변화하는 상황
고깃집인데 역한 기름 냄새가 전혀 없었다. 향수 따위를 뿌리면 기름 냄새와 섞여 오히려 더 역겨운 냄새가 된다. 고급 음식점답게 정기적으로 전문 업체가 와서 냄새를 제거하는 듯했다.
그 돈이 다 고깃값에 포함되니까 이렇게 비싼 거겠지. 메뉴 보고 든 감상이었다.
"형, 다시 봤어. 이런 곳도 알고."
헐렁한 청바지에 맨투맨. 회사에서 퇴근하는 길이라고 보기엔 너무 편한 복장이었다.
현성이 집은 돈이 꽤 있는 편이지만, 권력과 거리가 멀다. 위로 누나 둘이 있는데 평범한 중산층 집안과 결혼해 무난하게 살고 있었다.
"그래. 오늘은 나랑 주스나 마시자."
단단히 얻어먹으려다가 메뉴판 보고 기겁해서 고기 2인분만 시켰다. 비싼 집이라고 알고 오긴 했지만, 비싸봤자 마트 고기 가격이 거기서 거기라고 생각했었다.
그러나 메뉴판을 보고, 마트에서는 안 파는 고기도 있고 그 고기가 엄청 비싸다는 사실을 알았다. 사실 한우 세트 가격만 생각해도 알 수 있는 일인데, 광해는 일 년에 기껏 해 한두 번 먹을 수 있는 비싼 한우와 매일 문 여는 고깃집을 연결하지 못했다.
현성이는 돈 따위가 문제 아니라는 듯 고기 4인분을 더 시켰다. 현성이 배짱이 은근히 부럽긴 했지만, 그저 부러운 것으로 끝이었다. 연 2억 벌어도 저런 배짱은 따라 해선 안 된다고 광해는 혼자 다짐했다.
"형. 나 오늘 회사 그만뒀어."
목소리가 살짝 떨리긴 했지만, 후련함도 느껴졌다. 소고기가 불판의 거친 손길에 앙탈 부리는 칙 소리가 그 떨림을 대부분 숨겨줬다.
"집에선 알아?"
"지금쯤 알 거야. 나 전화기 꺼놨어."
"야, 어서 전화기 켜. 네 어머니라면 지금쯤 경찰서에 실종 신고했을 수도 있어."
광해 말에 현성이도 아차 싶었는지 황급히 핸드폰을 켰다. 바로 문자랑 톡 메시지가 엄청나게 들어왔다.
몇 분 안 되어 전화기가 울렸고, 현성이가 시한폭탄이라도 되는 듯 전화기를 광해에게 던졌다.
"네, 어머님. 제가 지금 같이 있어요. 안 오셔도 돼요. 제가 안전하게 집까지 데려다줄 거예요. 네, 걱정하지 마세요. 현성이 기분 나쁘진 않아요. 같이 사업하자고 찾아온 겁니다. 계획도 그럴듯하고 해서, 저도 동업할까 고민입니다. 그럼요. 어머님도 제가 얼마나 조심스러운지 잘 아시네요. 걱정 마시고, 이따 뵙겠습니다."
통화를 마친 광해는 핸드폰을 현성에게 돌려줬다.
"야, 소고기가 돌덩이 같아서 넘기지 못하겠다."
"내가 씹어서 입에 넣어줄까?"
"너 대단하다. 입에 들어간 고기도 도로 뱉을 수 있어?"
현성이 배꼽을 잡았다.
"작은 매형이 유니콘 홍보실에 있다고? 그런데 가상현실 기기로 피시방 사업 허가가 나와?"
"응. 컴퓨터도 20대 정도 놔야겠지만, 주력은 레전드로 가려고 해."
"이번 업데이트 후에 일이 어떻게 될지도 모르는데?"
"그건 나도 잘 모르겠는데, 매형 말로는 가상현실 기기 천만 원에 싸게 파는 거래."
"그건 뭔 소리야?"
"데이터가 모이면 최적화 상품이 나와 가격을 낮출 수 있는데, 지금 나온 제품은 모든 스펙을 최고로 맞췄대. 괜히 사고 나면 안 되니까. 그래서 실제 가격보다 훨씬 낮춰서 파는 거라고. 그러니 30대 사 놓고 피시방 사업이 망해도 중고로 더 비싸게 팔 수 있어."
"언제 시작하려고?"
정작 사업을 벌이려니 떨리는지, 현성이는 고기를 거의 집지 않았다. 광해는 입안의 고기가 목구멍을 넘기 전에 새 고기를 쑤셔 넣으며 대화를 이어갔다.
"매형 도움으로 사업자 구매를 신청해야 해. 아직 내부 방침이 정해지진 않았는데, 매형이 줄 잘 탔나 봐. 테스트 삼아 사업자 협력 모드 시도하기로 의견이 몰렸는데, 내가 그 테스트 상대가 될 수 있다는 거지."
"망하고 중고로도 못 팔면 너도 타격이 큰 거 아냐? 너희 집 돈 다 부동산에 묶여있잖아. 건물이야 집 걸 쓴다고 하더라도 전기세만 해도 장난 아닌데."
"유니콘에서 8백만 가격으로 회수하도록 계약에 조항 넣을 수 있어. 최악이라고 해도 1억 정도만 손해 보고 말 거야."
하긴. 보증 한 번 잘못 서면 날릴 수 있는 돈인데. 사업하다 그 정도 손해 보는 건 감수해야 할 일이다.
"거기서 끝이야?"
"아니지. 당연히 수면실도 만들고 라면이나 음료 같은 거 팔아야지. 그게 돈이 더 된다고 다들 그러던데."
현성의 대답에 광해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에구. 돌대가리야. 이 부드러운 소고기도 네 뇌를 부드럽게 못 바꾸는구나."
"아까는 돌덩이 같다며."
광해는 부드러운 소고기를 쌈에 싸서 콩기름만 살짝 발라 입에 넣었다. 양념을 최대한 배제해서 고기 맛을 그대로 느끼기 위한 노력이다. 쌈장을 비롯한 다른 양념이야 직접 만들어 먹어도 되지만, 소고기는 아무 때나 구워 먹을 수 있는 게 아니다.
눈을 감고 입안에서 탁 터지는 고기 향을 한참 음미하고 나서 주스 한 모금 마셔 입안을 시원하게 헹궜다.
"너 레전드 경매장 수수료 얼만지 알아?"
"20% 아냐?"
"그럼 골드 환전 수수료는?"
"20%. 다만 경매금액은 환전 수수료 따로 안 받는 거로 아는데."
"너 현금 장사는 세금 안 내도 되는 거 알지?"
"상식 아냐?"
"유니크 아이템이 대부분 수백만에 거래되는 거 알아?"
"진짜? 뭔 게임 아이템이 그렇게 비싸?"
유니크는 옵션이 별로여도 최소 백만 원에 팔린다. 모든 아이템을 전부 유니크로 맞추면 캐릭터에 후광이 생긴다. 전투에는 레어 아이템 사용하더라도 도시에선 유니크로만 치장하고 다니는 유저도 있다.
"생각해 봐. 백만이면 수수료 20이지? 그런데 네가 그걸 대행하고 10%만 받는 거야. 판매자 입장에서 생각해 봐. 네 가게에 와서 거래하면 몇만 절약해. 만약 그게 3백이라면, 수수료 60에서 30 절약할 수 있어."
"그건 신용만 있으면 아무나 할 수 있는 거 아냐? 그냥 중간에서 돈만 받아주고 거래는 본인들이 직접 게임 안에서 하면 되잖아."
"그 신용을 어떻게 쌓아? 그 기간과 거기에 드는 비용 생각해 봐. 그런데 넌 버젓이 가게 차리고 장사하는 거잖아. 당연히 사람들이 먹튀는 못 할 거라고 믿지. 남들이 돈과 시간을 들여서 쌓아야 하는 신용을 넌 이미 갖추고 있다는 말이야. 처음에는 가게로 와서 거래하는 사람이 대부분이라도, 나중엔 가게로 오지 않고 너를 중개인으로 쓰는 사람도 많을 거야. 네가 고객을 많이 알고 있으면 아이템 파는 애들도 자연스럽게 널 찾을 거고. 그렇게 되면 10% 수수료만으로도 큰 수익을 낼 수 있어."
아이템 사는 사람에게서 현성이가 먼저 돈을 받고, 파는 사람과 사는 사람은 게임에서 직접 거래한다. 거래가 끝난 걸 양쪽에 확인한 후 10% 수수료를 떼고 남은 돈을 건네면 된다. 사는 사람은 적어진 수수료 10% 중 일부를 이득 보고, 파는 사람도 적어진 수수료 10%의 일부를 이득 본다.
유니콘 사에서 벌어야 할 20% 중 10%는 중개인이 벌고, 남은 10%는 판매자와 구매자가 이득 보는 방식이다.
"그런데 유니콘 사에서 고소하면 어떡해?"
"세금 꼬박꼬박 내면 돼. 현금 거래는 수수료 덜 받고. 증거가 남는 거래만 세금 신고하면 문제 될 게 뭐야. 법적으로 유니콘 사에서 네게 태클 걸 게 없어. 개인 간 거래가 불법인 것도 아니고 말이야. 그거라면 중고나라 거래 모두 불법이게?"
구매자로부터 돈을 받은 후, 그 일부로 판매자한테서 물건 사서 구매자에게 넘기면 법적 문제도 피해갈 수 있다. 좀 귀찮긴 하지만.
"유니콘 사에서 수수료 낮추면?"
"너도 따라 낮추면 되지. 어차피 들이는 공에 비교해 돈 거저 버는 거 아냐? 그리고 돈이 되면 다른 사람도 따라 할 거야. 카르텔을 형성해서 가격을 정하든지, 하나 남고 다 죽을 때까지 가격 낮추면서 싸우든지. 개싸움이 되면 누가 유리한지 알지?"
"고객과 판매자를 미리 선점한 쪽이 유리하겠지."
"그래. 넌 남들보다 먼저 시작할 수 있으니 네가 무조건 유리해."
"신규 유저가 하루에 만 이상 늘어나는데, 혼자서 감당할 수 있을까?"
"그게 아니면 고급 아이템만 취급하든가. 사이트 하나 만들어서 고급 레어나 유니크만 취급해 봐. 사이트 하나 돌리고 관리 좀 하는 게 위험 부담은 훨씬 적지 않아? 몇억씩 투자한다는 놈이 이건 왜 망설여? 내가 피시방 꾸릴 능력 있으면 게임 당장 때려치우고 중개 사업만 하겠다."
"형. 나 모르는 사람이랑 대화하고 그런 거 잘 못 하는 거 알잖아."
"여자 후배들이랑은 말 잘하던데?"
"술 먹어서 그런 거잖아. 그렇다고 맨날 술 먹고 사람 상대할 수도 없고."
"후배 중에 믿음직하고 말발 좋은 애 없어?"
"나 형 빼고 믿음 줄 만한 사람 없어."
그때 광해 핸드폰이 울렸다.
"응, 동해야. 이 시간에 어쩐 일이야? 내일 서울 온다고? 알았어. 운전 조심하고, 나 병원에서 기다릴게."
"동해야?"
"응. 대학병원에 외국 의사가 왔대. 아픈 다리 수술할 수 있는지 검사하러 온다고."
"그럼 내일도 보자. 내가 점심 살게."
식사 끝낸 후 현성이 집에 가서 한 시간 남짓이 곤욕을 치렀다. 현성이 부모님과 두 누나가 사업계획을 듣고 광해 의견을 꼬치꼬치 캐물었다. 잘 이해 못 하는 넷에게 설명하다 보니 광해 마음도 움직였다. 현성이 가족을 설득하는 과정에 본인마저 설득해버렸다.
현성네 가족도 광해가 동업자라고 하니 걱정 덜었다며 좋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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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원 안 나무 벤치. 고향의 삭막한 병원과 달리, 여긴 아예 식물원 수준이다.
"형, 형 영어 잘하잖아. 의사가 분명히 수술로 완치할 수 있다고 말한 거 맞지?"
"응. 맞아. 오히려 수술 안 하면 신경이 완전히 죽어버릴 수 있으니, 빨리 수술하자 그랬어. 8일 뒤 날짜까지 잡았어."
"형. 이거 그냥 하자 이러고 막 할 수 있는 그런 쉬운 수술이었어?"
허탈한 마음은 광해도 마찬가지였다.
"외국 의사한텐 그런 수술인가 보지 뭐. 까다로운 수술이지만, 이미 몇 번이나 성공한 적 있다고 그랬어."
"시발, 축구선수 하고 싶었는데."
동해 눈에 눈물이 글썽였다.
검사 다 끝나고 한참 지나서야 현성이 도착했다.
"미안. 회사 그만뒀다고 이모부한테 잔소리 듣느라 늦었어. 의사 뭐래?"
"수술하면 완치할 수 있대. 비슷한 수술 몇 번 성공한 적도 있고."
현성이가 밝게 웃었다.
"수술비는 얼마 들어? 부족하면 나도 좀 보탤게."
"걱정 마. 내가 그간 모은 돈으로 충분해."
"형. 나 다리 나으면 열심히 일해서 형 돈 다 갚을게."
"다리만 나으면 갚은 거야. 점심 먹으러 가자. 어제 먹은 고기가 소화도 잘되고 맛도 좋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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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해 원룸은 사람 하나 더 재울 공간도 없고, 동해가 몰고 온 차를 주차할 곳도 마땅치 않다. 그래서 수술 날까지 현성이 집에서 신세 지기로 했다.
그리고 화요일에 끝내 업데이트가 끝났다. 업데이트 규모는 광해 예상을 완전히 뛰어넘었다.
업데이트 내용
하나. 우르크 제국이 통치하는 대륙을 개방합니다.
하나. 에픽 퀘스트가 8개 생성되었습니다.
하나. 새로운 직업 36종이 추가되었습니다.
하나. 새로운 스킬 803개 추가되었습니다.
하나. 특정 퀘스트를 완성해야만 현재 중앙섬에서 대륙으로 진출하는 항로를 개방합니다.
중략...
하나. 에픽 퀘스트를 완성한 유저 혹은 단체는 대륙을 지배하던 왕의 혈통을 획득합니다. 왕의 혈통은 왕이 되는 필수 조건입니다. 왕은 왕국 세금의 0.3%를 개인 소득으로 돌릴 수 있습니다.
광해는 성급히 로그인하지 않고 업데이트 내용을 꼼꼼히 살폈다. 새로 추가된 직업들도 훑어보고 추가된 스킬들도 빠르게 열람했다.
'요리사의 요리. 일시적 버프.'
'대장장이의 인챈트. 무기 성능 업그레이드.'
'화가의 초상화. 유저의 명성을 높여주는 용도.'
[속보] 업데이트 완료한 레전드 게임 트래픽 폭주. 유니콘 사 긴급 서버 증설.
게시판에 들어가 보니 게임에 접속했다 튕긴 유저들의 욕설로 도배됐다. 3시간 후 서비스 재개한다는 공지를 확인한 광해는 초반부터 있었던 8대 직업을 포함해 모든 직업을 자세히 살폈다. 80개가 넘는 직업과 관련 스킬을 일일이 확인해서 새로운 전투 직업과 생산 직업이 어떤 영향을 끼칠지 분석했다.
'전투 직업은 대부분 기존 8개 직업을 세분화하고 변형한 것에 불과해. 오히려 생산직이 게임 판도를 흔들 가능성이 크다. 유저가 많을수록 무력의 강제성은 하락한다. 대부분 유저는 게임을 즐기려는 거니까. 무력으로 남을 강제하려는 자들은 오히려 많은 유저로부터 배척받아 망할 수밖에 없다.'
사회 규모가 거대해지면 폭력으로만 통제하기 힘들다. 안정과 발전을 지향하는 사회는 폭력으로 자신을 좀먹는 요소를 어떻게든 제거하려 한다.
WM이나 OB 같은 미친놈들이 좀 게임에서 사라졌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지금까지 두 길드가 투자한 금액을 생각하면 당분간 어려울 거다.
'설마. 기업들이 게임에 조직적으로 뛰어들진 않겠지? 레전드가 한국 게임 시장의 지분 20%만 먹어치워도 그럴 가능성이 충분하긴 한데.'
서버가 정상화될 때까지 광해가 얻은 결론은, 혼자서는 뭘 하기 힘들다는 거였다. 다행히 게임에서는 현실처럼 대화가 두렵지 않으니, 일단 괜찮은 길드가 있으면 가입하는 것도 나쁘진 않다.
'그래도 최대한 혼자 버텨보고.'
현질을 전혀 하지 않은 광해가 게임으로 돈 버는 길로 들어설 수 있었던 건, 마스터 랭크가 되기 전에 우연히 먹은 유니크 반지 덕분이었다. 그걸 2천만에 팔아서 반년 월급에 해당하는 돈을 챙겼다.
'이번에도 운에 맡길 순 없지.'
덕분에 회사 그만두고 게임 시간을 늘렸다. 초반엔 아주 힘들었지만, 유니크 무기 불의 심판을 얻은 후부터는 승승장구했다. 두 번의 행운이 광해의 성공을 도운 셈이다. 그러나 이젠 운이 아닌 실력으로 이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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