죄악
독일군 공병들은 소련군이 침투할 수 있는 경로에 모두 지뢰를 설치했다. 놈들이 측면이나 후방으로 우회해서 올 수도 있기 때문에 그 곳에도 모조리 지뢰를 설치해두었다. 낮은 포복, 높은 포복으로 기어오더라도 인계철선에 걸려 지뢰가 폭발하도록 만발에 준비를 해두었다.
뿐만 아니라 독일군은 측면에 빈 오두막의 문에도 지뢰를 설치해두었다. 이 오두막은 얼핏 보기엔 독일군의 경계 초소처럼 보인다. 하지만 소련군이 오두막의 문을 여는 순간, 설치되어있던 지뢰가 폭발할 것 이었다.
그렇기에 독일군은 진지를 드나들때 지뢰가 설치되어있지 않은 아주 좁은 통로로만 이동해야했다. 식량과 탄약을 운반하는 짐수레가 올 때도 이 통로로만 진입해야했다. 지크프리트 4인조는 기관총 진지에서 후방 경계를 하게 되었다. 후방 경계하는 시간대는 두 시간대로 나뉜다.
한 조는 밤 10시부터 12시까지, 새벽 4시부터 6시까지 경계하고, 다른 조는 밤 12시부터 새벽 4시까지 4시간을 쭉 이어서 경계를 한다. 지크프리트 4인조는 어느 시간대에 경계를 하는 것이 좋을지 생각했다.
'그냥 12시까지 4시간 쭉 경계하고 빨리 잠이나 잘까?'
'4시간 이어서 하는건 너무 지루하다!'
올라프가 말했다.
"내가 10시부터 하겠네!"
"그러게!"
"아..아니네! 아무래도 밤 12시부터 새벽 4시까지 하는게 좋겠네!"
그렇게 지크프리트 4인조는 한참을 옥신각신했다. 하이에는 이 광경을 보며 골머리가 아팠지만 1차 대전 참전 용사에 자신보다 20살이나 많은 지크프리트 4인조에게 뭐라고 하기도 불편했다.
지크프리트 4인조가 이렇게 머리를 굴리며 최대한 편히 근무하려는 것을 보고, 하이에 소대의 다른 10대 20대 보병들이 생각했다.
'나..나도 경계 설때 편한 시간대에 서야겠군!!'
'역시 군대에선 머리를 써야 해!!'
잠시 뒤, 하이에는 뒷목을 잡고는 본부로 복귀했다. 그렇게 올라프와 로베르트가 9시 55분부터 시꺼먼 어둠 속에서 기관총 진지에서 경계 근무를 준비했다. 올라프의 손목에는 끈이 묶여져 있었고 이 끈은 하이에의 손목까지 연결되어 있었다. 혹시나 적군의 인기척이 보이면 이 끈을 당기면 될 것 이었다.
올라프는 시험삼아 끈을 세 번 짧게 당겨보았다. 하이에가 응답하는 의미로 자신도 끈을 세 번 짧게 당겼다. 10시부터 경계 근무였고, 그 전까지가 마지막으로 담배를 빨 수 있는 시간이었다. 올라프는 로베르트와 하나 남은 담배를 피우기 시작했다.
'맛 좋다!!'
담배를 피우고 로베르트 녀석이 에너지바를 꺼내서 절반씩 나눠먹었다.
'이제 슬슬 준비하지.'
그렇게 둘은 기관총호로 걸어갔다. 그 순간 올라프가 미끄러졌다.
"아악!!!"
올라프는 미끄러진채로 기관총호로 자빠졌다. 그 덕분에 장교 휴게소에서 반합에 담겨진 까샤를 먹던 하이에 또한 갑자기 팔이 당겨지며 휴게소 밖으로 끌려나왔다.
"으악!!"
군복이 까샤로 범벅이 된 하이에는 기관단총을 들고는 잽싸게 기관총 호로 달려갔다.
"무슨 일 입니까!!"
올라프가 멋쩍게 웃으며 말했다.
"넘어졌습니다!"
하이에는 애써 분노를 억눌렀다.
'참아야 한다...'
그렇게 올라프와 로베르트는 경계 근무를 시작했다. 경계 근무를 설 때는 달그락거리는 소리도 내면 안 된다. 그렇기에 몰래 통조림을 먹는것도 금지였다. 올라프와 로베르트도 집중해서 경계를 했다. 그리고 5분 뒤, 올라프는 지겨워서 밤하늘에 별자리를 바라보았다.
'저게 큰곰자리인가?'
2시간 뒤, 크리스티안과 호르스트가 와서 졸고 있던 올라프와 로베르트를 흔들었다.
'이런 멍청한 녀석들!!!'
한심한 로베르트는 크리스티안이 자신을 흔들자 소리를 냈다.
"뭐야.."
'쉿!! 조용히 해!!'
올라프는 손목의 끈을 푸는 것을 잊어버리고 로베르트와 함께 대피호로 걸어갔다. 그 덕분에 하이에는 잠을 자다가 장교 휴게소 밖으로 질질 끌려갔다. 잠시 뒤, 올라프는 하이에에게 이를 사과하고 있었다.
"죄송합니다!"
하이에는 위생병에게 두통약을 처방받으러 갔고, 그렇게 크리스티안과 호르스트는 새벽 2시부터 경계를 시작했다.
'한심한 녀석들...'
'철십자 훈장 수훈자로서 모범을 보여야하는데 졸기나 하다니..'
'소대장이 불쌍하네!'
크리스티안은 자신의 손목에 묶인 끈을 확인했다.
새벽 3시, 크리스티안과 호르스트도 기관총 호에서 졸고 있었다. 그러다 호르스트는 방구가 마렵기 시작했다. 이럴 때는 엉덩이 한 쪽을 들고 끼면 소리가 나지 않는다. 호르스트는 한쪽 엉덩이를 들고 방구를 꼈다. 그런데 이번에는 소리를 안나게 하는 것에 실패했다.
부르릉!!
자고 있던 크리스티안이 깜짝 놀라서 화들짝 일어났다.
'으악!!'
크리스티안이 갑자기 일어나는 바람에, 진지를 돌아보던 하이에는 또 갑자기 팔이 당겨졌다.
"으익!!"
그렇게 하이에는 죽도록 고생하며 지크프리트 4인조를 자신의 부대로 보낸 다른 장교를 원망했다.
'그 망할 새끼!!!'
그리고 이 시각, 슐레프 중대는 새벽 5시에 있을 공격을 준비했다. 소련군들은 잔해 더미 속에 대전차포, 기관총 등으로 강력하게 무장해놓고 지뢰까지 설치해두었을 것이 분명했다. 노이어 공병 소대가 대전차 지뢰를 제거하고 온 상황이었다. 음파 거리 측정 부대 녀석들이 잔해 더미까지의 거리를 은밀하게 측정해두었다. 하지만 이번 작전은 기습으로 가야했기 때문에 포병 부대의 지원을 받지 않고 전차 부대로 때리기로 했다. 물론 기습이라고 해봤자 전차 부대의 엔진과 궤도 소리는 멀리서도 들리니 완전한 기습은 될 수 없지만 말이다.
지난 번 전투 때도 기껏 포격을 했지만 소련군은 어떻게 알아챈건지, 미리 방어진지에서 후퇴해서 전력을 유지한 다음, 포격이 끝난 후 방어진지에 자리를 잡고 기관총과 대전차포로 방어했던 적이 있었다. 이번 작전은 오토의 소대가 정면에서 잔해 더미를 공격하는 동안, 2소대와 3소대가 측면에서 소련군의 잔해 더미를 공격할 계획이었다.
만토이펠 대대장은 2시간 전 회의실에서 브리핑을 하면서 이렇게 작전 계획을 설명했다. 오토와 소대원들은 작은 전등이 켜져있는 회의실에서 이 브리핑을 들었다.
만토이펠은 여전히 분명한 악의를 갖고 오토의 소대를 계속해서 가장 위험한 경로로 투입하고 있었다. 하지만 지금 오토 입장에서는 딱히 할 수 있는 것이 없었다.
그리고 새벽 5시, 오토의 소대가 먼지를 내뿜으며 앞으로 전진했다.
트등 트드드등 트드등
가능하면 소리가 적게 나도록 은밀하게 움직였지만 소련군 대전차포는 이미 만발의 준비를 해두고 있을 것 이다. 담배를 빨며 경계 근무가 끝나기만을 기다리던 소련군들은 이미 끈을 당겨서 상황을 보고하고 모두 위치로 달려가서 독일군의 전차를 격파할 준비를 했다.
잔해더미까지 거리는 1800m 정도였고 오토가 명령을 내렸다.
"전 소대 정지!"
어차피 주공은 2,3소대가 될 것 이었다. 오토가 외쳤다.
"고폭탄 장전!! 자유 사격!!"
티잉! 쿠과광!! 티잉! 콰광!!!
잔해 속에서도 발사광이 번쩍거렸다.
티잉!!
소련군이 발사한 철갑탄은, 45도 각도로 선회한 티거의 측면 장갑에 도탄되었다.
카강!!!
티거의 장갑에 선명하게 패인 자국이 남았고, 오토와 전차병들은 엄청난 충격을 받았다.
"으악!!"
"자리 이동!!!"
이번 전투는 비교적 수월하게 마무리되었다. 독일군은 아직 살아남은 소련군 포로를 잡는데 성공했다. 소련군 포로들은 눈알을 굴리며 앞으로 어떻게 될지 눈치를 보고 있었다. 비르타넨은 소련군 포로의 대가리를 때렸다.
퍽!! 퍼억!!
"이 좆같은 새끼들!! 핀란드인한테 한 방 먹은 기분이 어떠냐!!"
오토와 전차병들은 이 광경을 보고 낄낄거렸다. 솔직히 소련이 약소국에 했던 짓거리가 있기에 오토와 동료들 입장에서도 이 광경은 통쾌하기만 했다. 그 때, 이 광경을 보고 하이에가 와서 비르타넨에게 말했다.
"이게 무슨 일인가!!"
순간 비르타넨의 입꼬리가 올라갔다.
"포로들의 군기를 잡고 있었습니다!"
하이에는 비르타넨을 노려보았다. 핀란드 출신 비르타넨은 난폭한걸로 보병 부대에까지 유명했다. 현재 독일 제국군은 핀란드, 오스트리아 등 타 국가 출신 병사에 대한 인종차별적 발언을 엄격히 금하고 있었다. 하이에가 말했다.
"제네바 협약에 의하면 포로 학대는 금지되어 있네. 다시 이런 일이 있을 경우 위에 보고하겠네."
오토가 자리에서 일어서서 하이에에게 걸어갔다. 다른건 몰라도 자신의 앞에서 자신의 소대원에게 이런 식으로 말을 하는 것은 용납할 수 없었다. 이건 오토의 체면과도 관계가 있었다.
'이런 사소한 일로 내 소대원을 군사 재판에 넘기겠다고?'
"내 소대원이 벌인 일은 내가 알아서 해결하네."
하이에는 아무 말 없이 오토를 쳐다보았다. 지금 보병들과 전차병들이 모두 이 상황을 주목하고 있었다. 오토는 전투에는 무척이나 뛰어났고, 오토의 소대 덕분에 여태까지 하이에의 소대 또한 큰 피해를 입지 않을 수 있었다. 하지만 오토는 자신의 소대원들의 전쟁 범죄를 전부 다 묵인하고 있었고, 이는 다른 부대에도 영향을 주고 있었다.
하이에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내가 개입할 일이 앞으로 없었으면 좋겠군."
하이에가 자리를 뜨자 오토가 비르타넨의 어깨를 두드리며 말했다.
"저 녀석은 혼자 착한척 하는군! 괜히 골치 아픈 일은 안 생기는게 좋으니 저 새끼 앞에선 조심하게나!"
에밀이 투덜거렸다.
"핀란드가 소련에게 당한걸 보면 나도 핀란드인들의 분노가 이해가 된단 말일세."
마티아스가 말했다.
"핀란드 친구들이 소련에게 갖는 증오심은 우리 같은 독일인이 왈가불가할게 아닐세. 우크라이나 쪽 반소련 게릴라들은 소련군의 사지를 갈라놓는다더군. 이걸 보고 비인간적이라고 하는 새끼들이 오만한거지. 내가 볼때 우크라이나와 핀란드는 소련군을 증오할 권리가 있네."
비르타넨이 말했다.
"자네들은 핀란드가 놈들에게 갖고 있는 증오를 절대 이해할 수 없을걸세."
비르타넨이 지난 번에 용감한 행동으로 소련군의 항공기를 격추시킨 이후로 독일군 전차병들은 비르타넨을 인정해주기 시작했다. 오토 또한 자신의 소대가 계속해서 전공을 올리고 있는 것이 자랑스러웠다.
'내 소대는 중부집단군 최고의 전차 소대일거야!!'
지금 에이스 전차장과 장교들은 전부 티거로 이루어진 티거 중전차 대대로 가고 있었다. 잘만하면 오토 소대원들 전부 티거 중전차 대대로 배속될 수도 있었다. 오토는 소련군에게서 노획한 투숑카 통조림을 먹으며 드넓은 동유럽 하늘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이 시각, 한스 파이퍼는 청산가리가 들어있는 캡슐을 들고는 피크가 있는 수녀원에 도착했다. 수녀원장은 거액을 수녀원에 후원해준 한스를 반갑게 맞이했다. 한스가 후원한 덕분에 많은 전쟁 고아들과 전쟁 범죄 피해자들이 치료를 받을 수 있었다.
한스는 식은 땀을 줄줄 흘리며 말했다.
"화..환자들의 상태는 괜찮습니까?"
한스는 차마 피크라는 여자의 얼굴을 제대로 쳐다볼 용기가 나지 않았다. 하지만 한스는 자신의 원수봉을 떠올렸다.
'할 수 있다...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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