변수의 굴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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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스퍼
그림/삽화
발아현미우유
작품등록일 :
2014.08.20 17:22
최근연재일 :
2020.08.11 17: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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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01.02 18: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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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쪽

(25막) 탈태(奪胎) (2)

DUMMY

예비훈련생도 대부분은 기사의 피를 가지고 있을 뿐이지, 제대로 된 훈련조차 받지 않은 민간인이다. 당연히 눈앞에 있는 여인이 누구인지 아는 자도, 모르는 자도 있었다. 그러나 그들 모두가 한 가지 사실만큼은 공통적으로 깨달을 수 있었는데,

그것은 바로,

그녀의 몸짓과, 그녀의 미소에서부터 흘러나오는,

원초적 공포.

입으로는 웃고 있지만, 깊이를 가늠하기 어려운 저 칠흑의 눈동자는 노골적으로 죽음을 부르고 있다. 단순히 그녀가 기다란 검을 뽑아 들었기 때문만은 아니다. 안전을 장담 못 하는 수준의 적의가 아니다. 마치 적을 대하듯이 영력을 흩뿌리고 있지 않은가. 게양대 아래로 뛰어내린 그녀의 앞으로 순식간에 널찍한 공간이 만들어진 이유였다.


“흐응~?”


하지만, 야생은 물론이고 문명의 물결 안에서도 언제나 튀어 오르는 존재들이 있는 법이다. 그들은 뒤틀려있으며, 자신이 생존해온 방식에 대한 자부심이 굳건하다. 눈앞에 있는 존재가 얼마나 위협적이고 거대한지는 중요한 게 아니다.


“씨발, 진짜지? 그 곱상한 면상에 한 방 먹이면 전역시켜주는 거지?”


모두가 경악한다.

케타르디노 상회 출신의 에이미도 경악했고, 겨우 지혈을 마치고 뒤늦게 합류한 치체도 경악한다.

목소리가 담고 있는 무례함 때문이 아니었다.

온갖 차량이 전속력으로 달리는 도로를 향해 아무것도 모르는 얼굴로 걸어나가는 아이를 보더라도 이보다 경악스럽지는 않을 것이다. 무모하다-라는 표현으로는 담아내기 벅차다.

그래, 저건 미친 거다.

에두아르도 렐라바, 그의 별명인 ‘미친개’처럼.


“전역은 아니고 퇴소였지만....... 뭐, 상관없지? 좋아, 내 피부에 조금이라도 상처를 내면 바로 집으로 돌려 보내줄게.”


“대, 대장님!”


“왜?”

아무리 전권을 위임받았다 하더라도 퇴소도 아닌 일방적인 전역조치는 ‘징병’의 의미가 퇴색되는 행동이다. 그러나 부관은 그 이상 입술을 움직일 수 없었다. 반쯤 뒤를 돌아본 엘라의 싸늘한 눈빛에 사고가 묶여버린 탓이었다. 부관의 침묵을 확인한 엘라는, 다시금 즐거운 얼굴로 에두를 향해 시선을 옮긴다.

“원하는 무기 말해.”


“좆까, 필요 없어. 죽빵 한 번 먹이는 데 뭔 무기가 필요해?”


“꺄핫, 마음에 드네!”


이미 다른 예비훈련생도들은 크게 물러난 지 오래였다. 넓은 연병장의 중심에서 짝다리를 짚고 서있는 에두. 그리고 게양대에서 한 걸음씩 그를 향해 다가서는 엘라. 한 번의 도약으로 닿을 거리에 접어들자, 엘라는 갑자기 뽑았던 검을 기계식 검집으로 되돌린다.


“.......씨발, 뭐하는 짓이야?”


에두가 욕을 내뱉었지만, 엘라는 멈추지 않는다. 그녀의 경갑에선 더 이상 하얀 증기가 새어 나오질 않고 있었다.


“주먹엔 주먹이지, 안 그래? 이래야 나중에 불공평했다느니 그런 소리가 안 나올 거 아냐. 아, 물론 이빨이랑 혀가 남아있다면 말이지만.”


“씨발년이!”


엘라가 자세를 다잡기도 전에 에두가 먼저 먼지를 일으키며 도약한다. 정식교육이나 훈련하고는 거리가 먼 투박한 도약이었지만, 빠르게 거리를 좁히는 데엔 문제가 없었다. 그가 디딤발에 중심을 싣고, 허리로부터 끌어올린 힘의 균형을 주먹까지 옮겨 담을 때까지도 엘라는 어떠한 움직임도 보이질 않고 있었다. 에두의 ‘뒷골목’ 경험으로 봤을 댄 이미 승부는 난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여태까지 그가 때려눕힌, 허세만 가득했던 수많은 귀족과 군출신들의 경우와 흐름이 같았으니까.


“-!”


그렇기에,

그는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분명 날씨는 맑았다. 그런데 지금 시야를 어지럽히는 노란, 또는 새파란 번쩍임은 뭐란 말인가. 그리고 오른쪽 뺨에서 솟아오르는 이 열기. 불에 덴 것만 같은 끔찍한 열통은 무엇인가.

왜 나의 몸이 저항의 구속으로부터 풀린 것처럼 가볍게 공중을 통과하고 있는가.

왜 터진 입술이 연병장의 더러운 모래를 쓸어 담고 있는가.

그는 이해할 수 없었다.


“씨바아아알!”


형체를 알아보기 힘들 정도로 터진 입술과, 박살 난 이들의 조각이 뚫고 지나간 왼쪽 뺨에서부터 피가 쏟아진다. 그나마 남아있는 어금니도 금 간 뿌리가 느껴질 정도로 덜렁거리고 있다. 하지만 이 모든 고통으로부터 에두가 처음 보인 반응은 신음이 아닌 거대한 욕지거리였다.


“꺄하하하하하하하! 이야, 안 죽었네? 내 손등을 맞고 다시 일어난 건 칭찬해줄게. 이름이 뭐랬지?”


“씨바아아아아아아알!”


“이름이 씨발이야?”


엘라는 숨김없이 웃으며 자신의 오른손을 살짝, 가볍게 털어낸다. 예비생도들 중에서도 방금 무슨 일이 있었는지 깨달은 자는 극히 일부분이었다.

그중 하나인 에이미는 숨을 삼킨다.

말 그대로 한 번의 손짓이었다.

에두의 도약은 난잡하기는 했어도 틈은 훌륭하게 파고들었다. 바로 이어진, 힘이 제대로 실린 주먹. 그러나 엘라는 마치 파리를 내쫓듯, 오른손바닥을 밖으로 휘둘러 에두의 뺨을 내친 것이다. 그 작은 손짓에 얼마나 큰 영력이 담겨있었는지는 알 수가 없다. 에이미의 눈은 그 움직임도 간신히 찾아낸 수준이었으니까.


“아아아아으, 씨바알! 조아에 아흐네!”


철퇴를 맞아도 입이 저렇게 되기는 힘들 터. 당연히 반쯤 찢어진 에두의 혀는 제대로 된 발음을 낼 수 없었다. 모두에겐 그 끔찍한 그 광경이 본인에겐 재미있던 것인지, 엘라는 다시 한 번 깔깔 웃으며 에두가 나가떨어진 방향으로 한 걸음 크게 내딛는다.


“대장님, 그만하십시오! 죽이실 셈이십니까?!”


결국 보다 못한 부관이 내려와 용감하게 엘라의 팔을 붙든다. 그의 걱정과는 달리, 엘라에게서 돌아온 것은 짜증이나 분노가 아닌, 흥미롭다는 듯 얇게 중얼거리는 목소리였다.


“재밌네.”


“예?”


“진짜 죽일 생각으로 친 거였거든.”


“.......”


이렇게 시원하게 말해버리면 도리어 이쪽에서 할 말이 없다. 그녀가 무슨 생각으로 시작부터 생도 하나를 죽이려고 했는지, 아니 애초에 그녀에게 생각이란 게 있는지조차 의심이 된다.


“어어어-이~ 씨발. 더 할 거지?”


“개뉘여나아아아아!”


흘러내리는 피와 끔찍한 통증은 에두의 분노를 흐트러트리기엔 너무 가벼웠다. 그는 연병장의 모래까지 던져가며 엘라에게 달려들었고, 휘날리는 먼지 사이로 보이는 그녀의 미소가 그의 입소식 마지막 기억이었다.






======================






“안녕하십니까, 장군님.”


“음.”


경직된 자세로 경례를 올리는 장교들. 제국 3군단장 ‘은빛의 사선’ 카이우스 드레브냑은 그런 장교들을 향해 간단한 목례로 답한다. 그러나 존경과 두려움은 오래가지 않는다. 카이우스가 지나치고 나서, 장교들은 싸늘한 눈빛으로 그의 행적을 뒤쫓다가 저들끼리 귓속말을 나누며 가던 길을 향해 사라진다.

이곳이 그에게 적대적인 시선만이 가득한 본국이었다면 익숙한 광경이었을 테지만, 카이우스가 서있는 곳은 그의 안방이나 다름없는 3군단본부. 브린타이나 전투 이후 재정비를 한다는 핑계로 본국에 귀환하지 않고 이곳에 머물러있는 그였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그의 그림자를 죄여오는 것은 본국의 독촉도, 패전의 책임을 묻는 질타의 목소리도 아닌, 방금 받았던 바와 똑같은 부하들의 의구심 가득한 눈초리였다.

노골적이진 않았으나, 서서히 몸을 중독시키는 독처럼 군영 내에 번져나가는 어수선한 분위기. 이러한 분위기를 직접적으로 느끼기 시작한 것이 베이어 대령의 방문 이후라는 건 단순한 우연일까. 그가 내뱉었던 말을 지금 생각해보니, 단순한 경고나 협박이 아니었던 모양이다. 베이어는 일종의 선포를 한 것이다. 그리고 그런 베이어의 ‘선포’를 무겁게 생각하지 않았던 대가로, 카이우스는 그가 경험해본 적 없는 전투에 접어들고 있었다.

카이우스는 오직 자신의 신념과 능력만으로 지금의 자리에 오른 인물이다. 그는 헛된 욕망과 타협하지 않았으며, 제국의 장군들 중에서도 가장 제국다운 품위를 유지하고자 했다. 가문의 이름이나, 권력의 색깔에 구애받지 않는 독립성. 그것이야말로 그가 자신과 자신의 이름을 받드는 후예들에게 요구한 최우선요소였다. 부하들은 그런 군단장을 신뢰했으며, 카이우스는 부하들에게 부족함 없는 믿음을 주었다.

그러나 좌검성 델핀 드리브달의 죽음과 그로 인해 공석이 된 좌검성직은 그를 비롯한 모든 군단장들에게 느긋함을 앗아가 버렸다. 그 결과로, ‘은빛의 사선’은 어쩌면 그의 인생 최초라고도 할 수 있는 거대한 실수를 저지르고 만다. 바로 ‘오열의 검성’, 블라르 트리스탄테의 기질을 잘못 꿰뚫어 본 것이었다.

그를 이용하여 브린타이나를 수중에 넣으려던 카이우스의 계획은 도리어 대 제국동맹의 기틀을 굳게 다지게 되는 결과로 이어지고 말았다. 그에 대한 대책으로써 선택할 수밖에 없었던 브린타이나 침공. 그러나 그의 계산과는 다르게, ‘어떤 이유에서인지’ 브린타이나와 그들의 동맹군은 쉽게 무너지지 않았다. 오히려, 이쪽을 훤히 꿰고 있는 듯한 움직임으로 자신의 3군단을 무력화시켰다. 단순히 ‘변수’ 하나만으로는 설명하기 힘든, 그런 실패였다. 졸렬함과는 거리가 먼 카이우스가 좀처럼 패배를 인정하지 못하는 이유이기도 했다.

처음 맛보는, 납득할 수 없는 패배. 하지만 카이우스는 마지막까지 원칙만은 지키길 바랐다. 패배는 패배고 실패는 실패다. 자신의 혈육이라는 이유로 포로 하나 때문에 협상을 한다는 건 여태까지 그가 지켜온 ‘원칙’으로는 납득할 수 없는 일이었다.

그래서 무시했다.

아무렇지도 않다고 한다면 거짓말일 것이다. 붉은 나무의 나라 옛 검성이 그러했듯, 그의 아들, 그의 딸, 그의 손자와 손녀들이 자신의 이름에 짓눌리면서 받았던 고통을 뼈저리게 알고 있는 카이우스다. 그러나 안톤, 그 아이만큼은 그러지 않았다. 그는 카이우스의 ‘원칙’을 이해하는 기사였다. 본인부터 앞장섰다면 섰지 ‘특혜’를 바라는 일은 없었고, 그런 안톤이었기에 그가 증조부의 전속부관후보에 이름을 올렸을 때 거부감을 느끼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어쩔 수 없었다.

원칙은 원칙이니까.


카이우스는 자신의 이런 뜻을, 여태까지 자신의 밑에서 복무해왔던 부하들이라면 당연히 이해할 것이라 생각했다. 이해를 넘어, 존중해줄 것이라 생각했다. 그러나 그것은 오판이었다.

유연하지 못한 그의 원칙과 신념은 성공이라는 단어의 옆에 있을 때는 존경을 이끌어내는 가장 중요한 존재였지만, 실패라는 단어를 이끌었을 때에는 그럴 수가 없었다. 안톤은 더 이상 그의 원칙을 대변하는 상징물이 아니었다. 처참하게 퇴각하는 부하들의 눈에는, 실패한 부하를 내치는 차가운 지휘관의 표정만이 남아있을 뿐이었다.


‘그에게 부하란 자신의 성공을 위한 소모품에 지나지 않는다. 심지어, 그게 친족일지라도.’


‘그는 혈족을 아끼지 않는다. 오히려, 그들의 실패가 자신의 영역을 침범하지 않도록 냉담하게 꼬리를 자른다.’


베이어가 이곳에 심고 간 독의 씨앗이 어떤 식으로 싹을 틔웠는지 정확히는 알 수 없지만, 한 가지만큼은 확실했다. 그리고 그 확실한 한 가지 사실을 직접 대면하지 않기 위해 카이우스는 은둔하다시피 군단본부에 틀어박혀 있는 것이었다. 지금 자신이 중앙군부로 출석했다가는, ‘그들’에게 맛있는 먹잇감이 될 뿐이니까.


“이 녀석이!”


집무실로 향하는 복도. 갑작스러운 소란에 카이우스가 고개를 돌려 중앙연병장을 향한다. 시선을 길게 뺄 필요도 없었다. 창문 밖, 바로 앞의 정원이 바로 소란의 중심지였으니까.


“무슨 일인가?”


“응? 앗, 장군님!”


카이우스가 창문을 열자, 부하 장교 두 명이 급하게 경례를 올린다. 그리고 카이우스는 그제야 그들의 그림자에 가려서 보이지 않던 ‘소란의 원흉’을 볼 수 있었다.


“.......”


남자아이였다.

열두어 살 남짓으로, 잘 빗어 넘긴 검정 머리와 훤히 드러난 이마 아래로 연보랏빛의 신비한 시선이 돋보인다. 깨끗하게 다린 하얀 셔츠와 바지색깔에 맞춘 듯한 회색 조끼까지. 얼핏 보아도 귀족의 자녀를 연상시키는 차림새였다.


“죄, 죄송합니다! 어디로 들어왔는지 이 주변에서 알짱대고 있길래 내쫓으려던 참이었습니다!”


“아이, 잠깐만 놀다 간다니까?”


굳센 군인의 손을 뿌리치기엔 소년의 앙탈은 너무 가냘프다. 그러나 아무리 작은 꼬마일지라도 군시설, 그것도 군단본부가 무단침입을 허용했다는 사실은 바뀌지 않는다. 장교들이 식은땀을 흘릴 수밖에 없는 이유였다. 특히, 요즘 군내에 흐르는 카이우스에 대한 소문과 평가를 생각해본다면-


“내 손님일세.”


“.......옛?”


순간 굳어버리는 두 장교의 몸짓. 카이우스는 짧은 한숨과 함께, 창문틀로 다리를 올려놓는다.


“내 손님이라고 했네. 안으로 들여보내게.”


“하, 하지만-”


“앗싸~”


장교들이 뭐라 반응하기도 전에 소년은 그들의 손을 뿌리치고 창문을 넘어온 카이우스에게 안긴다. 익숙하게 소년을 안아 든 카이우스는 그대로 다시 복도로 되돌아가, 소년의 손을 잡고 집무실을 향한다. 남겨진 장교들은 벙찐 표정을 교환할 수밖에.


“.......”


전속부관이 없는 집무실은 싸늘하고 조용했다. 소년은 카이우스가 문을 닫기도 전에 안으로 뛰어들어가 까치발을 들어 벽난로 위를 더듬는다. 잠시 후 소년의 손에 의해 끌려 내려온 것은, 다름 아닌 베이어가 탐냈던 브랜디 병이었다.

놀랍게도,

소년은 꼬물꼬물한 손으로 잔 두 개를 들어 탁자로 다가선다. 그리곤 능숙하게 잔을 채우더니, 망설이지 않고 독한 향을 입술에 담는다. 이어지는 반응은 잔뜩 찌푸린 채 경악하는 천진난만한 표정이 아니었다. 만족이, 소년의 얼굴에 흐른다.


“이거, 내가 저번에 선물해준 거 맞죠?”


“예.”


“역시.”


군단장의 정중한 대답에 고개를 끄덕이고, 그제야 깡총 소파 위로 엉덩이를 올려놓는 소년. 가만히 그를 지켜보던 카이우스는, 깊게 숨을 들이마시며 결국 맞은편에 자리를 잡는다.


“갑자기 이곳엔 어쩐 일이십니까? 제가 출석하지 않아서 직접 오신 겁니까? 만약 그렇다면, 저는 아무런-”


“아뇨, 그냥 이거 마시러 온 건데요?”


평범한 소년 같은, 장난기 넘치는 미소.

그러나 카이우스는 그 미소에 소름이 돋는다.


“아무리 당신의 그 모습을 알아보는 사람이 없다고 해도 수행원이나 부관도 없이 이렇게 막 나오셔도 되는 겁니까?”


“필요 없으니까.”


“.......”


반박할 수 없다.


“뭐, 그건 그렇고, 얼마 전에 베이어가 왔다갔다면서요?”


“.......”


“아, 그렇게 노려보지는 말고. 딱히 나한테 보고한 게 아니라 들었을 뿐이니까요.”


“.......그렇습니까. 그럼 이제 맛을 보셨으니, 이곳에 온 이유를 알려주셨으면 합니다만.”


“이런, ‘은빛의 사선’과 한잔하기 위해서-라는 건 변명의 선택지에 없는 건가요?”


“언제까지 ‘진짜’ 어린아이처럼 그러실 겁니까?”


“하하하.”

웃음이 없는 웃음이다. 소년의 이름을 알고 있는 카이우스로서는 그렇게 느낄 수밖에 없었다.

“카이우스, 좌검성직에 대해 당신이 어떻게 생각하고 있었는지, 그리고 내가 당신을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지를 정리할 필요가 있었어요. 굳이 베이어가 아니었더라도, 당신은 실패했고 그 실패를 수습하지 못했죠.”


“실패는 인정합니다. 하지만 저에 대해 돌고 있는 소문은-”


“물론 사실이 아니라는 건 제가 잘 알고 있습니다. 안톤에 대해선 유감이라고 생각해요. 당신이 틀린 건 아니었죠.”


“.......”


“문제는, 더 이상 ‘공포’만으로 검성의 자리를 유지할 수가 없는 지금의 상황입니다.”

잔이 기운다.

이미 절반이 비어있었던 브랜디 병은 빠르게 그 맑은 본모습을 되찾아가고 있었다.

“델핀이 전사했고, 그녀의 딸은 제국을 배신했어요. 그리고 임시라지만 제국의 2군단장을 맡았던 브란트가 카나반 기사와의 1:1 대결에서 패배하였습니다. 바로 ‘흐름’의 손녀딸에게 말이죠. 거기에 마즈다힐을 빼앗겼고, 어윈이 엘라론을 따라 조국을 등졌습니다. 마지막으로 당신은 패배했죠. 짧은 기간이지만, 이 기간 동안 우리 제국이 입은 피해는 단순히 병력이나 물자, 영토라는 개념의 문제가 아닙니다. 바로, 적들이 더 이상 제국의 기사를 두려워하지 않는다는 점이죠.”


“.......”


“기사의 생산과 기사의 육성. 이 두 가지를 위해 우리 제국은 오랫동안 수많은 가치를 희생해야 했습니다. 하지만 그 희생의 대가는 확실했어요. 그 누구도 우릴 무시할 수 없었고, 우리 기사들의 강함을 동경하면서도 두려워했습니다. 그런데 요즘엔 어떻습니까? 2군단은 물론이고 그대를 포함한 군단의 수장들은 좌검성이란 영광과 명예에 눈이 팔려 제국의 가장 위대한 가치를 등한시했어요.”


“하지만 그건.......”


“예, 맞아요. 공개적으로 좌검성직에 경쟁을 붙였기 때문이죠. 하지만 그 의도가, 정말로 군단장들과 중앙군부 사이의 균형을 맞추기 위한 수작이었다고 보십니까?”


“.......”


카이우스의 침묵을 안주 삼아, 소년은 또다시 잔을 비운다.


“제 의도를 의심하셨다는 건 이해합니다. 애초에, 그러라고 내린 군령, 아니, 법령이었으니까. 하지만 전 당신만은, 3군단장 ‘은빛의 사선’ 카이우스 드레브냑만큼은 다른 길을 보여줄 것이라 기대했습니다.”


“.......”


“그래서 실망했습니다.”


실망.

이 단어가, 이토록 쓰라리게 가슴과 이성을 파고든 적이 있었던가.

눈앞의 소년은, 아니, 눈앞의 존재는,

카이우스에게 있어서는 동경도, 두려움도 될 수 없는 존재다. 하지만 그는 어째서인지 실망이라는 단어에 실망하고 있었다. 마치, 인정받고 싶었던 선생님에게 꾸중을 들은 것처럼.


“당신이 나를 어떻게 생각하는지는 몰라도, 나는 당신을 꽤나 아꼈습니다, 카이우스. 그래서, 중앙군부를 대신하여 이 말을 전해야 한다는 게 참으로 가슴이 아파요.”


“.......”


“물론 이에 수긍할지 부정할지는 전적으로 당신에게 달려있습니다. 선택지는 많지요. 누구처럼 카나반에 투항해버릴 수도 있고, 아니면 반기를 들고 대적할 수도 있어요. 하지만 어떤 게 당신과 당신들의 부하, 그리고 차기 좌검성을 위한 최선의 선택일지, 잘 알고 계실 거라 믿습니다.”


순식간에 넉 잔을 비워버린 소년이 자리에서 일어난다. 브랜디 때문이었는지, 아니면 카이우스의 얼굴빛 때문이었는지는 몰라도, 소년의 표정은 만족으로 물들어있었다.


“........한 가지, 한 가지만 여쭤봐도 되겠습니까?”


집무실의 문을 열고 나가려던 소년을 붙드는 카이우스의 목소리. 약간, 떨리는 목소리.


“네?”


“베이어 경이 찾아왔을 때, 그에게 물었습니다. 그와 그의 형제자매들이 움직인 것이, 바로 당신의 뜻이 아닌가-라고.”


“.......흐응.”


흥미롭다는 듯, 미세한 미소를 지어 보이는 소년.


“가장 믿을 수 있는 혈족을 좌검성에 앉히고, 그대로 군부를 장악하려는 게 ‘그’의, 아니.......”

은빛의 사선이, 평범하기 그지없는 소년의 얼굴을 향한다.

“ ‘당신’의 의도가 아니었나- 라고요.”


짙어지는 미소. 이번엔, 거짓이 담겨있지 않다.


“글쎄요,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솔직히, 모르겠습니다.”


“하하, 그러면 된 겁니다.”


그 짧은 웃음소리를 마지막으로, 소년은 모습을 감춘다. 집무실에서 뿐만이 아니었다. 3군단본부 어디에서도 소년의 모습을 본 사람은 더 이상 나오지 않았다.


“.......”


카이우스의 시선이 자신의 잔으로 향한다. 소년과의 대화 중 전혀 입을 대지 않았기에, 내용물은 아직 그대로 찰랑이며 남아있었다.

브랜디 병에 남아있는 내용물도, 이제는 애매하다.

대접하기도 애매하고, 혼자 먹기엔 넘친다.

의도한 것인지는 알 수 없었다.


그는 잔을 들고 내용물을 깨끗하게 비운다.

향이나 맛은 느껴지지 않았다.

남은 것은 애매함뿐이었다.


애매하다.


마치-









일주일 후,

‘은빛의 사선’ 카이우스 드레브냑은 제국3군단장직을 사임하고 본국으로 귀환한다.


작가의말

언제나 미흡한 글을 봐주시는 독자분들께 감사드립니다

어색한 문장이나 문맥, 오타가 있다면 지적부탁드려요!

새복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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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77 (막간) 이 구역의 미친개는 나야 +4 17.02.16 367 10 18쪽
276 (25막) 탈태(奪胎) (10) +8 17.02.11 553 6 16쪽
275 (25막) 탈태(奪胎) (9) +4 17.02.06 378 10 20쪽
274 (25막) 탈태(奪胎) (8) +6 17.02.01 382 10 17쪽
273 (25막) 탈태(奪胎) (7) +4 17.01.27 471 6 17쪽
272 (25막) 탈태(奪胎) (6) +4 17.01.22 492 11 14쪽
271 (25막) 탈태(奪胎) (5) +4 17.01.17 388 9 18쪽
270 (25막) 탈태(奪胎) (4) +10 17.01.12 540 11 18쪽
269 (25막) 탈태(奪胎) (3) +8 17.01.07 425 14 18쪽
» (25막) 탈태(奪胎) (2) +8 17.01.02 424 12 20쪽
267 (25막) 탈태(奪胎) (1) +8 16.12.28 479 12 16쪽
266 (막간) 우리가 그림자를 대하는 자세 +8 16.12.23 451 11 13쪽
265 (24막) 다시 품은 목소리 (10) +4 16.12.18 498 12 18쪽
264 (24막) 다시 품은 목소리 (9) +8 16.12.13 393 12 23쪽
263 (24막) 다시 품은 목소리 (8) +2 16.12.08 368 12 22쪽
262 (24막) 다시 품은 목소리 (7) +6 16.12.03 519 11 16쪽
261 (24막) 다시 품은 목소리 (6) +7 16.11.28 435 12 19쪽
260 (24막) 다시 품은 목소리 (5) +4 16.11.23 400 11 17쪽
259 (24막) 다시 품은 목소리 (4) +8 16.11.18 415 11 17쪽
258 (24막) 다시 품은 목소리 (3) +4 16.11.13 486 11 20쪽
257 (24막) 다시 품은 목소리 (2) +6 16.11.07 727 12 17쪽
256 (24막) 다시 품은 목소리 (1) +8 16.11.02 436 12 17쪽
255 (막간) 무게 +4 16.10.28 509 13 16쪽
254 (23막) 네 눈물 속에서 나를 본다 (11) +10 16.10.23 512 13 23쪽
253 (23막) 네 눈물 속에서 나를 본다 (10) +10 16.10.18 421 13 19쪽
252 (23막) 네 눈물 속에서 나를 본다 (9) +10 16.10.13 480 15 17쪽
251 (23막) 네 눈물 속에서 나를 본다 (8) +8 16.10.08 475 12 18쪽
250 (23막) 네 눈물 속에서 나를 본다 (7) +12 16.10.03 548 14 16쪽
249 (23막) 네 눈물 속에서 나를 본다 (6) +5 16.09.28 470 15 16쪽
248 (23막) 네 눈물 속에서 나를 본다 (5) +10 16.09.23 430 13 17쪽
247 (23막) 네 눈물 속에서 나를 본다 (4) +8 16.09.18 507 15 19쪽
246 (23막) 네 눈물 속에서 나를 본다 (3) +10 16.09.13 511 13 18쪽
245 (23막) 네 눈물 속에서 나를 본다 (2) +10 16.09.08 458 14 13쪽
244 (23막) 네 눈물 속에서 나를 본다 (1) +7 16.09.03 511 12 1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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