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왕을 잡았더니 세상이 망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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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명수
작품등록일 :
2023.12.01 17:08
최근연재일 :
2024.01.15 02: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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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6 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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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5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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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12.05 16: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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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쪽

성채 진지

DUMMY

“저는 성벽의 수비대장, 마크셔라고 합니다. 잘 부탁드립니다.”


제법 그럴듯하게 콧수염을 기른 사내였다.

눈썰미가 노련한 것이, 전장을 오랫동안 누빈 실력자 같았다.

인사치레로 악수한 후 성벽 쪽의 상황을 물었다.


“최전방은 버틸 만합니까?”

“매일 겨우 버티는 수준입니다. 그래서 시로네 님의 도움이 필요합니다.”


나에 대해서는 아델레에게 전해들은 모양이었다.

적당히 둘러대 달라고 했으니 안면이 있는 뛰어난 마법사라고만 해뒀을 테지.

그렇다면, 불필요한 이야기를 하느라 시간 낭비하지 않아도 된다.

어차피 서로 이해관계가 맞아떨어져서 협력하는 것일 뿐이다.


‘안그래도 확인할 게 있었다.’


무지성으로 들이받기만 하던 마물이 갑자기 그럴듯한 전략을 구사하는 이유.

배후에 누가 있는지, 원인이 뭔지 궁금해지는 게 당연했다.


“목적지까지 호위해드리겠습니다. 따라오시죠.”


마크셔가 병사들을 이끌고 앞장섰다.

성채 진지로 향하는 분위기는 무거웠다.

얼마전의 마물 침공으로 도시 전체가 쑥대밭이 된 탓이었다.

잔해가 깔린 시가지의 모습은 참담했다.

부상병이 들것에 실려 가는 중이며, 부모를 잃은 고아가 울고 있다.

살아남은 이들도 힘없이 웅크린 채 고개를 떨구고 침묵하기만 한다.


“···.”


피해가 얼마나 심했던지 교회에서 파견된 사제들의 숫자도 만만치 않다.

나는 무덤덤하게 그들의 모습을 지켜봤다.


“이래서는 신병을 모집하기도 어렵겠군. 너무 많이 죽었어.”


마크셔가 탄식했다.

최근 최전방으로 차출할 인력이 모자라서 애를 먹는 중이라고 한다.


“이번에도 아들러 치안대장에게 부탁을 해보실 겁니까?”


뒤따르던 부관이 의향을 물었다.

듣자 하니, 얼마 전부터 범죄자를 조건부 사면해서 병사로 써먹고 있었다.

물론, 그러려면 지하 감옥을 관할하는 치안대장의 협력이 필요하다.


“좀 더 고민해보겠다. 그건 최후의 선택이니까.”


안 그래도 범죄자를 많이 들여와서 부대의 기강이 문란해져 있다고 했다.

마크셔가 주저하는 모습을 보며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전투 감각이 탁월한 놈들도 제법 있겠지만, 기본적으로 통제가 잘 안 되지.’


내부 규율이 무너져서 혼란이 생겨나면 무슨 짓을 저지를지 모른다.

그런 녀석들의 수가 계속해서 늘어난다면 언젠가 등 뒤에서 칼을 맞고 말겠지.

지휘관으로서 현명한 판단을 하는 것이었다.


“그럼 결격사유가 없는 자들을 최대한 끌어모으겠습니다. 성벽 내부의 피해가 극심하니 어쩌면 자원 숫자가 늘지도 모릅니다.”


물론, 어디까지나 희망사항일 뿐이었다.

모집인원이 미달하는 사태가 예견되었는지 호위하는 병사들의 안색이 어두워졌다.


“당분간 발 뻗고 편히 자기는 틀렸군.”

“신병이 안 채워지면 우리가 경계 근무를 더 서야 하잖아!”

“다음 달 정기휴가도 잘리게 생겼어. 이래서는 사는 낙이 없잖아.”


떨어진 사기 속에서 은근한 불만이 속출했다.

표정을 구기는 병사들의 모습을 보고 있자니, 최전방의 암울함이 느껴졌다.


‘아델레가 서둘러 날 여기로 보낸 이유가 있었군.’


이런 식으로 악순환이 반복되면 문제가 생긴다.

보급이 얼마나 잘 이루어지는진 모르겠지만, 병사들의 처우에 더 신경써야 할 것 같았다.


‘성벽 도시의 높으신 분들은 이런 쪽으론 관심이 없나 보군.’


일선에서 구르는 무장과 부관들만 죽어나고 있었다.

나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예상하고는 있었지만, 상황이 정말로 좋지 않다.


“무슨 문제 있어요, 오빠?”


함께 걷던 갈색 머리칼의 소녀가 말했다.

예배당에서 신성 주문으로 마물에 대항했던 아이.

이름은 라일라인데, 전방 진지까지 동행하는 중이었다.

소울 웨폰을 소환할 수단이 달리 없으므로 내게는 당분간 그녀가 필요했다.


“아니, 걱정하지마. 무슨 일이 있어도 너는 지켜줄 테니까.”


그것이 동행을 해주는 대가였다.

라일라와 잠시 대화를 하고 있는데 어디선가 소란이 일었다.


달그락. 달그락.


멀리서 말발굽 울리는 소리가 들려온다.

전방을 바라보니 화려한 장식의 마차가 돌진해오는 중이었다.

길가의 사람들이 황급히 비켜서는 걸 보면, 신분이 높은 자의 행차였다.


“왕녀님이 지나가신다! 방해되지 않게 서둘러라!”


마크셔가 병사들을 양옆으로 물렸다.

나는 감속하지 않는 마차를 피해 부관의 옆으로 피신했다.

미처 반응하지 못한 라일라를 품에 안고 말이다.


“위험했네. 자칫 잘못하면 말려들 뻔했어.”


멍 때리던 병사 한 명이 식은땀을 흘리며 말했다.

행인들을 배려하지 않는 왕족이 마음에 들지 않는지 부관도 표정을 굳혔다.


‘민심이 좋지 않군.’


왕족이라곤 하나, 그 위상이 예전만 못할 터였다.

7인의 영웅이 사라졌던 10년의 기간 동안, 많은 일이 있었을 테니까.

하지만 이곳 성벽 도시에서만큼은 절대적인 영향력을 행사하는 존재다.


“불만이 있어도 입 밖으로 내뱉지 마라. 여기에서 살아남고 싶다면 말이지.”


병사들을 쳐다보던 부관이 충고했다.

행인들도 기분 나쁜 표정만 지을 뿐 아무런 말 없이 다시 제 갈 길을 간다.


“그렇다. 과거의 왕국은 몰락했지만 예로부터 내려오는 신분 제도는 여전히 유효하니까.”


마크셔가 씁쓸하게 덧붙였다.

그는 상명하복을 미덕으로 여겨야 하는 군인이었다.

나도 그의 입장을 이해했기에 침묵을 지켰다.


‘복잡한 이해관계에 얽히지만 않으면 된다.’


예전부터 발목 잡히는 일은 질색이었다.

덕분에 동료들에게 인정머리 없는 인간이라고 비난당했지.

하지만 지난 세월을 돌이켜보면, 매몰차더라도 제 갈 길을 가는 편이 결과적으로 현명했다.


‘도시 내부의 위계질서는 내가 관여할 문제가 아니야.’


나는 불가피한 이유로 이곳에 잠시 머무르고 있을 뿐이었다.

걸음을 재촉하려는데 재차 소란이 일었다.

어디선가 귓전을 울리는 포격음이 들리더니, 머지않아 소란이 벌어진다.


“뭐, 뭐야? 저 괴물은!”

“마물 소탕은 끝난 거 아니었어?”


발길을 멈춘 행인들이 경악한 얼굴로 한쪽을 바라봤다.

얼마 전에 마차가 지나온 방향.

정체를 알 수 없는 괴생명체가 무장한 병사들의 제지를 받고 있었다.


“저자들은 성벽 내부의 질서를 유지하는 치안대 아닙니까?”

“그렇다. 제복의 표식을 보면 알 수 있지 않나?”


마크셔가 감흥 없는 목소리로 대꾸했다.

그러자 부관은 황당하단 반응을 보이며 되묻는다.


“대체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 겁니까?”


괴생명체는 지금까지 보아온 마물과는 명백히 달랐다.

야수처럼 흉포한 모습을 하고 있기는 하나, 어딘가 불안정하고 인위적인 느낌이 강하다.


“우리가 관여할 바는 아니다. 도시의 치안은 저들이 맡고 있으니 대열을 갖추도록.”


어쩐 일에서인지 마크셔는 눈앞의 소란에 되도록 끼어들지 않으려 했다.

하지만 치안대 병사들이 어설프게 대처하면서 이쪽도 어쩔 수 없이 휘말리게 되었다.


캬오―!


잠시 발이 묶여있던 괴생명체가 포진을 뚫고 밀집 대형으로 달려들었다.

더는 가만히 있지 못하는 상황.

마크셔가 한숨을 내쉰 후 허리춤의 장검을 뽑아 들었다.


“귀찮게 되었군.”


괴생명체는 평범한 장정의 체구를 압도할 정도로 거대했다.

마물로 치면 준 중형급.

하지만 마크셔는 물러서지 않고 최전방에서 녀석과 마주봤다.


“너희는 나서지 마라.”


치켜 올린 검날의 끝자락에서 푸른빛이 감돌았다.

이후 그것은 흘러내리듯 퍼져나가며 은은하게 피어오른다.

수련자들 중 극히 일부만이 체득할 수 있다는 경지의 검술.

단지, 위용뿐만이 아니라 파괴력 또한 엄청났다.

달려드는 맹수의 틈을 예리하게 파고들며 일격에 승부를 내버린다.

치명상을 입은 괴생명체는 피칠갑을 한 채 무력하게 쓰러지고 말았다.


“과연, 대장님이셔!”

“저런 마수를 무 자르듯 베어버리다니 엄청난걸!”


지켜보던 병사들이 대단하다는 반응을 보였다.

옆에 있는 라일라도 입을 쩍 벌린 채 연신 박수를 쳐댔다.


“어, 엄청나네요. 저 사람.”


그러면서 나를 쳐다보며 공감해주라는 눈초리로 쳐다본다.


“그렇지 않아요?”

“···확실히 쓸만하긴 하네.”


다만, 조금 전의 개입으로 사소한 알력이 생겨날 것 같았다.

마물을 놓쳤던 치안대의 병사들이 가까이 다가오고 있다.


“우리가 포획하려 한 녀석을 왜 멋대로 처리한 겁니까?”

“처음부터 사살할 생각이었으면 이렇게 고생하지도 않았을 텐데요.”


무능력하게 사태를 악화시켰으면서 적반하장이었다.

하지만 놈들이 시비를 걸 명분이 없는 건 아니었다.

시가지에서 발생한 사건을 담당하는 건 치안대의 권한이기 때문이다.


“애초에 현장 통제를 제대로 하던가요. 주위의 피해를 보니 저 괴물이 적어도 십여 분간은 날뛴 것 같은데요.”


보다못한 부관이 앞으로 나섰다.

양쪽이 첨예하게 대립하는 걸 보며 나는 관자놀이를 짚었다.


‘별로 나서고 싶지 않은데.’


이런 데서 존재를 드러내봤자 이목만 집중될 뿐이었다.

7인의 영웅 중 한 명인 걸 들키게 되면 도와달라며 귀찮게 해댈 것이 뻔하다.

고민하던 그때, 어디선가 하이톤의 남자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거, 실례했군요. 부하들의 실력이 형편없어서 여러분까지 휘말리게 한 모양입니다.”


곱상한 얼굴을 한 금발벽안의 사내였다.

치안대장, 아들러 카진스키.

군부에서 무려 서열 2위에 해당하는 인물이다.

뜻밖의 등장에 부관과 휘하의 병사들은 물론, 치안대까지도 당혹스러움을 드러냈다.


“대, 대장님!”

“추, 충성!”


감히 올려다보기도 힘들 정도로 계급 차이가 엄청났다.

특히나 치안대 내부에서는 아들러의 말이 곧 법이나 다름없다.

시비 걸던 치안대 놈들이 뒤로 빠지는 걸 보며 나는 혀를 내둘렀다.


‘별로 얽히고 싶지 않은 녀석이다.’


그건 마크셔도 마찬가지인 모양이었다.

불쾌감을 드러내며 상대에게 의미심장한 말을 건넨다.


“또 뭔가 재미있는 일을 꾸미는 중인가 보군?”


외지인인 나로서는 자세한 내막은 알기 어려웠다.

다만, 둘이 별로 친한 사이는 아닌 것 같다.

굳이 끼어들 이유도 없으니 방관자의 태도로 지켜보기로 했다.


“하하, 무슨 의미인지요? 저 괴물에 대해서는 치안대도 아는 바가 없습니다.”

“여전히 농락이 지나치군.”

“정말입니다. 저희도 진상파악을 위해 놈을 생포하려 했던 겁니다. 안타깝게도 이렇게 참살되고 말았지만요.”


알 수 없는 눈빛 싸움이 두 지휘관 사이에 오갔다.

결국, 여유롭지 못한 마크셔가 한 발짝 물러섰다.


“이쪽은 성벽 수비하는 것만으로도 벅차다. 네놈들의 수작질에 우리까지 말려들게 하지 마라.”

“그럼요, 그럼요. 저도 매일 같이 친위대와 신경전을 하느라 피곤하답니다. 요새 들어 왕족의 외출이 잦아져서 말이죠.”


아들러는 말을 마친 후 한쪽으로 눈짓을 보냈다.

그러자 대기 중이던 병사들이 어디선가 들것을 가져와서 괴생명체를 실어나르기 시작한다.


“이상은 우리 소관이 아니다. 쓸데없이 시간이 지체되었으니 다들 서둘러라.”


마크셔는 못본체하며 부하들을 재촉했다.

그의 뒤를 따라나서며 나는 흘끗 뒤를 돌아봤다.

멀리서부터 괴생명체가 쫓던 방향.

왕녀가 탄 마차의 운행코스와 일치했다.


‘뭔가, 골치 아픈 내막이 있을 것 같군.’


그것이 나와 관련이 없는 일이기만을 바랐다.

하지만 사건의 경과를 지켜보고 나니, 본능적인 직감이 계속해서 경고를 보내온다.


‘만일에 대비해 일단 염두에 두고는 있어야겠어.’


미묘해진 기분을 뒤로 한 채 다시 걸음을 재촉했다.

풀리지 않은 수수께끼에만 전념하고 있기엔 호락호락한 상황이 아니다.

저 멀리로부터, 드높은 성채 진지가 우리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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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왕을 잡았더니 세상이 망함 연재란
제목날짜 조회 추천 글자수
36 숲속에서의 대화 24.01.15 14 2 12쪽
35 숲속의 악마 24.01.12 12 1 12쪽
34 에리나 브르타니엔 24.01.11 15 1 12쪽
33 환영의 숲 24.01.10 14 2 12쪽
32 추방된 자들 24.01.09 16 1 12쪽
31 황무지에서의 전투 24.01.08 18 1 11쪽
30 성벽 밖으로 24.01.05 16 1 11쪽
29 유리우스 제르가딘 24.01.04 21 1 12쪽
28 정예 인원을 뽑았다 24.01.03 20 1 12쪽
27 협상을 해보자 24.01.02 22 1 12쪽
26 알현실에 불려갔다 23.12.30 26 1 12쪽
25 부하를 팔아먹었다 23.12.29 22 1 12쪽
24 재각인 23.12.28 25 2 12쪽
23 할 일은 해야 한다 23.12.27 23 1 12쪽
22 귀찮은 일은 싫다 23.12.26 23 2 13쪽
21 리제 에스터리츠 23.12.25 25 2 12쪽
20 지하 고문실의 독대 23.12.23 28 2 12쪽
19 사라진 왕녀 23.12.22 26 2 12쪽
18 오래된 기억 23.12.21 36 3 12쪽
17 악인은 심판 받는다 23.12.20 34 3 12쪽
16 구원받지 못한 자 23.12.19 30 3 11쪽
15 악마숭배자 23.12.18 32 3 12쪽
14 밤은 깊어간다 23.12.16 30 3 11쪽
13 고대 마물 23.12.15 27 3 12쪽
12 비밀 통로 23.12.14 31 3 12쪽
11 도둑 길드 23.12.13 30 3 11쪽
10 초승달 밤의 도둑고양이 23.12.12 43 3 14쪽
9 진위 조사대 23.12.11 42 3 12쪽
8 유도 질문 23.12.09 43 4 12쪽
7 야간 습격 23.12.08 45 4 1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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