즐거운 힙투비: 마지막 하이크란트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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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antaray12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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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8.13 14: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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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9.20 07: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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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9.20 07: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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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9화 – 공격(3)

DUMMY

“이건 뭐하자는....”

꿈까지 찾아들어온 불길함으로 퍼뜩 잠에서 깨어난 케레스키는 눈앞에 펼쳐진 광경에 순간적으로 말을 잇지 못했다.

그도 그럴 것이 서쪽에서부터 몰려온 검은 구름사이로 달빛조차 모습을 감춘 어둠 속에서 온 몸에 빼곡히 주문과 문양을 그려 넣은 카이난의 벌거벗은 육체가 앉아 있었다.

아니, 정확하게는 시커멓고 꿈틀거리는 연기에 휩싸여 마치 제단에 바쳐진 제물처럼 그 불길한 검은 연기의 먹이가 되고 있는 것만 같았다.

“이, 이봐, 대체 무슨 지랄 맞은 주술을 꾸미고 있는 거야?”

“조용히 해, 잡놈아. 아빠를 방해하지 마. 의식을 방해하면 저 어둠들이 너까지 먹어버릴지도 모르니까.”

“정말 먹히고 있는 거야?”

그의 곁에서 가만히 두 다리를 모으고 앉아 카이난을 둘러싼 연기를 노려보고 있던 힙투비의 날카로운 경고에 케레스키는 겁을 먹은 눈동자로 소녀를 돌아보았다.

“저 검은 것들은 대체 뭐하는 괴물들인 거야?”

“에너지야. 소망을 가능하게 하는 강렬한 의지의 에너지. 지금 아빠의 생명력을 먹고서 아빠의 의지를 극대화 시키고 있는 거야. 일종의 배터리처럼 아빠가 몸 안에 모으고 있던 힘을 사용해서 의지를 소망으로 환원시키는 과정인거지.”

“에너....지? 배...터리? 뭐야, 그게? 그런 말은 들어본 적도 없어.”

케레스키가 혀에 익지 않은 단어를 발음하며 생소함에 이맛살을 찌푸리자 힙투비는 가만히 한숨을 흘려내며 손을 턱에 괴고서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래. 나도 이곳에서는 뭐라고 표현해야 할지 모르는 단어라서 그냥 말해봤어. 그냥 힘을 축적해둔 것이라고 이해하면 돼. 아빠는 왕을 죽이고자 하는 소망을 이루기 위해 차원의 틈바구니에 도사리고 있는 어둠을 줄곧 모아왔어. 원래 그런 힘은 질투와 원망을 하는 인간의 몸에 잘 모이기 마련이라 아빠는 그런 감정에 빠진 여자들의 유혹을 순순히 받아들였어. 그 여자들이 가진 어둠의 힘을 모으고 그 힘을 통해 길을 열어서 차원의 틈바구니의 힘을 더욱 끌어당기고...”

“젠장, 그래서 저렇게 자신의 생명을 먹이로 내줘가면서까지 왕의 목을 따겠단 말이지? 대체 네 <아빠>라는 저 놈은 페테브란트의 왕과 무슨 악연인 거냐? 듣자하니 페테브란트는 꽤나 많은 나라를 침략해서 원한을 가진 놈이야 널리고 널렸을 테지만 혈혈단신으로 저렇게 덤비는 미친놈은 처음 보았다!”

“아빠는 죽을 거야.”

질렸다는 듯이 코에 주름을 잡으며 입술을 비틀어대는 케레스키의 투덜거림에도 카이난의 모습에서 눈을 떼지 않고서 힙투비는 중얼거렸다.

“하지만 나는 아빠를 죽게 하고 싶지 않아.”


...저녁 기도시간을 알리는 티오라의 낮고도 그윽한 음이 정령원을 타고 흐른다.

카이난은 돼지들을 먹이는 일을 멈추고 축사에서 나와 울라한 폭포의 소리에 섞여서 귓가로 흘러들어오는 그 풍금의 소리에 눈을 감았다.

한적하고도 평화로운 저녁이다. 그는 언제나 이 시간을 사랑했다.

주홍빛으로 떨어지는 울라한의 폭포수와 뚜렷하게 대비되는 아름다운 월광암이 지금 이 순간은 서산으로 넘어가는 태양이 남긴 강렬한 흔적으로 인해서 함께 황금빛으로 빛이 난다.

천한 신분인 그는 단 한 번도 저녁 기도시간에 참석을 허락받지 못했지만 그래도 상관이 없었다.

그는 천천히 무릎을 꿇고 황금빛으로 물이 든 울라한 폭포를 향해 나직하게 저녁의 기도를 읊조렸다. 그러면 언제나 아름다운 정령들의 날개 소리와 맑은 숨결을 귓가에 느낄 수 있었다. 언제나 신성한 그들의 가호가 자신의 몸에도 내리는 것을 확신할 수 있었다.

비록 정령원의 다른 이들은 카이난을 읽고 쓰는 일조차 하지 못하는 어리석은 자로 알고 있었지만 그의 머릿속은 언제나 정령들과 태고의 언어로 가득 차 있었다. 그러하기에 히가.레이온의 명령에 의하여 그가 믓삼어로 기도를 올리던 날, 모두가 앉은 의자에서 굴러 떨어질 만큼 놀랐었지.

그 날은 좋았어. 모두를 놀라게 하는 일도 좋았지만 그들이 내켜하지 않는 얼굴로나마 자신을 <사제>라고 인정하고 불러주는 일이 무엇보다 기뻤다.

그 날의 별은 얼마나 아름다웠던가, 불어오는 저녁바람은 얼마나 청명했었나, 나의 기도는 또한 얼마나 평화로웠던가.

하지만 모든 것은 찰나의 순간에 불과했다.

카이난은 순식간에 사라지는 정령원의 평화로운 한때를 대신하여 검은 연기로 불타오르는 도시와 눈앞에서 내장이 비어져 나온 채 나무 기둥에 묶여있는 히가.레이온의 참혹한 모습에 곧 언제나의 악몽이 엄습해 왔음을 깨달았다.

날아드는 화살과 창이 주는 고통, 울부짖는 사람들의 저주와 공포어린 비명들. 그리고....

어두운 공간을 비추는 미약한 달빛 아래서 눈을 감고 있던 그녀.

부르르....

모든 생기가 사라져버린 그 얼굴을, 다시는 볼 수 없는 초록의 눈동자를 향해 떨리는 손을 뻗는 카이난의 앞으로 길고 검은 혓바닥을 날름거리는 어둠의 그림자가 나타난다.

검은 연기의 뱀들이 그의 육체를 단단히 감아 죄어서 그녀를 향해 뻗은 손이 그 차갑고 부드러운 살결을 만지는 일을 방해한다.

그래, 먹어라 – 나를 먹어라. 나의 생명과 나의 슬픔과 나의 분노와 나의 눈물까지도 모조리 먹어치워라.

그리고 인도하라, 나를 인도하라. 시간과 공간을 뛰어넘어 절대적인 힘, 완벽한 분노의 이름 앞에 나를 데려다 놓아라.

순간 그가 알고 있는 세상의 모습이 모조리 사라지고 카이난은 불어오는 눈보라 속에 떠있었다. 온통 검은 밤의 공간속을 하얀 화살처럼 차가운 눈보라가 쏟아져 내린다.

그리고 허공에 떠 있는 발 아래로 얼음과 눈부신 대리석의 궁전이 있었다. 그가 알지 못하는 세상이다, 그에게 속한 세상이 아닌 풍경이다.

카이난은 끈질기게 따라붙어 자신의 몸을 죄고 있는 검은 연기의 뱀들에게서 벗어나려 팔다리를 허우적거리며 보다 더 가까이 궁전으로 다가가려고 했다.

본 적도 없고 들은 적도 없는 궁전. 오로지 오래된 문헌으로만 알고 있는 그 궁전에 자신이 찾아 헤매는 존재가 있다.

자신이 손에 넣기 위해 모든 것을 바친 존재가 있는 것이다.

콰르르릉 ---

순간, 천지를 뒤흔드는 굉음과 폭음이 허공에 떠있는 카이난에게까지 충격으로 다가온다. 동시에 갈라지는 궁전의 지붕과 함께 무너지는 기둥 사이로 눈부신 불꽃이 솟아올랐다. 그리고 그 거대한 불꽃은 사람의 형태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아칸테!”

허공에 결박당한 그의 몸까지도 삼켜버릴 듯 맹렬하게 타오르는 불의 거인을 향해 카이난은 외쳤다.

“분노의 정령신 아칸테여- 나에게로 오소서!”

그의 부름이 시간과 공간을 뚫고 전해진 것일까, 궁전을 뚫고 올라와 눈보라가 치는 동토의 땅에 우뚝 선 불꽃의 거인이 고개를 돌려 허공에 결박당한 카이난을 바라보았다.

용암의 가장 깊은 곳처럼 이글거리는 빛의 눈동자에서 흘러내리는 것은 놀랍게도 눈물이다. 아니, 흘러내리는 불꽃의 붉은 빛이 마치 피처럼, 혹은 눈물처럼 보이는 것일 수도 있다.

카이난은 자신의 몸을 파고드는 검은 연기가 주는 고통 속에서도 두 팔을 벌려 필사적으로 외쳤다.

“운타가르 아칸테 피아! -분노의 정령신이여, 나에게로 임해주소서! 이 몸에 임하여 그 힘을 빌려주.....!”

순간 입으로 밀려드는 볼꽃으로 인하여 폐가 타들어가는 고통이 엄습해 온다. 카이난은 자신을 향한 불꽃의 거인의 입에서 흘러나오는 끔찍한 절규에 아픔을 이기지 못하고 귀를 틀어 막았다.

그러나 차원의 틈바구니 가장 깊은 곳에서부터 솟아올라오는 것 같은 고통의 절규는 이렇게 외치고 있었다.

<힙투비! 힙투비! 네알 세르케 다스라루티!>


“..............!”

고막을 뚫고 들어와 머릿속의 뇌수까지도 하얗게 태워버릴 것만 같은 거인의 외침에 카이난은 눈을 떴다.

비가 오듯이 쏟아지는 땀으로 얼룩진 육체에 피로 그려 넣은 주문은 흔적도 없이 사라져 있고 내내 그의 몸을 좀먹던 검은 연기도 오간 곳이 없다.

대신 투명한 빛으로 벌거벗은 그의 육체를 감싸고 있는 것은 슬픈 눈동자를 한 자신의 수호신이었다.

“에스투람....”

그는 평소와 다를 바 없는 자애롭고 단아한 미모를 지닌 정령신을 올려다보았다. 자신의 수호신의 모습을 보는 것은 참으로 오랜만이다.

어둠의 힘을 모으기 위하여 여인들과 육체적인 관계를 가진 이후부터 카이난은 의식적으로 자신의 수호신에게 기도를 드리지 않았다. 그를 청하지도 않았다.

순결을 상징하고 남녀의 아름다운 합일과 정절을 소중히 여기는 수호신을 볼 면목이 없다는 것은 어쩌면 핑계일지도 모른다. 수호신과의 교감이 높았던 만큼 언젠가는 수호신이 자신을 외면할 것이다.... 그렇다면 차라리 그 날이 오기를 바라며 그대로 방치해 두었다는 것이 더 정확한 이유일 것이다.

무엇보다 자신이 하려는 일을 그의 수호신이 받아들일 리가 없지 않은가?

“아빠를 걱정하고 있어.”

“...깨어 있었구나.”

처연한 눈빛으로 자신을 내려다보다가 서서히 밤의 대기 속으로 사라지는 정령신을 하염없이 바라보던 카이난은 조용히 들려오는 힙투비의 목소리에 무거운 몸을 움직여 회색의 수도복을 몸에 걸쳤다.

“그래서 내가 부탁을 했어.”

느릿하게 옷을 입는 그를 바라보며 힙투비는 조그만 한숨으로 말을 이었다.

“힙투비는 아무것도 못하잖아. 그래서 에스투람에게 부탁을 했어. 들어주기 어려운 부탁이라는 것은 알아. 에스투람에게는 잔인한 일이라는 것도 알고. 하지만 에스투람은 들어주겠대. 나랑 약속했어.”

“무슨 말이냐? 나의 수호신과 무엇을 약속을 했다는 거냐?”

카이난은 이맛살을 접으며 두 손을 턱에 괴고서 자신을 올망히 올려다보는 힙투비와 시선을 맞추었다.

“정령신은 함부로 계약을 하지 않아. 대가를 지불하지 않는 한 인간과는 약속을 하지 않는다는 말이다. 너는 대체 무엇을 대가로 해서 어떤 계약을 한 거냐?”

“아빠가 죽는 것은 보기 싫어.”

작은 어깨에 손을 올리고 시선을 맞추어 오는 카이난의 남청색 눈동자를 피함 없이 마주하며 소녀는 단호하게 말을 이었다.

“전에도 말했지만 그것은 아빠가 감당할 수 있는 힘이 아니야. 목적을 이루어도 아빠는 죽고 말아. 그래서 내가 부탁을 했어. 아빠를 살려달라고 했어. 아빠를 살려주면 나도 살려주겠다고 했어.”

“무슨 말인지 더욱 모르겠군. 아무리 나의 수호신이라고 해도 내가 하려는 일은 쉽게 막을 수 있는 일이 아니다. 게다가 너는 누구를 살려주겠다는 말이냐? 잘 들어라, 힙투비. 정령과의 약속은 곧 계약이다. 허튼소리나 거짓말로 약속을 하면 그 대가는 감당할 수 없는 보복이란 말이다. 너는 책임지지 못할 약속을 한 것이 아니냐?”

“힙투비는 아무것도 못해.”

엄한 눈빛으로 쏘아보는 카이난의 나무람에 삐죽 입술을 내밀면서도 소녀는 당찬 표정으로 그의 눈동자를 마주 쏘아 보았다.

“그래서 지금당장은 무리야. 하지만 약속은 꼭 지킬 거야. 내가 모든 기억을 되찾으면 지킬 수 있는 약속이니까 아빠는 걱정하지 않아도 돼.”

...네가 모든 기억을 되찾는 것은 언제인데? 그런 날이 오기는 하는 거냐?

-라는 물음으로 반박을 하고 싶었지만 카이난은 깊은 한숨으로 말을 삼켰다.

이 아이를 상대로 대화를 하는 일은 쉬운 일이 아니다. 그것은 마치 미궁 속으로 발을 들여놓는 일과 같아서 언제나 시작도 끝도 없는 지리멸렬한 대화가 되기 일쑤이지 않았던가?

대신 그는 현실적인 질문을 선택했다.

“케레스키는 정찰을 하러 간 것이냐?”

“응. 돌아올 때가 되었어. 어둠이 물러가고 있으니까.”

힙투비가 손을 들어 하늘의 달을 가리킨다. 과연 달은 상당히 기울어서 산의 봉우리에 걸려있다. 기울은 달빛으로 인해 어둠도 한층 깊어져서 벼랑 아래로 펼쳐진 군대의 불빛도 상당히 줄어들어 있었다.

이제 곧 어둠이 물러가고 푸른 새벽이 찾아 들 것이다.

“추워”

줄어든 군대의 화톳불을 확인하고 있던 카이난의 품으로 꼬물꼬물 힙투비가 애벌레처럼 몸을 웅크리며 파고든다.

“불을 피우면 적들이 알아차린다.”

“알아. 그래서 참고 있잖아. ...한 여름인데도 역시 새벽은 춥구나.”

거친 양털로 만든 카이난의 회색 수도복을 마치 담요처럼 몸에 감으며 힙투비는 앉아있는 카이난의 품에서 편한 자세를 찾아 옴죽거렸다.

그때 멀리서 들려오는 수풀을 헤치는 소리에 카이난은 뒤를 돌아보았다.

“케레스키가 돌아온 것인가?”

“여기까지 오려면 한참 더 걸려. 아빠는 귀가 너무 좋다니까.”

눈을 감고서 대답을 하며 힙투비는 본격적으로 잠을 청하듯 그의 팔에 머리를 대고 조그맣게 하품을 했다. 그의 의식이 돌아오기를 기다리며 밤새 깨어 있었던 모양이다.

“.........”

곧 새근거리며 잠으로 빠져드는 힙투비의 고른 숨소리를 들으며 카이난은 인내심을 가지고 수풀을 헤치는 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이윽고 검은 나무 그림자 사이에서 케레스키의 밝은 금발머리카락이 모습을 드러낸다.

“뭐야, 이 꼬맹이 또 자는 거야? 애들은 자면서 큰다고는 하지만 완전 잠꾸러기구만.”

케레스키는 카이난의 품에서 곤히 잠든 힙투비를 향해 노골적으로 표정을 구기며 털썩 자리에 주저앉았다.

“틀렸어, 형씨. 당신이 죽이려는 저 국왕나리는 보통 음흉한 것이 아니야.”

“왕의 천막을 찾아내지 못했나?”

“말도 마, 진짜로 죽을 뻔 했다고.”

실망스러운 표정이 역력하게 번지는 카이난의 물음에 가죽 주머니에 든 물을 벌컥거리며 게걸스레 삼키던 케레스키가 혀를 차면서 품에서 흑연으로 엉성하게 약도를 그린 양피지를 꺼내었다.

“쯧.... 여덟 개야, 여덟 개나 된다고. 왕이 머무는 것으로 짐작이 되는 막사가 여덟 개나 되더란 말이야. 그 막사들을 각각 그 뭐냐... 백인장이라고 하든가? 하여간 상급전사들의 막사가 빙 둘러서 있는데 접근조차 힘들더구먼. 그 중에서 어느 것이 진짜 왕이 머무는 곳인지는 신이든지 악마만이 알겠지. 여기, 대충 막사의 위치를 그려왔으니까 알아서 해. 검은말총 덤불이 가장자리에 잔뜩 나 있으니 그것의 그림자에 숨어서 이동을 하라고.”

“....크세투스 왕은 의심이 많은 자라는 소문이 있다. 평소에도 암살에 대한 그 정도의 대비는 기본이겠지.”

“먼발치이기는 하지만 왕을 보기는 했어.”

“왕을 보았다고?”

반사적으로 턱의 근육이 꿈틀거리는 카이난의 눈동자에 예리한 날이 서는 것을 보며 케레스키는 한쪽 눈썹을 치켜떴다.

“보면 뭘 해. 그 옆을 지키고 있는 기분 나쁜 빡빡이 중놈 때문에 접근조차 못했는데.”

“.............”

이미 예상을 했던 답이 돌아옴에 카이난은 입술 안의 속살을 깨물었다.

케레스키가 말하는 <기분 나쁜 중놈>이란 시투람 샤먼을 말하는 것이 분명하다. 왕이 그를 한시도 자신의 곁에서 떨어뜨리지 않는다는 소문 역시 사실이구나.

“그 기분 나쁜 중놈이 말이야. 왕의 주변에 괴상한 주술을 걸어놓은 것 같더라고. 내가 욕심을 내어서 조금만 더 가까이 갔더라면 틀림없이 주술의 거미줄에 걸려서 정체가 탄로나 버리고 말았을 거야.”

“...틀림없이 그랬을 거다.”

카이난은 2년 전, 샴.베스타의 왕궁에서 이공간의 구멍을 통해 보았던 시투람의 모습을 떠올렸다. 목소리만으로도 맹독을 품고 있던 그 남자. 번뜩이는 회색의 눈동자는 그 남자를 구성하고 있는 감정에 따듯함이나 자비 따위는 일말도 없다는 것을 알려주었었다.

“내가 모르기는 몰라도 그 중놈, 보통내기가 아니야. 형씨. 분명히 왕의 주변에 온갖 괴상한 주술을 걸어놓고서 보호를 하고 있는 것이 틀림이 없어. 아무리 형씨라고 해도 그 잘난 정령술을 쓰기도 전에 병사들의 창에 꼬치처럼 꿰이고 말거라고.”

“...........”

카이난은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어둠이 곧 물러갈 시간이지만 해가 뜨기 직전의 어둠이 가장 깊은 때이다. 하늘의 별들도 아직은 그 빛을 잃지 않고 있다.

그래. 새벽의 가장 깊은 어둠의 시간. 더 이상 지체할 수는 없다.

“이 아이를 부탁한다. 자유를 찾고 싶으면 이 아이를 무사히 목적지까지 데리고 가라.”

보통의 인간보다 서늘한 체온을 가진 힙투비의, 그러나 미세하게나마 전해져오는 온기를 품에서 떼어내 바닥에 눕힌 카이난은 죽은 산양을 손으로 가리켰다.

“아침이 되면 모닥불을 피워서 저것을 식량으로 삼도록 하고. 그때까지는 모든 일이 정리되어 있을 것이다.”

“어, 어이.... 설마 지금 당장 가겠다는 거야?”

놀라서 되묻는 케레스키의 당혹한 표정에 그는 단호하게 자신의 가죽가방을 가리켰다.

“여분의 식량과 지도와 여비는 저 안에 들어있다. 하지만 돈에는 정령술을 걸어두었으니 욕심낼 생각은 하지마라. 필요한 여비는 힙투비에게 얻도록 해. 그 아이만이 손을 댈 수 있도록 해 놓았으니까. 힙투비가 깨어나면 즉시 이곳을 떠나라.”

“젠장, 일처리 한번 깔끔하네. 정말로 지금 죽으러 가겠다는 거야? 이 애한테는 뭐라고 말을 해야 해? 작별 인사도 안하고 떠날 요량이야? 아, 난 애 뒤치다꺼리는 못한단 말이야. 아빠가 없어져서 애가 울기라도 하면 어쩌려고 그래?”

“............”

케레스키의 투덜거림에 카이난은 추운지 몸을 웅크리는 힙투비의 잠든 얼굴을 내려다보았다. 눈을 뜬 순간부터 한 치의 거리낌도 없이 자신을 <아빠>라고 불렀던 아이. 과거를 아무것도 기억하지 못함에도 매사가 무엇이 그리 즐거운지 자신을 졸졸 따르다가도 뜬금없이 고집을 피워대며 자신을 뜻대로 조종해온 아이.

만일 이 아이가 자신이 짐작하는 바대로 특별한 존재라면... 보이지 않는 미래를 보고, 들리지 않은 것을 들을 수 있는 아이라면 운명의 길은 계속해서 이어질 것이다.

비록 자신의 시간은 여기서 끝을 맺을지라도 말이다.

“내 운명의 길은 여기까지다. 위대한 정령신들이 이 아이의 앞길을 비춰주기를.”

“어, 어이 – 형씨!”

그 말을 끝으로 카이난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서 빽빽한 검은 수풀을 헤치고서 걸어 나갔다. 바위를 타고 넘으며 아래로, 아래로 – 군대의 불빛이 가까워지는 곳으로 다가가는 동안 그는 한 번도 뒤를 돌아보지 않았다.

돌아볼 과거는 아무것도 없다. 그의 시간은 이미 끝이 나 있었다.

다른 목숨은 필요가 없다. 필요한 것은 단 한 명의 목숨.

어둠을 헤치고 협곡의 바닥을 향하여 내려가는 발걸음 속에서 카이난의 눈동자는 오직 한 남자, 2년 전의 그날- 적의 암흑술로 열렸던 이공간을 통해서 보았던 왕의 흐릿한 모습만이 각인되어 있었다.


“....엄마를 찾아야해.”

반짝 – 검은 밤하늘의 별빛이 소나기처럼 떨어져 응집한 것 같은 빛이 나는 눈동자가 하늘을 향해 크게 열렸다.

“에? 어? 너 언제 깬 거냐?”

뒤도 돌아보지 않고서 어둠속으로 사라져버리는 카이난의 뒷모습을 바라보고 있던 케레스키는 청명하게 흘러나오는 소녀의 목소리에 화들짝 놀라 고개를 돌렸다.

어느 사이 일어나 있는 것인지 힙투비는 산봉우리에 걸린 달빛을 받으며 카이난이 내려간 어둠의 공간을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서둘러야 해. 힙투비는 서둘러야 해. 불꽃이 아빠를 삼키기 전에 운명을 붙잡아야 해. 할 수 있을까? 힙투비는 힘이 없는데 해낼 수 있으려나? 에스투람의 힘만으로 버틸 수 있을까?”

“뭔 알아듣지도 못할 소리를....야야야! 어딜 가는 거야?”

“엄마에게 가야해, 빨리!”

“너 멋대로... 인마! 들키면 우리도 죽어, 아, 말 좀 들으라고! 이 망할 계집애야!”

무서운 기세로 가죽 가방을 들어 케레스키에게로 집어 던진 힙투비가 빠른 속도로 벼랑을 내려가기 시작했다. 무거운 가죽가방을 겨우 어깨에 둘러맨 케레스키는 비틀거리는 걸음으로 소녀의 뒤를 따르며 자신을 처지를 저주하기 시작했다.

“망할! 나는 저주 받았어, 아주 재수가 옴 붙었다고! 이 망할 년놈들에게 걸리는 바람에 이게 무슨 난리야? 젠장, 젠장!”

하지만 아무리 욕설을 허공에다 내뱉어도 상황이 바뀌지는 않는다.

케레스키는 자칫 이대로 소녀를 놓쳐버릴 경우 자신에게 들이닥칠 정령의 계약을 떠올리자 온 몸에 식은땀이 솟아났다.

그는 필사적으로 발걸음을 옮기며 소녀의 이름을 외쳤다.

“힙투비! 꼬마야! 좀 천천히 가라 – 나도 내 목숨이 걸린 문제라고, 이것아!”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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즐거운 힙투비: 마지막 하이크란트 이야기 연재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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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9화 – 공격(3) NEW 3시간 전 2 0 21쪽
29 28화 – 공격(2) 24.09.19 4 0 21쪽
28 27화 – 공격(1) 24.09.18 4 0 20쪽
27 26화 - 귀신의 자식(3) 24.09.17 4 0 26쪽
26 25화 - 귀신의 자식(2) 24.09.16 6 0 21쪽
25 24화 - 귀신의 자식(1) 24.09.13 7 0 25쪽
24 23화 - 여기사, 소녀를 만나다 (4) 24.09.12 6 0 22쪽
23 22화 - 여기사, 소녀를 만나다 (3) 24.09.11 6 0 23쪽
22 21화 - 여기사, 소녀를 만나다 (2) 24.09.10 6 0 25쪽
21 20화 - 여기사, 소녀를 만나다 (1) 24.09.09 8 0 23쪽
20 19화 - 샴.베스타의 학살 (3) 24.09.06 8 0 23쪽
19 18화 - 샴.베스타의 학살 (2) 24.09.05 6 0 21쪽
18 17화 - 샴.베스타의 학살 (1) 24.09.04 6 0 25쪽
17 16화 – 전조(前兆) (3) 24.09.03 5 0 23쪽
16 15화 – 전조(前兆) (2) 24.09.02 5 0 23쪽
15 14화 – 전조(前兆) (1) 24.08.30 6 0 28쪽
14 13화 - 축복의 시간(5) 24.08.29 8 0 20쪽
13 12화 - 축복의 시간(4) 24.08.28 7 0 26쪽
12 11화 - 축복의 시간(3) 24.08.27 8 0 20쪽
11 10화 - 축복의 시간(2) 24.08.26 7 0 24쪽
10 9화 - 축복의 시간(1) 24.08.23 6 0 25쪽
9 8화 - 시녀 일레이네 (4) 24.08.22 5 0 24쪽
8 7화 - 시녀 일레이네 (3) 24.08.21 7 0 16쪽
7 6화 - 시녀 일레이네 (2) 24.08.20 6 0 17쪽
6 5화 - 시녀 일레이네 (1) 24.08.19 9 0 18쪽
5 4화 - 정령원의 비밀사제 (4) 24.08.16 6 0 23쪽
4 3화 - 정령원의 비밀사제 (3) 24.08.15 6 0 22쪽
3 2화 - 정령원의 비밀사제 (2) 24.08.14 5 0 19쪽
2 1화- 정령원의 비밀사제 (1) 24.08.13 8 0 18쪽
1 프롤로그 24.08.13 10 0 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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