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궁 도시에서 감정사로 살아가는 법

무료웹소설 > 일반연재 > 판타지

새글

무늬도
작품등록일 :
2024.09.02 10:41
최근연재일 :
2024.09.18 23:59
연재수 :
17 회
조회수 :
1,585
추천수 :
78
글자수 :
92,511

작성
24.09.02 15:20
조회
147
추천
4
글자
12쪽

1화 인정이 눈곱만큼 있는 도시

DUMMY

1화 인정이 눈곱만큼 있는 도시





눈을 떠 보니, 그곳은 더 이상 아늑한 집구석이 아니었다.


웅성웅성···.


피부를 스치는 황량한 바람.

사막 도시를 연상케 하는 백색 도시의 전경.

그 속을 바삐 오가는 이국적인 외모의 사람들과 심지어 사람이 아닌 존재들.

낯선 냄새, 낯선 소리들이 사정 없이 스며들어 감각을 어지럽혔다.


“이게 대체···?”


퍽!

털썩.


“이 머저리 같은 놈이? 눈깔 똑바로 뜨고 다녀!”


영어도 뭣도 아닌, 생전 처음 들어보는 낯선 언어.

그러나 듣자마자 그 의미가 바로 이해되었다. 마치 지금까지 줄곧 사용해 온 언어인 것처럼.


김수호는 자리에서 일어나 다시금 주위를 둘러봤다.

틀림없이 단 한 번도 와 본 적이 없는 낯선 장소, 그러나 기이하게도 익숙하기 그지없는 광경.

이곳이 어딘지 깨닫는 데는 그리 오랜 시간이 필요하지 않았다.


“미궁 도시 몰비아잖아···?”


그가 조금 전까지 컴퓨터 앞에 앉아 하고 있던 게임의 배경, 바로 그곳이었다.

말도 안 돼!


그러나 아무리 현실을 부정해 본들 달라지는 건 없었다.

눈으로, 귀로, 피부로 느껴지는 이 생생함은 믿지 않는 것 정도로 쉽게 사라지고 마는 성질의 것이 결코 아니었으니까.


그 사실을 인지하고 현실을 받아들이기 시작하자 위기감이 엄습했다.

이 도시는 절대로 친절한 곳이 아니었기에.

눈 뜨고 코 베어 간다는 말이 실제로 이루어질 수도 있는 무지막지한 곳이었다.

정신 바짝 차려야 한다.


우선은 상황 파악이 먼저였다.

일단 지금 서 있는 곳은 튜토리얼이 끝난 뒤 처음으로 보게 되는 도시 중앙 구역.

가진 것은 허름한 옷과 은화 한 닢뿐.


‘···무기랑 갑옷은 어디 갔어?’


튜토리얼을 완수하면 기본적으로 주어지는 장비가 없었다.

혹시 튜토리얼을 생략한 셈 치는 건가?

만약 그런 거라면 장비는 인벤토리 안에 들어있을 터다.


‘이 말을 내 입으로 직접 내뱉게 될 줄은 몰랐는데···.’


생각만으로도 수치스러워지는 일이었지만, 생존 앞에선 아무것도 아니었다.


“···인벤토리.”


···그러나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설마?


“상태창···? 캐릭터창! 장비창-.”


명령어라 할 만한 단어들을 모조리 입에 담아 봤지만, 여전히 달라지는 건 없었다.

게임 속에 들어왔지만, 정작 게임적인 능력은 주어지지 않은 것이다.

안돼! 이럴 순 없어!


김수호는 같은 말을 두어 번 더 반복하고서야 참혹한 현실을 받아들일 수 있었다.


‘···좆됐네.’


눈앞이 캄캄해졌다.

아무런 장비도, 능력도 없이 이 도시에서 어떻게 살아남지? 그것도 꼴랑 은화 한 닢으로?

당장 무인도에서 눈을 떠도 이보다는 희망적일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아냐, 그래도 사람 사는 곳인데 무슨 방법이 있겠지.’


당장 필요한 건 먹을 것과 묵을 숙소였다.

돈이 정 없으면 노숙이라도 하면 되지 않겠나 싶겠지만, 그렇지 않았다.

이 도시에서 노숙은 선택 사항이 아닌 자살행위였기 때문이다.


금품이나 신체를 노리고 습격하는 무법자들, 그리고 해가 지면 어디선가 나타나 산 사람의 몸을 노리며 도시를 배회하는 망령들이 그 이유였다.

그런 고로 어찌 보면 지금 가장 중요한 건 식(食)이 아닌 주(住)인지도 모른다.


아무튼 돈을 벌 수단이 필요하다. 그것도 전투 없이, 지금 당장 맨몸으로 벌 수 있는 수단이.


마음을 차분하게 가라앉히고 곰곰이 생각해 본 결과, 그는 한 가지 방법을 떠올려 낼 수 있었다.


‘분명 부가 퀘스트 중엔 일상 퀘스트 같은 것도 있었어.’


미궁을 탐사하는 RPG게임이었던 만큼 주로 하는 일은 보물 사냥과 전투였지만, 그 와중에도 소소한 보상을 주는 일상 퀘스트는 존재했다.

창고에 숨어든 쥐를 사냥한다든가, 가게 물품을 정리한다든가, 편지를 전달한다든가 하는.


당시엔 보상이 형편없어서 굳이 하지 않았던 일들이지만, 지금은 달랐다.

당장 뭐라도 해야 먹고 살 수 있을 테니까.

그는 지체 없이 일거리를 찾아 나섰다.


“···물건 정리하는 걸 도와주겠다고? 내가 그쪽을 어떻게 믿고 일을 맡겨? 됐으니까 뭐 살 거 아니면 나가. 아, 얼른!”

“···배달할 물건이 있기는 하지만, 길드 소속도 아닌 분한테 일을 맡기기는 좀 그렇네요. 다른 볼일이 없다면 이만 나가 주시겠어요?”

“···그, 직원이 필요한 건 맞죠, 맞는데··· 주인 아저씨가 신분이 확실하지 않은 사람은 받지 말라고 하셔서요··· 죄송해요!”


어느새 해가 지평선 너머로 발을 걸치며 슬그머니 넘어가려 하고 있었다.

그동안 스무 군데 가까이 찾아다녔지만, 그에게 일을 맡긴 곳은 0군데, 단 한 곳도 없었다.

이유는 분명했다. 신분이 확실하지 않다는 것.


‘역시 현실은 게임하고는 다르네···.’


게임에선 일을 못 줘서 안달이었는데.


아무튼 일을 구하려면 신분을 증명할 만한 무언가가 필요했다.

그런 걸 얻으려면 지금으로선 제국 공인 길드에 가입하는 방법밖엔 없었는데, 그게 말처럼 그리 쉬운 일이 아니었다.

어느 길드든 그에 맞는 활동을 할 수 있다는 사실을 증명해야만 가입할 수 있기 때문이다.

요컨대 합당한 재능이 필요하다는 소리다.


‘내가 할 수 있는 게 뭐가 있지···?’


곰곰이 생각해 봤지만, 마땅히 떠오르는 게 없었다.

무려 대학을 졸업한 몸임에도 아무 쓸모가 없는 것이다!


그나마 위안이 되는 건 이 세계의 언어로 대화를 하거나 읽고 쓰는데 아무런 지장이 없다는 점이었다.

이런 것도 특전이라면 특전일까?


아무튼 내일은 이 점을 살려 일자리를 구해볼 생각이었다.

문맹률이 높은 곳이니 적어도 한 군데쯤은 고용해 주는 곳이 있지 않을까?


그런 희망적인 생각으로 마음 속 불안을 덜어내며 미리 눈여겨 둔 여관을 향해 발걸음을 옮겼다.


텅!

와하하하.


그가 찾아간 곳은 술집을 겸하는 제법 커다란 여관이었다.

이곳에선 여관에서도 자다가 칼을 맞을 수 있기 때문에 나름 고심해서 고른 곳이었다.


“어서 오세요! 숙박을 원하신다고요? 130블랑이에요. 행여나 흥정할 생각은 말아요. 이 구역 어느 여관을 가도 이보다 저렴하진 않을 테니까. 대신 십일치 선불로 내시면 100블랑 깎아드려요. 어떡하실래요?”

“······.”


‘···물가가 이렇게 비쌌었나?’


난감하게 됐다. 은화 한 닢의 가치는 100블랑.

즉, 그에겐 하루 묵을 돈조차 없다는 소리였다.


“···저, 혹시 여긴 직원 안 필요한가요? 무슨 일이든 열심히, 아니 잘할 자신 있는데···.”

“흐음, 그건 주인 아저씨가 나오셔야 대답해 드릴 수 있겠네요.”

“그분은 언제 나오시는데요?”

“글쎄요. 오늘 밤 늦게나··· 어쩌면 내일쯤?”

“···그렇군요.”


‘이 방법은 글렀군. 그럼 이제 어쩌지? 무턱대고 밖으로 나갈 수도 없고. 음유시인 행세라도 해 봐야 하나···.’


머리를 긁적이며 난감해하는 그에게 여급이 말했다.


“딱 보니, 이 도시에 온 지 얼마 안 됐나 봐요. 기껏해야 이삼일쯤? 내 말이 맞죠?”

“···그게 티가 나나요?”

“아하하, 그럼 안 날 줄 알았어요? 아마 그쪽을 본 사람들은 거의 다 알아봤을 걸요?”


나름 자연스럽게 행동한다고 한 건데, 다른 사람들 눈엔 그렇지 않은가 보다.


“이 도시엔 왜 왔는지 모르겠지만, 그렇게 어리바리하게 굴다가는 쥐도 새도 모르게 목숨이 달아날 거예요. 아직까지 멀쩡한 게 기적이네.”

“혹시 뭐가 문젠지 구체적으로 들을 수 있을까요?”

“흐음, 원래 이런 건 돈 받고 알려줘야 하는 건데··· 귀여운 얼굴을 봐서 특별히 알려 줄게요.”

“??”


‘···귀여, 뭐? 지금 나보고 한 소리야??’


10대 때도 들어본 적이 없는, 진정 처음 들어보는 말이었다.

아무리 사람마다 취향이 천차만별이라지만, 30대에 그런 말을 듣기는 좀···.


‘아? 잠깐만! 설마 내 몸이 바뀌었나?!’


그러고 보니 스토커처럼 만성적으로 달라붙어 있던 허리, 목, 손목 통증이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마치 팔팔했던 10대 시절로 돌아간 것처럼!


‘···이건 좀 좋은데?’


처음으로 마음에 드는 게 한 가지 생겼다.


“우선 이것부터 알아둬요. 이 도시의 사람들은 웬만큼 돈을 모았거나 능력이 받쳐주지 않는 이상 여관에서 묵지 않는다는 걸요.”

“···? 그럼 대체 어디서 잠을 자죠?”

“그야 자기 집이나 소속 길드에서 제공하는 숙소, 그도 아니면 몰비아 총독부에서 관리하는 회관에서 잠을 자죠. 근데 보통 이런 건 여기 올 때 자연스럽게 알게 되는 건데··· 설마 도망자는 아니죠?”

“···그럴 리가요.”


아니었으면 좋겠는데.


“하긴 그런 사람이었으면 여기가 아니라 지하 구역으로 갔겠네. 아무튼 그래요. 그러니 어디 가서 방 달라는 소리는 함부로 하지 말아요. 그렇게 무방비하게 아무것도 모르는 티를 내고 다니면 표적이 되기 십상이니까. 아직 모르죠? 이 도시가 얼마나 무서운 곳인지. 가진 게 없다고 안심할 수 있는 도시가 아니에요. 알았어요?”

“네···.”


‘···나 지금 혼나고 있는 건가?’


중학교를 졸업한 이후로 이런 취급을 받아본 적이 없었는데.

어쩐지 기분이 이상하다.


“지금 돈은 얼마나 있어요?”

“······?”


‘갑자기 그런 건 왜 물어보는 거지?’


불쑥 고개를 쳐든 경계심에 김수호가 머뭇거리자 여급이 발끈했다.


“난 이미 그쪽이 130블랑도 없는 거 알고 있거든요?! 의심하는 버릇도 좋지만 도와주려는 사람에게 그럼 쓰나요? 에이, 그럼 이것만 말해 봐요. 50블랑 정돈 가지고 있죠?”


틀린 말은 아니라 김수호가 살짝 미안해하며 천천히 고개를 끄덕이자 그녀가 손을 내밀었다. 누가 봐도 돈을 달라는 몸짓이었다.


이 사람을 믿어도 될까? 이름도 모르는 사람을?

하지만 안 믿으면? 달리 방도는 있고?

이미 해가 진 상태라 밖으로 나가는 건 위험했다.

그러니 지금 기대할 수 있는 건 이 사람의 친절뿐. 달리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잠시 망설이던 그가 주머니에서 은화를 꺼내 슬그머니 건네자, 여급이 빙긋이 웃으며 50블랑을 거슬러 주었다.

그러고는 빈 자리를 가리키며 잠깐만 기다리라고 하더니, 잠시 후 쟁반을 들고 다시 돌아왔다.


“자, 먹어요. 딱 보니 오늘 한 끼도 못 먹은 거 같은데.”


쟁반 위에는 주먹만 한 빵 두 개와 걸쭉한 붉은 스튜, 그리고 술내를 풍기는 나무잔이 놓여있었다.

허기를 달래기엔 충분한 양이었지만, 은화를 반 개나 가져간 것 치고는 퍽 초라한 밥상이었다.

설마 친절을 빙자한 강매였던 건가?


“무슨 말이 하고 싶은진 그 표정만 봐도 알겠는데, 일단 나 여기 직원이거든요? 손님도 아닌 사람이랑 길게 얘기하고 있을 순 없다고요. 그러니 일단 먹어요. 이제부터 설명해 줄 테니까.”


듣고 보니 나름 일리가 있었다.

김수호는 순순히 그릇을 받아 들고는 빵을 한입 크기로 찢어 스튜에 찍어 먹었다.

빵은 거칠고, 스튜는 담백한 토마토 맛이었지만, 시장이 반찬이라 그런지 상당히 맛있었다.


여급이 그 모습을 흐뭇하게 바라보다 입을 열었다.


“아까도 말했다시피 이 여관에 묵으려면 적어도 130블랑은 필요해요. 그런데 사실 130블랑을 다 내지 않아도 이곳에 머물 방법은 있어요.”

“어떻게요?”

“지금처럼 술집의 손님이 되는 거예요. 밤새도록. 피곤하면 구석에 앉아 잠을 청해도 되고요. 그 정돈 주인 아저씨도 눈감아 주시거든요. 물론 50블랑 이상 쓴 손님에 한해서지만!”

“아···.”


마치 찜질방이나 피시방에서 밤을 새는 것과 비슷했다.


‘···몸 상태가 어려져서 정말 다행이군.’


“이제 알겠죠? 그러니 그거 다 먹고 나면 저기 구석으로 가서 적당히 눈 좀 붙여요.”

“···고맙습니다.”

“뭘요. 귀여운 손님에게 이 정도쯤이야.”


여급이 장난스럽게 윙크를 던지고는 다른 손님에게로 향했다.


생전 처음 받아보는 추파에 멋쩍어진 그는 괜스레 머리를 긁적거리며 남은 음식을 마저 먹어치웠다.

그러고는 술잔을 기울이며 주변을 둘러보는데, 문득 뒷자리에서 나누는 대화 소리가 그의 이목을 잡아끌었다.


“···그러니까, 이 검에 불의 비를 부르는 마법이 걸려 있다, 그 말이오?”



이 작품은 어때요?

< >

Comment ' 1


댓글쓰기
0 / 3000
회원가입

미궁 도시에서 감정사로 살아가는 법 연재란
제목날짜 조회 추천 글자수
공지 당분간 연재 시간은 21시 35분입니다 24.09.12 44 0 -
17 17화 황금 열쇠(4) NEW 42분 전 4 2 11쪽
16 16화 황금 열쇠(3) 24.09.17 29 6 12쪽
15 15화 황금 열쇠(2) 24.09.15 58 6 12쪽
14 14화 황금 열쇠(1) +1 24.09.14 64 6 12쪽
13 13화 최종 보스(?) +1 24.09.13 73 6 12쪽
12 12화 멸망한 세상의 검제 +1 24.09.12 82 5 11쪽
11 11화 검 속에 깃든 것 +1 24.09.11 88 5 11쪽
10 10화 전설의 검을 가진 아이 +1 24.09.10 92 4 12쪽
9 9화 별잡이 화살 +1 24.09.09 99 5 12쪽
8 8화 신의에는 신의로 +1 24.09.08 110 4 12쪽
7 7화 신화급은 아니지만, 그에 비견되는 +1 24.09.07 117 5 12쪽
6 6화 황금향의 저주 +1 24.09.06 118 4 12쪽
5 5화 거울 주머니 +1 24.09.05 119 4 12쪽
4 4화 유물 감정사=사기꾼(?) +1 24.09.04 124 4 14쪽
3 3화 잡았다, 요놈 24.09.03 131 3 13쪽
2 2화 특전의 성능이 생각보다 뛰어나다 24.09.02 130 5 13쪽
» 1화 인정이 눈곱만큼 있는 도시 +1 24.09.02 148 4 12쪽

구독자 통계

신고 사유를 선택하세요.
장난 또는 허위 신고시 불이익을 받을 수 있으며,
작품 신고의 경우 저작권자에게 익명으로 신고 내용이
전달될 수 있습니다.

신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