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든 자들은 다 죽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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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렉디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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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8.27 22: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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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9.11 0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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빛나는 달 (17)

DUMMY

터무니없는 발언이다.

또한 마땅하다.

무재로는 이소청조차 능가해 천 년 고금제일 백은과 비견할 신인(神人)이라면.

하지만······.


‘불가(不可).’


무정검후는 단념할 수 없다.

사명을 받들어야 옳다.

그 옛날 신선혈세의 재래로서 강호 무림이 맞닥뜨릴 천살은 사라져야 한다.


요동치는 두려움보다 힘껏 여의를 쥔 순간.

서천이 상아검을 그었다.


———.

아무것도 느끼지 못했다.

기척은커녕 소리나 빛도 없이 공간만 갈라졌다.

그리고 날아든 강(罡)이 경고처럼 목을 스친다.


“아······.”


흘러내린 선혈.

오한에 휩싸이듯 떨려온 손과 전의를 상실한 마음.


필패다.

생사결이란 허울조차 성립지 못하리라.

망연스레 바라본 시선 끝자락의 옥음(玉音)만 또렷하였다.


“그대 의지와 충정 드높구나. 다만 기어코 사부 뒤꽁무니를 쫓는다면, 평생 이곳엔 못 닿을걸세.”

“······!”


지금 막 하늘과 가까워 예리하게 벼린 자가 건네는 조언.

어스름한 생각 하나가 머릿속을 휘돈다.

잡힐 듯하다.


이 단상을 깨우친다면 비로소 어검마저 넘어······.

적아(敵我)를 막론해 한 사람 무인으로서 존경을 담아 심옥진은 고개를 숙였다.


“천금보다 귀한 가르침, 심 모가 서천검월께 감읍드리오.”


더는 소성주가 아니다.

무황성을 떠나서 돌아오지 않을 터이니.


“사부께 전해주게나. 내 입신에 올라 기꺼이 감당하노라고. 부디 평안하여 등선을 이루시라고.”

“······보았던 대로 아뢰리다.”

“그대도, 사부도, 다시 만날 일이 있을지 모르겠군. 나는 오늘로써 은원을 잊는다. 청컨대 그대들도 그렇게 하라.”


타앙!

담담히 이른 서천이 북쪽 밤하늘로 날았다.

입신경을 증명하는 신기 능공허도다.


“서처어언-!”


내상을 입고 움직이지 못하던 단리선아가 뛰쳐나왔다.

상공에서 서천이 뒤돌아본다.


콰앙- 콰아앙!

떨어져 내린 유성우가 단리선아를 가로막았다.

상천현계 시공월의 남은 공능이다.


그리고 빛과 폭음이 잦아든 다음.

서천검월은 이미 눈부신 반짝임이 되어 먼 하늘로 사라지고 있었다.

자유로이, 환한 달빛을 받으면서.


그 모습에 무정검후는 떠올린다.

어느덧 십오 년 전이다.


자신이 정도제일기재란 위명을 얻은 천인위전 마지막 날.

결승 상대였던, 그날부터 볼 수 없었고 다신 만나지도 못할 백련화(白蓮花).

반론을 용납하지 않는 분노로 그녀에게 따져 물었다.


<왜 져줬지?>

<응? 져주지 않았어.>


백련화가 천연덕스레 답했다.

그녀의 순수함.

재기발랄하면서도 강인한 마음.

심옥진은 싫었다.


스스로 갖지 못한 것들이었다.

무용하다 여겼으나 저도 모르게 의식하는 것들이었다.

그래서 더욱 추궁했다.


<헛소리 마라. 네가 나보다 나았다. 네가 이겼어야 했어. 왜 마지막에 힘을 거뒀지?>

<글쎄, 거둔 게 아니라니까.>


백련화가 웃었다.

언제나 그랬듯 맑고 아름답게.


<네가 나보다 강했어. 네 의지가 더 강했던 거야. 난 최선을 다했고, 그 이상 힘을 더할 수 없었는걸.>

<선문답은 집어치워. 알아듣도록, 제대로 설명해.>

<나 성을 떠날 거야.>

<······!>


충격보다도 이유를 알 수 없어 노려봤다.

어째서?

나와 일생을 두고 겨루어야 할 네가 무엇 때문에.


마주 전해온 백련화의 눈길이 반짝였다.

조금 아쉬워하듯, 그러나 더욱 큰 기쁨으로 답해왔다.


<내가 누굴 좀 만났거든. 정인이 생겼어. 우리보다 몇 살 어린데, 사람이 밝고 참 괜찮다?>

<정인······.>

<그 사람이랑 강호를 돌아다닐 거야. 늦었지만 고향에 가서 오라버니도 뵈고.>

<오라버니?>


백련화의 출신에 대해서는 알려진 바가 없었다.

가명으로 댄 이름이 곧 별호였고, 제 출신을 아무에게도 알리지 않았다.

그녀가 장난기를 담아 일렀다.


<이건 비밀인데······ 나 원래 얼굴은 지금이랑 살짝 다르다? 참고로 더 예쁘니까 언젠가 마주치면 꼭 알아봐 주라. 그럼 잘 있어. 안녕!>


밝게 손을 흔들며 백련화는 떠났다.

친우와의 작별이 아쉬우면서도 기껍고 후련하게.

수년을 지낸 무황성과 정도제일기재라는 영광엔 한 조각 미련조차 없이.


이후로 심옥진은 한층 무공에 매진했다.

부와 권력을 탐하지 않고, 오직 세상에서 가장 강한 사람의 칼로서 제 존재를 증명해왔다.


한데 이상한 기분이다.

당시의 백련화와 저 멀리 서천이, 어째선지 닮아 보인다.

나는······ 틀렸던가.


“돌아간다.”


혼란스러운 심경을 추스른 그녀가 무인들에게 명했다.

척살 실패.

크나큰 불충인바 서둘러 보고해야겠지.

이내 남쪽으로 나아가는 길.


———!

삶보다 찬란하며 죽음보다 어두운 빛이 나타났다.

있고 없음의 삼라만상을 자아낸 그 오묘한 광휘 중심에서-


“아아······.”


무정검후는 우주를 보았다.


***


파아아아아!

상아에 의지하지 않고 하늘을 날아가며 나는 떠올린다.


십이 년 전 오늘.

보름달이 밝던 중추절 밤.


죽어가는 여인을 만나고.

옥가락지를 건네받고.

그녀가 이름도 알려주지 못한 채 안긴 아이와 마주하였던.

낯선 세상에서 살아갈 이유를 찾은 그날을 떠올린다.


나는 아이에게 화월이라 이름을 지어주었다.

밤하늘 환한 달빛처럼 네 거닐 생이 아름답기를 바라였다.


그리고 다짐하였다.

네가 이름처럼 살 수 있도록 힘껏 보살피겠노라고.


그로부터 십이 년.

실망하지 않고 서운해하지 않으며, 담담히 인정한다.

쉽지는 아니하였다.


너는 잘 웃는 아이였고, 실은 잘 웃질 아니하였다.

너는 차분한 아이였고, 실은 발 닿는 세상이 하찮아 관심을 두질 아니하였다.

너는 거짓말한 적 없는 아이였고, 실은 내가 물음을 삼가니 구태여 털어놓질 아니하였다.


그리하여 나는, 실망하지 않고 서운해하지 않되, 많이 고민하였다.

무엇을 해야 할까.


네가 진정으로 웃으려면.

네가 세상에서 즐거움을 찾으려면.

네가 내 물음에 거짓말할 필요가 없으려면.


십이 년.

나는 많이 고민하였고, 네게 위협일지 모를 것들을 줄곧 걱정하였으며, 너를 지키고자 힘껏 노력하였다.

그리한 모든 시간이 소중하였다.


고민하고, 걱정하고, 노력하면서.

다만 근원이 사랑이라 행복하였다.


반드시 옳은 마음만은 아니었다.

한편으로는 길을 잘못 든 집착이었다.


너를 생의 이유로 여긴답시고 스스로 희생할지언정 네가 행복해야 한다는 욕심을 강요하였다.

너를 사랑하려면 나 자신도 사랑해야 함을 망각하였다.

사실은 이기적으로 건넨 짐이었다.


이제는 안다.

내 생을 떼어준다고 그것이 네게 행복이 아님을.

죽더라도, 살더라도, 우리 함께하기에 행복함을.


그러니 전하고 싶다.

너를 만나기 전 무의미한 날을 보내던 나에게.

너를 위해 고민하고, 걱정하고, 노력하던 나에게.


괜찮아.

곧 만날 거야.

정말로 소중한 누군가를.


괜찮아.

지켜냈어.

정말로 소중한 누군가를.


지금 그 아이한테 가고 있어.

무의미할 뿐이기에 외롭지도 않던, 이젠 돌아갈 수 없는 그때가 아니라.

너무나 소중하기에 헤매던, 돌아가선 안 될 그때도 아니라.

사랑을 주고 또 받으며 함께하는 세상으로, 나는 지금 가고 있어.


스아아아아-!

벅찬 마음만큼 속도를 내었다.

이십 리, 오십 리, 그리고 팔십 리.


마침내 보인다.

큰 칼에 올라타 창을 쥐고 빙륜갑으로 보호받는 아이.

화월이었다.


“아월.”


아이가 나를 본다.

나도 아이를 본다.

괜히 울음처럼 소리가 나올까 숨을 삼키고 다가섰다.

앞으로 네게 무엇을 해줄 수 있을까.


번듯한 학당에 가자.

글과 그림도, 음률과 다른 기예라도.

네가 원하는 만큼 배우도록 해주고 싶어.


봄엔 꽃나무, 여름엔 강, 가을엔 단풍, 겨울엔 설산.

계절마다 멋진 장소로 데려다줄게.

가끔은 마을 큰 거리에서 재미난 극을 구경하고, 맛있는 음식도 먹자.

전부 해줄게.


마음속으로 전하고서 아이를 힘주어 끌어안았다.

그제야 애써 웃으며 물었다.


“금방 온다고 했지?”

“네.”


나지막이 답한 화월이 마주 껴안는다.

조금은 서툰 손길이 기뻐.

칼과 창을 흩어내고 우리는 서쪽으로 날았다.


“멈춰라.”


슈아아아악!

이미 감지한 터라 발길을 더욱 서둘렀던, 다만 적의는 없이 쫓아온 인영이 제지한다.

단출한 경갑을 입고 명검처럼 기운이 서린 중년인.

수년 전 들른 북경에서 일면식이 있던 자다.


오늘까지 현존한 여섯의 상천 중 하나.

황도제일고수 군신황검 우겸.

나와 화월을 응시하던 그가 가라앉은 어조로 묻는다.


“자네의 혈육인가.”

“그렇소.”


한 걸음 아이를 감싸면서 답했다.

관무불가침까지 어기고 황도 무인이 올 가능성은 사실상 없었거늘.

내가 입신에 들었음을 알았기 때문인가.


하지만 그보다도 우겸의 표정이 심상찮다.

의문스럽고, 못내 추궁을 자중하듯이.


어쩌면 그럴까.

저자가 화월에 대해 무언가를 알고 있을까.


“폐하께서 명하셨네. 자네 경지를 높이 평하여 데려오라 하시니, 무부 서천검월은 황명을 받들라.”

“사양하외다.”


직감했다.

내키지 않되 제안한 우겸은 내 대답에 안심하고 있다.

나보다는 오히려 화월을 눈에 담던 그가 나직이 묻는다.


“하면 이제부터 어찌 살아가려는가.”


가장 답하기 쉬운 의문이었다.


“행복하게.”

“······알겠네. 뜻을 이루시게나.”


짧게 이른 그가 북쪽으로 날아간다.

다시금 둘만 남아서 우리 남매는 서쪽으로 향했다.

문득 화월이 말한다.


“전이랑 다르세요.”


내가 잘못을 깨달았음을 알아본 게다.

이 아이는 예전부터 이미 같은 마음에 있었으니까.

나는 조용히 사과했다.


“늦게 알아서 미안해.”

“아니에요.”


옅은 포옹으로 아이가 답해주었다.

마주 껴안아 산과 강을 넘으며, 우리는 계속해서 날았다.

그리고 생각난 일 하나.


“선물도 골라야지.”


중추절을 탄일로 세는 화월에게 아직 줄 수 없었다.

미리 줘버리면 정말로 이별이라는 것 같아서.

또 무엇을 원하는지 실은 알기에.


이제 줄 수 있다.

너는 함께인 이 순간을 선물이라 여기고, 그리 답하겠지만.

그래도 주고 싶어.


“음······ 모르겠어요.”

“오늘 지나서도 괜찮으니 천천히 생각해보렴. 그럼 일단은, 어디로 갈까?”


어디든 갈 수 있다.

중원이든 새외든, 그보다 멀리 서역까지도.

그게 아니라면-


“해동은 어떠려나.”

“해동이요?”


의아해하는 물음에 나는 자랑하듯 답했다.


“그쪽 말을 조금 알거든. ······아마도?”

“저는 어디든 좋아요.”


뒷말은 듣지 않아도 안다.

함께라면 어디든.

나도 같은 마음이야.


스아아아아!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누며 어느새 삼백 리 넘게 날았다.

산지대를 지나고 보이는 평야, 하북성 너머 산서 땅에 이르렀다.

달빛을 받은 대지가 고요히 펼쳐진 광경이었다.


“예뻐요.”


아이가 작게 속삭인 말.

나는 생각했다.

선물이라기엔 별것 아니나 당장 해줄 수 있는 일이다.


“더 예쁘게도 되는데.”

“네? 아······!”


휘오오오!

되물은 순간 아이가 하늘로 떠올랐다.

저 멀리 구름까지도 닿게끔.

어검의 묘리를 응용해서 펼친 비행술이었다.


“어때?”


놀란 눈길로 경치를 감상하고 내려온 아이에게 물었다.

화월이 드물게도 또렷이 답한다.


“한 번 더요.”

“응.”


몇 번이라도 해줄 수 있어.

다시 한번, 방금보다도 더 높이 아이를 올려보냈다.


휘오오오오!

아주 조금은 들뜬 기색으로 화월이 아래를 둘러본다.


그리고.

사랑스러워 웃음을 지은 나와 시선을 마주했고.

예쁜 달빛을 받으며 아이도 마주 웃었고-


“피해요!”


다음 순간 큰 목소리로 외쳤다.

오늘까지 단 한 번도 들어보지 못한, 난생처음 내는 비명과 같은 떨림으로.


서걱!

기운이 날아왔다.

내가 반응했을 땐 이미 옷깃을 베어 지나갔다.

화월에게 듣지 못했다면 팔이 잘렸을지도 모를 극쾌의 검.


나는 대응보다 먼저 허공을 박찼다.

화월을 안고 그제야 뒤돌아보았다.

그곳에 서 있다.


여기에 없어야 할 사람.

결코 올 것이라 생각지 않았고, 와서는 안 될 사람.


“버리라 일렀더니 멀리도 와버렸구나.”


천상 선녀처럼 아름다운 여인이다.

다만 존재 자체로 무심히 군림하는 절대자다.

팔 년 전 오늘, 처음 만나던 날 그러했듯이.


천하제일인 무황 이소청.

내 스승이었던 그녀가 신검 무극을 겨누며 선고한다.


“기어이 버리지 않겠다면, 내 직접 거두어가리라.”


이 작품은 어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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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 빛나는 달 (18) 24.09.12 86 1 15쪽
» 빛나는 달 (17) 24.09.11 90 1 12쪽
18 빛나는 달 (16) 24.09.10 102 1 12쪽
17 빛나는 달 (15) 24.09.09 110 0 10쪽
16 빛나는 달 (14) 24.09.08 115 0 10쪽
15 빛나는 달 (13) 24.09.07 130 0 9쪽
14 빛나는 달 (12) 24.09.06 132 1 10쪽
13 빛나는 달 (11) 24.09.05 145 1 11쪽
12 빛나는 달 (10) 24.09.04 157 1 20쪽
11 빛나는 달 (9) 24.09.03 163 1 15쪽
10 빛나는 달 (8) 24.09.02 179 0 10쪽
9 빛나는 달 (7) 24.09.01 178 0 1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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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빛나는 달 (5) 24.08.31 204 0 9쪽
6 빛나는 달 (4) 24.08.30 203 0 7쪽
5 빛나는 달 (3) 24.08.29 230 1 10쪽
4 빛나는 달 (2) 24.08.28 299 3 9쪽
3 빛나는 달 (1) 24.08.28 350 2 9쪽
2 서 (序) 24.08.28 556 5 10쪽
1 정천리격문 (訂天理檄文) 24.08.28 651 7 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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