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 강아지가 되고 싶은 하라어 (何羅魚)
게다가 영기 디바이스는 어디까지나 영근이 없는 범인이 영기 기술이 적용된 세계에서 불편 없이 살게 하기 위한 일용 필수품이지 수도자용이 아니었다. 하물며 대요수 전투용은 더더욱 아닌 게 당연했다.
정민의 사례가 특이하기에 설령 오성전자의 1급 디바이스더라도 이렇게 과부하에 가까운 영기 연화와 운용은 내구도 테스트에서조차 상정한 적이 없는데, 장갑 위 옥구슬은 조금씩 빛을 잃어가기 시작했다.
“크와아아아아악ㅡ!!!”
‘이렇게 된 이상 이판사판이다!’
정민은 그 생각을 마지막으로 대뜸 현철 방패를 통제하고 있던 영기의 양을 무리해서 순간 몇 배로 늘린 뒤 ‘고양이’쪽으로 밀어냈고, 고양이가 갑자기 앞으로 확 나온 방패에 밀린 틈을 타 어화술로 아까 만든 것보다 몇 배는 큰 불덩이를 만들어 날렸다.
콰앙ㅡ!
화르륵
“크아아악ㅡ!!! ··· ㅡ!!!!”
사람 얼굴을 한 호랑이의 비명은 큰 불덩이가 그 몸을 감싸 불태우며 끊겼고, 그것이 단말마가 되었다.
“헉헉···.”
[ 솔직히 기대에 약간 못 미치지만, 잘했구나. ]
‘이게··· 기대에 못미친다고?’
정민이 숨을 막 고르기 시작할 때, 익숙한 목소리가 다시 정민의 마음에 울려 퍼졌다.
[ 고양이 꼬리 여덟 개를 빼내고, 벼락을 내려 입 안에 있던 창귀도 없애줬는데 거의 새끼 고양이를 잡으라 한 격이지. ]
‘미친놈··· 내가 다시는 조금이라도 뱀새끼 네 말 믿나 봐라! 달에선 영식이 없니, 몸을 차지 못하니, 천기누설이니 사기를 치더니 이젠 호랑이, 아니 사람 얼굴을 한 백호 요수를 고양이라고 불러?’
누가 봐도 호랑이 요수인데 끝까지 고양이라고 부르며 고집부리는 용의 태도에 정민은 두 손 두 발 다 들었다.
“이제 말 걸지 마. 옥구슬도 빛을 거의 잃었고 딱 봐도 어화술··· 도 아니고 하이퍼루프 단말에 한두 번 대는 게 한계야. 나갈 길 찾아야 해. 네가 꼬리가 아니라 사지를 다 떼줘도 아까 같은 애, 아니 그냥 호랑이 한 마리만 더 마주치면 진짜 끝이야.”
[ 종문 령패를 살펴보니 고양이 꼬리가 필요한데 가져가지 않을 건가? ]
“가져갈 거야!”
정민은 마음속으로 말하는 대신 혼잣말로 용에게 뭐라 했는데 용도 그에 한 치도 지지 않고 딴소리를 해댔다.
아까 령패에 적혀있던 ‘영기를 운용해서 요수 해체하는 법’도 읽었건만 전혀 소용이 없게 되어 버렸다.
자연스레 용이 떼놓은 그 여덟 개의 꼬리로 다시 눈이 갈 수밖에 없었다.
영기 없이는 그냥 무거운 철 방패에 불과한 산악현철순과 여덟 개의 호랑이 요수 꼬리를 목걸이에 집어넣는 것을 마지막으로 오른손 장갑의 옥구슬이 깨져버렸다.
“나 이제 다시 범인이나 마찬가지야. 법술도 못 쓰고, 법기도 못 쓰니까.”
[ 주위에 다른 요수가 있을지도 모르는데 잘도 혼잣말로 얘기하는구나. ]
“대나무숲이 그 자리에 그대로 있었으면 그냥 들어가면 되는데···.”
정민과 용은 계속해서 서로 딴소리하고 있었고, 그러면서도 서로의 말에 귀 기울이고 있었다.
[ 어째서 돌아가려 하지? 지금 가면 이곳에 언제 다시 오게 될 지 모른다. ]
“대나무 숲은 커녕 비슷한 것도 안 보여···.”
[ 장갑으로 영기를 썼던 게 문제라면 왜 태양정수석을 꺼내지 않는 거지? 네 상태에 그것으로 법술을
쓸 수 있는지 모르겠지만, 시도라도 하지 않으면 어차피 죽을 목숨인데. ]
“···! 잊고 있었어!”
태양정수석, 정확히 말하면 태양정수 한 방울이 품고 있는 영력은 정민도 어느 정도 알고 있다.
지난 며칠간 사저이자 사부 하은이 자신이 그것을 내내 손에 쥐고 수위를 쌓아도 된다고 허락해 줄 때, 도합 수십 시간이나 영기 연화에 사용 했는데도 조금도 줄어든 티가 나지 않았으니까.
“···근데 지금 알면 뭐 해? 이제 영력을 운용할 수단이 없어서 목걸이에서 그걸 빼낼 수 없잖아.”
[ 내가 말했지? 축기기가 되기 전까지 법술을 배울 수 없다고. 예상과 달리 배우긴 했지만
결국 스스로 쓸 수는 없다. 법기도 마찬가지. ]
“이젠 아예 불난 집에 기름을 끼얹네.”
[ 화내지 말고 들어봐라. 왜 너만 축기기가 되기 전까지 그런 것들을 할 수 없다고 생각하나? ]
“연기 중기가 못되니까 그런 거 아니야? 수위(修爲)랑 경지(境地)는 붙어 있는 것 같아도 엄밀히 따지면 별개라서.”
둘 사이 딴지를 거는 빈도가 줄어들고 이야기에 집중할 수 있게 되자 용은 설명을 이어 나갔다.
[ 각 수행의 소경계를 초기, 중기, 후기로 나누지만, 왜 거의 모든 대경지의 돌파 전 병목 구간이 셋일까?
고리타분하게 들릴 수 있겠지만 각 대경지가 나름 담고 있는 천, 지, 인을 깨닫는 게 그 병목 구간들이기 때문이다. ]
[ 大同而與小同異 크게 보면 같고 작게 보면 다른 것은
此之謂小同異 조금 다르다고 한다. ]
[ 연기 후기에서 축기기에 이르기 위한 방법도 세 가지로 알려져 있다. 인도(人道) , 지도(地道), 천도(天道) 축기가 그것이다. ]
[ 연기기의 소경계를 각각 돌파하든, 인도, 지도, 천도 축기를 구분해서 돌파하든 조금 다른 것에 불과하지. 너희들이 말하는 천교마저도 더 강한 심마를 마주하는 게 두렵거나 그깟 지보를 구하지 못해 천도 축기와 지도 축기를 저울질하며 고민하지만 크게 다르지 않으니 그것은 부질없다. ]
[ 축기(築基)는 수선지로의 가장 필수적인 토대(基)를 쌓는(築) 것, 너는 천지인 삼도(三道)를 합쳐 세상에서 가장 두터운 토대를 지닌 축기기에 이를 것이다! 모든 조금 다른 것을 포용하는 것은 모든 크게 다른 것을 포용하는 것! ]
[ 萬物畢同畢異 만물은 생각하는 관점에 따라 모두가 같다고도 할 수 있고, 모두가 다르다고도 할 수 있다.
此之謂大同異 이것을 크게 다르다고 한다. ]
···
용의 장설은 한동안 더 이어져 나중엔 거의 설법(說法)에 가까워졌고, 정민은 그것을 들으며 입정에 들었다.
“내가 너한테 이런 말 하게 될 줄은 정말 몰랐는데··· 고맙다.”
시간은 어느새 밤이 된 듯 주위가 완전히 어두워졌는데, 정민은 흐른 시간은 상관없다고 생각하는지 혹은 그저 자신이 말한 게 낯간지러운 듯 그 말을 하자마자 자리에서 일어나 앞이 거의 보이지 않는 데도 정처없이 걷기 시작했다.
[ 나야말로 지금 네 반응이 의외라는 생각을 하고 있다. ]
[ 그런데 태양정수석 꺼내는 것은 포기하는 건가? ]
“그게 있다고 내가 법술을 쓸 수 있다고 보장된 것도 아닌데, 큰 차이 없어.”
[ 내가 말해준 것 중에 조금은 마음에 닿은 게 있나 보구나. ]
[ 그런데 내 신식으로 네 목걸이에 손을 대면 숨 쉬는 것보다 쉬울텐데, 부탁하지 않는군? ]
“너 진짜 나한테 심마짓 하러 온 거 맞지? 심마가 뱀이었네? 아담과 이브는 심마에 빠진 거였어.”
[ 네 말을 빌리자면 ‘백호 요수’를 새끼 고양이로 만들어 준 것도 난데 안될 게 무엇이지? ]
“난 그런 고양이랑 싸우게 해달라고 한 적 자체가 없는데···.”
둘은 한동안 다시 티격태격대다 한 연못에 다다르게 되었는데, 정민은 마침 지치고 목이 말라서 잘됐다는 생각에 이 연못 물을 마셔도 되는지 따지지도 않고 퍼마시기 시작했다.
“생각해 보니 들어올 때 도시락만 주고 물은 하나도 안 줬어! 뭔가 반대로 된 것 같아.”
[ 하루 마시지 않는다고 죽는 것도 아닐텐데 그것 하나 참지 못하다니. ]
“월월ㅡ!”
용이 혀를 차며 정민에게 뭐라 하던 순간 갑자기 어디선가 개 짖는 소리가 났다.
정민은 물 마시는 것도 멈추고 긴장했는데 자세히 들어보니 소리가 수풀이나 숲 쪽이 아닌 연못 쪽에서 나고 있단 생각이 들었다.
소리는 점점 가까워지더니 정민 앞에 다다랐는데 이상하게 그 소리가 가까워질수록 정민은 자신의 시야가 밝아진다는 느낌을 받았다.
개소리를 내던 것의 정체는 연못을 헤엄치는 어떤 물고기 였는데, 자세히 보니 이 물고기는 머리는 하나지만 몸이 두 개였다.
[ 이건···? 너 정말 운이 좋은 놈이구나. 성체는 아니지만. ]
몸 두 개 달린 물고기는 낯을 가리거나 적대적인 감정 없이 정민 앞에 이르렀고 이후 정민이 반응할 때까지 가만히 있었다.
‘운이 좋아? 안전···한 거란 소리지?’
[ 이왕에 성체를 만났으면 좋았을걸. 그럼 고양이 꼬리 여덟 개를 떼줬듯 이놈 몸을 아홉 개 떼줬을 텐데. ]
혹시나 물고기를 도발하게 되는 것 아닐까, 혼잣말 대신 다시 속마음으로 용과 얘기를 나누기 시작한 정민은 그가 다시 고양이의 예를 들자 이 물고기가 해를 끼치지 않는 존재라는 건지 더욱 긴가민가해졌다.
[ 긴장할 것 없다. 이곳에서 제일 온순한 놈이니까. 너에게 제 몸을 다 바칠 생각이구나. ]
‘나한테 자기 몸을 바쳐? 뭔 소리야?’
정민의 마음이 그렇게 되묻고 있을 때 물고기는 다시 한 번 왈왈ㅡ! 하더니 돌연 죽어 버렸다.
그러더니 물고기의 양쪽 몸체 안에서 둥그런 것이 하나씩 떠올라 물을 뜬 상태에서 미동도 없던 정민의 양손에 쥐어졌다.
“···.”
[ 너는 수행의 견식이 좁아 이게 얼마나 행운인지 모를 거다. 내가 아무리 번개를 부릴 수 있어도 이곳의 천겁을 맞고 싶진 않으니 굳이 ‘이놈’이 ‘무엇’인지 주절주절 말하지는 않겠다. ]
“너 지금 내가 얼마나 황당한지 알아? 네가 나한테 다짜고짜 날아오던 때보다 더 당황스러워.”
얼마 안있어 물고기 사체는 온데간데 없이 사라지고 정민 손 위에 있는 동그란 물체 두 개만이 허상이나 환각이 아니었음을 증명했다.
[ 종문 령패 추가 임무에 ‘물고기 요수 내단’이 있던데, 하나 제출하고 하나는 네가 쓰면 되겠군. ]
“무슨 절세의 기연을 마주친 것처럼 굴더니 그렇게 해도 돼?”
[ 같은 놈에게 나온 건 같은 이에게 딱 한 알만 효과가 있다. ]
“대체 무슨 효과길래···.”
[ 이건 말해줘도 되겠지. 물고기 놈이 죽을 때 몇 개의 몸체가 달렸느냐에 따라 다르긴 한데, 범인이 이것을 그냥 먹으면 ‘운이 좋으면‘ 영근을 가질 수 있을 것이고 너같은 연기기 수도자가 먹으면, 이놈 것 같은 경우는 아마 영식 한두 줄기를 얻을 거다. ]
“김빠지게 영식 한두 줄기라니··· 축기기가 되면 의식으로부터 영식을 뽑아낼 수 있잖아?”
무슨 자기가 천기누설을 하는 것처럼 재보듯이 조심스레 말하던 용의 태도와 다르게, 자신에게 떨어지는 건 축기기가 되면 만들 수 있는 영식, 그것도 한 줄기 내외라는 말에 정민은 실망감을 감출 수 없었다.
[ 너희 세상에 영식이 있는 연기기 자체가 없을진대··· 그런데 축기로 돌파 못 한다는 생각은 하지 않는구나? ]
“내가 삼도 축기로 돌파할 거라며.”
정민은 그러더니 자기 오른손에 들린 물고기 내단을 돌연 삼켜버렸다.
[ 무식한 놈!! 세상 어느 누가 그걸 그렇게 먹느냐?! 죽을지도 모른다! 하다못해 나에게 묻기라도 할 것이지!! ]
용은 마치 정민이 아니라 제가 먹은 듯 거의 대경실색하며 그에게 화를 냈는데, 그가 내단을 삼키자마자 눈을 감고 입정에 들려 하자 이내 말을 관뒀다.
정민의 의식은 얼마 전 물과 불 바다를 보고 어화술을 깨우칠 때처럼 다시 저 아래 어딘가로 떨어졌는데 이번에는 바다나 물 같은 것은 찾아볼 수 없었다.
“너는···.”
자신에게 내단을 남기며 죽은 물고기가 그의 앞 공중에 떠 있었는데 여전히 얼굴은 하나였지만 몸은 전과 달리 열 개였다.
“네 몸이 열 개라니···. 아홉 개를 버리면 완벽해지고. 그럼 넌 물고기가 아니라 강아지구나.”
정민은 생각을 거치지 않고 무의식적으로 나오는 말에 속으로 흠칫 놀랐지만 이내 자신이 말한 것을 받아들였다.
그가 자기 말을 한 번 곱씹자, 의식은 저 아래로부터 멀어지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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