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궁 도시에서 감정사로 살아가는 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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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9.02 10: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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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9.03 15: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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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화 잡았다, 요놈

DUMMY

3화 잡았다, 요놈





그 순간, 김수호는 굶주린 맹수 앞에 선 것처럼 머릿속이 하얘지며 심장이 벌렁거리고, 다리가 바르르 떨렸다. 동시에 온몸이 굳어버린 것처럼 움직일 수가 없었다.


“······!”


누가 말해주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이게 소위 말하는 살기라는 걸.


“워워, 진정하시오. 설마 접대의 관습을 잊은 거요? 우리가 이곳의 손임을 잊지 마시오. 달리아도 좀 진정해. 이러다 저 사람 숨 넘어가겠어.”


달리아가 그 말을 듣고는 화들짝 놀라 고개를 돌렸다.

그 순간, 몸을 옥죄던 기운이 씻은 듯이 사라지며 다리에 힘이 풀렸다.


털썩.

철그럭.


김수호가 바닥에 철퍼덕 주저앉자, 달리아가 신속히 다가와 그의 얼굴을 부여잡고 살펴보며 속사포처럼 말을 내뱉었다.


“괜찮아요? 이런, 숨 좀 쉬어봐요, 숨!”


‘숨?’


그는 그제서야 자신이 숨도 안 쉬고 있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후우우! 하아, 하아···.”

“휴우, 다행이다. 정말 미안해요. 기감이 그렇게 예민한 줄은 미처 몰랐어요.”


기감? 그게 뭔진 모르겠지만, 아무튼 실수해서 미안하다는 말 같았다.


“부랑아 돌보기는 끝났나? 그럼 이제 그만 나 좀 보지?”


로브를 입은 남자는 어느새 그가 떨어트린 인도자의 검을 손에 쥔 채 멀찍이 물러나 있었다.


“···너, 지금 뭘 하려는 거야?”

“너희 같은 무지렁이들은 뭐든 눈에 보여야 믿지. 그래서 보여주려는 거다. 내 말이 옳았다는 걸. 저 부랑아 자식이 아니라! 내가!”

“그래서, 그걸로 여길 불태우겠다고? 어리석긴. 관습을 어긴 널 사람들이 가만 놔둘 거 같아? 사지가 부러지고 목이 매달리게 될 걸?”


로브를 입은 남자가 수군거리는 사람들을 돌아보며 비웃듯이 말했다.


“흥, 저 무지렁이들은 불의 비를 피하느라 날 붙잡을 정신도 없을 거다. 그보다는 본인들 걱정이나 하시지. 이곳이 불타면 밤새 망령들을 피해 숨어 다녀야 할 테니까 말이야.”

“···여기서 어떻게 도망친다고 해도 넌 수배될 거야. 우리가 그렇게 만들 거니까. 설령 운 좋게 영지로 도망친다고 해도 협약에 의해 다시 이곳으로 끌려오게 될 거고. 그땐 사지가 부러지는 정도론 안 끝나. 감당할 수 있겠어?”

“그것참, 레이디의 지나친 걱정에 몸 둘 바를 모르겠군. 보답으로 조언 하나 해 줄까? 지금부터라도 변명할 말을 생각해 두는 게 좋을 거다. 내가 이런 소문을 낼 거거든. 하이랜더 연놈들에게 기껏 유물을 감정해줬더니 날 버러지만도 못한 엉터리라며 겁박하고 모욕했다고, 그래서 유물을 사용해 증명할 수밖에 없었다고 말이야!”


얼토당토않은 말이었다. 누가 누구를 겁박했단 말인가? 거기다 모욕이라니? 그럼 검증도 안 된 사실을 마법사가 말했단 이유만으로 그냥 믿으란 말이야? 억지도 정도가 있지!


그러나 그런 생각과는 다르게 달리아는 선뜻 달려들 수 없었다.

만약 그의 감정 결과가 옳았던 거라면?

최악의 경우 여관은 불바다가 되고, 밖으로 내몰린 사람들은 고대 망령들의 표적이 되어 목숨을 잃을 것이다.

그런 상황에 저런 얼토당토않은 소문까지 퍼진다면, 그 모든 탓을 하이랜더가 뒤집어 쓰게 될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안 그래도 상아탑과의 불화가 이어지고 있는 지금, 그런 일이 벌어졌다가는 그나마 남아있는 우호적인 마법사들마저 등을 돌리게 될지도 모르는 일.

그만한 리스크를 감수할 수는 없었다.


으드득.

달리아는 입술을 잘근 깨물며 입을 열었다.


“···원하는 게 뭐야?”


로브를 입은 남자가 얼굴에 화난 표정 대신 의기양양한 미소를 띠며 대답했다.


“약속한 보수를 내놔, 지금 바로. 나를 모욕한 대가까지 쳐서 말이야. 그럼 이번 일은 특별히 문제 삼지 않고 넘어가 주지.”


까딱거리는 손을 보며 달리아가 이를 아득 깨물었다.

상아탑과의 불화만 아니었어도 이런 사기꾼 같은 놈에게 끌려 다니는 일은 없었을 텐데.

실로 굴욕적이었다.


그녀가 부들거리는 손으로 약속했던 보수를 꺼내려는데, 문득 누군가 그녀를 말리며 앞으로 나섰다.


“그 돈은 꺼내실 필요 없어요. 걱정하시는 일은 일어나지 않을 테니까요.”


김수호였다. 그는 조금 전 여파가 아직 남았는지 여전히 창백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그런데도 자신 있게 앞으로 나선 건 무슨 생각이 있어서일까?

그라고 해서 특별히 믿을 수 있는 사람인 건 아니었지만, 어차피 달리 좋은 방법이 없었던 달리아는 잠시 지켜보기로 했다.


“이 버러지가 또 겁도 없이 나대는구나. 네놈은 죽는 게 두렵지도 않은 것이냐?”


김수호가 어깨를 으쓱 올리며 대답했다.


“죄송해요. 원래는 안 이러는데, 저도 먹고 살아야 하다 보니···.”


위협에 아랑곳 않는 태연자약한 대답에 로브를 입은 남자의 얼굴이 붉으락푸르락 달아올랐다.


“이놈이-! 지금 날 놀리는 거냐!”

“아, 그럴 의도는 아니었는데···. 그냥 그런 걸로 해 둘까요?”

“뭐, 뭐라고?! 이 버러지 같은 새끼가-!”

“자꾸 그렇게 이놈 저놈 버럭대지만 말고 우리 지성인답게 대화를 좀 해 보죠. 마법사는 이 시대를 대표하는 지성인이라던데··· 지금 보니 영 의심스럽네. 아저씨, 마법사 맞아요?”


솔직히 말해. 아니잖아, 그치? 하는 듯한 표정에 로브를 입은 남자가 머리 끝까지 화가 치민 얼굴로 소리쳤다.


“하, 하이랜더어! 생각이 바뀌었다! 날 모욕한 대가는 저놈으로 받아야겠어! 저놈을 잡아! 당자앙-!”


달리아가 얼굴을 싸늘하게 굳히며 대답했다.


“네놈은 하이랜더를 뭘로 보는 거냐. 우리가 싸구려 청부 집단인 줄 알아? 한 번만 더 그딴 개소릴 지껄이면 우릴 모욕한 걸로 간주하겠어.”


그녀가 단칼에 거부하자, 로브를 입은 남자가 검을 앞으로 내밀며 소리쳤다.


“그럼 이곳이 불바다가 되어도 좋다는 말이냐!”


그 협박에는 달리아도 주춤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어떡하지?


“아저씨, 그거 어떻게 사용하는지는 알고 큰소리 치는 거예요?”


김수호의 목소리에 사람들이 화들짝 놀라 고개를 틀었다.


“아니···!”


대체 어쩌자고 그런 도발을?


이유야 어찌 됐든 도발은 훌륭하게 먹혀들었다.

남자가 분노를 주체하지 못해 푸들거리는 손으로 검을 뽑아 들더니, 김수호를 향해 겨누며 소리 질렀다.


“오냐! 타 죽는 게 그렇게 소원이라면 기꺼이 들어주마! 욱-크 치토 옴붸르 데-.”

“막아!”


로브를 입은 남자가 대뜸 주문을 외우기 시작했다.

달리아와 덩치 큰 남자가 재빨리 달려갔지만, 제 시간에 그 입을 틀어막는 건 역부족이었다.


“이구뉘스!!”


남자가 주문을 마무리 지으며 검을 휘두르자, 달리아와 덩치 큰 남자가 다급히 좌우로 몸을 피했다.

다른 사람들도 허겁지겁 몸을 수그리거나 반대 방향으로 몸을 던졌다.

태연히 선 것은 오직 김수호뿐.


——.


순간 장내에 침묵이 감돌았다.

역시나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은 것이다.


“거봐요, 괜찮을 거라니까.”

“···이, 이게 왜···! 옴붸르 데 이구뉘스! 옴붸르 데-.”

“잡아!”


달리아와 덩치 큰 남자가 재빨리 달려가 그에게서 검과 지팡이를 떨어트리며 움직이지 못하도록 깔아뭉갰다.


“이럴 리가 없다, 이럴 리가! 대체 왜···!”

“그야 그 검에 불의 비를 부르는 마법 같은 건 걸려 있지 않으니까요.”


사실 그런 마법이 있었어도 발동되는 일은 없었을 거다. 발음이랑 어법 모두 엉터리라.

관련 지식이 아예 없는 것 같진 않은데, 많이 어설프달까.


“너 같은 놈이 뭘 안다고···!”


김수호가 바닥에 나동그라진 지팡이를 주워 표면에 새겨져 있는 기호들을 쓱 살펴보며 말했다.


“다른 건 몰라도 이거 하난 확실히 알죠. 그쪽이 지금 본모습을 숨기고 있다는 거요.”

“자, 잠깐만! 너 지금 뭐 하려는 거야? 누구 마음대로 내 지팡이에 손을 대! 당장 내려놓지 못해?! 손-.”


"[레쳅투스]”


김수호의 목소리가 묘한 울림을 안고 울려 퍼졌다.

그러자 로브를 입은 남자의 얼굴이 아지랑이처럼 일렁거리더니, 이내 그 자리에 다른 얼굴이 나타났다.


“······!”


거무죽죽하게 움푹 꺼진 눈자위, 살가죽만 얹어놓은 것 같은 홀쭉한 뺨, 피부 위로 도드라진 자주색 반점들.

그는 내일 당장 죽는다고 해도 이상하지 않을 병자의 얼굴을 하고 있었다.


김수호는 이런 특징을 가진 사람이 어떤 부류인지 알고 있었다.


‘···퍼프닐 중독자였군. 실제로 보니 더 끔찍하네. 역시 약은 함부로 하는 게 아니야.’


퍼프닐은 마약의 일종이었다.

복용하면 얼굴에 자주색 반점이 도드라지는 특징이 있어서 주로 지하의 거주민들이 복용하는 마약이었다.

달리 말하면 이 자가 지하 구역의 사람일 확률이 높다는 말이기도 했다.


“노먼···?!”


달리아는 그가 누군지 아는 눈치였다. 아니, 그녀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들도 그의 얼굴을 알고 있는지, 저들끼리 모여 수군거리기 시작했다.


“그놈 아니야? 상아탑에서 수배 내린 그 견습 마법사!”

“어! 듣고 보니 맞네. 딱 저 얼굴이었어!”


이제 보니 그는 유명인이었다.


“제길! 당장 그거 이리 내! 내놓으라고!”


남자가 지팡이를 향해 손을 뻗으며 거세게 발버둥 쳤다.

그 모습이 사뭇 안쓰러웠지만, 그에게 동정의 눈길을 보내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어지간히 나쁜 짓을 저질렀던 모양이다.


“유명한 사람인가 보군요.”

“상아탑을 배신하고 등쳐먹은 간 큰 놈이죠. 그동안 상아탑의 눈을 어떻게 피해 다녔나 의문이었는데, 이제 보니 그 지팡이 덕분이었어요. 혹시 그게 어떤 유물인지 알려 줄 수 있어요? 물론 그 값은 따로 쳐줄게요.”


거절할 이유가 없었다.


“이 지팡이의 이름은 기만자의 지팡이예요. 방금 보신 것처럼 허상을 만드는 환상 마법이 걸려 있고···.”


김수호가 말을 흐리며 지팡이로 테이블 위에 놓인 나무잔을 가리켰다. 그러자 나무잔이 지팡이의 움직임을 따라 천천히 공중으로 떠올랐다.


“이렇게 특별한 주문 없이도 보이지 않는 힘을 사용할 수 있게 해 주죠. 마치 마법사들이 그러는 것처럼요.”


김수호는 겉으로는 담담하게 설명하고 있었지만, 기실 속으로는 몹시 들떠 있었다.

그도 그럴게 마법이지 않은가!


‘오, 마법이야! 내가 마법을 부리고 있어!’


사실 보이지 않는 힘은 마법사라면 누구나 할 수 있는, 마법 축에는 끼지도 못하는 잔재주에 불과했지만, 현대인의 입장에서는 그야말로 기적이나 다름없었다.

그러니 신이 날 수밖에.


“그럼 누구라도 그것만 있으면 마법사를 사칭할 수 있겠군요. ···아! 그래서 아까 마법사가 좋아할 만한 물건이 아니라고···?”

“네, 맞아요.”

“···이미 그때부터 저 자가 사기꾼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군요.”

“짐작은 하고 있었죠.”


김수호가 꽁꽁 묶인 채 한구석에 처박힌 남자를 엄지로 가리키며 물었다.


“저 사람은 앞으로 어떻게 되는 거죠?”

“내일 날이 밝는 대로 상아탑에 넘길 생각이에요. 저지른 짓이 있으니, 아마 무사하긴 힘들겠죠.”


상아탑은 마법사들의 집단이다.

마법사들은 대개 정신 세계가 독특한 편이고.

그러니까 조금 과장되게 말하자면, 미친 놈들의 소굴이라는 소리다.

과학자로 예를 들면 열에 아홉은 매드 사이언티스트랄까.

그런 자들의 원한을 샀으니 아마 편히 죽긴 힘들 거다. 어쩌면 죽을 때까지 실험체로 쓰이게 될지도 모르고.


문득 게임 속에서 봤던 장면들이 떠올라 팔에 소름이 돋아 올랐다.


‘이젠 그게 전부 현실이라는 거잖아? 세상에···!’


앞으로 그가 처하게 될 잔혹한 현실에 문득 동정심이 일었지만, 그렇다고 그가 해 줄 수 있는 일은 없었다. 해서도 안 되고. 그저 조용히 명복을 빌어 주는 것밖엔.


덩치 큰 남자가 주변을 정리하고 돌아와 앉자 달리아가 다시 입을 열었다.


“우선 감사 인사부터 할게요. 고마워요. 덕분에 곤란한 상황을 모면할 수 있었어요. 혹시 나중에 도움이 필요한 일이 생기면 날 찾아와요. 도와줄게요. 아, 그러고 보니 아직 통성명도 안 했군요. 난 달리아, 이쪽은 버나드예요. 그쪽은 이름이 어떻게 되죠?”

“전···.”


한국어 이름은 이 세계 사람들에게 있어 낯설기만 하다.

앞으로 이 사회에서 살아가야 하는 처지에 그런 거리감은 방해만 될 터.

그래서 그는 이 세계의 언어에 맞는 이름을 미리 생각해 뒀다.


“에드워드라고 합니다. 편하게 에디라고 불러 주세요.”


김수호, 아니 이제는 에드워드인 그가 빙긋이 웃으며 그렇게 대답했다.



이 작품은 어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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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화 잡았다, 요놈 24.09.03 130 3 1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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