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든 자들은 다 죽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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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렉디마
작품등록일 :
2024.08.27 22: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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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8.28 20: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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빛나는 달 (2)

DUMMY

굳이 일러주지 않아도 된다.

생사를 불문하는 천인위전, 목을 잘라서 죽인 모용인, 정도 십오문이 날 노릴 앞으로의 보름.

나보다 열 살이나 어린 동생과 무관한 일이어야 한다.


은화월(殷華月).

내 유일한 가족이자 살아가는 이유.


너를 위해서라면 나는 기꺼이 완전할 수 있다.

이기지 못할 적수가 없고, 오르지 못할 산이 없노라.

이 강호의 가장 높은 곳에서 지켜주마.


언젠가 환한 달빛을 올려다보면서 약속했다.

화월은 해사하게 웃었다.


<저는 지금이 좋아요.>


그리될 거다.

나 은서천이 숨 쉬는 한은.


“중추절까지 위전이라네. 그동안은 외출을 삼가야 한다?”


마당에서 검을 뻗으며 지나가는 말로 건넸다.

무황성 전체가 비무대일 터라 미심쩍진 않을 당부다.

문간에 걸터앉아 구경하던 화월이 생글생글 답한다.


“아, 오늘 청홍안과 비무를 치르셨죠? 그분 검법이 많이 늘었는걸요.”

“······알아보았니?”

“처음엔 산형(散形)과 추혼(追魂)이다가 근원을 보면 무극이에요. 성주께서 가르치셨나 봐요.”


대결을 복기하느라 가볍게 펼친 흐름만으로 꿰뚫어 본다.

내가 이미 한 차례 싸웠고, 상대가 모용인이었으며, 사부가 무얼 관여했는지도.


익히 겪어왔으니 놀라지 않았다.

기이하게도 단전에 내공을 두지 못하는 체질이나 화월의 무안(武眼)은 천재적이다.

본래라면 천하제일을 논할 대종사로 컸을 아이인데.


······잘 모르겠다.

안타까운지, 무림인이 될 수 없음에 다행인지.


그저 생각한다.

달이 빛나는 중추절 밤에 만나 화월이라 이름 지어준, 하나뿐인 가족을 힘껏 보살피리라.


“인제 씻고 와야겠네.”

“식사 준비해놓을게요.”


평소의 일과대로 저녁해가 저물 즈음 수련을 마무리한 나는 욕탕에서 몸을 닦고 나왔다.

바깥 하늘이 올려다보이는 마루에 상을 차린 화월이 노래를 흥얼거리고 있었다.



단원인장구(但願人長久)

다만 우리 오래오래 살면서


천리공선연(千里共嬋娟)

천 리를 떨어져도 고운 달빛은 함께하기를



“후훗.”

“왜 그러세요?”


무심코 흘린 웃음에 뒤돌아본 동생이 묻는다.

나는 정직히 답해줬다.


“이번엔 욕심을 너무 부린 듯해서.”


무황성에 오기 전부터 자주 불렀더랬다.

당송팔대가 소동파의 수조가두(水調歌頭, 노랫말).


그날 기분에 따라, 달이 얼마나 밝느냐에 따라 가락을 바꿔가며 평해주는 것이 우리의 놀이였다.

음률이 서툰 아이는 아니거늘 오늘은 과하네.


제 어릴 적 자장가처럼 불러주던 때와도 닮았고, 성에 와서 서로를 의지하던 때와도 닮았고, 보름달이 뜬 밤에 들뜬 마음으로 함께 읊던 때와도 닮았다.

결국 희비애락이 어지러이 모호한 곡조가 되어버렸다.


“음······ 아! 삭월(朔月, 음력 초하룻날 사라지는 달)이라 정취를 담기 어려웠던 듯해요.”

“무언가 심려라도 있진 않고?”


제 마음을 짐작해본 아이 맞은편에 앉으며 일렀다.

화월이 맑은 표정으로 답한다.


“아니에요, 고민할 일은 없거든요.”

“그러니?”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누며 우리는 일각쯤 식사했다.

풀벌레 우는 고즈넉한 소리와 달이 자리를 비워서 반짝이는 별빛을 헤아리는 시간이었다.


그리고 문득 화월이 자그마한 검집을 내밀었다.

이름난 장인의 솜씨처럼 소박하지만 가지런한 형상이다.


“어제 완성했어요. 중추절이 탄일(誕日, 생일)이시잖아요.”


내게 받은 용전(用錢)을 모아서 직접 만들었단다.

서천께 전할 선물이라니 대장간에서 신경을 써줬다고.

나는 천 길 절벽에 선 심정으로, 내색하지 않고 물었다.


“보름이나 남았는데 어째서 미리 줘?”

“중추절엔 못 드릴지도 모르니까요.”


고운 얼굴이며 명확한 답이었다.

이 아이는 이미 안다.

내가 수련하는 모습을 보면서 알아버렸다.


“성주께서 위전 율법을 바꾸신 거죠? 오늘 드리는 편이 나으려나 싶어서 서둘렀어요. 와아, 근사하네요.”


내 허리춤에서 단검을 빼낸 화월이 저가 마련해준 검집으로 바꾸곤 감탄했다.

그저 순수하게 기뻐하는 얼굴에 나는 답하려 했다.


중추절에도 얼마든지 줄 수 있다고.

나와 탄일을 같이 세는 네게도 선물을 줄 거라고.

하지만 그러기 전에 기척이 감지됐다.


“······.”


열한 명.

멀리서 장원을 향해 다가온다.

의도하여 내는 발소리며 전원 일류 이상의 고수다.

곧장 일어나 단검을 꼭 쥐여주고 화월에게 일렀다.


“금방 올 테니 집에서 기다리렴.”

“다녀오세요!”


해맑은 배웅에 마주 손을 흔들고서 문을 나섰다.

호흡마다 정신이 싸늘히 가라앉는다.

검을 쥔 손끝의 감각이 예리해진다.


모용인을 잔혹하게 징치했으니 며칠 무탈할 줄 알았건만.

연유가 있는 방문이었다.


“늦은 시각에 결례로구만. 오랜만일세, 서천.”


장원을 따라 이어지는 숲길.

무인이라기보단 학사처럼 보이는 사내가 인사했다.

당금 모용세가 주인 모용명의 첫째 아들이자 소가주 모용문경이었다.


“은원을 잊겠다 하였거늘 듣지 못했던가.”


강호에서 한 번 안면이 있는 자다.

나는 대수롭지 않으나 저쪽은 구명지은을 입었다고 할 만한 일이니 그것까지 불문에 부치면 넉넉했을 터.

서출에 방만한 처신이라 잘 구슬려 칼잡이로나 써먹을 둘째 아들을 아낄 모용 가주가 아닌데.

모용문경이 난처해하며 답한다.


“가주께서 명하시니 별수 있나. 그 파락호 놈이야 객사하든 말든 슬플 까닭이 없다만 무재만은 아까워하셨네.”


그럴 만하다.

무황성주는 못 되어도 후기지수의 범주를 월등히 넘은 실력이었지.


“마침 명분도 섰으니 기회라고 보셨음이야. 그놈을 잃은 손해보다는 얻어야 한다나? 내가 무황의 제자는 아니지만, 자네 목을 베어가면 제법 입지를 다지지 않겠는가.”

“단언컨대 가주가 행차한들 불가능하다.”


성에 상주하는 모용가 무인이 백여 명.

천인위전의 참가 자격을 갖춘 나이대로 정예를 골라 데려왔으나 부족할 따름이다.

소가주를 더해도 오십 합이면 죽일 수 있다.

모용문경이 너털웃음을 지었다.


“알지. 어찌 모를까, 자네 무공을 두 눈으로 보았는데. 백도십절이라 불린 세월도 수년이니 오늘날은 천하가 마땅해.”

“하면 무엇으로 얻으려는가.”


모용문경은 전의가 없다.

벌써 목적을 달성했다는 듯한 어조였다.

이어서 검을 들고 말한다.


“죽긴 두렵되 가주께 최소한의 성의는 보여드려야지.”


서걱!

검격이 왼팔 팔꿈치 아래를 잘라냈다.

지혈하지도 않고 스스로 내상을 일으켜서 피를 토한다.


“끄흑, 욱······! 후우······ 이걸로, 모용은 천인위전에서 물러나겠네.”


방금 소가주는 대단히 큰 무형의 득을 보았다.

동생의 원수를 갚으려는 형.

수하들과 합공하지 않고 정당한 비무.

패배했으나 한쪽 팔만 잘리고 살아온 무위.


“혼자서 오는 편이 수월했을 텐데.”

“모두 내 사람들이니 괜찮아. 되먹잖은 잡놈보다 무재는 못하나 나도 나름의 방식으로 치열했으니.”


열 명이 한결같이 머리를 숙인다.

장차 모용가를 이끌 그들은 가주가 아닌 소가주에게 충성을 바치고 있다.

팔은 의수를 달면 되고 이만하면 강호에 내세울 훈장이라며 모용문경이 말했다.


“자네에게 빚을 두었다 여기지는 않네만 일전 내 목숨 빚은 갚았다고 봐주시게나. 또한 몇 가지 알려드리지.”


내일과 모레까지 이틀.

정도 십오문은 물론이고 누구도 찾아오지 않을 거란다.


“당장은 그놈 죽음을 구실로 본가에서 양보를 얻었다네. 저들이 의논 중이라니 대비하는 여유로 써도 될 게야. 다만 성을 나가진 말게. 그리하면······ 자네는 죽어.”


성 내에 머무를 때만 후기지수들의 천인위전이다.

외부에선 울타리가 무용해진다.


천라지망(天羅地網).

정도 십오문이 총공세를 펼쳐올 터였다.


“이겨내시게. 우리는 자네에게 줄을 댄다는 뜻이야. 등선에 혹해 인세를 등진 무황보다, 본가를 포함해 썩어빠진 정도 십오문보다, 미래의 천하제일인에게. 자네는 해낼 수 있어. 정을 떨치기만 한다면-”

“그만.”


딴에는 조언이랍시고 내뱉는 말을 끊었다.


“그 이상은 용납하지 않아.”

“······실례했군. 용건도 얼추 끝났으니 가보겠네. 중추절 지나서 자네 임명식이라도 있으면 참석하지.”


잘린 팔까지 들어 격식을 갖춘 모용문경과 수하들이 떠나고 나는 장원으로 돌아갔다.

다급한 걸음만큼 가슴이 뛰었다.

그리고 문을 열었을 때.


“일찍 오셨네요?”


낮에 반겨줬던 것과 전혀 다르지 않은 목소리로, 내가 맡긴 단검을 목에다 댄 화월이 말했다.

달빛조차 없는 세상이라 검날이 더욱 시리게 보였다.

일순간 멈춘 숨을 내쉬며 동생에게 물었다.


“왜 그러고 있어?”

“얼마나 날카롭나 궁금해서요.”


태연하게 답하곤 나를 바라본다.

걱정도 불안도 없이 마음을 읽어내듯 차분한 눈길.

나는 피하지 않았고, 화월이 제 목에서 단검을 떨어뜨렸다.


“모용가에서 왔나요?”

“괜찮아, 돌려보냈단다.”


그리고 아까 다하지 못한 말을 전했다.


“중추절에 위전이 끝나면 우리 동생 선물을 사야겠네. 무얼 가지고 싶어?”

“음······ 가지고 싶은 건 있는데 살 수는 없어요.”

“어째서?”

“그날 이루어지는걸요.”


이제껏 가져왔으며 중추절부터 다시금 이어질 선물이다.

나와 지내는 평온한 나날.

아마도 이 아이가 중히 여기는 일은 그것뿐이다.


“응, 그럴 거야.”


지켜줄게.

천하 모든 무인이 가로막는다 해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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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서 (序) 24.08.28 557 5 10쪽
1 정천리격문 (訂天理檄文) 24.08.28 652 7 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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