밟기 전에 꿈틀
"안 올 줄 알았는데."
"무슨 생각일까?"
"소금성 이미 철혈팔기에 팔았다는 소문 있던데? 국가 해체하고 대당성세에 들어갈 거래."
유저들은 파티 채널이나 길드 채널로 수군댔다. 우르크 수도 공략에 네크로 세력이 참여할 줄은 누구도 몰랐다. 우르크 수도를 함락하면 바로 공격받을 가미카제는 당연히 참여하지 않았고, 프리덤 역시 국가가 파산 위기로 몰리는 바람에 전쟁에 참여하지 못했다.
"근데 옆에 그 용병 맞아? NPC도 염색할 수 있는 거였어?"
제이크는 평소엔 늘 은신했지만, 아이템 추출할 때마다 모습을 드러냈다. 게다가 영화에도 나온 적 있어서 많은 사람이 구체적인 생김새는 몰라도 머리 색이나 체형 정도는 알았다. 푸른색으로 변한 머리에 유저들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네크로의 출현에 공성전 지휘부도 깜짝 놀랐다. 이미 네 세력이 문 하나씩 도맡아 뚫고 들어가서 황궁을 함께 함락하기로 했다.
넷이 그간 계획적으로 움직이며 우르크 병력을 최대한 소모했다. 수도의 NPC 우르크도 전투에 참여하겠지만, 스탯이 정예 군인보다 낮아 큰 위협이 되지 않는다.
"무슨 속셈일까?"
"보상 때문이겠죠. 한 달에 한 번씩 평가해서 보상을 내리지 않습니까."
인공지능 최고신의 제안은 셋 중에 둘만 통과했다. 일주일에 공성전 다섯 번으로 제한하는 설정은 부결됐다.
우르크와 싸우는 이벤트 퀘스트가 각 국가에 내려졌다. 국가 소속이 아닌 유저는 우르크를 아무리 많이 죽여도 소용없다. 이 퀘스트 역시 수도만 함락하면 사라진다.
"게임 시스템을 뚫고 방해할 방법을 찾은 건 아닐까요?"
"그게 불가능함을 알지 않습니까? 공선전이 시작하면 바로 특수 필드가 됩니다. 여기서 게임 시스템이 어떤 조치를 해도 파급력이 대륙까지 미치지 않죠. 네크로가 게임 시스템을 뚫는다면 백섭 해서라도 그 악영향을 없앨 겁니다."
공성전 수성전에선 웬만한 수작이 안 통한다. 게임이 허락하지 않는 수작을 부려 이득을 취하면 반드시 그에 상응하는 보복을 시스템이 내린다.
"설마. 우르크 수도를 함락한 후 우리끼리 싸우면서 소모했으면 하는 게 아닐까요?"
"우리가 협약을 맺은 사실을 전혀 모른다고?"
"정보원 심을 능력도 안 되는 세력이니깐요. 한국, 중국, 일본에서 실력이 부족해 걸러진 유저가 대부분 아닙니까. 그나마 유럽 유저들은 실력자가 좀 있지만, 그쪽 실력자라고 해봐야 언급한 세 서버에선 하수 취급만 받는데요."
네크로의 세력이라고 고수가 없는 건 아니다. 그러나 대부분 유저가 각 서버 대세 길드에 못 들어가는 것도 사실이었다.
철혈팔기, 초인동맹, 만리장성, 역천은 협약을 맺었다. 현실 시간으로 한 달씩 소금성을 차지하기로.
넷이 힘을 합쳐 소금성을 함락한 후, 소금성을 수도로 삼을 첫 국가는 고구려였다. 식량 생산량이 부족하고 우르크와 전투할 때 가장 열성적이었기 때문이다.
두 번째는 마찬가지로 식량으로 고생하는 초인동맹이었다. 소금성을 수도로 하면 초인동맹도 식량 고생을 덜 할 수 있다.
세 번째로 만리장성이 차지하고 마지막은 철혈팔기였다.
누구든 약속을 어기면 남은 셋이 힘을 합쳐 응징하기로 했다. 단, 수도를 지키는 건 각자 알아서 해야 했다.
"네크로 길드는 얼마나 왔습니까?"
"유저 3만 명입니다."
네크로 길드는 최근 전투 유저를 받았다. 유일하게 길드 레벨 8을 이뤄 유저 3만 명까지 받을 수 있다. 싸울아비나 네사모 그리고 쌈닭 같은 길드들은 그대로 유지했고, 마을 운영까지만 가능한 소규모 한국 길드들은 아예 네크로 길드로 병합했다.
"국가의 큰 세력들이 탈퇴하고 싶으나 소금성 때문에 주저한다는 소문이 있던데. 사실인 것 같습니다."
"단순히 공적치나 쌓으려고 적당히 데리고 온 게 아닐까요?"
"얼핏 살폈는데 3만 명 모두 한국 길드였습니다. 내부에 문제 있다는 소문이 사실입니다."
네 세력 다 속으론 꿍꿍이가 있지만, 우르크 수도를 함락하려는 목표는 일치했다.
"네크로 길드 보고 황궁 함락에만 힘 보태 달라고 하죠."
"네크로 혼자서 대문을 반파하던데, 안 써먹는 건 좀 그렇습니다."
"네크로 없어도 승산 있다고 판단한 거 아닙니까? 일단 성벽 공략에는 참여하지 말라고 통보하죠. 자기가 알아서 움직이겠다면 방법 없지만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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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것들이 시커먼 심보를 그냥 꺼내놓고 다니네?"
"우리보고 구경만 하래?"
"응. 나도 예상이 좀 틀리길 바랐는데."
"뭐. 황궁까지 편하게 카펫 깔아주겠다면 우리야 감사하지."
다른 세력 유저들이 성벽으로 돌진할 때 네크로 세력은 가만히 구경했다. 공성 측은 피로도가 3배 빠르게 쌓인다. 각 길드 간부들이 피로도를 체크해서 가끔 음식을 섭취하게 했다. 전투에 참여하지 않아도 피로도가 쌓이기에 관리할 수 있을 때 미리 해줘야 했다.
가장 먼저 성문을 깬 건 역천이었다. 내구도를 낮추는 일회용 아이템을 소모해 성문을 쉽게 깼다. 성문으로 밀고 들어간 역천 세력 유저들이 북쪽 성벽을 점령했다.
성문을 되찾으려고 달려오는 우르크들을 성벽에 의지해 편하게 잡으면서 다른 성문도 깨지기만 기다렸다.
"역시 경험이라는 게 중요해."
황궁 담벼락이 내구도가 성벽 못지않기에 공성전 순서도 달라졌다. 보통 성문 하나만 돌파하면 바로 시청으로 달렸는데 우르그르는 성벽이 두 겹인 셈이어서 성벽 돌파에 소모를 줄여야 한다.
처음 우르그르를 공격할 땐 멋모르고 황궁으로 달렸는데, 이번엔 성벽을 모조리 점령한 다음 우르크를 차근차근 줄이면서 황궁으로 진격할 계획인 것 같았다.
"형. 우리 계획 성공할 수 있을까?"
"최선을 다할 뿐. 사실 지금 이렇게 된 게 오히려 기뻐. 일 년 더 지났다면 실력 차이가 너무 커서 지레 포기했을 거야."
네크로는 WORLD를 조화롭게 성장시켰다. 철혈팔기처럼 강하게 키우진 못했다. 특정 목적에 맞춰 한 단체를 키워내기엔 네크로의 경험이나 지식이 너무 부족했다. 역천이 괜히 높은 연봉을 줘가며 각 분야 인재들을 데리고 있는 게 아니었다.
"우리 꼭 성공해서 오래오래 잘 먹고 잘살자."
"이번에 성공해도 그저 조금 나아지는 것뿐이야. 조금씩 조금씩 상황을 좋게 만들어 결국 판을 뒤집는 게 목표긴 한데."
"지금까지 다 잘해 왔잖아. 운이든 실력이든, 어쨌든 형이 한 거야. 다른 사람이 대신해준 게 아니잖아."
진돗개의 응원에 마음이 단단해졌다.
역천에 이어 초인동맹이 문을 뚫었다. 전투 능력은 여전히 철혈팔기가 최강이지만, 목표를 세운 작적에선 역천이나 초인동맹이 훨씬 나은 모습을 보였다.
게임 시간으로 4시간 흘러 네 세력이 성벽을 모두 차지했다. 성문이 모조리 깨지고 성벽이 점령당하자 우르크들은 덤벼들지 않고 황궁 쪽으로 몰려갔다.
"역천 대박이야. 빙하시대 쿨타임이 2달 미만이라니."
네 세력은 성급하게 들어가지 않고 마법부터 펼쳤다. 빙하시대에 대항해 우르크 주술사들이 대주술 몇 개 펼쳤다.
빙하시대는 어마어마한 파급력에 비교해 데미지가 별로다. 빙하시대 하나로 대주술 몇 개를 끌어낸 건 엄청 수지맞는 일이었다.
"헐. 저런 스킬도 있어?"
초인동맹의 국왕, 사령술사 유저 '무산무사'가 '부랑자의 묘지'라는 스킬을 펼쳤다. 주술인지 저주 마법인지 정체가 모호한 스킬은 성안에 수많은 묘지를 소환했다.
푸석푸석한 흙으로 덮인 묘지는 대충 만든 티를 풀풀 날렸다. 소환된 묘지에서 앙상한 팔다리가 솟아 나왔다. 해골이라고 하기엔 살이 골고루 붙어있고, 좀비라고 하기엔 거의 뼈에 가죽을 입힌 수준이었다.
정체 모를 언데드는 우르크들이 무기로 공격하자 바로 죽어버렸다. 죽은 언데드의 입에서 푸른 연기가 나왔다. 강한 독은 아닌지 죽는 우르크는 없었지만, 비칠거리게 할 정도는 되었다.
또 뭔가 대주술이 터졌다. 독 저항을 올리거나 생명력 회복을 빨리하는 버프가 틀림없었다. 빙하시대는 대주술 몇 개나 뽑았는데 자신은 하나만 끌어냈다는 게 마음에 안 드는지 무산무사는 입술을 살짝 깨물었다.
"늪지의 폭군."
무덤이 사라지기 무섭게 만리장성이 대마법을 펼쳤다. 수도 안이 온통 늪지로 변하고 이빨이 날카로운 강철 악어가 득실거렸다.
"피아구분 못하는 놈들입니다. 접근하면 공격해서 해치우라고 지시하세요."
모래바람이 불었다. 모래나 사막과 관련한 주술이 펼쳐지며 늪지가 굳고 강철 악어가 힘을 잃었다.
"이번엔 우리가 나서죠."
역천 세력에서 유저 하나가 나섰다.
"모래 폭풍."
사막에서 사용하면 위력이 강해지는 스킬이었다. 마침 우르크가 돗자리를 깔아줬다. 모래 폭풍이 불면서 우르크에게 데미지를 입혔다. 우르크 대주술이 하나 또 터졌다.
"여덟. 아직 남았는데 어떡하죠?"
대주술을 펼치는 우르크는 정확히 세진 못했지만, 열이 넘는다.
"네크로에게 부탁하죠. 그쪽에도 대주술사 둘이나 있잖습니까."
요청이 오자 우자르가 무지개 대주술을 사용했다. 거기에 맞춰 우르크도 버프 주술 몇 개가 터졌다.
"우자르의 주술이 거의 빙하시대 급이네."
빙하시대 빼곤 우르크의 대주술 하나씩밖에 못 끌어냈다.
무지개 주술은 총 7개 버프를 주는데, 유저의 직업이나 스탯 그리고 처한 상황에 따라 세 개의 버프를 준다. 늘 상황에 최적화한 버프를 줘서 전투력과 생존력을 끌어올리는 정말 대단한 주술이었다.
"방금 부서진 보석 합치면 3천만 원인데. 안 강하면 유니콘 쳐들어갈 거야."
유저가 앞장서고 공성 병기가 뒤따랐다. 예전에 코뿔소가 나타났던 위치에 바리케이드를 치고 성기사를 안배했다.
황궁 앞에 수만 명이 여유 있게 설 수 있는 커다란 광장이 있었다. 지휘부는 거기에 막사를 치고 전투를 지휘했다.
"네크로 길드는 아직도 안 들어왔다고요?"
"그렇습니다."
"뭔가 꿍꿍이 있는 것 같은데."
"어떤 꿍꿍이가 있어도 같은 편에게 해를 끼치진 못합니다."
말은 그렇게 해도 불안감이 완전히 해소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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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형, 왜 아직도 안 들어가?"
"지금 들어가면 피로도가 빨리 오르잖아. 여기 있는 게 나아."
투석기는 바위가 떨어지자 바로 해체해서 상인 유저들이 인벤토리에 넣었다. 그냥 뒀다가 난전에 파괴되면 마음이 무척 아플 것이다.
드워프의 공성 병기는 네크로가 독점해버렸다. 대장장이 유저들도 만드는 속도가 느려 돈이 아무리 많아도 공성 병기는 쉽게 구할 수 없었다. 드워프가 많이 만들기라도 하면 자금 압박으로 네크로가 독점을 풀 수도 있는데, 드워프도 공성 병기는 조금씩 생산했다.
잡철로 만든 묵직한 사다리가 담벼락에 걸쳐졌다. 힘이 센 우르크도 쉽게 밀지 못했다. 그러나 황궁 벽에 오르기 무섭게 우르크들의 공격에 대기실로 떠났다. 아무리 수비에 전념한 성기사도 2초 버티지 못했다.
충차가 후퇴와 전진을 반복하며 황궁 대문을 두드렸지만, 웬만한 대도시 성문보다 더 큰 황궁 대문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네크로에게 문을 부숴달라고 할까요?"
"공교롭게도 성문을 부수는 능력은 네크로와 가미카제가 차지했군요."
수비해야 할 운명에 처한 두 세력이었다.
"요청해 보죠. 거절하든 승낙하든 상관없지 않습니까."
지휘부의 요청을 받은 네크로는 길드원들을 이끌고 우르그르에 입성했다.
"네크로 저런 성격이었나요?"
"다음 해부턴 게임 못할지도 모르니깐요."
"약속대로 아이템 우선권은 우리 철혈팔기가 갖습니다."
"광산과 탄광은 공평하게 나눕시다."
네크로 무리는 유저들의 시선을 즐기는 듯 무척 느리게 걸었다. 황궁 앞에 도착한 후 유저들은 멈추고 네크로만 나섰다.
"멈추지 않는 충차."
철혈팔기가 동원한 충차가 조카처럼 보이게 할 커다란 충차가 소환되었다.
"저거 오버 테크놀러지 아냐?"
"항공모함도 있는데 증기 기관쯤이야."
처음 소환한 네크로도 깜짝 놀랐다. 기차 대가리를 닮은 충차는 네 개의 굴뚝으로 흰 김을 힘차게 뿜어냈다. 밑에 달린 십수 개의 바퀴가 한꺼번에 돌아가며 충차가 황궁 대문에 부딪혔다.
쿵 소리가 울렸지만 대문은 멀쩡했다. 지휘부에 속한 유저들은 아쉬움과 안도감이 교차했다. 겉으론 꽤 그럴듯했는데 실패해서 아쉬웠고, 자기들이 못해낸 일을 네크로가 단번에 해내지 못한 데서 오는 안도감도 있었다.
뒤로 물러선 충차가 다시 문으로 몸을 던졌다. 소리는 여전히 요란했고 대문도 변함없이 멀쩡했다. 물러선 충차가 다시 부딪쳤고, 문과 충돌하고 다시 물러났다.
소환 시간이 끝날 때까지 대문을 두드렸지만, 대문에 흔적 몇 개만 남겼다. 마법과 주술의 보호를 거두기 전에는 단순한 물리력으로 대문을 부술 수 없다. 흔적 남긴 것만으로도 네크로가 소환한 충차가 얼마나 강한지 알 수 있다.
"피의 끈끈한 이어짐."
지휘부가 은근히 네크로를 비웃을 때, 전장에 흐른 피가 충족해졌다. 다미안은 미리 지시받은 대로 대주술을 사용했다. 적 전체에 50% 데미지를 추가하는 어마어마한 주술이었다.
"슬슬 나서야 할 때군."
방패 해동청을 든 네크로가 대문으로 달렸다. 성벽과 달리 문에 달라붙는 네크로를 향한 공격은 얼마 없었다.
"절대영도."
황궁을 보호하는 마법과 주술 탓에 효과가 평소 같지 않았다.
"훼멸."
저항이 강한 만큼 스킬도 강하게 펼쳤다. 절대영도와 훼멸 둘 다 쿨타임 30일이 되었다. 현실로 10일이 지나야 두 스킬을 다시 쓸 수 있다.
"지옥불."
금이 살짝 간 대문을 지옥불로 태운 후 진공 스킬까지 썼다.
"도룡참수."
타고난 전사와 세 개의 심장 그리고 광전사 스킬까지 사용한 진돗개가 양손 검으로 도룡참수 스킬을 펼쳤다. 대문에 타격이 아닌 베기 스킬이 터질 걸 누구도 예상치 못했다. 진돗개의 스킬은 마법과 주술의 보호를 벗겨내고 문에 직접 타격했다.
"아니, 전사 스킬이 저런 위력이라니?"
곧 수정될 결함임을 모르는 지휘부 유저들이 경악했다. 황궁 성문이 쩌적 갈라지며 유저의 진입을 허락했다.
- 작가의말
지렁이도 밟으면 꿈틀합니다. 주인공은 밟히기 전에 움직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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