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03화. 후유증
사건을 해결하고 며칠이 지난 어느 날 밤, 나는 또 꿈을 꾸었다.
지금은 공사에 들어가 흔적조차 남아 있지 않은 우리 집에서 난 또 잠을 자고 있었다.
이제는 무섭다기보다 그 두 모녀가 안쓰러웠고, 귀찮았다.
사건도 해결해 주었는데, 내게 무슨 억하심정이 있어서 또 나타나는 것인지.
그러나 전에 꾸었던 꿈과는 뭔가가 좀 달랐다.
하얀 소복을 입고, 피눈물을 뚝뚝 흘리며, 머리를 산발한 채 나타난 것이 아닌 머리도 곱게 빗질을 하고, 보다 밝은 모습을 하고 내 앞에 나타나 연신 고개를 숙이며, 감사의 인사를 건네고 있었다.
그러고는 두 번 다시 꿈에 나타나지 않았다.
***
최 부장 일행은 지금 그들의 조직원들로부터 배신을 당해 쫓기고 있었다.
가까스로 북에서 빠져나온 그들은 아지트로 향했다.
아지트에 거의 도착했을 무렵, 최 부장이 갑자기 고통을 호소하며 쓰러졌다.
베를린에서 입은 총상을 급한 대로 치료하긴 했지만, 제대로 된 치료가 아니었다.
그렇기에 몸을 쓸 때마다 그 후유증이 상당했으나, 적들에게 자신의 약점을 드러낼 수 없었기에 지금껏 꾹 참고 있어야만 했다.
그러다 북에서 놈들에게 구타당하면서 어설프게 꿰맸던 상처가 터져 많은 양의 피를 흘리고 말았다.
오직 그녀를 지키겠다는 일념 하나로 머리끝에서 발끝까지 전해지는 고통을 이를 악물고 참았지만, 끝내 한계에 부딪히고 말았다.
“조금만 참아요. 아지트에 도착하면 바로 치료할 수 있으니까.”
권 서장이 부축하고 있던 최 부장의 손을 그녀가 꼭 잡았다.
그녀의 바람과는 달리 아지트에 가까워질수록 최 부장의 의식은 자꾸 희미해져 갔다.
가까스로 세 사람은 아지트에 도착했지만, 최 부장은 지금껏 잡고 있던 정신을 그녀의 손과 함께 놓아 버렸다.
그들을 본 조직원들이 그를 의무실로 옮겨 급하게 치료를 했지만, 그는 마치 죽은 사람처럼 깨어나지 않고 있었다.
누워 있는 그를 걱정스러운 마음으로 지켜보고 있는데, 간부 회의에 참석하라는 연락을 받았다.
“최 부장이 정신을 차릴 때까지 회의를 미루시는 게 낫지 않겠습니까.”
“저들이 최 부장이 깨어날 때까지 우리를 가만히 내버려 두려고 할까요? 우리를 죽이지 못해 안달인 놈들인데.”
“최 부장이 없는 지금은 상당히 위험합니다. 핑계를 대고 자리를 피하시는 게..”
“권 형사님께서 걱정해 주시는 마음 충분히 이해합니다. 하지만 언제까지 제 목숨을 최 부장이나 그 사람한테 맡기고 싶지는 않습니다. 그러니 형사님도 제 마음을 이해해 주셨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회의실 안에는 지난번 최 부장의 숙청 때, 살아남은 자들이 이를 갈고 기다리고 있었다.
회의실에 모인 간부들은 이번에 최 부장이 계획한 작전의 실패를 문제 삼아 그녀를 수장 자리에서 박탈시켜 버렸다.
자리에서 쫓겨난 그녀는 그 즉시 간부들에 의해 지하 감옥에 갇히게 되었다.
불행인지 다행인지 권 서장은 예전에 간부들을 살려 주자 했던 공이 인정되어 별다른 처벌이 내려지지 않았다.
“이제, 최 부장 그놈을 처단하러 갑시다. 전에는 놈의 기세에 눌려 죽일 수 없었지만, 의식 없이 누워 있는 지금은 상황이 좀 다르지 않겠나 하는 생각입니다.”
“지금, 그를 죽이는 게 무슨 의미가 있겠습니까?”
권 서장이 최 부장을 지금 당장 죽이자는 간부들을 막아섰다.
“그동안 놈과 같이 있었다고 놈의 편을 드는 것이오!”
“그럴 리가요. 제 말은 최 부장이 깨어나면 그때 죽이자는 것입니다.”
“그게 무슨 말이요?”
“여러분도 알다시피 그 두 사람은 대표와 조직원 그 이상의 관계였습니다. 최 부장이 깨어났을 때, 그녀가 보는 자리에서 그의 손가락 하나, 발가락 하나씩을 끊어내면 그녀가 얼마나 고통스럽겠습니까.”
회의실에 있던 모두가 그의 말에 집중하고 있었다.
“그렇게 두 사람 모두에게 고통을 주며, 서서히 죽게 해야 그의 손에 죽어 나간 우리 간부님들의 넋을 조금이나마 위로할 수 있을 거 같습니다.”
생각지도 못한 그의 잔인한 제안에 그곳에 있던 간부들조차 혀를 내둘렀다.
“그러면, 저는 최 부장이 깨어났나 안 깨어났나 살펴보고 오겠습니다.”
권 서장은 서둘러 회의실을 빠져나와 최 부장이 누워 있는 곳으로 갔다.
“최 부장, 내 말을 들을 수 있는지 없는지 알지 못하지만, 내가 하는 말을 잘 들으시오.”
권 서장이 아무 의식 없이 누워만 있는 그의 귀에 대고 속삭였다.
“지금부터 난 당신이 깨어날 때까지 철저히 저들의 편에 설 것이오. 그러니 얼른 일어나 그녀를 구해 주시오.”
이이기를 마친 권 서장이 태평스럽게 누워만 있는 그의 머리맡에 총 한 자루와 단검 하나를 그들 몰래 넣어 두었다.
“놈의 귀에 대고 뭐라고 속삭였습니까?”
간부 중 하나가 병실을 나오는 그에게 물었다.
“깨어나면 어마어마한 일이 기다리고 있으니 각오 단단히 하라고 일러두었습니다.”
그는 병실을 빠져나와 태은이 갇혀 있는 지하 감옥으로 갔다.
그녀는 모든 것을 단념한 듯 눈을 감고 가만히 앉아 있었다.
그는 그런 그녀를 한동안 말없이 지켜만 봤다.
“내가 시키는 대로 했으면 이 꼴은 당하지 않았을 텐데. 왜 고집을 부려 여러 사람 귀찮게 하는지 모르겠습니다.”
갑작스러운 그의 말에 그녀는 눈을 떴다.
“최 부장이 당신의 목숨을 포기할 만큼 그렇게 소중한 존재요.”
권 서장 자신도 지금 자기가 무슨 말을 하는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그건 그녀 또한 마찬가지였다.
“이 배신자 놈아! 니가 우리를 배신하고도 무사할 성싶으냐! 내 지옥에 떨어지는 한이 있더라도 네 놈만큼은 저승길 동무로 삼고 싶구나!”
순간 그녀가 창살 가까이에 서 있던 권 서장에게 팔을 뻗어 그의 멱살을 잡았다.
“에이 씨팔! 이게 뭐 하는 거야! 재수 없게!”
자신에게 달라붙은 그녀를 밀치며, 그녀의 안쪽 주머니에 미리 준비해 둔 권총을 몰래 넣었다.
간부들은 그들이 다투는 장면을 CCTV를 통해 지켜보고 있었지만, 그 누구도 그들의 이야기를 의심하거나 이상하게 생각하지는 않았다.
그녀를 떼어낸 그가 자신의 옷을 툭툭 털며, 기분 나쁜 표정으로 나와 버렸다.
그는 친구인 장 서장에게 도움을 요청하고 싶었으나, 왠지 두 사람을 지켜 주고 싶은 마음에 그러지 않았다.
이제 그가 할 수 있는 일은 다 했다.
지금 그가 할 수 있는 건 최 부장이 얼른 정신을 차리고 일어나 이 사태를 수습해 주기를 간절히 바랄 뿐이었다.
한편 정신을 잃고 누워 있던 최 부장은 깊은 꿈을 꾸고 있었다.
꿈속에서의 그는 여행을 하고 있었다.
모든 걸 훌훌 털어버리고 싶어 무작정 떠나기로 한 낯선 이국땅에서의 도보여행이었다.
서툰 영어 실력과 번역기에 의지한 채 묻고 물어서 코츠월드라는 마을로 향하는 버스에 올랐다.
생전 처음 타는 외국의 버스지만 나쁘지만은 않다.
서툰 영어로 사람들과 이런저런 이야기들을 하는 동안 버스는 어느새 목적지에 도착했다.
하늘에서는 아까부터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우산을 쓰거나 우비를 입을까 잠시 생각하다가 그냥 비를 맞으며 걷기로 했다.
아무튼, 오늘은 온종일 비를 맞으며 여행을 즐기기로 했다.
비가 오는 시골은 또 그 나름대로 특유의 냄새가 난다. 그 냄새가 너무 좋았다.
도시에서는 맡으려 해도 맡을 수 없는 시골의 정겨움이 한껏 밴 냄새가 참 향기롭다.
낯선 이방인이 꽤 큰 배낭을 메고 비를 맞으며 걷는데 아무도 눈길을 주지 않는다.
그는 이런 무관심이 좋았다.
이 시골 마을과 도보여행이 마음에 든다.
발걸음을 멈춰서 추적추적 내리는 비를 온전히 맞고 있는 마을의 풍경을 카메라에 담는다.
멀리 보이는 산등성이에서 피어나는 안개도 함께 담아간다. 참 운치롭다.
한참을 걸었는데도 고단하지도 다리가 아프지도 않다.
그렇게 계속 걷다 보니 어느새 비가 그쳤고 날도 어두워졌다.
주변엔 온통 들과 산뿐이었고, 가로등 불빛 하나도 없이 깜깜했다.
하늘에 떠 있는 별들과 달들의 안내를 받아 조금 더 걷기로 했다.
얼마를 걸었는지, 몇 시간을 걸었는지는 잊어버린 지 오래다.
생각 같아선 더 걷고 싶지만 다음을 기약하며 오늘은 그만 멈춰야 했다.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나무 밑으로 가 메고 있던 배낭을 바닥에 내려놓고 침낭을 폈다.
하늘을 이불 삼고 풀들을 침대 삼아 종일 비를 맞으며 고생한 몸을 누인다.
밤하늘에 무수히 펼쳐진 별들이 참 보기 좋다.
런던의 미드 나잇은 아름다웠고 찬란했고 위대했으며, 생각보다 매우 포근하고 따뜻했다.
멈췄던 비가 다시 내리기 시작했고, 기나긴 여행을 마친 최 부장은 서서히 정신을 차렸다.
눈을 뜬 최 부장은 자신이 정신을 잃었을 때, 권 서장이 했던 말을 떠올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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