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든 자들은 다 죽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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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렉디마
작품등록일 :
2024.08.27 22:57
최근연재일 :
2024.09.13 00:20
연재수 :
21 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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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
글자수 :
96,8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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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8.28 00: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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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자
10쪽

서 (序)

DUMMY

단 하나만 소중하였는데 그것을 잃으니 다 잃었다.


그런데 무림인들아.


너희는 왜 아직 살아있느냐.



***



화르륵-!


시뻘건 불길이 밤하늘을 물들였다.


불꽃 끝에서 피어난 연기가 아지랑이처럼 날아 곳곳에 뿌연 안개를 만들었다.


불길과 안개는 구름 같았다.


아무리 멀리 달아난들 하늘을 올려다보면 구름은 여전히 그곳에 머무르듯, 피할 수 없고 외면할 수조차 없는 처참한 광경들이 어디에나 펼쳐져 있었다.


잘 꾸며진 정원을 화마(火魔)가 불태웠다.


예쁜 노란색 꽃이 불에 탄 종이처럼 스러졌다.


누백 년이나 뚝심 있게 자라온 거목이 뿌리부터 가지, 잎사귀에 이르기까지 남김없이 타올랐다.


소담한 돌담으로 이룬 연못이 도망치지도 못하고 겁먹어 불에 그슬렸다.


그 속에서 한 청년이 노래를 흥얼거렸다.



명월기시유(明月幾時有)

밝은 달아 언제부터 떴니


파주문청천(把酒問靑天)

술잔 들고 파아란 하늘에 묻지


부지천상궁궐(不知天上宮闕)

하늘 궁궐에서는


금석시하년(今夕是何年)

이 밤이 어느 해려나



송나라의 시인 소동파가 아우 소철을 그리며 지은 노랫말이리라.


흰 자수가 수놓아진 붉은 무복 차림에 검을 쥔 청년은 수려한 외견과는 달리 노래 솜씨가 영 신통찮은지 같은 구절을 몇 번이나 조금씩 다르게 불러가며 음을 맞췄다.


마치 저가 기억하는 곡조를 정확히 찾아내려는 듯한 모습이었다.


그리고 멀리서 비명이 들려왔다.


“아아악!”


사내 대여섯이 불길에 휩싸여 무너지는 전각을 피해 달려오고 있었다.


저마다 피를 흘리고 팔다리가 떨어져 나가 참혹한 몰골이었다.


노랫가락을 멈춘 청년은 무심한 눈초리로 그들을 보며 정원을 가로질러 나아갔다.


붉게 칠하여 화려한 대문간에 기대선 그가 검을 어깨로 비스듬히 올리곤 툭툭 두드렸다.


도망치던 사내들은 그제야 놀라 눈을 부릅떴다.


다음 순간 청년이 검을 휘둘렀다.


“커헉!”

“끅, 으윽······.”


가슴팍이 쩍 갈라진 시체들이 땅에 누웠다.


이미 묻어있던 피를 바람결에 씻어낸 검이 개운해하듯 떨렸다.


청년이 입은 무복에는 붉은 바탕이 한층 진해지고 흰 자수가 줄었다.


아니, 자세히 보면 본래는 흰색 무복이다.


붉은색은 모두 피였다.


방금 죽인 자들에게서 튄 피가 옷감에 스며들어 흰 자수가 느리게 이지러졌다.


용케도 숨이 끊어지지 않은 사내가 쓰러진 채로 그를 노려보며 절규했다.


“협귀······ 어째서!”


월하협귀(月下俠鬼).


무림에서 청년을 일컫는 별호였다.


달 뜨는 밤이면 홀연히 찾아오니 월하(月下)다.


사마외도와 죄지은 자만을 처단하므로 협귀(俠鬼)다.


아무도 그를 모른다.


연원을 짐작하기 어려운 독문무공을 사용하는 데다 무림인들과 일절 교분을 맺지 않았기 때문이다.


신출귀몰하게 움직이며 제 목적을 달성하고 떠나는 그를 목격한 사람조차 드물었다.


하늘이 내려준 것이라고밖에 설명되지 않는, 기이하리만치 뛰어난 무재와 잔혹성만이 그의 존재를 증명했다.



협귀에게 함부로 무공을 내보이지 말라.

그가 들여다볼 것이다.


목숨을 구걸하지 말라.

부질없는 짓이다.


만나지 않기만을 소원하며, 노랫말 없이 서툰 곡조가 들리거든 자리를 피하라.

운이 따라준다면 살 터이니.



사파 무림에 널리 알려진 경구였으나 이 장원에 온 무인들은 운이 좋지 못했다.


노랫가락이 들려왔을 땐 벌써 불길이 치솟으며 협귀가 검을 휘두르고 있었다.


불에 타 죽거나 검에 베여 죽거나 둘로 나뉠 뿐이었다.


스스로 선택하지도 못하고 후자를 맞이하게 된 사내가 애원했다.


“사, 살려다오. 무엇을 원하느냐. 은자라면 얼마든- 컥!”


목이 꿰뚫린 자의 핏줄기가 청년의 옷을 적셨다.


이제 옷감에서 흰색이 드물건만 그는 신경도 쓰지 않고 노래했다.


아까 다하지 못한 소동파의 수조가두(水調歌頭, 노랫말)였다.



아욕승풍귀거(我欲乘風歸去)

바람 타고 돌아갈까 해도


우공경루옥우(又恐瓊樓玉宇)

아름다운 달 선궁은


고처불승한(高處不勝寒)

높아서 추울 것 같아


기무농청영(起舞弄淸影)

일어나 춤추며 맑은 그림자와 노나니


하사재인간(何似在人間)

사람 사는 세상도 좋아라



서걱- 푸욱!


겁화(劫火)로 타오르는 장원을 거닐며 그는 검을 떨쳤다.


도망치는 자.


겁먹고 다친 자.


독기를 품고 덤비는 자.


전부 죽였다.


마침내 사방을 둘러봐도 산 사람이 없었다.


청년의 옷자락이 온통 붉었다.


그때 날카로운 기운이 등 뒤에서 날아왔다.


“과연 제법이구나. 듣지 못했을 터인데······.”


돌아보지도 않고 내디딘 걸음으로 피하니 누군가가 검은 연기를 헤치고 다가왔다.


은색 수실을 매단 창을 쥔 청수한 인상의 중년인이었다.


“내가 심무진이다.”


탈혼섬창 심무진.


사파 최대 세력인 사도련에서 일개 무력단체의 수장을 지냈던 자다.


협귀가 오늘 명줄을 거두기로 마음먹은 사내이기도 했다.


두려워하는 기색이라곤 없이 주위를 둘러본 심무진이 혀를 차며 말했다.


“악귀놈이 많이도 죽였어.”


팔 할 이상의 승산을 점치기에 자신감이 넘치는 어조였다.


장원과 수하들을 희생시키면서까지 기회를 엿보았다.


협귀의 무공 수위는 자신과 거의 대등했으되 일류급 사파 무인을 수십이나 참살하느라 지쳤을 터.


강호에 널린 허섭스레기들이야 놈을 천재라 경외하나 무의 재능이라면 이쪽도 만만치 않다.


쳐죽이지 못할 까닭이 없다.


“네 사문이나 밝히고 가거라. 본련의 동도들에게 일러주고 싶으니.”


승리를 확신하는 조롱에 청년은 대꾸하지 않았다.


그저 부르던 노랫가락을 마저 읊었다.



전주각(轉朱閣)

붉은 집 돌아서


저기호(低綺戶)

비단 창문에 드리우니


조무면(照無眠)

환해서 잠이 안 오네



“시건방이 하늘을 찌르는구나!”


대로해 일갈한 심무진이 창을 내질렀다.


고강한 내력에 날랜 움직임이었다.


순식간에 십여 합을 겨루며 청년의 붉은 무복이 잘려갔다.


명백히 불리한 상황에도 그는 계속해서 흥얼거렸다.



불응유한(不應有恨)

원망도 없으면서


하사장향별시원(何事長向別時圓)

왜 이별할 때면 둥글까


인유비환이합(人有悲歡離合)

사람은 슬프거나 기쁘고 헤어지거나 만나고


월유음청원결(月有陰晴圓缺)

달은 흐리거나 맑고 차거나 기우니


차사고난전(此事古難全)

원래 늘 좋기는 어려운 일이야



그리고 검과 창이 맞부딪친 횟수가 백 번을 넘어설 즈음.


청년이 처음으로 노래 이외의 말을 담았다.


“창궁(蒼穹), 화우(花雨).”


피싯!


소리도 없이 날아들던 창이 허무하게 스쳤다.


금강석을 두부처럼 갈라낼 기운이 검에 닿자마자 사그라졌다.


믿기지 않는 기사에 경악하며 심무진은 똑똑히 봤다.


적의 가라앉은 두 눈동자에서 귀기 어린 붉은빛이 흘렀다.


“뭣······ 커흑!”


협귀가 신묘한 동작으로 검을 그었다.


일격에 푸른 창날이 잘렸다.


다음으로 은빛 창대가 썩둑 잘렸다.


오른팔이 잘리고 왼팔과 양쪽 허벅지가 단번에 갈라졌다.


사지에서 피를 쏟으며 뒷걸음질한 심무진이 무릎을 꿇었다.


검신에 묻은 피를 털어내곤 청년이 말했다.


“호풍(呼風), 단문(斷門), 복마(伏魔), 분광(分光), 운룡(雲龍), 오행(五行), 양의(兩儀)······ 많이도 훔쳤네.”

“그걸, 어떻게······.”


고통조차 잊은 심무진이 멍하니 물었다.


창궁이란 남궁세가를 말한다.


화우란 사천당가를 말한다.


호풍이란 제갈세가를 말한다.


단문은 팽가이며 복마는 공동파다.


분광과 운룡은 각각 점창과 곤륜이다.


오행과 양의는 화산파와 무당파를 뜻한다.


그리고 몇 곳을 더하여 정사를 막론하고 도합 열여덟 문파.


심무진의 창법에는 그들에게서 은밀히 훔친 묘리가 녹아들어 있었다.


하지만 무슨 수로 알았단 말인가.


내릴 수 있는 결론이 하나임에 심무진이 부르짖었다.


“네놈! 무황성의 끄나풀이었더냐!”


아니라면 어찌 알아챘을까.


구파일방과 오대세가를 아우르는 정파 무림의 태양, 무황성.


그곳에서 키운 비수가 아니라면 결코 몰라야만 한다.


인정할 수 없었다.


고작 일백여 합에 탈혼섬창이 평생을 일군 무학을 꿰뚫어 보았다고는.


저 새파랗게 젊은 놈의 무재가 자신을 아득히 능가한다고는.


원했다면 절반의 격돌로도 승부가 났으리라고는.


검을 쥐고 청년이 다가왔다.


죽음을 예감한 심무진이 물었다.


“너는 무엇이냐. 어째서······.”


이유를 알고 싶었다.


사마외도의 무인들을 죽이는 이유.


심무진 자신을 노린 이유.


청년이 아름답게 웃었다.


“네가 칼을 들었기 때문이야.”


칼이란 무인들의 은유였다.


무공으로 타인을 해하는 힘.


역겨운 대답에 심무진이 피를 토하며 조소했다.


“으하하! 무황성의 어린 졸개야. 그러는 너희는 칼을 들지 않았더냐? 알량한 위선이 우습구나! 북해와 남만은 어떠한가. 천산의 마교는 어떠하고 주 씨의 황실은 어떠한가. 멀고 강하다 하여 거리낄 테냐. 감히 그들의 칼까지 다 부러뜨릴 용기가 있겠느냐!”


푸욱!


검 끝이 심장을 찔렀다.


시야가 흐려지는 가운데 청년이 답했다.


“할 거야.”


심무진은 희미하게 알았다.


놈의 선언에는 한 점 거짓도 없었다.


그러나 원통하기에, 잘리지 않은 왼팔의 검지를 뻗어 단말마의 저주를 남겼다.


“네놈도, 칼을······.”


휘오오오-!


찬 바람이 몰아치며 불길을 부추겼다.


장원을 걸어 나오며 청년은 하늘을 바라봤다.


보름이라 달빛이 환했다.


떨어져 있는 아우를 그리워하며 소동파가 읊었던 노랫말의 마지막 구절이 그의 입에서 흘러나왔다.



단원인장구(但願人長久)

다만 우리 오래오래 살면서


천리공선연(千里共嬋娟)

천 리를 떨어져도 고운 달빛은 함께하기를



잘 떠오르지 않는다.


귓가에 울리던 맑은 목소리도.


함께 불렀던 사람의 얼굴도.


무림을 지워 없애겠다는 그날의 다짐만 저 달처럼 선연했다.


작가의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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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 (序) 24.08.28 557 5 10쪽
1 정천리격문 (訂天理檄文) 24.08.28 651 7 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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