일레이네 (3) 24.08.21 7 0 16쪽
7 6화 - 시녀 일레이네 (2) 24.08.20 6 0 17쪽
6 5화 - 시녀 일레이네 (1) 24.08.19 9 0 18쪽
5 4화 - 정령원의 비밀사제 (4) 24.08.16 6 0 23쪽
4 3화 - 정령원의 비밀사제 (3) 24.08.15 6 0 22쪽
3 2화 - 정령원의 비밀사제 (2) 24.08.14 5 0 19쪽
2 1화- 정령원의 비밀사제 (1) 24.08.13 8 0 18쪽
1 프롤로그 24.08.13 9 0 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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