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든 자들은 다 죽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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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렉디마
작품등록일 :
2024.08.27 22:57
최근연재일 :
2024.09.13 0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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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9.01 00: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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빛나는 달 (6)

DUMMY

“갈수록 짐이 될 거예요.”


그날 밤을 떠올린다.

어쩌면 자결할지도 모를 순간이건만 격정 없이 내 마음만을 들여다보던 눈길이었다.

오늘은 더욱 명확히 설득한다.


“지금이라면 성을 나가실 수 있어요. 둘 중 한 명은 사는 게 낫고요.”


거짓으로 훗날을 기약하지 않는다.

나를 떠나보낸 즉시 목숨을 단념할 작정이다.


정도 십오문의 포위를 돌파할 내게 인질이란 약점은 불필요하다는, 차갑고 논리정연한 최선.

지금껏 계속 고개를 끄덕인 나는 마침내 부정했다.


“아니야.”


손을 감싸 단검을 내려뜨렸다.

아직은 나보다 작은 몸을 끌어안고 일렀다.


“우리 동생이 잘못되면 내가 이 세상에 남아있을 이유가 없어지는걸.”


똑똑한 아이니 이해하겠지.

힘껏 전하는 애정이자 생을 도외시한 협박이다.

날 살리고 싶다면 너도 살아야만 해.

조금 더 욕심을 부려서······ 나는 죽더라도 너만은.


맞닿은 살결이 따스하고 침묵은 간절했다.

옅은 숨소리만 내며 안겨있던 화월이 약속한다.


“알겠어요. 혼자 남을 때까지 기다릴게요.”


단 한 번도 내게 거짓으로 대답지 않은 아이다.

맞이할 결말을 예감하기에 한시적인 유예로 따라줬다.

아무리 안간힘을 쓴들 버티지 못해 이별할 날이 오리라고.


“고마워.”


그거면 충분하다.

나도 포기할 생각은 없어.


“밤새 깨어 있었는데 피곤하지? 조금 잘래, 아니면 아침 만들어줄까?”

“괜찮아요.”


일부러 밝게 물으니 화월이 앞장서서 문을 열고 들어갔다.

이내 발길이 향한 부엌엔 정갈한 음식상이 차려져 있다.


“언제 만들었어?”

“인시(오전 3시~오전 5시)에요.”


망(望, 보름)의 빛무리를 보고 장원을 나섰지만 그 전에 준비해뒀단다.

식사도, 이부자리도, 그 외 약재와 몸을 씻을 더운물까지.

내가 돌아오면 편히 휴식하도록.


“피곤하실 텐데 주무실래요, 아니면 씻고 식사하실래요?”


기뻐하듯 시선을 올려다본 화월이 묻는다.

조금 잠겨오는 목을 내색하지 않고 나는 답했다.


“······배고프네. 우리 착한 동생이 차려준 밥 먹을래.”


이어진 나흘째는 새벽의 싸움이 무색하게 평온했다.

식사하고, 씻고, 치료하고, 내공을 다스리고.

그제야 눈가에 어둑하니 그늘이 진 화월을 재웠다.


아이는 깊이 잠들었으나 나는 한 시진마다 깨어나서 결계를 보강하며 어느덧 신시(오후 3시~오후 5시)였다.

입신경과 어검술을 상정해 대책을 새로 마련할 테니 오늘은 습격이 없으려나.


새근새근 숨을 내쉬다 가끔 뒤척이는 동생의 머리칼을 쓰다듬어본다.

위전을 마쳐 후환까지 정리하면······.


“북경으로 갈까.”


이소청과의 연을 단절할 수 있을지는 의문이라도 거처를 옮기는 일은 가능하겠지.

몇 년은 강호 무림에서 멀어져 조사할 계획이었다.


화월의 본래 성씨가, 정말로 주(朱)인지.

이 나라 대명국 황실의 혈손인지.


“십이 년······.”


항상 지니고 다니는 옥가락지를 매만지며 되뇐다.

알려진 바와 달리 우리는 친남매가 아니다.

오래 지났지만 선연한 기억이다.


십이 년 전 이맘때.

내겐 탄일(誕日, 생일)이자 달이 밝은 중추절 밤.

화월과 처음 만났다.


***


태어나 자란 마을은 평화로웠다.

외딴곳이라 왕래가 적고, 땅은 비옥하여 인심이 넉넉했다.

소탈한 일상에 즐거워하는 사람들이었다.

굳이 골칫거리를 꼽자면 내게 어미가 되는 이였을까.


아비는 외지인이었다.

과거 시험에서 연거푸 낙방하자 고향 땅을 밟기가 부끄러워 떠돌던 자였다.

내 어미가 나를 낳기도 전 달아났다.


아비에게 받은 거라곤 은 씨 성과, 서천이라는 자가 대신해 더는 불리지 않는 이름뿐이었다.

어미에게 받은 거라곤 원망뿐이었다.


학대는 아니었다.

딴엔 학대할 요량이었으나 당사자인 나로선 시들했으니.

아비도, 어미도, 부모라고는 여기지 않았다.

패륜으로 들릴지언정 단지 가교였다.


어미는 내가 아홉 살이던 여름에 도망쳤다.

상실감이나 슬픔이 없었다.

혈연을 끊어 택한 길이라면 안녕하길 잠시만 바랐다.


자식에게 무관심하던 어미라 사라져도 생활은 그대로였다.

차라리 가족에 가까웠던 마을 사람들의 도움으로 나는 커나갔고, 열한 살이 되었다.


우연이었다.

달구경을 하고자 내가 바깥을 거닐던 것도.

황금빛 포대로 감싼 갓난아이를 안고 죽어가던 여인이 나를 발견한 것도.


<추적······ 누구도 모르니······ 성년, 황도(皇都)······ 이걸->


띄엄띄엄 말한 그녀가 맑은 가락지를 건네주었다.

포대를 벗기곤 갓난아이를 내 품에다 안겼다.


<귀명(貴名)은······.>


아이 이름을 일러주지 못한 채 여인은 죽었다.

직후 신비로이 치솟은 불길에 모두 타올랐다.

그녀의 육신도, 금빛 포대도.


흔적을 지우려는 호위무사의 마지막 충정이었을까.

실은 그보다 깊었을까.


나는 세상모르고 잠든 아이를 바라봤다.

고민하지 않고, 결심하지도 않고, 그저 당연한 순리처럼 정했다.

이 아이를 돌보겠다고.


지금 와서 돌이키면 겹쳐본 마음이리라.

가족도 이름도 잃어버린 아이.

여기 서 있는 나와 닮았다고 느꼈다.


이젠 둘이 되었다.

이름을 지어주고 싶었다.


<화월(華月)······.>


밤하늘 빛나는 달이 환했다.

은화월(殷華月).

네 이름이야.


그리고 아이가 눈을 떴다.

꼭 의아해하듯이 나를 마주 보다가, 말갛게 웃었다.

왠지 구원받았다고 생각했다.


<어머나, 그 애는 누구니?>

<누가 산에 버리고 갔나 봐요.>

<못난 자들이 그리한다더니 어쩜 좋을까. 가엾어라······.>


아이를 본 마을 어른들이 호들갑을 떨었다.

측은해하고 어느 집에서 데려갈지 의논하는 광경이었다.

다시금 잠이 든 아이를 토닥이며 나는 일렀다.


<제가 키울게요.>

<키운다고? 너도 어린데 어떻게->

<걱정 마세요.>


당황한 그들에게 확고히 말해줬다.


<오늘부터 제 동생이에요.>


네가 지어준 웃음이 답했으니까.

이곳에서 삶의 이유를 찾지 못한 나지만, 널 위해서라면 살아갈 수 있겠다고.


***


동생을 키우는 일은 쉽지 않았다.

신기할 만큼 얌전하고 순한 아이라며 마을 아낙들이 감탄했으나 나는 매사가 조심스러웠다.


<배가 고프니? 바람 쐬러 나갈까?>


우는 적이 드물었다.

안아주면 방긋이 웃거나 편안하단 표정을 짓곤 했다.


내가 널 제대로 돌보고 있는 걸까.

확신할 수 없어서 불안했다.

불안함보다 훨씬 많이 행복했다.


<우- 즈아! 우······.>

<즈아? 아하하, 날 부른 거야?>


모든 순간이 기적처럼 좋았다.

옹알이하고, 스스로 뒤집고, 일어나고, 걷고, 말하고.

모든 게 빨랐지만 그러지 않더라도 좋았다.


너는 아마도 천재고, 주 씨였고, 내 동생이야.

세 번째만이 중요했다.


이 작품은 어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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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 빛나는 달 (7) 24.09.01 178 0 10쪽
» 빛나는 달 (6) 24.09.01 186 1 7쪽
7 빛나는 달 (5) 24.08.31 204 0 9쪽
6 빛나는 달 (4) 24.08.30 203 0 7쪽
5 빛나는 달 (3) 24.08.29 231 1 10쪽
4 빛나는 달 (2) 24.08.28 299 3 9쪽
3 빛나는 달 (1) 24.08.28 351 2 9쪽
2 서 (序) 24.08.28 556 5 10쪽
1 정천리격문 (訂天理檄文) 24.08.28 651 7 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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