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든 자들은 다 죽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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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렉디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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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8.27 22: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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빛나는 달 (16)

DUMMY

***


정통(正統) 12년 8월 15일.

북경의 중추절은 올해도 성대하였다.

이 나라 대명국 황실이 거한 자금성에선 더더욱.


“풍악을 울리시오!”


악공들의 연주에 아리따운 무희들 춤춘다.

밝은 달빛이 드리우며 펼쳐진 낙원.

흥겨운 눈길로 그리 바라보던 황제 주기진이, 오늘 열세 살 탄일을 맞이하여 봉호를 받은 소녀에게 물었다.


“영명(永明)은 잔치가 즐거우냐?”

“물론이옵니다.”


그녀, 황실의 핏줄이니 성씨는 주(朱)고 휘는 청혜(淸慧)다.

선황께서 승하한 해 태어난 유복녀.

하늘 사람처럼 어여쁜 용모에 일찍부터 기품을 갖춘 성정이 다소곳한지라 황제가 무척 아끼었다.


기실 오늘 연회가 이토록 거창함도 동복누이의 탄일을 축하하는 연유라.

흐뭇해한 정통제가 일렀다.


“네 책봉도 마쳤으니 곧 하가(下嫁, 공주의 혼인)를 돌볼 차례인데······.”

“일전 영명에게 듣길 아무래도 폐하의 품을 떠나고 싶지 않다더구려.”

“하하! 그렇습니까?”


황태후와 황제의 대화에 모두 웃음을 짓는다.

황후도, 회임하여 두어 달 뒤 아들을 낳을 가능성이 높다는 후궁 주(周) 씨도, 선황이 총애하던 부인 한 씨도, 정통제의 배다른 동생 주기옥도.

영명공주가 부끄러운지 조용히 답했다.


“폐하의 큰 뜻일진대 어찌 따르지 않겠나이까. 다만 궁에서 오래도록 어른들께 기쁨이 되길 바라옵니다.”

“그래, 나 역시 떠나보내기가 아쉽도다. 천하제일의 혼처를 찾을 때까진 어림도 없지.”


다시금 화기애애한 순간이다.

표리부동 마음의 칼 숨기는 황궁이되 영명 앞에서만은 다들 긴장을 늘어뜨리니.


그리고 그는 숨죽여서 듣고 있었다.

연회장을 호위하는 황도제일고수, 군신황검 우겸.


올해가 지천명(知天命, 50세)이다.

선대 영락제부터 벼슬을 살았으며 군부 내에선 충무공 악비 이래 제일무재라 칭송받았다.

십여 년 전 입신을 깨우치고, 현재는 군을 총괄함과 동시에 황제 직속의 친위대인 금의위 수장.


한마디 문장으로 그의 무공과 충심을 설명하리라.

주 씨조차 처단하여 황실을 지킬 칼이라고.


‘덧없구나.’


푸른 달 빛무리 올려다본 우겸이 한숨을 읊조렸다.

가슴이 막힌 것처럼 괴롭고 답답하기에.


천하의 가장 존귀한 신분으로 두려움이 없는 황제.

그를 잘 따르는 누이동생.

적어도 겉으로만은 웃음 가득한 황실.

그러나 저들이 본디 타고나지 못한 영광을 누리고자 희생되어야 했던-


‘잊어라.’


치밀어오른 울분을 다스리며 되뇐다.

잊어야 한다.

이미 죽었다.

살아있는 자신은 주어진 대로 황실을 지키는 검에 충실하면 그뿐이다.


부끄러움을 모르고.

원수를 갚을 줄도 모르고.

오늘까지 연명해왔던 것처럼.

바로 그때였다.


스아아아아아-!

멀리서, 아주 멀리서 빛이 일었다.

눈부신 은광이 밤하늘로 올라서듯 솟구쳐 저 머나먼 보름달까지 향했다.


“헉!”

“무슨 변고인가······.”


무희들이 겁먹고 춤사위를 멎었다.

악공들도 손을 멈추니 음악이 잦아들었다.

연회에 참석한 신하들이나 황족들도 놀라긴 매한가지.

우겸은 빛이 사라져간 방향을 살폈다.


‘백 리 바깥.’


북경 외곽을 기준으로 삼은 거리다.

이곳 자금성에서는 이백 리가 훌쩍 넘으리라.

한데도 선명히 보일 만큼 아득한 빛이었다.


“흐음? 우 공(公).”

“부르셨사옵니까.”


쉬익-!

고개를 갸웃하던 황제의 부름에 발 구른 순간, 우겸은 이미 수십여 장을 격하고서 부복해 있었다.


“방금의 빛은 무엇이오.”


확실치는 않되 짐작해본다.

과거 강호행으로 황도에 들러 우겸 자신과도 마주친 무인.

지금은 무황성 추격대와 싸우는 중일 서천검월과 관련한 빛이겠지.


“나흘 전 폐하께 보고드린 일로 사료되옵니다.”

“아, 서천검월 말이군. 이소청이 척살을 명했다더니 용케도 여즉 살아있구려.”


정통제가 별로 대수롭지도 않게 일렀다.

나라를 수호하는 군인이자 입신 고수인 우겸은 신경을 쓰는 일이었으나 황족에게 무림은 별세상 이야기니.


관과 무림이 서로 멀리하길 관무불가침.

이쪽에서 억압하지 않는다면 그쪽도 감히 넘보지 않는다.


우습다.

천하가 대명이거늘 시정잡배들이 칼 차고 활보하는가.

어처구니없을 노릇인데 황제는 그걸로 족한 듯했다.


귀하게 태어나 제 위협이 되는 두려움을 모르며, 그것이 포부의 크기까지 담보하진 않는다.

그저 귀하게 자란 철부지일 뿐이다.


“짐이 생각기로 그대의 무위와 견줄 빛이던데 맞소?”

“올바른 판단이옵니다.”


신을 엿보는 경지.

하늘이 허락하여 제때 이르렀으리.

철부지께서 호승심처럼 말한다.


“입신이라······. 내 국사가 바빠 소홀했으되 심공을 갈고 닦았다면 길이 열렸을 터.”


대명국 주 씨는 대대로 무재가 뛰어났다.

태조 주원장은 단지 입신을 넘어 상천현계를 둘까지 연, 무후팔존의 일곱 번째 자리에 등극한 절세고수였다.

황실의 피를 이어받은 자 누구라도 예외 없이, 태조가 남긴 호흡법을 의무적으로 익혀야 했고.


황족 중에서 주원장 다음가던 고수는 영락제 주체.

마찬가지로 입신에 올라 조카의 황위를 찬탈하였다.

그의 손자인 선황 주첨기도 젊은 시절부터 강기를 구사하는 무인이었으니.


해서 대장군은 읽어냈다.

심공과 입신을 거론하는 황제의 말은, 제 윗대를 우러러 따르긴커녕 일류조차 아닌 부끄러움을 숨김이라.

그마저도 자각이 없어 한탄스러운 작자가 경멸감을 삼킨 우겸에게 물었다.


“서천검월이 입신에 들었다면 황도까지 올 수 있겠소?”

“가능할 것이옵니다.”


추격대 절정고수가 반백 명.

무의미하다.

정녕 입신이라면 깨달음이 완전치 않아 상천현계를 열지 못한들 도주쯤은 쉽다.


“그렇단 말이지······.”


혼잣말로 고민하던 황제가 명했다.


“알겠구려. 무재를 증명한바 이쪽도 성의를 보여야겠지. 우 공이 가서 데려오시오.”

“하오나 소신이 자리를 비우기엔-”

“괜찮소. 그대 하나 없더라도 백절의 절반이나 궁을 지키니 무에 걱정일까. 괘념치 말고 다녀오시오.”

“······명을 받드나이다. 다만 심려하여 화신을 남겨둘 테고, 서천검월이 응하지 않는다면 어찌하리까.”


정도 십오문의 추격을 무산시킬 곳이 필요했을 터.

입신경에 올랐으니 천하도 자유로움이다.

황제가 피식 웃었다.


“그대를 믿소.”

“존명.”


타앙!

우겸이 하늘로 날아올랐다.

한데 어슴푸레 서린 인영이, 그가 떠난 대지에도 여전히 발 디디고 있다.

이형환위의 극에 이른 만재(萬在).


그리고 멈추었던 풍악이 흐를 때였다.

문득 영명공주가 일렀다.


“기이한 빛이옵니다.”

“어딜 말이더냐?”


황제가 의아해하며 고개를 올렸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다.

달빛 비추어 내리는 밤하늘뿐.

길흉을 가늠하듯 미동 없는 누이를 오라비가 다독였다.


“우 공이 갔으니 알아볼 터이니라. 영명은 안심하고 연회를 즐기려무나.”

“송구하옵니다, 폐하.”


공손히 답한 영명공주가 느리게 시선을 거두었다.

한순간이나마 보았다.

처음의 은광보다 작은, 별보다도 희미한 빛이 저 멀리서 건너오는 모습.


꿈결처럼 사라졌으나 어쩐지 눈을 떼기 어려웠다.

마치 무언가를 예감한 듯이.


“황제 폐하 만세-!”


연회장에 웃음소리가 감돈다.

영명공주는 다시 지루한 잔치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북경을 넘은 외곽.

서둘러 날아가던 우겸은 자그만 빛을 목도했다.

입신경의 절대고수인 그는 어둡고 멀지만 파악한다.


어검비행.

서천검월이 먼저 보냈으리라.

큰 칼에 타고 양손으로 창을 쥔······.


‘아이?’


우겸이 눈을 부릅떴다.


***


사아아아아-

빛이 일었다.

모조리 사라졌다.


호북성 출신의 절정고수 섬류도객 악위룡.

그는 자신의 도강이 흔적도 없이 사라지는 광경을 보았다.


강서성 출신의 절정고수 낙일검 고원.

그도 자신의 검강이 빛 너머에서 사라지는 광경을 보았다.


화산파 매화검수 단목연.

그녀가 펼친 소요대라검이 봄바람에 날리듯 소멸했다.


무당파 장문제자 현청.

그가 펼친 태극혜검이 자연으로 돌아가듯 흩어졌다.


파아아앗!

저들뿐만이 아니다.

오십 절정고수의 강기공이 모두 사라지고 말았다.

그리고 위맹한 기운들이 걷힌 자리에 서 있다.


강호제일기재 은서천.

공격을 맞닥뜨리기 직전과 같이 상아검을 들고서.

다만 절정고수들은 침묵하면서도 의문을 되뇌었다.


‘상천현계?’


나직한 목소리였으되 분명 들었다.

상천현계 시공월이라고.

허세를 부린다고 통할 상황도 아니었으니 사실이겠지.

방금 무공이 서천검월의 입신 상천현계이리라.


해서 의아하다.

경악보다는 물음이 앞설 만큼 의심스럽다.

너무 강해서가 아니라······ 반대로 너무 약하기 때문에.


‘무재에 비해 보잘것없도다.’


누군가가 떠올린 평이 대다수의 생각이었다.

다른 사람도 아니라 은서천이거늘.


장래 입신경은 당연지사.

두 번째 현계를 열어 무후팔존의 칭호를 여덟에서 아홉으로 바꾼들 놀라우랴.

나아가 스승 이소청이 그러했듯 삼계에 들지도 모른다고 온 강호가 경외시한 만고기재건만.


겨우 이따위였는가.

무극은 고사하고 혼안과 만재에도 못 미칠 현상이······.


물론 대단하다.

절정고수와 맞선다면 승리를 자신할 힘이다.

그러나 한편으론 미약하다.


특별한 공능이 아닌 호신강기의 확장.

성을 나설 때, 그리고 아까 동생을 탈출시키고자 발현한 빛무리와 별반 다르지 않다.


‘이길 수 있다.’


혼자로는 버겁겠으나 오십 명이다.

상천의 내력인들 무한할 리 없어 강기로 몰아붙인다면 결국 죽이리라.

그래서-


“겁먹지들 마시오!”


누군가의 외침을 시작으로 모두가 손발에 힘을 모았고.


“쳐라!”


또 다른 외침을 시작으로 모두가 서천검월을 향해 달렸고.


“허억!”


스아아아앗!

홀연히 빛난 강기공에 모두가 대경하며 멈췄다.


호북성 출신의 절정고수 섬류도객 악위룡은 생각했다.

나를 가로막은 이 기운은, 사라졌던 내 도강이라고.


강서성 출신의 절정고수 낙일검 고원은 생각했다.

낙일검을 잘라낸 이 기운은, 사라졌던 내 검강이라고.


화산파 매화검수 단목연은 생각했다.

봄바람에 날린 소요대라검이, 다시 내 앞에 나타났다고.


무당파 장문제자 현청은 생각했다.

흩어졌던 태극혜검이, 다시 내 앞에 나타났다고.


저들뿐만이 아니다.

오십의 절정고수 모두가 확신했다.

내게 날아든 강기공은, 다른 누구도 아니라 나 자신이 자아냈던 힘이라고.


시간과 공간조차 넘어서.

어딘가에 간직해두었던 힘을 현세로 되돌려낸 것처럼.


종전과 비할 수 없이 두려움을 닮은 침묵이 일었다.

이해하지 못하고 설명하지 못한다.

다만 경악스럽도록 신비로운 현상이었다.

그리고 누군가가 깨닫고 말았다.


“여의검은?”


추격대 최고수로 어검술까지 운용하던 검후 심옥진.

그녀는 강기공만 펼치지 않았다.

서천검월의 목숨을 거두고자 애병을 쏘아냈다.


한데 나머지 절정고수들과 달리 한 발자국도 움직이지 않은 그녀는 지금, 어째서 검 없이 빈손인가.

주인의 뜻을 받드노니 응당 회수했어야 할 여의검은 어디로 갔는가.


슈아아아악!

허공에서 내려온 빛.

무정검후의 발아래 한 자루 검이 꽂혔다.

강호팔대명검 여의였다.


“상천······.”


누군가가 당혹해 중얼거렸다.

오십의 절정고수가, 추격대 삼백 명 전원이, 도무지 불가사의한 기현상에 저도 모르게 뒷걸음질했다.


그리고 유일하게 멈춰선 자.

무정검후 심옥진은 조용한 경악으로 이를 악물었다.


이 자리에서 홀로 실감하기에.

서천이 얻은 상천현계의 진신을.


‘시공간을 넘나드는 힘······!’


실로 경이롭다.

그녀가 알기로는 만재와 혼안보다 낫다.

여타 현계를 반 수가량 앞서는 천마신공의 지옥현계 이상.

언젠가는 천하제일 무극에 준할 초능이리라.


이윽고 말이 들려왔다.

고요히 적들을 응시하던 강호 무림의 새로운 절대고수.

서천검월이 아름답고도 당당하게 명한다.


“그대들, 이제 칼을 거두어라.”


이 작품은 어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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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 빛나는 달 (19) 24.09.13 87 0 9쪽
20 빛나는 달 (18) 24.09.12 85 1 15쪽
19 빛나는 달 (17) 24.09.11 89 1 12쪽
» 빛나는 달 (16) 24.09.10 102 1 12쪽
17 빛나는 달 (15) 24.09.09 109 0 10쪽
16 빛나는 달 (14) 24.09.08 114 0 10쪽
15 빛나는 달 (13) 24.09.07 130 0 9쪽
14 빛나는 달 (12) 24.09.06 132 1 10쪽
13 빛나는 달 (11) 24.09.05 145 1 11쪽
12 빛나는 달 (10) 24.09.04 156 1 20쪽
11 빛나는 달 (9) 24.09.03 163 1 15쪽
10 빛나는 달 (8) 24.09.02 178 0 10쪽
9 빛나는 달 (7) 24.09.01 178 0 10쪽
8 빛나는 달 (6) 24.09.01 185 1 7쪽
7 빛나는 달 (5) 24.08.31 203 0 9쪽
6 빛나는 달 (4) 24.08.30 203 0 7쪽
5 빛나는 달 (3) 24.08.29 230 1 10쪽
4 빛나는 달 (2) 24.08.28 299 3 9쪽
3 빛나는 달 (1) 24.08.28 350 2 9쪽
2 서 (序) 24.08.28 556 5 10쪽
1 정천리격문 (訂天理檄文) 24.08.28 650 7 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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