극랑전(極狼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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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aHa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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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10.09 20: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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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8.01 1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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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6화. 자각(自覺) (3)

DUMMY

“···뭐지? 왜 그러고 있나?”


제갈민은 잠깐이지만 혼백이 살짝 몸 밖으로 빠져나가는 것을 느꼈다. 쩍, 벌어진 입으로 심장이 톡, 튀어 나가서 저기 어디쯤에서 통통 튀고 있는 기분이다.


혼미한 정신을 겨우 수습한 제갈민은 소리가 나지 않도록 손을 휘저으며 수화로 이야기했다.


-모른 척해주세요!! 제발!!!


“···.”


수화를 배운 적이 없는 검랑이지만, 그렇다고 눈치가 없는 건 아니었다. 검랑은 자연스럽게 시선을 돌려, 저 앞에서 서성이는 득구에게 말을 걸었다.


“무슨 일이지? 왜 거기서 그러고 있나?”

“그게···.”


득구는 머쓱한 표정으로 뒤통수를 긁적이더니, 들고 있던 책을 내밀었다.


“이걸 좀 다시 갖다 놓으려는데, 어디서 꺼내온 건지 모르겠어서···.”

“내게 주도록. 내가 돌려놓도록 하지.”

“···알겠수.”


득구는 마치 뜨거운 것을 손에 쥔 사람처럼 얼른 책을 넘겨버리고는 호다닥, 어디론가로 달려갔다. 그에게 다음 수련 일정을 이야기하려던 검랑은 순식간에 사라져버린 득구의 뒷모습을 보며 두 눈을 꿈뻑였다.


“···무슨 일이지? 내게 설명해라.”

“그으··· 런 게 있어요. 지, 지금은 말 못 해욧!!”


득구가 멀어진 것을 확인하자마자 입이 뚫린 제갈민은 그렇게 소리를 빽, 지르더니 역시나 호다닥, 달려서 어디론가로 사라져버렸다. 정확하게 득구가 향한 반대쪽으로 달려가는 걸 봐선, ‘지금은 마주치고 싶지 않다’라는 의사만큼은 확실하게 이해할 수 있었다.


“···.”


하룻밤 사이에 이상해진 동거인들의 행동거지를 가만히 곱씹던 검랑은 짧게 한숨을 내쉬고는 혼잣말을 내뱉었다.


“···젊군.”


씁쓸한 입매로 입맛을 다시며, 검랑은 득구가 사라진 방향을 향했다.



* * *



“고민이 있다면··· 들어주겠다. 말해보도록.”

“끄악?!”


휘청, 발이 꼬인 득구는 그대로 나뒹굴고 말았다. 다행히 넘어지면서 검을 던져버렸기에 망정이지, 자칫했다간 칼 위에 꼬라박을 뻔했다.


“저런, 위험했군. 조심했어야지.”

“···그게 지금 할 소리유?”


검랑은 투정을 부리는 득구의 팔을 붙잡아 일으켜 세우고 물었다.


“그래서, 무슨 일이 있었던 거지?”

“···일? 무슨 일? 아무 일 없었는데?”

“아무 일이 없는데, 아침나절부터 왜 제갈민의 방 앞에서 서성이고 있었지?”


득구는 피식, 웃었다. 하지만, 왠지 모르게 득구의 이마에서는 삐질, 땀방울이 흘러내리고 있었다.


“아니, 아까 말했잖수? 채, 책을 놓고 가서··· 그거 갖다주려고 갔다니깐? 내가 뭐, 어디에 뭐가 있는지 보이질 않잖수!”

“일단은 그런 것으로 해두지.”

“···일단이 아니라···.”


검랑은 피식, 웃음소리를 냈다. 그 웃음소리에 득구는 꿀먹은 벙어리가 되어 입을 닫았다.


“여러모로 생각이 많고, 머릿속이 복잡해진 것 같은데··· 오늘 수련은 여기까지 해도 좋다. 쓸데없는 잡념이 가득한 상태에서 검을 휘둘러 봐야, 그건 단지 노동일 뿐이니까.”


예전 같았으면 별생각 없는데 괜히 그런다며 고집을 피웠을 득구였지만, 이번엔 대답을 망설였다. 무언가 말을 하려는 듯, 조심스럽게 말을 더듬던 득구는 이내 인상을 구기고 말했다.


“···배려 고맙수. 딱히 말할 생각은 없지만··· 생각은 좀 정리해야겠수.”

“그러도록.”


선선히 고개를 끄덕인 득구는 입에서 딱! 소리를 내더니, 바닥에 떨어진 칼을 단박에 찾아내고는 그것을 챙겨 자기 방으로 돌아갔다.


“···언제 반향정위를 저기까지 익혔지?”


돌바닥과 그 위에 떨어진 칼의 반사음 차이를 인식할 정도라면, 이젠 소리로 눈을 대신해도 이상할 게 없는 수준이다. 아마 드넓은 평원 같은 곳이 아니라면 길을 잃지도 않을 것이다.


“성장이 더딘 아이라고 생각했는데··· 내가 잘못 본 걸지도 모르겠군.”


이전의 탐랑이었던 사제를 생각하면··· 확실히 성장이 더디다고 생각했다.


사제는 다른 무엇보다도 특히 이해력이 무척 탁월했다.


12세에 이미 무심결을 6성까지 연공하고, 17세에는 ‘검술’로써 시우십결의 초식을 완성했던 천재였으니까.


물론, 탐랑에게 주어진다는 ‘특별한 눈’이 있었기에 가능한 성취였을지도 모르지만··· 어쨌거나 설총이라는 좋은 선배가 있었던 득구와는 달리, 사제는 그 길을 홀로 개척해야 했다.


사제가 한현보의 제자로 들어왔을 때, 사부님은 이미 대부분의 공력을 소진해버린 상태였다. 사형은 우직하게 수련하는 것으로서 본이 되는 사람이긴 했지만··· 앞서서 길을 개척할 정도로 성취가 빠른 사람은 아니었다.


결국 검랑과 사제는 사부님의 기억에 의존하여, 가본 적 없는 길을 스스로 개척해야만 했다. 그리고 검랑의 막힌 앞길을 먼저 여는 이는 항상 사제였다.


여느 모로 보나, 하나를 가르쳐주면 열을 깨치는 사람이었다고나 할까.


반면 득구는 가르치는 것은, 무언가 구멍이 숭숭 뚫린 상자를 보는 기분이었다. 처음부터 한현보의 정식 제자로 무공을 수련한 게 아니라 그런 것일까?


예를 들면─ 구결을 외울 때, 그게 무슨 뜻인지도 모르고 그냥 왼다든가. 그러면서도 막상 심법을 자연스럽게 연공하는 걸 보면 도리어 신기할 지경이다.


그보다 더 이해할 수 없는 건, ‘검’에 대한 이해도가 아주 들쭉날쭉하다는 점이었다.


영자팔법(永字八法)도 제대로 모르는 주제에, 후발제인(後發制人)에 대한 이해도는 무척이나 뛰어났으니까. 마치 천자문은 못 읽지만, 사서삼경은 줄줄 외는 격이었다.


“도종인이라는 사내의··· 영향이겠지.”


화검 도종인. 화산제일검의 칭호를 거머쥔 그 사내와 꽤 깊은 교류가 있었다 들었다. 그리고 그 탓인지, 득구는 한현보의 검술인 소청보다도 화산의 매화검법에 더 익숙한 것 같았다.


지금까지는 그저, 기초가 부족해서 그 구멍을 메우지 못하는 것이라고 여겼다.


“···내가 틀렸을지도.”


어떤 사람은 걸음마를 떼기도 전에 뛰는 법부터 배우는 사람이 있다. 물론, 그런 사람은 잘 넘어진다. 자주 넘어지고. 하지만, 그 넘어지는 것에서조차 배울 것이 있는 법이다.


사람은 각자의 방식으로 성장하기 마련이다. 타고난 재능과 자질, 세상을 이해하는 방법도 전부 제각각이다.


‘둔재’라고만 여겼던 사형이─ 그렇게 빠르게 한현보를 ‘군문세가’로 성장시키는 것을 보고, 검랑은 그것을 깨달았다.


물론, 그 당시엔 사형의 그런 행보가 좋게 보이지 않았다. 일자전승의 규율을 깨뜨린 것에 있어서, 사부님은 돌아가시는 순간까지 죄책감을 느끼셨기 때문이다.


그런 사부님의 마음을 알면서도, 성공에 목말라하는 사형의 모습이··· 그때는 정말이지 탐욕스럽다고 생각했었다.


하지만, 이제는 조금 다르게 생각하게 되었다.


사형은, 사형 나름의 방식으로 사부님의 이름과 한현보를 세상에 널리 알리고 싶었던 거니까.


사형이 가장 잘하는 것으로. 사형에게 가장 자신 있는 방식으로.


‘세가’를 경영하는 법을, 누가 가르쳐준 것도 아닌데 말이다.


“그 아이의 방식으로, 그 아이가 가장 잘 할 수 있는 것으로···.”


검랑은 지금이야말로, 변화의 때라는 것을 느꼈다. 어쩌면, 지금 득구에게 필요한 것은 걷는 법이 아니라 하늘을 나는 법일지도.


“정위(精衛)인 줄 알았는데··· 신천옹(信天翁)이었던 건가?”


이유는 알 수 없지만, 왠지 모르게 흐뭇한 기분이 들었다.



* * *



“있나?”

“···아잇!! 까, 깜짝이야?!”


제갈민은 마치 벼락 맞은 다람쥐처럼 튀어오르며 놀랐다.


“가, 간 떨어질 뻔했잖아요!!”

“기척은 하고 왔다만?”

“못 들었으면 그건 기척이 아니죠!!”


검랑은 괜한 실랑이가 귀찮아졌다.


“그런 것으로 해두지. 할 말이 있어 찾아왔다.”

“뭔데요?”


툴툴대는 제갈민에게, 검랑은 뜻밖의 제안을 했다.


“네게도 ‘카르마’를 다루는 법을 알려주마.”

“···네?”


너무 뜻밖이었던 탓에, 제갈민은 당황했다. 그러나 영특한 그녀는 이내 생각을 정리하고, 진지한 표정으로 되물었다.


“갑자기 그런 생각을 하시게 된 이유가 뭐죠?”

“정위인 줄 알았더니, 신천옹인 것 같더군.”


무슨 소린가 싶은 말이었지만, 제갈민은 단박에 이해했다.


“한 소협이요? 음··· 어울리는 표현이네요. 한 소협이 딱 그런 사람이긴 하죠.”


검랑이 말하는 정위는 산해경에 나오는 고사성어, 정위전해(精衛塡海)의 ‘정위새’를 말한다.


정위새는 염제 신농의 딸, 왜(蛙)의 영혼이 변하여 된 새다.


삼황오제 중 하나인 염제의 딸이 도대체 어찌하여 새로 변하였는가 하면, 그녀가 동해에서 헤엄치다 물에 빠져 죽었기 때문이었다.


물놀이를 좋아하여, 이름도 ‘개구리(蛙)’일 정도로 헤엄치며 놀기를 즐기던 그녀였지만···. 너무 멀고 깊은 바다까지 나간 후, 파도에 휩쓸려 마치 거품처럼 사라져버린 것이다.


그렇게 그녀의 영혼은 작은 새로 변했고, 빨간 발과 흰 부리, 머리에는 꽃무늬가 있는 이 작은 새는 매일 서산으로 날아가 나뭇가지와 돌들을 물어다 바다에 빠뜨렸다.


그 이유인즉, 자기를 삼켜버린 동해를 메우기 위해서였다.


이 새는 울음소리 때문에 ‘정위’라고 불렸고, 한때는 무모함과 쓸데없는 노력의 상징과 같은 이름으로 불렸었다.


마치 산을 옮기려 들었던 우공(愚公)처럼 말이다.


하나 세월이 흐르고, 불가능에 도전하는 무모한 이들이 영웅이 되어 역사에 그 이름을 새기게 된 지금에 이르러서는─


정위와 우공은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끝없이 노력하는 자들을 상징하는 이름이 되었다.


그렇게 본다면, 한 소협은 확실히 정위새와는 어울리는 사람이 아니다.


비록 그가 보여준 ‘탁월함’이 ‘탐랑의 재능’에서 비롯되었다는 사실은 부정할 수 없겠지만··· 그걸 떠나서도, 한 소협은 확실히 번뜩이는 재치가 있는 사람이었다.


오히려 정위새나 우공에 비견될 사람은 한 소가주가 아닐까?


“하여, 이제는 걷는 법 말고··· 나는 법을 알려줘야 할 것 같다. 그리고··· 그건 내가 아니라 네가 할 수 있는 일일 테고.”

“···제가요? 어째서요?”

“너는 그 아이의 마음을 움직이는 사람이니까.”

“···!”


생각지도 못한 검랑의 말에, 제갈민은 충격을 느꼈다. 그리고 동시에 여태껏 자신이 무엇을 인정하지 않으려 했던 것인지를 이해했다.


아니, 자각은 하고 있었다. 바보도 아니고, 몰랐다는 건 거짓말이다.


하지만 한 소협도, 자신도···


그런 마음을 인정하고, 겉으로 드러내어 표현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야, 두 사람에게 주어진 현실은─


“지금이 아니라면··· 느낄 수 없는 가슴의 고동이란 것이 있는 법이다.”

“!!”

“내가 할 말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나야말로··· 진실로 소중한 것을 소중히 여기지 않은 사람이니까.”


검랑은 다시 평소의 냉철하고 사무적인 태도로 돌아와 말을 이었다.


“강요는 하지 않겠다. 선택은 네 몫이니··· 또한, 무엇보다도─ 평범한 인간에게 있어서 ‘카르마’는, 허락된 힘이 아니다. 그것은 스스로의 생명을 깎아 타고난 명운을 거스르는 힘. 어쩌면 그것은 너의 수명을 깎고, 네 목숨마저 앗아갈지도 모른다.”

“···.”

“충분히 생각하고, 결정해라. 기다리고 있겠다.”


매번 그렇듯, 검랑은 소리도 없이 사라졌다. 그녀가 사라진 흔적을 물끄러미 내려다보던 제갈민은 오래전··· 이제는 마치 수백 년쯤 전에 있었던 일처럼 느껴지는 오래된 기억을 떠올렸다.


마음이 통하는 사내를 만나, 고동치는 가슴을 부정하지 않기로 했던 그날의 기억─


그날, 제갈민이 생각했던 대로···


흘러가는 대로 흘러와 여기까지 오게 되었다.


그리고 그날 제갈민의 가슴을 고동치게 했던 사내는···


과거의 기억 속으로 흘러가 버렸다.


무책임하게도.


지금과 마찬가지로, 그때도 역시나 그럴 상황은 아니었다.


현실은··· 항상 녹녹지 않았다.


하지만─ 그때의 제갈민은 자신이 품었던 그 마음이 어떤 것이었는지, 제대로 티조차 내지 못했었다. 변변찮기 그지없게도.


설총은··· 너무 빨리 그를 사랑했던 이들의 곁을 떠나가 버렸다.


“···바보같이.”


제갈민은 왈칵, 솟구치는 눈물을 참지 못하고 그만 주저앉고 말았다. 이미 3년 전에, 흘려야 할 눈물은 전부 흘려버렸다고 생각했는데··· 아직도 한참 남아있었던 모양이다.


지금이 아니라면 느낄 수 없는 고동···이라.


“나는···.”


작가의말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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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99 88화. 늑대가 나타났다. (2) 24.08.08 115 1 12쪽
298 88화. 늑대가 나타났다. (1) 24.08.07 113 3 12쪽
297 87화. 회기서문(回其西門) (2) 24.08.06 124 2 15쪽
296 87화. 회기서문(回其西門) (1) 24.08.05 127 1 13쪽
295 86화. 자각(自覺) (4) 24.08.02 135 1 14쪽
» 86화. 자각(自覺) (3) +2 24.08.01 127 2 13쪽
293 86화. 자각(自覺) (2) 24.07.31 126 2 14쪽
292 86화. 자각(自覺) (1) 24.07.30 140 3 14쪽
291 85화. 불비불명(不飛不鳴) (2) 24.07.29 115 1 14쪽
290 85화. 불비불명(不飛不鳴) (1) 24.07.26 137 1 12쪽
289 84화. 7년의 밤 (7) +1 24.07.25 131 2 16쪽
288 84화. 7년의 밤 (6) 24.07.24 143 2 13쪽
287 84화. 7년의 밤 (5) 24.07.22 117 2 16쪽
286 84화. 7년의 밤 (4) 24.07.19 142 2 15쪽
285 84화. 7년의 밤 (3) 24.07.18 121 1 12쪽
284 84화. 7년의 밤 (2) 24.07.17 143 2 14쪽
283 84화. 7년의 밤 (1) 24.07.16 120 3 14쪽
282 83화. BAD END. (4) +2 24.07.09 160 3 14쪽
281 83화. BAD END. (3) 24.07.08 125 3 13쪽
280 83화. BAD END. (2) 24.07.05 141 1 14쪽
279 83화. BAD END. (1) +2 24.07.04 142 4 14쪽
278 82화. 유산(遺産) (4) 24.07.03 133 2 15쪽
277 82화. 유산(遺産) (3) +2 24.07.02 141 4 14쪽
276 82화. 유산(遺産) (2) 24.07.01 147 3 12쪽
275 82화. 유산(遺産) (1) 24.06.28 149 3 13쪽
274 81화. 운명이 부르는 소리 (4) 24.06.27 149 2 15쪽
273 81화. 운명이 부르는 소리 (3) 24.06.26 136 2 13쪽
272 81화. 운명이 부르는 소리 (2) 24.06.25 133 3 15쪽
271 81화. 운명이 부르는 소리 (1) 24.06.24 159 3 14쪽
270 80화. 꽃무리 모두 진 겨울에야, 매화꽃은 홀로 곱게 피어난다. (3) 24.06.21 147 2 1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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