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화 - 미륵상 소실은 인재입니다.
다른 이들은 무시한 채 복지겸만을 겨냥한 내 행동은 자못 의아한 눈길을 받았다. 그래도 어명인지라 다른 선택지는 없었고, 태초의 목표였던 복지겸의 답지는 내 손에 쥐어졌다.
“순군부령.”
이어진 호출.
장귀평은 중앙으로 걸어와 군중을 향해 가볍게 묵례했다.
망설임 없는 걸음으로 보건대 자신의 역할을 인지한 듯 보였다. 모든 이의 이목이 제 입에 집중되어 있음을 느꼈을 테지만, 얼굴색 하나 변하지 않은 채 말했다.
“미륵상 소실은 인재입니다.”
과연.
첫 마디부터 파격적이었다.
비난, 꾸중, 호기심.
갖가지 반응을 한 몸에 안고 지난밤의 경위를 설명해 나갔다. 내 밀명으로부터 시작된 감시, 흉수 포착, 끝을 내지 못한 충돌, 은신처 확보까지 모두 말이다.
마치 녹음된 음성을 재생하는 듯 조금의 감정도 담겨 있지 않았다. 그저 내 대변인으로서 역할에 충실했다.
“······하여 폐하께서는 복 장군을 흉수로 지목하셨습니다. 이와 관련해 어떤 식으로든 발언하실 분 계시는지요.”
당장 저놈을 끌어내라며 외쳐야 할 과격파도, 무슨 착오가 있었던 건 아닌지 점검해야 할 신중파도, 아군의 아군을 두둔해야 할 왕건 일당도 모두 입을 열지 못했다.
정말 아무런 말도 들리지 않았다.
상식을 아득히 뛰어넘는 사건이다 보니, 섣불리 개입할 수 없던 탓이다. 수십의 군중이 흘려대는 소리라고는.
“······.”
“허어······.”
깊은 침음뿐이었다.
물론, 그 침묵은 당사자에 의해 깨졌다.
“폐하!”
복지겸은 이마를 바닥에 처박았다.
“소신을 음해하는 세력이 수를 쓴 것이옵니다! 짚이는 바가 있사오니, 부디 소명할 기회를 주시······.”
“조용!”
관심법에서 보았듯 놈은 모략을 겸비한 변설가다.
지금도 순식간에 가상의 세력을 만들어 돌파구를 노린다. 모르면 몰랐지. 알고도 당하는 우를 범할 이유가 없었다.
나불대는 입을 막고 당겨진 흐름을 유지했다.
“금일 복지겸의 행적을 읊거라.”
옆에서 다른 마군 장군이 대신 답해주려 했다. 그러나 내 질문의 대상이 따로 있다는 걸 깨닫고는 문장을 삼켰다. 비로소 이 자리가 토론장이 아님을 받아들인 듯했다.
부름을 받은 건 일대의 경비를 책임지는 순찰 대장이었다.
제향 터, 인근 마을, 대소신료의 임시 거처 등등. 통제해야 할 범위가 넓었기에 내군을 동원하기보다는 별도의 부대를 조직하여 관리하던 중이었다.
꽤 똘똘하게 생긴 순찰 대장은 인상답게 명부를 기록하고 있었는데, 잠시 살펴보더니 이내 아뢰었다.
“자정쯤에 출타하여 동틀녘에 복귀. 사유로는 모친 간호라고 쓰여 있습니다.”
나는 계속하라며 손짓했다.
“제향이 시작되기 전부터, 그러니까 터가 정해지고 명부가 작성된 이래로 정리해 본다면. 하루 이틀의 간격을 두고 비슷한 시간대에 출타한 기록이 있습니다.”
“사유는?”
“모친 간호와 약재 구매가 주입니다.”
결국, 복지겸은 참지 못하고 방언을 터트렸다.
“살펴보신 대로입니다. 모친께서는 폐하를 모시는 소신을 자랑스럽게 여기십니다. 하여 본가를 떠나와 함께 살고 있는데, 최근 들어 잔병치레가 잦으셨습니다. 충심에 어긋난다는 걸 잘 알고 있사오나, 효를 외면할 수 없던 탓에 자리를 비우고야 말았습니다. 사적인 일로 제향에 누를 끼친 벌은 달게 받겠습니다. 하지만 미륵상과 관련된 내용은 절대 사실이 아니옵니다! 하늘에 맹세코 진범을 잡아 올 테니 부디! 부디 소신께 조금의 시간을 허락해 주시옵소서!”
아우, 귀 아파.
의외로 조용하다 싶더라니 속사포 랩을 준비하고 있었던 모양이다. 하긴 놈의 성격을 감안한다면 아무리 내 앞이라 해도 오래 참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누군가 복지겸에게 물었다.
“······약재를 새벽 시간대에 구매해야 하는 이유가 있는가.”
“폐하를 동경하여 그 뜻에 따른 지 오래되지 않아 도성에 안면 있는 약재상이 없습니다. 양질의 것을 얻기 위해서는 일일이 발품을 파는 수밖에 없었습니다. 모두 소신의 무능과 집착이 만들어 낸 행동이었습니다.”
입만 열면 거짓말이 자동으로 나온다.
그런데 곤란한 건.
다들 말은 하지 않았지만, 관심법으로 직감했다.
어쩌면 또 궁예가 생사람을 잡는 건 아닐지 하는 분위기가 형성되고 있었다. 시계를 거꾸로 조금만 둘러봐도 억울하게 목숨을 잃은 자가 한둘이 아니기에 당연한 의심이기도 했다.
심지어 복지겸의 가슴 절절한 사연과 찌르면 찌르는 대로 나오는 답변이 너무 유창했다. 중심을 지켜야 할 대신들도 갈피를 잡지 못하고 흔들리는 기색이 역력해 보였다.
그래서 고민이었다.
결정적인 증거가 없다면 흐지부지 풀려나게 될 터였고, 복지겸의 가짜 증언은 진짜 증언으로 꾸며질 테니 말이다.
자, 이제 어떻게 공개한담?
“폐하, 아뢰옵기 황공하오나 장 순군부령의 태도로 보아 증좌가 있는 것으로 사료되옵니다. 소신들에게 보여주시어 감긴 눈을 틔워주시옵소서.”
딱 좋은 타이밍에 딱 좋은 질문이었다.
기특하게 활로를 뚫어준 이가 누군가 살펴보니, 역시나 곧 죽어도 내 편을 들어줄 자였다.
아주 조심스럽게 허리를 굽혀 물었던 종간을 일으켜 세우며, 내친김에 왕건까지 한데 불러 모았다. 자타가 공인하는 서열 1, 2위이자, 출신지가 달라 파벌도 나뉜 중심인물이다.
심사위원으로 아주 적격이라는 말씀.
“증좌라.”
나는 이죽거리며 복지겸의 답지를 훑었다.
“길게도 썼군. 음, 단어가 많아.”
내 감상은 그게 전부였다.
영문을 모르겠다는 시선을 뒤로 한 채 심사위원들에게 넘겼다. 그들은 내 재촉 아래 이유도 모른 채 읽어 나갔다.
평소라면 감탄할 만한 문장도 더러 섞여 있었지만, 지금은 알 수 없는 긴장감에 그저 읽기에만 집중할 뿐이었다.
그렇게 얼마나 지났을까.
종간과 왕건은 이제 무엇을 바라냐는 듯이 힐끔거렸다.
“다 읽었으면 이거랑 한 번 비교해 보지.”
장귀평이 가져온 종이.
흉수의 은신처에서 확보한 성과물.
그 정체는 미륵상을 이용해 날 묶어두고, 혁명의 기틀을 마련하려던 계획표였다. 일시, 접선 장소, 제향이 결정된 뒤의 수정 내용 등등이 상세히도 적혀 있었다.
비로소 이들도 내가 무슨 말을 하려는지 눈치챈 듯했다.
나 역당이오!
라며 구구절절 외치는 계획표에 적힌 필체가 눈에 익을 것이다. 그도 그럴 것이 필적 검사인 줄도 모르고 열심히 여러 단어를 적어낸 복지겸의 답지에 적힌 것과 같을 테니 말이다.
“차이점이 있는가?”
내 직접적인 물음에도 왕건은 복지겸을 두둔하고 나설 수 없었다. 특정 단어를 쓸 때의 버릇 하나, 획과 획 사이의 사소한 거리 하나 도장으로 찍어낸 수준이었으니까.
그저 사색이 된 얼굴로 두 종이를 번갈아 볼 뿐이었다.
“자, 그럼.”
판결할 시간이다.
“자칭 효자라 주장하는 네놈의 마지막 말은 무엇이냐.”
“······빌어먹을 미치광이 새끼가!”
마침내 가면이 벗겨졌다.
모든 걸 포기한 복지겸의 욕설과 박술희가 녀석을 포박하기 위해 몸을 날린 건 동시에 벌어진 일이었다.
**
“순군부령께 다 듣고 왔단 말입니다.”
불만 가득한 얼굴.
퉁명한 말투.
내게 이런 식으로 대할 수 있는 자는 단 한 명뿐이다.
『은부 / 명궁, 수탐, 신의, 용력』
내군장군으로써 왕실 친위대를 이끌고 있으며, 종간과 더불어 세상이 멸망한다 해도 내 곁을 지킬 충신.
아니다.
단순히 신하라 칭하기에는 그 궤가 조금 달랐다.
“형님! 듣고 계신 것 맞습니까?”
유일하게 궁예와 호형호제를 맺은 사나이였으니까 말이다.
은부는 벌써 십여 분째 자신을 빼놓고 장귀평과 둘이서만 재미를 본 것이냐며 불만을 토로 중이었다. 천벌이니, 반역이니 하는 국가 중대사는 그에게 아무런 영향을 끼치지 못했다.
그저 함께하지 못했다는 서러움만이 가득해 보였다.
거한이라는 말이 어울리는 덩치와 상반되는 언행이었지만, 그 징징거림에 담긴 마음이 느껴져 웃어버리고 말았다.
“알았다, 알았어.”
“그리고 요새 들어 외출이 잦으시던데, 또 계획하는 게 있으시거든 무조건 저도 끼워주시는 겁니다!”
“내 약속하마.”
슬슬 태초에 기획했던 나만의 사천왕과 회동 할 때가 온 것 같았다. 왕건의 이면, 다가오는 반란. 진실을 알려주어야 함께 대비할 수 있으리라.
그러기 위해서는 오늘의 만남이 먼저 이뤄져야 했다.
현재 궁내의 분위기는 우리의 시시콜콜한 사담과 달리, 내 확답을 듣고 난 뒤 방긋거리는 은부의 얼굴과 달리 스산했다.
제향과 관련된 모든 게 취소되고, 내군은 전시에 준하는 경계 태세를 갖췄다. 고위 관료라 할지라도 공익과 관련된 일이 아니고서는 외출을 자제할 정도였다.
물론, 왕건의 쓸데없는 행동을 억제하기 위한 그림이다.
오직 내군만이.
그러니까 오직 박술희만이 감금한 복지겸을 마주한 지 사흘째. 공포감이 무르익었다 느끼고는 직접 옥사를 찾았다.
미리 연락을 받은 장귀평과 박술희가 우리를 맞이했다.
“신 박술희, 죄를 청하나이다.”
그런데 밑도 끝도 없이 사과부터 건넸다.
장귀평이 부가 설명을 해주었다.
이유인즉슨, 그간 옥사를 책임지며 복지겸의 독기를 빼기 위해 안간힘을 쓴 박술희다. 하지만 도리어 놈의 도발에 넘어가 입을 찢어버리겠다고 날뛰며 소동을 벌였었단다.
복지겸과의 대면에서 불충한 언사를 듣게 된다면 자신이 책무를 다하지 못한 탓이니, 벌을 내려달라는 뜻이었다.
과연.
걱정대로 화가 난다기보다 그저 감탄스러울 뿐이었다.
그 진중한 박술희마저 이성을 잃게 만들 언변이라니.
그러나 제아무리 사나운 짐승이라 할지라도 이미 우리에 갇힌 놈이다. 마지막 발악을 지켜보는 즐거움도 있을 터였다.
“거칠던가? 자네가 통제할 수 없을 만큼?”
“예?”
“복지겸 말일세.”
“분부를 내려주신다면 지금이라도 다시 들어가서······.”
“그런 말이 아니네.”
나는 가볍게 어깨를 짚으며 말했다.
“앞으로 전장에서 만날 적장 중에는 복지겸보다 더한 자가 많을 걸세. 자네는 아직 어려. 이번 일을 배움으로 여기고 정진한다면 어떠한 일에도 흔들리지 않을 것이야.”
잠시 되뇌이던 박술희는 감동한 기색으로 소리쳤다.
“명심하고 또 명심하여 절대 꺾이지 않는 폐하의 검이 되겠사옵니다! 마음껏 휘둘러 주시옵소서!”
그럼, 그래야지.
히죽 웃어주고는 다 함께 옥사로 향했다.
독방 중의 독방.
한쪽 벽면을 통째로 차지한 공간에 복지겸이 있었다.
몰골은 가히 충격적이었다.
두 다리는 허공에 떠오른 채 사지가 밧줄에 묶여 있었고, 흐르다 굳기를 반복한 피딱지는 온몸 구석구석 새겨지지 않은 곳이 없을 정도였다.
살아 있나?
라는 생각이 들었는데 형형한 눈빛으로 생존을 주장했다.
“네 이놈, 땡중아! 정녕 천벌이 무섭지 않으냐!”
이야, 깡다구가 대단하네.
기개에 박수를 보내고 싶었다.
물론, 내 감탄과 별개로 박술희와 은부는 외침이 끝나기도 전에 몸을 날리고 있었지만 말이다. 내 제지가 없었다면 그대로 유언이 되었어도 이상하지 않을 만큼 기세가 흉포했다.
“들어와 봐! 겁낼 줄 알아? 들어오라고!”
그럼 내가 들어가 볼까?
“어이, 복지겸이 할 말이 많지?”
“뭐?”
“얌전히 들어줄 테니까 한 번 다 쏟아내 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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