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그넘 왕의 상상
프라이바드는 코르삭만큼이나 덩치가 컸다.
그래서 큼직한 사슴 고기 꼬치를 하나 더 뜯으며 이야기를 이어 나가는 것이 전혀 이상해 보이지 않았다.
“이거 맛이 좋구먼.”
“맛있다니 다행이네요.”
“어쨌든 절망의 평원 오크들은 왕이 사라지고 여러 세력들이 어지럽게 살아가고 있었어.”
말하자면 분열기, 혼란기를 겪게 된 것이다.
“그런데 정확히 언제부터인지는 몰라도 어느 순간 절망의 평원 중앙에서 강력한 세력이 일어났다네. 절망의 평원을 탐험하는 모험가들이나 투리스 사령부도 그 사실은 파악했을 거야. 절망의 평원까지 정찰대를 보내니까.”
“그렇습니까?”
“음. 그 세력은 송곳니 부족, 송곳니 오크라고 하네.”
“송곳니 오크요? 송곳니가 길게 나나 보죠?”
“아니. 맹수의 송곳니를 목에 걸고 다니기 때문이야. 지위가 높을수록 목에 걸고 다니는 송곳니가 크고 개수가 많지.”
“아!”
“송곳니 오크는 어느 정도 자리를 잡은 뒤에는 확장하려 하지 않았어. 동서남북 어디로도 뻗어 나가지 않았지. 그런데 최근에 그 송곳니 오크들이 검은 숲 근처의 오크 부족들을 은밀히 대체해 나가고 있다네. 투리스 사령부도 그것까지는 파악하지 못했을 거야.”
“대체해요?”
“음! 장악인지 대체인지 정확하지는 않지만, 지휘관 오크들은 확실히 송곳니 오크들이지. 오랫동안 질서와 규율이 몸에 밴 녀석들 말이야.”
프라이바드의 말이 사실이라면 최근 오크들이 벌인 사건은 떠돌이 오크 무리가 우발적으로 일으킨 것이 아니다.
이미 강력한 지휘 체계를 갖춘 오크 세력이 어떤 의도를 가지고 저지른 일인 것이다.
코르삭은 프라이바드가 말한 내용도 놀라웠지만, 그가 이런 이야기들을 어떻게 알게 되었는지부터 궁금했다.
“그런데 그 사실을 어떻게 아세요?”
“어떤 사실 말인가?”
“중앙의 오크들이 송곳니 오크이고 녀석들이 최근에 검은 숲 근처의 오크들을 대체 혹은 장악했다는 사실 말이에요.”
“그야 직접 봤지.”
프라이바드가 전혀 뻐기는 기색 없이 태연하게 말했다.
코르삭은 어이가 없어 눈만 깜박이다 다시 물었다.
“어디서요?”
프라이바드는 컴컴한 어둠을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말했다.
“검은 숲을 통과하면 절망의 평원이 나온다네.”
“그러니까 검은 숲을 지나 절망의 평원에 가서 직접 봤다고요? 혼자서?”
프라이바드는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 그가 절망의 평원까지 가서 오크들을 관찰하게 된 까닭은 그 사건 때문이었다.
남동생이 죽고, 첫째 여동생은 가정이 파탄 나고, 부모님은 화병으로 돌아가시고, 막내 동생은 도망치듯 결혼하여 떠나 버렸다.
견딜 수가 없었다.
자신과 가족을 따돌린 마을 사람들이 원망스러웠다.
모두 다 죽여 버리고 싶었다.
이대로는 사고를 크게 칠 것 같아 마을을 떠나 따로 살았다.
그렇게 해도 세상에 대한 원망과 증오, 피에 대한 갈망을 억누를 수가 없었다.
그러다 숲에서 우연히 오크를 만났다.
‘피를 볼 거면 차라리 오크를 죽이자!’
그때부터 숲에서 만난 오크와 몬스터를 죽이기 시작했다.
사람들은 프라이바드가 숲에 살면서 몬스터를 해치워 마을 사람들을 지켜 준다고 생각하지만, 그것은 결과적인 것이지 그럴 의도를 가지고 한 일이 아니었다.
피에 대한 갈증을 그런 식으로 풀어 왔던 것이다.
어쨌든 투리스 요새 앞쪽 검은 숲에서 더는 오크를 보기가 쉽지 않자 그는 더욱 과감하게 오크의 땅으로 들어갔다.
그런데 그곳은 그가 마구잡이로 뛰어들기에는 오크의 수가 너무 많았다.
그래서 유심히 관찰하기 시작한 것이다.
들키지 않고 조용히 관찰하는 것은 전쟁터에서 얻은 그의 특기 중 하나였다.
그는 특기를 오크에게도 통하도록 발전시켰다.
은신, 잠입, 정찰.
머리카락과 수염을 자르지 않고 옷을 빨지 않고 이끼와 잎을 붙인 채 맨발로 다니는 것은 지형지물에 자연스럽게 동화되도록 하는 은신, 잠입, 정찰 기술이 몸에 완전히 밴 결과였다.
그는 그렇게 20여 년을 절망의 평원을 드나들며 오크들을 죽이고 관찰해 왔다.
그러는 동안 오크의 말도 익히게 되었다.
“자네는 내 사정을 알지?”
“예. 어느 정도는······.”
“나는 사람들 사이에서 사는 것이 편하지 않아. 아주 가끔 필요한 물건을 사기 위해 투리스 요새에 들를 뿐이지. 그런데 이 몰골을 하고서 요새로 가면 어떻게 되겠나?”
귀신 같은 몰골에 다들 깜짝 놀라 쳐다볼 것이다.
코르삭은 프라이바드가 검문이나 무사히 통과할지 의문이었다.
아니, 신분증을 가지고는 있는지 궁금했다.
“그래서 요새에 가는 일도 마을 사람에게 부탁할 때가 많아.”
프라이바드는 숲 가장자리가 아니라 여느 약초꾼, 채집꾼도 들어가기를 꺼려하는 숲 깊은 곳까지 가서 귀한 약재, 값비싼 뿌리와 열매, 나무껍질을 구해 온다.
사냥꾼들보다 더 좋은 짐승 가죽과 오크 장신구를 가져오고 광부들보다 더 귀한 원석을 주워 온다.
그것을 대신 처분하는 사람은 이익의 상당 부분을 가져간다.
프라이바드에 대한 마을 사람들의 태도가 크게 달라진 데에는 이런 이유가 있었다.
그가 마을 사람들에 대한 미움을 완전히 버린 것은 아니었다.
다만, 애꿎은 사람들을 마구 죽여 온 지옥 같은 과거를 되풀이하고 싶지 않았고, 이렇게 해서 마을 사람들을 이용하는 것이 더 현명하다는 것을 알았던 것이다.
그렇게라도 엮여 살면서 20여 년을 지내다 보니 마을 사람들에 대한 미움도 많이 희미해지게 되었다.
그러나 여전히 대면하는 것은 불편했다.
“사람들과 거의 접촉하지 않고 살아왔지. 그럼 뭘 하고 살았겠나? 다른 사람들이 다니지 않는 곳을 다니며 살았다네. 검은 숲은 물론이고 절망의 평원까지, 발 닿는 곳은 어디든 갔어.”
수긍이 되는 이야기라 코르삭은 고개를 끄덕였다.
어쩐지 말도 어눌한 것 같았다.
사람들과 말을 거의 안 하고 지냈으니 당연한 일이었다.
물론 이야기를 하는 도중에 점점 더 자연스러워지기는 했다.
코르삭은 프라이바드의 말을 참이라 생각하고 정리해 보았다.
“그러니까 절망의 평원에서 오크들은 수백 년 동안 하나로 뭉치지 못하고 난립해 있었는데 가장 먼저 뭉친 송곳니 오크가 하필 검은 숲과 가까운 오크들 쪽으로 세력을 확장하고서 뭔가를 꾸미기 시작한다는 거죠?”
“그렇지. 오크는 머리를 쓰는 종족이야.”
오크는 머리를 쓴다.
“송곳니 오크는 이번에야 뭉친 게 아니야. 꽤 오래 전 일이지. 송곳니 오크의 족장이 절망의 평원 중앙을 왕처럼 지배한 게 못해도 10년, 15년은 되었을 거야. 그런데 왜 주변으로 확장하지 않았을까?”
“글쎄요. 내부 장악이 덜 되었을까요? 아니면 괜히 주변 부족들을 공격해서 경계하게 만들면 곤란하다고 생각했을까요? 강한 적이 공격해 오면 살아남기 위해 뭉칠 수 있잖아요.”
“그래도 머리를 쓰는군그래, 오크처럼.”
코르삭은 오크처럼 머리를 쓴다는 말을 난생처음 들었다.
“칭찬으로 알겠습니다.”
“송곳니 오크가 확장하지 않고 잠자코 있었던 이유는, 그게 아니야.”
다른 오크들을 자극하지 않기 위해서가 아니다.
“그럼요?”
“인간의 경계심을 불러일으키지 않기 위해서지. 절망의 평원에 사는 오크들이 하나의 세력으로 통일되어 가는 것을 알게 되면 투리스 요새에서 가만히 있지 않을 테니까.”
“투리스를 방심시키기 위해서라고요?”
프라이바드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고는 고기를 다 먹은 꼬치로 바닥에 선을 그으며 말했다.
“우베르 왕국이 로그넘과 전쟁을 시작한 지 어언 50여 년이 되었네. 지나가는 모든 나라를 멸망시킨 로그넘의 군대가 우베르는 멸망시키지 못했지.”
오크 이야기를 하던 프라이바드가 왜 갑자기 로그넘과의 전쟁 이야기를 하는지 이해하지 못했으나 코르삭은 일단 집중하여 들었다.
“자네가 로그넘의 왕이라고 생각해 봐. 라티시아를 점령하고 있는 장군이라고 생각해도 되고······. 잠이 안 오겠지. 괴로울 거야. 다른 나라들은 다 멸망시켰는데 왜 우베르는 멸망시키지 못하는 걸까? 머리를 쥐어뜯으며 이유를 찾고 방법을 생각하겠지.”
“뭐, 그러겠죠.”
“우베르가 왜 강한지 알아봤겠지. 오크와 오랫동안 전쟁을 치르면서 군대가 강해지고 영토를 확장했으며 라티시아를 차지해 부유해졌다는 것을 알았을 거야.”
“오랫동안 전쟁을 하다 보면 적국에 대해 그 정도는 알게 되겠죠.”
당연한 이야기였다.
“그렇지. 하지만, 오크에 대해 크게 신경 쓰지는 않았을 거야. 우베르 왕국이 오크와의 전쟁을 통해 강해졌다는 정도만, 우베르인들이 호전적인 이유가 오크와의 오랜 싸움 때문이라는 정도만 기억해 두었겠지. 어차피 오크는 오랜 세월 모래알처럼 흩어진 채 세력으로는 의미가 없는 존재가 되었으니 말이야.”
코르삭은 고개를 끄덕였다.
이 역시 당연한 이야기였다.
“그런데 만약에 로그넘이 우베르에 의해 멸망 직전까지 갈 뻔했다면 어떨까?”
“예? 그게 무슨······?”
“만약에 말이야, 우베르가 로그넘을 멸망 직전까지 몰아붙였다면 로그넘의 왕과 장군들은 우베르에 대한 두려움과 적개심으로 인해 무슨 수를 써서라도 반드시 우베르를 멸망시키려 하지 않겠나?”
“그··· 렇겠죠.”
“어차피 전쟁이란 이기기 위해서라면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는 극한의 투쟁이지만, 멸망 직전까지 몰린다면 그야말로 무슨 짓이든 할 거야.”
‘대체 무슨 이야기를 하려는 걸까?’
코르삭은 프라이바드의 말을 이해하기 어려웠으나 점점 긴장감이 높아지고 있다는 것은 확실했다.
프라이바드가 꼬치로 바닥에 그림을 그리며 이야기를 계속했다.
“우베르 동쪽만을 공격해서는 이기지 못했단 말이야. 수십 년 동안 이것을 확인해 왔지. 그렇다면 우베르의 북서쪽에 새로운 전선을 만들면 어떨까? 오크를 이용해 투리스를 돌파하고 우베르 북서쪽을 공격하게 만든단 말이지. 우베르는 혼란에 빠질 거야.”
“대체 무슨 말씀인지······?”
그러나 프라이바드는 자신만의 세계에 빠져들어 들뜬 표정으로 이야기를 계속했다.
“우베르는 지금 라티시아 방면을 막기에도 급급한데 오크가 북서쪽을 뚫어 버린다고 해 봐. 급히 동원령을 내려 병력을 소집하겠지만, 많이 늦을 거야. 우베르의 정예 병력은 대부분 라티시아 방면에 집중되어 있어. 할 수 없이 라티시아 방면군을 빼서 투리스를 막아야겠지. 당연히 라티시아 방면이 약해질 테고, 그 틈에 전군을 몰아쳐 라티시아와 우베르 사이에 있는 세 개의 요새를 함락시키고 우베르를 점령한다! 이 기나긴 전쟁을 끝내는 거지.”
“······!”
프라이바드가 바닥에 그린 우베르 왕국 한가운데에 꼬치를 칼처럼 꽂으며 말했다.
“로그넘의 왕은 분명 이런 상상을 했을 거야.”
코르삭은 프라이바드가 한 충격적인 이야기를 곱씹느라 한동안 아무 말도 할 수가 없었다.
잠시 후 정신을 차린 그가 입을 열었다.
“그러니까 아저씨, 아니 죄송합니다. 프라이바드 씨.”
“편하게 불러.”
“예. 그러니까 아저씨 말은, 이번 오크들의 움직임은 로그넘의 계획에 따른 것이라는 건가요?”
“알 수 없지.”
“예?”
“하지만 그럴싸하지 않은가?”
“솔직히 모르겠는데요?”
“하긴···, 자네는 로그넘 왕이나 장군들의 절박함에 대해서 모를 테니까.”
“그걸 누가 알아요?”
코르삭은 로그넘의 왕이나 장군의 마음이 어떨지에 대해서 단 한 번도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프라이바드가 신병을 대하는 경험 많은 장군처럼 말했다.
“전쟁터에서는 늘 생각해야 해. 늘 상상해야 하지. 비등한 전력이라면 상상력이 뛰어난 쪽이 이긴다. 열세라면 상상력 없이는 절대 뒤집을 수 없어. 전쟁은 상상력이야.”
전쟁은 상상력이다.
“세상에 널리 알려지지는 않았지만, 로그넘은 수도가 짓밟힐 뻔한 적이 있다네. 우리 우베르군에 의해서.”
처음 듣는 이야기에 코르삭은 눈이 휘둥그레졌다.
“그게 20여 년 전이지. 그 일을 겪은 로그넘의 왕이나 장군들은 어떻게 해서든 우베르를 지워 버리고 싶지 않았을까?”
그의 말이 사실이라면 틀림없이 그럴 것이다.
“로그넘에도 분명 똑똑한 녀석이 있을 테니, 오크를 이용하는 작전을 상상해 보았을 테고, 지휘부에서는 과거에는 헛소리라고 치부했을지 모르는 그 작전을 승인했겠지. 그렇지 않았다면 송곳니 목걸이를 이용한, 직관적이고 선명한 계급 체계가 설명이 되지 않아. 그것은 오크의 것이라기보다 로그넘의 것에 더 가깝거든.”
프라이바드의 말에 코르삭은 저도 모르게 몸을 부르르 떨었다.
그의 말이 미치광이의 공상이 아니라 확실한 경험과 근거에 바탕을 둔 추론이라면 자신과 아기는 라티시아 대공의 독수에서 멀리 떨어진 안전한 땅에 온 것이 아니었다.
로그넘의 왕에 의해 다시금 재현될 오크와의 종족 전쟁이 벌어질 위험천만한 땅에 와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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