변수의 굴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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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스퍼
그림/삽화
발아현미우유
작품등록일 :
2014.08.20 17: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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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08.11 17: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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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11.13 18: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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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쪽

(24막) 다시 품은 목소리 (3)

DUMMY

“아, 어서 오십시오, 아이언하트 대령.”


환하게 웃으며 들어서는 이를 맞이하는 여인과는 달리, 그 환대를 정면에서 맞이하는 어윈 아이언하트의 얼굴은 그리 밝질 못했다. 여인은 어윈의 심기가 불편한 이유를 너무나 잘 알고 있었기에 도리어 미소를 거두지 않는다.


“.......미첼 대령.”


동등한 계급, 동등한 눈높이. 그러나 과거 부하였던 자에게 경어를 쓰는 것도 모자라 지휘권까지 내주어야 했던 어윈은 이곳에 찾아온다는 사실 자체가 불편할 수밖에.


“식사는 하셨습니까?”


“네에, 뭐어.......”


“어쩐 일이시지요?”


아실레마제국 1군단 소속 제3전투예비보병여단장 마르셀 미첼은 지금 이 순간을 조금 더 즐기기로 작정한 모양이었다. 그녀가 어윈의 부관으로 복무할 당시, 그의 독선적이고 거친 성격 탓에 얼마나 많은 고생과 굴욕을 감내해야 했던가. 그랬던 그가 이제는 적에게 항복한 패장으로 자신의 앞에 서있으니, 마르셀의 입장에선 미소가 절로 새어 나오는 순간이었다. 모든 성가신 뒤처리를 도맡겠다며 나선 보람이 있는 셈이었다.


“그......., 카나반에서 출병했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사실입니까?”


“예, 사실입니다.”


“규모는?”


“2개 연대 수준이라고 하더군요.”


“.......2개 연대........”


혼잣말을 반복하며 마르셀의 말을 입에 담는 어윈. 마르셀은 가만히 그런 그를 올려다보다가, 결국 펜을 내려놓는다.


“왜 그러십니까?”


“아, 다름이 아니라, 저와 제 부하들도 이번 전투에 싸울 수 있도록 허락을-”


“안 됩니다.”


여유가 묻어나오는, 그러나 동시에 노골적인 악의 또한 함께 스며있는 마르셀의 미소. 미세한 흉터와 군인특유의 굴곡진 주름들로 인해 과거와는 달리 부드러움이 많이 무뎌진 그녀의 얼굴이었지만, 지금 이 순간만큼은 그 어떤 소녀보다도 부드러운 시선을 빛내고 있었다. 하지만 그 부드러움만으로도 어윈의 신경을 거스르기엔 충분했다.


“어째서입니까?! 이미 조사는 마쳤고, 제 독단적인 선택과 전술의 실패 때문에 패배한 것이라고 시인하지 않았습니까? 제 부하들은 죄가 없습니다! 녀석들에겐 무장해제당한 채로 방치되어있는 것보단 나은 대접을 받을 자격이 있습니다!”


“지휘관의 실패는 참모진 전원의 실패와도 같다-라고, 제가 당신을 보좌하던 시절에 말씀하셨지요. 그 가르침은 아직도 소중히 가슴 속에 모셔두고 있습니다. 저들에게 죄가 없다고요? 잘못이 명백한 당신을 저지하지 못하고 방관한 것 또한 패전에 한몫을 한 겁니다. 당신의 무능력한 항복에 굴복하고 저항을 이어가지 않았다는 것 또한 무거운 죄입니다. 이들 모두를 즉결처분하지 않고 본국의 지시를 기다리고 있는 걸 다행으로 여기셔야죠.”


“하지만 상대는 카나반의 정예군입니다! 숫자가 적다고 만만히 봐서는 안 되는 상대란 말입니다!”


답답한 듯 크게 한 걸음 마르셀이 앉아있는 탁자를 향해 다가선 어윈이었지만, 돌아오는 건 싸늘하게 식은 비웃음뿐이었다.


“하하, 어윈. 당신이 박살 났다고 해서 적을 높게 평가하시는 겁니까? 그게 어윈 아이언하트라는 기사가 판단하는 방식입니까? 참으로 치졸하기 짝이 없군요! 부하들 보기 부끄럽지도 않습니까?!”


“.......”

앞니가 짓누르고 있는 입술은 금방이라도 터질 듯이 새하얗게 질렸고, 주먹 쥔 손은 떨림을 감추지 못한다. 오른쪽 눈을 대신하고 있는 검은 안대 아래로는 분노를 참지 못해 붉은 핏줄기가 터져 나오는 중이었다.

그러나

어윈 아이언하트는 한 호흡, 크게 숨을 삼킨다.

“과거의 저였다면 여기서 소리를 내지르고 당신에게 달려들었겠지요. 하지만 저는 이제 과거의 어윈 아이언하트가 아닙니다. 이번 패배는, 저에게도 거대한 충격이었습니다. 변명할 생각은 없어요. 제 모자람으로 인한 패배였고, 저는 이제 그 사실을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


이런 어윈의 반응이 흥미롭다는 듯, 마르셀은 팔짱을 낀 채 천천히 등받이로 몸을 젖힌다.


“지휘권을 달라는 게 아닙니다. 그저 한 명의 기사로서, 한 명의 병사로서 저 붉은 나무의 족속들에게 설욕할 기회를 달라는 것뿐입니다! 계급과 직위는 이제 저에게 아무런 의미가 없습니다! 그저, 한 번만, 단 한 번만 싸울 기회를 주십시오! 설욕할 기회를 주십시오!”


목소리에 떨림은 사라졌고, 하나밖에 없는 시선에도 흔들림은 보이지 않는다. 예전부터 줄곧 그에게서 느낄 수 있었던 경솔한 영력의 잔재도 느껴지지 않는다. 오직 올곧은 분노만이, 지금 그에게서 보이고 있는 전부였다.


“.......오백 명. 오백 명을 드리죠. 굳이 승리하실 필요는 없습니다. 아직 제국의 군인으로서 싸울 수 있다는 의지만 보여주신다면, 남아있는 부하들에게는 최대한 선처를 베풀어드리겠습니다.”


오천 명이 넘는 적군을 상대로, 오백 명을 줄 테니 승리할 필요는 없고 의지만 보여 달라?

이 터무니없는 요구가 무엇을 뜻하는지 어윈이 모를 리 없다. 그러나 이를 갈며 따지는 대신, 어윈은 크게 고개를 끄덕이고 가슴팍의 계급장을 떼어 마르셀의 앞에 내려놓았다.


“모두가 보는 앞에서 저를 증명해 보이겠습니다.”


“기대 하겠습니다.”


짤막하게 허리를 숙이고, 그대로 거대한 걸음을 옮겨 집무실을 빠져나가는 어윈. 마르셀은 얇은 미소를 지은 채로 그의 모습이 사라질 때까지 문을 응시하고 있었다.


“괜찮겠습니까?”


고요가 찾아온 직후, 그림자처럼 맞은편 벽에 서있던 부관이 걱정스러운 얼굴로 마르셀에게 다가오며 물었다.


“어차피 보직해임과 강등은 피할 수 없다고 생각한 거다. 그는 그 나름대로 자신의 가치를 입증하고 싶은 거겠지. 처절한 발버둥이야.”


“하지만 본국에선 그를 처리하라고-”


“굳이 병사들의 사기를 꺾으면서까지 우리의 손을 더럽힐 필요는 없잖나.”


그녀의 미소를 보며 부관은 그제야 마르셀의 의중을 파악할 수 있었다.

개인적인 감정과, 군인으로서 받은 명령과 의무. 그녀는 이 모든 것을 한꺼번에, 그리고 만족스럽게 처리할 수 있는 방법을 찾아낸 것이다. 거기에 하찮은 적의 숫자까지 줄여놓을 수 있는 기회니, 어찌 미소를 짓지 않을 수 있겠는가. 마르셀은 입가의 느슨함을 유지한 채, 부관으로부터 서명할 또다른 서류를 받아들었다.




====================




“마제스티, 괜찮으시겠습니까?”


익숙한 풍경으로의 귀환. 낮고 초라한 성벽과 잔해들은 여전했지만, 그때와는 명백하게 다른 상황임을 피부로 느끼고 있는 카논의 걱정이었다. 그녀가 벤의 추천에 따라 왕실참모로 부임한 이후, 지나를 향한 그녀의 적갈색 눈동자가 이토록 불안함을 담은 경우는 이번이 처음이었다.


“뭐가?”


그런 카논의 걱정을 아는지 모르는지, 대답하는 지나의 미소와 시야는 시원할 정도로 깔끔하기만 하다.


“만약 저곳에 주둔 중인 일만의 제국군이 군단소속의 정예병이라면, 정면에서의 맞대결도 승리를 장담하기 어렵습니다. 그런데 공성이라면 더더욱.......”


“뭐어, 쥬넨의 수색 때문에 근위대가 빠져있는 건 아쉽지만, 나도 있고, 엘라도 있고, 어떻게든 될 거야.”


“어떻게든이라뇨....... 역시 지금이라도 인원보충을 요청하시는 게-”


“에이, 괜찮다니까.”


군마와 군마의 사이가 꽤나 멀었음에도 지나는 굳이 팔을 뻗어 카논의 머리를 잔뜩 헝클어트린다.


“마, 마제스티!”


“애들 태세 갖추는 대로 들어갈 수 있게 준비시켜놔. 빠르게 치고 들어갈 거니까.”


부하들이 볼까 두려워 황급히 헝클어진 머리를 정돈하던 카논은 크게 눈을 뜨며 지나를 돌아본다.


“예? 공성병기는 쓰지 않으십니까?”


“응.”


“하지만-”


“저쪽도 같은 생각인가 본데?”


히죽히죽 지나의 미소와는 별개로, 카논은 순식간에 바뀐 주변 공기를 느낄 수 있었다. 군장을 풀던 병사들은 물론이고, 입맛을 다시며 전방으로 걸어 나오는 엘라의 시선도 모두 같은 곳을 향하고 있었던 것이다.

저번 전투의 흔적이 고스란히 남아있는 망루와, 덜린족의 손길로도 전부는 보강할 수 없었던 허름한 성벽. 하지만 그것들은 모두 문제가 되지 않았다. 굳게 닫혀 있어야 할 성문이, 활짝 입을 벌린 채였다. 그리고 그 안으로 짙게 물결을 이루고 있는 먹색의 무리. 카논은 곧바로 몸을 돌려 병사들을 향해 영력이 실린 고함을 내지른다.


“적의 요격이다! 방어태세를 갖춰라! 각 지휘관과 기사들은 정면에서-”


“아니, 공격한다.”


“.......네?”


턱 막힌 목소리와 함께 크게 흔들리는 카논의 눈동자. 그러나 지나는 자신의 흑도를 뽑아 들고, 새빨간 혀끝을 깨문 채 다른 누구보다도 먼저 박차를 찬다.


“날 믿어봐.”







“적이 접근합니다!”


망루 위, 경계병의 다급한 외침. 마르셀 미첼은 새어나오는 미소를 감추기 위해 헛기침을 하고 나서 통신병을 향해 고개를 돌린다.


“어윈 대령에게 출격하라고 전달해라.”


“옛.”


군단의 정예병도 아닌, 이런 버려진 지방에서 경비병 노릇이나 하고 있던 오백 명의 잡군이다. 제아무리 어윈 아이언하트일지라도 저런 인원을 데리고 오천의 적을 상대로 할 수 있는 일은 제한적일 것이다. 물론 ‘의지’를 보여주기 위함이라지만, 처음부터 마르셀은 어윈의 ‘의지’따윈 볼 생각이 없었다.


“그리고, 어윈 대령이 전투에 돌입하면 성문을 닫고 수성 태세로 전환한다. 각 지휘관에게 전파하도록.”


“알겠습니다.”


이제 남은 것은 어윈의 마지막 불꽃을 지켜보는 것뿐. 마르셀은 차라도 한잔 곁들이고 싶은 욕망이 일었지만 얇은 미소를 대신하여 참아낼 수 있었다. 이제 저 버려진 남자는 자신의 운명을 깨닫지도 못하고 아무도 기억하지 못할 싸움을 향해 덤벼들 것이다. 한때 군단장의 직위까지 노렸던 남자의 마지막치고는 초라하지만, 어윈 아이언하트라는 이름을 지우기에 이보다 더 완벽한 무대가 있을까.


“부관.”


“옛.”


“어윈은 뭘 하고 있나?”


“아직 성문 앞에서 부하들과 대기 중입니다. 마지막 연설이라도 하고 싶은가 봅니다.”


“흥, 연설이라니, 어울리지 않는 짓을. 적이 더 접근하기 전에 빨리 출격하라고 해라.”


“예.”


망설임은 어윈 아이언하트의 미덕이 아니다. 다른 이들의 목소리를 듣기 위해 주저하거나 고민하지 않았기에 그는 지금의 자리까지 올 수 있었고, 동시에 지금의 자리에서 추락하는 것이다. 라고, 마르셀은 믿고 있었다.


“여단장님. 적이 최대사거리까지 접근했습니다.”


“뭐? 어윈은 뭘 하고 있나?”


“아직도 움직이지 않고 있습니다.”


“.......하아.”

한심함이 묻어나오는 깊은 한숨. 결국 마르셀은 자리에서 일어나 성 내의 모두가 들을 수 있는 목소리로 커다랗게 외친다.

“이제 와서 겁이 나 움직이지도 못하는 겁니까?! 어윈 아이언하트, 부끄러운 줄 아십시오! 당신은 제국기사의 수치입니다! 경비병! 성문을 닫아라!”


그러나 그녀는 몰랐다.

지금의 어윈 아이언하트라는 ‘기사’는, 더 이상 자신이 지금까지 알고 있었던 ‘지휘관’이 아니라는 사실을.

그리고

지금의 그는 단 하나의 목소리만을 듣고 있음을.









“이쯤이면 됐나? 아니, 이쯤이면 됐습니까?”


어윈은 아직도 경어가 어색한 모양이었다. 게다가 중간부터 ‘억지로’ 예전처럼 그녀를 부관마냥 부려야 했으니 오죽했으랴. 하지만 줄리아는 전혀 개의치 않는다는 듯, 살짝 고개를 흔들 뿐이었다.


“예, 지금입니다.”


줄리아의 무심한 시선은 안경과 성문 너머 매섭게 접근해오는 한 필의 말을 향해 있었다.


“지금이다! 성문을 장악해!”


어윈의 쩌렁쩌렁한 고함에, 그때까지만 해도 도살장에 끌려가는 돼지처럼 축 처져있던 오백 병사들의 어깨가 동시에 활기를 되찾는다. 하지만 그들의 의욕이 향한 곳은 성문으로 접근해오는 카나반군이 아니었다.


“무......., 무슨.......!”

마르셀은 벌떡 자리에서 일어날 수밖에 없었다.

시체와 같았던 아군이 갑자기 무기를 꺼내 들고 자신들을 공격하자 성문 근처에 있던 제국병들은 크게 당황한다. 어윈을 포함한 오백 명 하나하나의 움직임이 사전부터 철저하게 계산되어 있었기 때문에 수비병들은 속수무책으로 그들이 성문을 장악하는 걸 방관할 수밖에 없었다. 특히, 어윈은 곧바로 망루 위로 뛰어올라가 그곳에 있던 경비병들은 물론이고 성벽 위에 배치되어 있던 수성병기와 마법사들을 그의 철퇴, 아몬둔을 닥치는 대로 휘둘러 박살을 내고 있었다.

물론, 마르셀은 눈앞의 전황을 파악할 수 없을 정도로 우둔한 지휘관이 아니었다.

“어윈, 어윈이 배신했다! 모든 병력을 성문으로 집합! 어윈과 배신자들을 제압하고 적의 침입을 저지-”


그러나 마르셀은 말을 끝까지 잇지 못한다. 비록 멀리 떨어진 곳이었지만, 성문 아래로 샛노란 한줄기의 태양빛이 들어서 왔음을 볼 수 있었기 때문이다.






“어서 오십시오, 나이트 마제스티. 상황이 이렇게 된 점에 대해 진심으로 사죄드립니다.”


가볍게 열린 성문 아래로 들어온 지나를 기다리고 있던 것은 정중하게 허리를 숙이는 줄리아의 목소리였다.


“아냐아냐, 줄리아야말로 고생했어요. 아무리 버린 지역일지라도 어윈정도의 기사가 항복을 했다면 제국의 신경을 건드릴 거란 걸 예상했어야 했는데.”


“.......”


고개를 드는 줄리아의 눈빛엔 흔들림이 없다. 그리고 그 짧은 침묵으로부터 지나는 하나의 사실을 깨달았기에, 재미있다는 듯이 웃을 수 있었다.


“.......줄리아는 알고 있었군요?”


“예, 뭐. 대충은.”


“곧바로 이곳에 주둔군을 파견할 수 없는 우리의 정치적 상황과 제국의 감청위험 때문에 잠자코 계셨던 거네요.”


부드러운 태양의 미소였지만, 줄리아는 오히려 이해하기 어렵다는 듯 미간을 찌푸린다.


“왕비님께서야말로 오천이라는 숫자로 저흴 시험해보셨지요. 하지만, 어째서 아무런 의심도 없이 저흴 믿어주신 겁니까?”


“하하, 줄리아. 어윈은 몰라도, 당신은 스스로를 너무 과소평가하고 있네요.”


“.......예?”


그림자를 벗어난 흑도가 잔뜩 빛을 빨아들인다. 그리고 그 어둠이 겨누고 있는 건 혼란에서 회복하여 점차 대열을 갖추기 시작한 제국군이었다.


“과거는 중요하지 않아요. 특히 당신에게 있어서는 껍데기에 불과했던 시간들이잖아요. 그 모든 구속에서 탈피한 당신은, 저에게는 물론이고 우리 공화국에 있어서 결코 놓칠 수 없는 소중한 존재예요. 가능했다면, 당신을 구하기 위해서 오만 명이라도 데리고 왔을 겁니다.”


“.......”


줄리아는 입을 다문다. 그러나 멍한 시선만큼은 말에서 뛰어내려 앞으로 도약하는 태양의 뒷모습을 쫓고 있었다.

충분하다고 여길 수 있을 정도의 기간 동안 군복을 입었지만, 줄리아는 이런 기분을 느껴본 적이 없었다. 과장된 소속감이 아니다. 그리고 강요된 충성심과 의심 없는 복종도 아니다.

누군가 자신을 인정하고, 자신을 원한다는 느낌이

이토록 짜릿한 것이었던가.

그녀가 군복의 진정한 의미를 깨닫는 순간이었다.

동시에, 태어나서 처음으로 ‘주군’이라는 단어를 떠올린 순간이기도 했다.

다행히도, 그녀는 함성과 함께 성문으로 쏟아져 들어오는 카나반군 덕분에 눈물을 감출 수 있었다.




=====================




“무모함을 즐기시는 분이긴 하나, 걱정하실 필요는 없습니다. 폐하께서 가장 잘 알고 계시겠지만.”


“.......”

펜을 멈추고, 잠시 허공을 바라봤다는 것만으로 이렇게 정확히 꿰뚫고 들어오는 사람은 공화국 내에 마누앙밖에 없을 것이다. 로빈은 이 중후한 총리의 앞에서는 거짓이 통하지 않는다는 걸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한숨으로 대답을 시작할 수밖에 없었다.

“뭐, 내가 말려봤자 들을 인간도 아니지만요. 죄송해요, 마지막 거 다시 말씀해주시겠어요?”


“의회는 이번 주 내로 아르다르에 복귀할 예정입니다. 이스누시아 건으로 잡음이 많았지만, 크게 보자면 마즈다힐 원정 자체는 성공적이었다고 볼 수 있겠지요. 오로메 경께서 개선식을 제안하셨는데, 어쩌시겠습니까?”


“겉으로 보이는 축제보다는 전시세금 등을 줄여주는 게 시민들에게 더 의미 있지 않을까요?”


“세금은 팔루뎀과 마즈다힐 두 곳이 안정적으로 제 역할을 다할 때까진 유지할 필요가 있다고 봅니다. 감세는 그 이후에 점진적으로 추진하는 편이 낫습니다.”


“음......., 하지만 너무 오래-”


“항상 꽃만 받길 원하는 지도자는 결코 국가의 역사에 꽃길을 깔아줄 수 없습니다. 제가 20년에 가까운 섭정기간 동안 깨달은 유일한 진리이니, 믿으셔도 좋습니다.”


“.......총리님은 제가 할 말을 없게 만드는 데 탁월한 재능이 있으신 거 같아요.”


미소는 기대하지 않았지만, 돌아오는 마누앙의 날카로운 눈초리에 로빈은 결국 꼬리를 내린다. 모든 개선식의 비용은 왕당파가 부담한다는 부연설명을 읽고 나서야, 로빈은 그나마 가벼운 마음으로 서명을 할 수 있었다.


“다음 안건입니다.”


원체 표정이 별로 없는 사람이기도 했지만, 미세한 떨림조차 없는 마누앙의 목소리 덕분에 로빈은 별다른 의심 없이 종이를 받아들였다. 그러나 그 제목을 읽는 순간, 그는 조심스럽게 총리의 눈치를 살필 수밖에 없었다. 탈주자 수색범위를 확대해달라는 드렌턴의 요청서였기 때문이다.


“.......쥬넨 경, 아니, 쥬넨의 흔적을 찾을 수 없었다고 하네요. 심지어 리즈의 코로도.”


“애초에 브린타이나와 3군단의 전투가 끝난 직후 사형을 집행해야 했습니다. 지금까지 흔적조차 찾지 못했다는 건 이미 가망이 없는 것. 이 이상 인력낭비를 하지 마시고 수색대를 복귀시키십시오.”


마치 남의 이야기를 하는 듯한 무색무취의 억양이다. 로빈은 살짝 소름이 돋을 지경이었다. 그는 뭔가 말하려 했지만, 이미 총리의 비어있는 손이 무언의 재촉을 하고 있었기 때문에 결국 서명을 하고 종이를 그에게 돌려주어야 했다.


“폐하의 사설탐정노릇을 하고 있는 케타에게서 정기보고가 왔습니다. 오늘 저녁 중으로 해독하여 침실로 가져다드리겠습니다.”


“아, 네. 고마워요.”


“그리고 마지막 안건입니-.......”


로빈은 자신의 귀를 의심한다. 저 올곧은 총리가 업무 중에 말끝을 흐렸다?


“왜 그러세요?”


걱정스러운 로빈의 질문에도 마누앙은 한참을 대답하지 않은 채 자신이 들고 있는 마지막 종이를 뚫어져라 바라보고 있다. 그리고 그의 주름진 미간은 더더욱 구겨지기 시작했고, 마침내 고개를 들었을 땐 뭐라 형용할 수 없는 표정이 그의 얼굴에 떠올라있었다.


“.......검성에 관한 안건입니다.”


“검성? 벤이요?”

총리의 얼굴과, 갑자기 튀어나온 친구의 이름에 로빈의 검붉은 시선이 불안으로 흔들린다. 그는 조심스럽게 종이를 받아들였고, 그 첫 문단을 읽는다.

물론,

그의 구겨진 얼굴은 총리에 비할 바가 아니었다.

“전쟁범죄?! 아니, 이게 무슨....... 도대체 누가.......”


“그 아래 나와 있습니다.”


“.......교회?”

로빈은 잠시 거칠어져 가던 호흡을 정돈하고, 천천히 종이를 앞에 내려놓는다.

“잠시만요. 검성은 모든 군사작전에 대한 면책특권을 가지고 있는 거 아니었나요? 근데 전쟁범죄로 고발이라뇨?”


“상대가 교회라면 다릅니다. 그들에겐 군권과는 별개로 판단할 수 있는 강력한 기준이 있지 않습니까.”


“.......세뮈엘님의.......? 하지만 그건 종교재판의 영역이잖-”


“바로 그 종교재판의 영역에서 줄곧 벗어나길 원했던 자가 바로 검성입니다. 따라서 교회는 검성의 면책특권을 무시할 수 있는, 세뮈엘님의 대리인이라고 볼 수 있는 사람의 이름을 빌려 그를 고발한 것입니다.”


“그게 누군데요?”


“폐하입니다.”


“.......네?”


작가의말

언제나 미흡한 글을 봐주시는 독자분들께 감사드립니다

어색한 문장이나 문맥, 오타가 있다면 지적부탁드려요!

이 작품은 어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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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71 (25막) 탈태(奪胎) (5) +4 17.01.17 388 9 18쪽
270 (25막) 탈태(奪胎) (4) +10 17.01.12 540 11 18쪽
269 (25막) 탈태(奪胎) (3) +8 17.01.07 425 14 18쪽
268 (25막) 탈태(奪胎) (2) +8 17.01.02 424 12 20쪽
267 (25막) 탈태(奪胎) (1) +8 16.12.28 479 12 16쪽
266 (막간) 우리가 그림자를 대하는 자세 +8 16.12.23 451 11 13쪽
265 (24막) 다시 품은 목소리 (10) +4 16.12.18 498 12 18쪽
264 (24막) 다시 품은 목소리 (9) +8 16.12.13 393 12 23쪽
263 (24막) 다시 품은 목소리 (8) +2 16.12.08 369 12 22쪽
262 (24막) 다시 품은 목소리 (7) +6 16.12.03 519 11 16쪽
261 (24막) 다시 품은 목소리 (6) +7 16.11.28 435 12 19쪽
260 (24막) 다시 품은 목소리 (5) +4 16.11.23 400 11 17쪽
259 (24막) 다시 품은 목소리 (4) +8 16.11.18 415 11 17쪽
» (24막) 다시 품은 목소리 (3) +4 16.11.13 487 11 20쪽
257 (24막) 다시 품은 목소리 (2) +6 16.11.07 727 12 17쪽
256 (24막) 다시 품은 목소리 (1) +8 16.11.02 436 12 17쪽
255 (막간) 무게 +4 16.10.28 509 13 16쪽
254 (23막) 네 눈물 속에서 나를 본다 (11) +10 16.10.23 512 13 23쪽
253 (23막) 네 눈물 속에서 나를 본다 (10) +10 16.10.18 421 13 19쪽
252 (23막) 네 눈물 속에서 나를 본다 (9) +10 16.10.13 480 15 17쪽
251 (23막) 네 눈물 속에서 나를 본다 (8) +8 16.10.08 475 12 18쪽
250 (23막) 네 눈물 속에서 나를 본다 (7) +12 16.10.03 548 14 16쪽
249 (23막) 네 눈물 속에서 나를 본다 (6) +5 16.09.28 470 15 16쪽
248 (23막) 네 눈물 속에서 나를 본다 (5) +10 16.09.23 431 13 17쪽
247 (23막) 네 눈물 속에서 나를 본다 (4) +8 16.09.18 507 15 19쪽
246 (23막) 네 눈물 속에서 나를 본다 (3) +10 16.09.13 511 13 18쪽
245 (23막) 네 눈물 속에서 나를 본다 (2) +10 16.09.08 458 14 13쪽
244 (23막) 네 눈물 속에서 나를 본다 (1) +7 16.09.03 511 12 1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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