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심법으로 삼국통일

무료웹소설 > 일반연재 > 대체역사, 판타지

새글

곽재우
작품등록일 :
2024.08.29 17:53
최근연재일 :
2024.09.17 21:00
연재수 :
22 회
조회수 :
3,446
추천수 :
190
글자수 :
113,734

작성
24.09.01 15:00
조회
177
추천
7
글자
12쪽

4화 - 땀, 술, 추억. 그리고 소탈함.

DUMMY

미리 언질을 주었던 건지 술상은 순식간에 차려졌다.


장소는 여전히 흙바닥이었다.


시녀들도 이러한 경험은 없는지 우물쭈물하다가 겨우 임무를 완수하고 돌아섰다. 마침 갈증이 목 끝까지 차올랐기에 겨우 상체만 일으켜 나발째로 들이켰다.


나름 시원하니 개운했다.


“크으!”


내가 박술희라면 보고도 믿지 못할 광경일 것이다.


한 나라의 국왕이 산적처럼 의복을 흙먼지로 뒤덮은 채 주저앉는다. 체면 따위 가져다 버렸는지 나발을 불고는 소매로 입가를 닦는다. 맨손으로 안주를 집어 먹는 건 덤이다.


그래서 뭐.


교양 있게 어흠 어흠 거리면서 코딱지만큼 입에 넣을까?


팔자에도 없는 짓을 했다간 몸에 두드러기가 오를지도 몰랐다. 나는 기존의 궁예와 다른 사람이다. 도리에 어긋난 행동만 하지 않으면 된다는 마음가짐이었다.


다행히 이 중에 대갓집 출신은 없다.


“자네들도 한 잔 들지.”


흙이라면 친근하게 지내온 둘이니 거리낄 것도 없었다.


나와는 제법 떨어진 거리에 작은 개인 술상을 받은 둘이다. 내가 이렇게까지 했는데 거절하는 건 예의가 아니라 여겼다.


기분 좋게 연거푸 들이킨 우리는 입가에 미소를 띠었다.


나는 오랜만에 땀 흘리고는 낮술 때리니 좋고, 저들은 업무 시간에 왕이라는 배경을 믿고 농땡이 피우니 좋을 터였다.


“그래, 폐하와 겨뤄본 소감이 어떠한가.”


장귀평의 물음에 박술희는 머리를 긁적였다.


“폐하께서 적이 아니라 보필할 주군임에 감사드립니다.”

“호오?”

“비슷한 또래에는 적수가 없는 검술 덕에 영광스럽게도 이른 나이에 내군부장의 직을 받았습니다. 하여 어떻게 하면 폐하의 옥체를 건들지 않고 대련을 끝낼지 고민했었습니다.”


나는 장난스럽게 호통을 쳤다.


“그런 건방진 생각을 품었단 말이냐?”

“제 자만이고 오만이었습니다. 아마 전장에서 마주친 적장이었다면 전 죽음을 면치 못했을 것이옵니다.”


박술희는 돌연 무릎을 꿇고 깊게 절을 올렸다.


내 신분이 신분인지라 아부라고 볼 수도 있지만, 솔직히 좀 전의 대련은 내가 생각해도 조금 대단한 면이 있었다.


나는 박술희의 깨우침이라 받아들이기로 했다.


덩달아 장귀평도 한마디 거들었다.


“소인이 검술을 보는 눈은 없으나, 내군부장의 말이 허언이 아니라는 것쯤은 알겠사옵니다. 천지를 호령하던 폐하의 젊은 시절을 보는 것만 같았습니다.”

“그만그만 됐다. 과인의 얼굴에 금칠은 그쯤 하여라.”


말과 달리 높게 치솟은 미소는 지우지 못했다.


“두 번 대련했다가는 무신으로 칭송하겠구나.”


다행이라면 내 시선과 기준은 객관적이다.


괜한 헛바람으로 나보다 강자를 만났을 때, 만용을 부리는 일은 없을 거라는 뜻이다. 이렇게 재밌는 환경을 얻었는데 허무하게 죽을 수야 없는 노릇 아닌가.


우리는 이후로도 평소라면 나누지 않을 대화를 이어갔다.


땀, 술, 추억.


그리고 소탈함.


나에 대한 벽이 허물어진 느낌을 받았다.


두려움에 떨어야 할 폭군이 아니라 주군으로 삼는 시선 말이다. 그러한 짐작은 관심법을 통해서 확인 할 수 있었다.


『장귀평 / 신기묘산, 책략가, 줏대, 추진력, 신뢰』

『박술희 / 절개, 잠재력, 담력, 청렴, 충성심』


역시 남자끼리 친해지는 방법은 예나 지금이나 똑같다.


자, 이 정도면 소기의 성과는 이룬 셈이다.


기존의 궁예와는 다른 한 보를 내디뎠으니, 남은 뒷발도 끌어와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게 차근차근 걷다 보면 나만의 보폭이 만들어지리라.


“귀평, 혹 형미 대사의 소재를 아는가.”


**


하루가 흘렀다.


조회가 예정되어 있었지만, 어차피 하고 안하고는 내 마음이다. 시답잖은 이야기보다는 지금의 목적지가 더 중요했다.


장귀평과 박술희, 소수의 내군이 동행중이었다.


성문을 나서는 국왕의 행차치고는 소규모로 보일 순 있지만, 이마저도 민망할 정도로 지근거리에 사찰이 있었다.


그나마 내 몸값이 비싸니까 내군을 이끌고 나선 것이다.


“이렇게 가까운 곳에 있을 줄은 예상 못 했군.”

“왕 광치나가 초빙했다 합니다.”


왕 광치나는 왕건을 뜻했다.


내봉령이 문관 중에 최고라면, 광치나는 무관 중에 으뜸인 관직명이었다. 대장군 같은 느낌이라고 생각하면 편했다.


나도 왕건이 형미 대사를 철원 인근으로 이끌고 온 것까지는 알았다. 그래서 물어봤던 것인데 예상보다 너무 코앞이다.


혁명을 앞두고 왕건과 모종의 밀약이 오갔을 가능성이 점쳐졌다. 그럼에도 떡밥은 던져놓을 필요가 있었다.


박술희의 다음으로 일개 스님을 찾는 이유는 간단하다.


일개 스님이 아니기 때문이다.


궁예가 잔혹하게 살해한 고승, 석총보다 더 고위급의 승려가 바로 형미 대사였다. 즉, 궁예의 업보를 덮기 위해서 더 위명이 높은 승려의 인정을 받을 필요가 있었다.


지금은 전 국민이 불교라고 해도 과언이 아닌 시대다.


명망 있는 호족의 말 한마디보다 대사의 말 한마디가 백성에게 더 울림을 준다는 말과 같았다. 민심을 잡으려면 불교계를 반드시 끌어안아야 했다.


“저도 찾아오는 건 처음인데, 생각보다 소박하군요.”


장귀평의 말마따나 이름있는 대사가 주지로 있는 사찰치고는 굉장히 검소한 풍경이었다. 평소 그의 성품이 어떠한지를 여실히 보여주는 듯했다.


나를 뜻하는 깃발이 산을 오르는 걸 보았던 것일까.


사찰의 입구에 다다르니 누군가 마중 나와 있었다.


“그대는?”

“소승, 위 사찰의 주승인 형미라 하옵니다.”


오호라.


나는 의식적으로 관심법을 자제했다.


어쩐지 형미를 상대로는 잔기술 없이 진심으로 접근해야 할 것 같다는 느낌을 받았기 때문이다. 서로를 훑는 시선이 허공에서 잠시 마주쳤다.


기본적으로 날 향한 감정이 좋지는 않을 터.


내가 먼저 손을 내밀기로 했다.


“일국의 왕이라는 자가 불공 한 번 올리지 못했군. 공사가 다망하여 그랬던 것이니 너무 노여워는 말게나.”

“당치도 않사옵니다, 폐하.”

“앞으로는 신경 좀 쓰려하니, 오늘은 차나 한잔 얻어 마실 수 있겠는가?”

“소승이 도성 옆에 자리 잡을 수 있었던 건 모두 폐하의 은덕이옵니다. 쾌히 대접해 드려야 옳지요.”


형미는 공손한 태도로 안쪽을 가리켰다.


“모시겠습니다.”


나는 고개를 가로저으며 말했다.


“날씨가 이리도 화창한데 급할 필요 있겠나.”

“하옵시면?”

“함께 한 바퀴 둘러보며 건물 소개 좀 부탁하고 싶네만.”


형미의 곁으로 다가가며 박술희 포함 내군은 뒤로 물렸다.


장귀평만이 7보 정도 거리를 벌려 따라붙도록 했다.


무모하다면 무모한 내 행동에 형미는 짐짓 의외라는 표정을 지어 보였다. 그러나 이내 보폭을 맞춰 걷기 시작했다. 사찰이 작다 보니 큰 내용 없는 사담 몇 마디면 충분했다.


형미가 마지막으로 안내한 곳은 와상이었다.


다화를 즐길 장소가 대웅전이 아님에 살짝 당황했지만, 도성이 훤히 내려다보이는 풍경이 이유를 대변했다. 곳곳에 묻은 생활감이 형미가 주로 머무르는 곳임을 암시했다.


그런데.


이야 햇빛이 강렬한데?


오전인지라 지붕을 대신할 나무 그늘이 애먼 데 가 있다는 게 사소한 문제라면 문제였다. 초여름의 뜨거운 햇살이 아무런 방해 없이 내게 닿았다.


치사하게 혼자 태양을 등진 형미가 희미하게 미소 지었다.


어쩐지 시험대에 오른 기분이었다.


아마 내가 투정 부리면 곧장 일어서서 안으로 이동하리라.


하지만 중요한 건 난 크게 신경 쓰이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만족감마저 들었다.


백수에게 부족한 영양소는 수도 없이 많겠지만, 그중에서도 비타민D가 가장 쉬우면서도 얻기 힘든 영양소였다. 햇빛만 쐬면 된다지만 밖을 안 나가는데 그게 말처럼 쉬운가.


결국, 크게 앓아누운 뒤로 한때 집착증세까지 보인 나다.


잘 흡수되라며 고개도 살짝 돌려주고는 운을 띄웠다.


“여기서 내려다보는 태봉의 수도는 어떠한가?”

“마냥 평화롭다고는 못하겠습니다.”

“그리 보았다면 옳게 봤네.”


형미가 미간을 크게 꿈틀거렸다.


자신과 예측과 다른 언행이 연이어 이어진 탓이었다.


가볍게 한숨을 내쉰 그가 본심을 털어놓았다.


“소승 형미, 아무래도 폐하를 잘못 알았나 봅니다.”

“그게 무슨 뜻인가?”


형미의 말을 짧게 요약하자면 자신에게마저 미륵불 신앙의 교리를 강제로 설파하러 온 줄 알았단다.


석총이 살해당한 가장 큰 이유로 법상종의 분파 간 대립이라 보는 시선이 유력하니, 괜한 걱정이라고 할 수는 없었다.


그런데 난 궁예이기 전에 나다.


경전이 어쩌고, 분파가 어쩌고, 미륵이 어쩌고.


나는 관심도 없고 잘 모른다.


“어차피 모든 교리의 끝은 백성을, 그리고 인간을 이롭게 하는 데에 의의를 두고 있네. 서로 대립할 필요가 있겠는가.”

“······소문과는 정말 다르신 듯합니다.”


잠시 현자 흉내를 낸 나는 짐짓 얼굴을 굳혔다.


찻물로 입술을 적시고는 긴 이야기를 쏟아냈다.


“자네가 말하는 소문의 내용은 과인도 알고 있네. 그러한 말이 떠도는 이유 또한 알고 있으며, 이 나라를 위해 어떻게 바뀌어야 하는지도 인지하고 있네.”


형미는 침묵을 지켰다.


“여러 사죄는 후일로 미루고 실천부터 하려 하네. 그러니 도성과 가까운 이곳에서 지켜봐 주겠는가? 한낮의 허언으로 끝나지 않고, 어떻게 잘못을 바로잡아 가는지 말일세.”


당장 하루 만에 모든 불신을 거두라고 강요할 수는 없다.


누군가에게 내 의지를 퍼트려 주기를 바라며 털어놓은 것도 아니다. 단지 앞으로의 행보에 어떤 의도가 담겨 있는지를 알아주기를 바랐다.


변덕이 아닌 변화라는 걸 알아주기를 바랐다.


형미를 끌어안기에 앞서 나를 향한 관념부터 바꿔야 했다.


색안경을 벗긴다면 진심이 보이리라.


“나무 관세음보살······.”


형미는 목탁을 두드리며 허리를 숙여 보였다.


앞서 말했듯이 형미는 왕건이 초빙한 인사다.


이미 왕건의 혁명에 동참했을 가능성도 충분했다. 그러니 거짓을 제외하고 형미가 보일 수 있는 반응이란 침묵뿐이다.


“훗날 과인의 행보가 자네의 뜻과 같다면 힘이 되어주게.”


나도 대답을 바라고 온 건 아니다.


마지막 다짐을 남긴 뒤에 미련 없이 돌아섰다.


**


“폐하, 아뢰옵기 황공하오나······.”


사찰이 있던 산을 거의 빠져나왔을 때였다.


한참을 침묵에 잠겨 있던 장귀평이 나를 불러 세웠다.


궁예의 꼬장으로 인해 억울한 죽음을 앞두고도 의연했던 장귀평이다. 그런 그의 표정이 굉장히 상기되어 있었다.


“소신이 제대로 들은 것이 맞사옵니까?”

“무엇을 말이냐.”


나는 씩 웃어준 뒤 말을 이었다.


“미친 왕이 미친 짓을 멈추고 성실하게 국정에 임하겠노라. 라는 내용의 말이라면 제대로 들은 것이다.”


신하 된 자로써 섣불리 동의하기에는 힘든 문장이었다.


주군의 면전에 대고 너 미친놈 아니냐며 비아냥대는 것과 일맥상통하는 바가 있었으니 말이다. 하지만 장귀평은 그조차도 인지하지 못하고 그저 감격에 겨워 보였다.


이토록 유난을 떠는 게 이해되지 않는다면 거짓말이다.


장귀평은 평생토록 궁예를 위해 지모를 써왔다.


건국에도 크게 이바지한 공신인데 토사구팽의 유래를 몸으로 느낄 뻔도 했다. 이제 과거의 영광은 가슴 속에만 남아있을 줄 알았건만 내가 다시 날개를 펼치겠단다.


신뢰도를 떠나서 가슴이 벅차오를 터였다.


그러나 두 옛날 사람의 추억 여행은 더 이어지지 못했다.


정면에서 마주 걸어오는 무리가 있었다.


그들의 선두에 선 자와 나는 서로를 알아보았다.


『왕건 / 왕재, 덕왕의 자질, 천명, 인복, 용장, 영걸, 와신상담, 당혹』



이 작품은 어때요?

< >

Comment ' 1


댓글쓰기
0 / 3000
회원가입

관심법으로 삼국통일 연재란
제목날짜 조회 추천 글자수
공지 연재 시간은 21:00 입니다. 24.09.08 94 0 -
22 22화 - 포악하기로는 둘째가라면 서러운 놈. NEW +1 22시간 전 84 9 12쪽
21 21화 - 직구만 던지는 미친 강속구 투수. +1 24.09.16 105 9 13쪽
20 20화 - 대체 그놈은 정체가 뭡니까? +1 24.09.16 122 9 12쪽
19 19화 – 태봉은 건재하다. +1 24.09.15 125 9 12쪽
18 18화 - 채 펴지 못한 새싹을 그대로 밟아주리라 마음먹었다. +3 24.09.14 138 10 11쪽
17 17화 - 몸은 묘소에, 마음은 전장에. +2 24.09.13 128 10 12쪽
16 16화 - 말이 통하지 않는 말을 붙잡고 말싸움을 해대는 사내. +1 24.09.12 128 10 12쪽
15 15화 - 내심 걱정이 됐다. +1 24.09.11 139 7 11쪽
14 14화 - 산적들이 점점 군인이 되어감을 느꼈다. +1 24.09.10 144 7 12쪽
13 13화 - 인재라 해도 짝을 잘 만나야 한다. +1 24.09.09 156 8 11쪽
12 12화 - 어전이란 본디. +1 24.09.08 160 10 12쪽
11 11화 - 홍유, 배현경, 신숭겸. 그리고 복지겸. +2 24.09.07 168 10 11쪽
10 10화 - 축제로구나! +3 24.09.06 161 10 11쪽
9 9화 - 사람 심리가 그렇다. +2 24.09.06 164 10 12쪽
8 8화 - 미륵상 소실은 인재입니다. +2 24.09.05 164 9 11쪽
7 7화 - 이번 사건의 배후에 왕건이 있다. +1 24.09.04 172 8 12쪽
6 6화 - 왕건이 원하는 것. +1 24.09.03 184 7 12쪽
5 5화 - 대놓고 천명이라는 단어가 새겨진 인물. +1 24.09.02 177 7 12쪽
» 4화 - 땀, 술, 추억. 그리고 소탈함. +1 24.09.01 178 7 12쪽
3 3화 - 비상사태다. +1 24.08.31 192 8 12쪽
2 2화 – 도대체 어떤 삶을 살아온 거냐. 과거의 나. +2 24.08.30 220 8 9쪽
1 1화 – 통촉하여 주시옵소서. +1 24.08.30 235 8 9쪽

구독자 통계

신고 사유를 선택하세요.
장난 또는 허위 신고시 불이익을 받을 수 있으며,
작품 신고의 경우 저작권자에게 익명으로 신고 내용이
전달될 수 있습니다.

신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