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을 건너다
코르삭은 처음에 이 일을 계획할 때 녹스를 투입할 생각이었다.
모르부스 후작의 침실에 몰래 잠입한 녹스가 후작이 자고 있는 모습을 지켜본다.
불길한 시선에 잠에서 깬 후작은 깜짝 놀라며 투리스 측에서 마음만 먹으면 언제든 자신을 죽일 수 있다는 것을 알고 우베르 북서부에서 물러난다.
프라이바드에게 자신의 구상을 말하자 그가 물었다.
“왜 그런 생각을 하게 되었나?”
“피를 가장 덜 흘리는 방법이니까요.”
프라이바드는 심각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암살자가 늘 잠입에 성공하는 건 아니지만, 그렇게 해서 모르부스 후작이 운 좋게 자네 의도대로 병력을 물렸다 한들 이 문제가 완전히 해결될까? 언제든 내 침실로 암살자를 투입할 수 있는 적을 가만히 내버려두겠나?
암살자를 이용하는 것이 가끔은 효과적일 때가 있지만, 대부분은 역효과를 불러일으킨다는 것을 알아야 해. 끝없는 두려움과 불신을 가져오지. 결코 화해되지 않는 갈등을 만들 수도 있어.”
프라이바드는 녹스를 투입하는 작전에 부정적이었다.
“암살자 투입이 과연 문제를 해결할 것인지는 차치하고, 자네에게 근본적인 문제가 있는 것 같군.”
“예?”
“자네는 피를 덜 흘리는 방법, 안 흘리는 방법을 고르려고 한다는 말이야. 사실 이번만이 아니지.”
카멜리 자작, 글라드 남작, 모데나군의 병사들이 죽지 않는 방향으로 머리를 쓴다.
“그게 뭐가 문제인지 모르겠네요. 피를 안 흘리면 좋은 것 아닌가요? 죄 없는 병사들을 죽이지 않고, 죄가 있더라도 죽을죄는 아닌 사람들을 죽이지 않고 문제를 해결하면 좋은 일이잖아요?”
코르삭은 자신이 검을 휘두를 상대는 도적과 몬스터 그리고 로그넘 전사뿐이라는 아버지의 가르침이 어릴 때부터 뼛속 깊이 새겨져 있었다.
죄 없는 사람들 혹은 죄가 있더라도 죽을죄는 아닌 사람들을 죽이는 것은 옳은 일이 아니다.
얼마 전에 오크가 투리스 요새를 함락시키고 우베르인들을 모조리 죽이도록 땅굴을 판 로그넘 탈영병들의 처절한 원한과 그 배경을 알게 된 뒤로 그의 이런 마음은 더욱 강화되었다.
“자네가 세상에서 가장 강한 존재라면 그 마음씨는 미덕이 될 수도 있겠지. 죄 없는 자들이 피를 흘리지 않아도 되는 세상, 죄를 지었어도 죗값만큼만 벌을 받는 세상을 만들 수 있다면 말이야.
그런데 자네는 그렇게 강한 존재가 아니야. 자네가 지금 어떤 처지에 놓여 있는지를 봐. 고작 6백 명으로 모르부스 후작을 물리치려고 하고 있지 않은가? 그런데 후작이나 그의 병사들에게는 죄가 없으니 죽이지 않고 이기는 방법을 고민한다?
그건 미덕이 아니고 오만이야.
자네의 그런 마음이 아군 병사들을 사지로 몰아넣을 수 있다는 걸 알아야 해.”
자신보다 훨씬 강한 적을 상대하면서 적을 죽이지 않고 승리할 방법을 모색한다는 것은 아군을 죽일 수 있다.
“강을 건넌다는 건 군사적으로 아주 중요한 의미가 있네. 뭔지 아나?”
“뒤가 없다는 것 아닙니까?”
“그렇지. 강을 건넌다는 건, 도망칠 길을 스스로 없애고 뒤가 없이 싸움에 임하겠다는 거야. 죽을 각오로 싸우겠다는 거지. 악착같이, 무슨 수를 써서라도 이기겠다. 이겨야 살아남을 수 있으니까.”
“예.”
“이왕 강을 건너기로 마음먹었으면 몸만 건널 게 아니라 마음도 건너야 해. 칼을 들었잖은가? 내가 죽을 수도 있고 남을 해칠 수도 있지. 칼로 사람을 해친 죄를 안고 살겠다는 각오는 있어야지. 내가 죄를 안 지으려고 부하들을 죽여서야 되겠나?
무의미하게 사람을 죽이라는 말이 아니야. 그런 놈은 최악이지. 하지만, 칼을 들었으면서도 피 흘리기를 주저하는 놈도 최악이야.
그럴 거면 칼을 버려야지.
아니면 적으로 하여금 스스로 칼을 버리도록 만들 만큼 압도적인 강자가 되거나 말이야.”
이날 대화는 코르삭에게 많은 생각을 안겨 주었다.
어릴 때부터 만들어진 마음이 하루아침에 바뀔 수는 없었다.
검을 들었다고 하여 휘두르는 데 주저하지 않는다면 도적이나 다를 바 없다.
검을 휘두를 대상은 잘 가려야 한다.
그러나 기왕 싸움에 임했으면 피를 안 흘리는 것을 첫 번째 원칙으로 삼지는 말아야 한다.
검을 휘두르는 것을 주저하여 아군을 위태롭게 하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기 때문이다.
코르삭은 프라이바드의 말에 등장하는, 세상에서 가장 강한 존재에 대해서도 생각해 보게 되었다.
어차피 카시아를 구하려면 강한 존재가 되어야 했다.
이왕 강한 존재가 될 것이라면 세상에서 가장 강한 존재가 되어 한 번 호령에 로그넘의 우두머리도, 우베르의 왕도, 라티시아 대공도, 오크의 왕도 모두 무기를 버리고 엎드리는 모습을 상상해 보았다.
전쟁이 없는 평화로운 세상은 그럴 때 가능한 것이 아닐까?
코르삭은 막연하나마 세상에서 가장 강한 존재가 되어 볼 생각을 처음으로 하게 되었다.
***
투리스 민병대와 카드쿠스 순찰대는 갈라티 선착장에 상륙해 보초들을 제압하고 선착장 근처에서 말과 마차를 모조리 끌어모았다.
모르부스 후작군이 도강하기 전에 대기하고 있던 곳이라 병력과 물자를 실어 나른 말과 마차가 많았다.
600명을 태울 말과 마차를 구하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다연발 대형 쇠뇌 장착해!”
“알겠습니다!”
다연발 대형 쇠뇌는 민병대 화력의 핵심이라 이번에도 들고 왔다.
다연발 대형 쇠뇌 소대원들은 그 무겁고 무시무시한 무기를 능숙하게 마차에 설치했다.
“이번 작전을 마치고 투리스 요새로 돌아가게 되면 저걸 더 달라고 해야겠어.”
코르삭의 말에 불카르가 물었다.
“다연발 대형 쇠뇌를?”
“응. 민병대만큼 저걸 잘 활용하는 부대는 없을 테니까.”
투리스군도 성벽 위해 설치해 두고 사용하지 떼어서 마차에 장착하거나 숲에 들고 다니면서 쓰지는 않는다.
휴대하기에는 너무 크고 무거웠던 것이다.
쇠뇌뿐 아니라 화살도 크고 무거워 화살을 져 나르는 부사수들도 고생이 이만저만 아니었다.
그럼에도 민병대는 다연발 대형 쇠뇌 덕에 몇 배나 많은 적을 물리친 경험이 있어서 무겁다고 불만을 갖지 않았다.
“저걸 100대만 가지고 다닌다면 야전에서 무서울 게 없을 거야.”
“하지만, 만들기 어렵다면서? 투리스군이 주겠어? 요새 수비한다고 절대 안 줄 것 같은데?”
“부발루스 뿔과 힘줄을 구하기가 어렵대.”
부발루스는 절망의 평원과 검은 숲 경계에 사는 거대한 물소로 그것의 뿔과 힘줄은 대형 쇠뇌의 강력한 탄성을 위해 필수적인 재료였다.
“부발루스 뿔과 힘줄을 구해 주면 저걸 줄 것 같지 않아?”
“부발루스를 사냥하러 가야겠네?”
“그렇지.”
코르삭이 웃으며 대답하자 불카르가 얼굴을 와락 구겼다.
그에게 새로운 일거리가 생긴 것이다.
그것도 오크의 영역까지 들어가는 위험한 일이.
“상상해 봐. 다연발 대형 쇠뇌를 장착한 마차 천 대를 몰고 다니면 어떤 적이 우리를 막을 수 있겠어?”
“아까는 백 대라며?”
“상상이야 자유니까.”
“흥!”
불카르는 콧방귀를 뀌었지만, 머릿속으로는 다연발 대형 쇠뇌를 장착한 마차 천 대가 달리며 적진을 향해 무시무시한 화살을 날리는 상상을 했다.
그야말로 장관이었다.
“싸우기도 전에 겁을 먹고 항복하겠지.”
“응!”
불카르도 고개를 끄덕였다.
키르쿠가 다가오는 걸 보고 코르삭이 말했다.
“어쨌든 이번 작전을 무사히 마치고 나서.”
“그래.”
모르부스 후작의 땅에서 무사히 돌아가야 가능한 일이었다.
“출발 준비 마쳤습니다.”
키르쿠가 절도 있는 자세로 보고했다.
“순찰대 먼저 출발하세요.”
“알겠습니다.”
카드쿠스 순찰대가 출발하고 투리스 민병대가 그 뒤를 이었다.
코르삭은 말을 타고 후미에서부터 선두까지 따라잡으며 대원들에게 힘차게 외쳤다.
“속도 싸움이야. 빨리 가기만 하면 우리의 승리다. 그러니 다들 힘내!”
어슴푸레하게 날이 밝아 오는 가운데 말과 마차가 드넓은 서부 평야를 달렸다.
***
모르부스 후작군은 현재 3분의 1가량이 로그넘 탈환 전쟁에 나가 있었다.
오랜만에 국왕이 직접 소집령을 내렸기 때문에 3분의 1이 후작이 보낼 수 있는 최소 병력이었다.
남은 병력의 절반은 우베르 북서부에서 문제를 일으키고 있는 투리스 사령관을 혼내 주러 강을 건넜다.
그럼에도 후작령에 남아 있는 병력은 여전히 많았지만, 드넓은 후작령 곳곳에 흩어져 있었기에 모르부스 후작의 주성인 로쓰 성에는 그리 많은 병력이 남아 있지 않았다.
물론 6백 명보다는 많았으나 충분히 해 볼 만하다고 생각했다.
문제는 속도.
곳곳에 흩어져 있는 후작군이 소집되면 코르삭이 이끄는 6백 명은 그야말로 독에 빠진 쥐 신세가 되는 것이다.
그러니 선착장에서 적이 상륙했다는 소식이 전해지지 않도록 모르부스 후작군을 최대한 철저히 수색했고, 전해지더라도 최대한 늦게 전해지도록 말을 모두 끌고 왔으며, 설사 놓친 전령이 있어 로쓰 성에 소식이 전해지더라도 그 전에 도착할 수 있게 속도를 높여야 했다.
그리고 갈라티 선착장에서 로쓰 성까지 가는 최단 경로에 있는 세 개의 관문을 지체 없이 돌파해야 했다.
첫 번째 관문 하크보른은 성벽이 그리 높지 않았고 아직 상륙 소식이 전해지지 않아서 오크의 허공 낚싯대를 응용해 만든, 소형 허공 낚싯대 장착 마차 다섯 대로 한 번에 대원 다섯 명씩 성벽 위로 올려 보냄으로써 간단히 뚫을 수 있었다.
두 번째 관문 에스보르프에서는 이미 해가 솟아 경비병들이 멀리서 달려오는 수상한 마차들을 보고 비상 신호를 울리는 바람에 전투가 벌어졌다.
코르삭은 첫 번째 관문을 통과할 때보다 시간이 지체될 것 같자 밑에서 사냥꾼 출신 대원들이 성벽 위를 향해 활을 쏘는 사이에 허공 낚싯대로 직접 올라가 적을 제압함으로써 시간을 단축시켰다.
“계속 달려!”
“가자!”
코르삭이 이끄는 민병대와 순찰대는 관문을 통과하여 로쓰 성이 있는 남서쪽으로 계속해서 달렸다.
세 번째 관문 베브라는 관문이라기보다는 길가에 있는 성이었다.
그런데 성 바로 아래에 닿은 길을 지나지 않고는 통과할 수 없었기에 사실상 관문이나 마찬가지였다.
베브라 성의 병사들은 에스보르프의 소식을 이미 전해 듣고 잔뜩 긴장한 채 다가오는 적들을 노려보고 있었다.
성벽 위에 서 있는 살기등등한 궁수들을 보니 그 아래를 지나갈 엄두가 나지 않았다.
“이러면 로쓰 성에는 우리가 간다는 소식이 이미 전해졌다고 봐야겠군요?”
“그렇지. 어떡할 텐가?”
프라이바드가 물었다.
“강행 돌파 하겠습니다!”
코르삭의 대답에 프라이바드는 고개를 끄덕였다.
무장 상행단 시절부터 오크의 투창과 투석, 아군의 화살 공격을 막기 위해 마차에 벽과 지붕을 설치하고 말에 덮개를 씌워 달렸다.
대원들이 탄 마차에는 방패와 나무판자, 가죽과 옷감들이 실려 있었다.
“돌파한다! 화살 공격에 대비해!”
대원들이 말에 두꺼운 옷을 입히고 마차에 지붕과 벽을 달았다.
코르삭 또한 자신이 탄 말에 누비옷과 가죽을 둘렀다.
지저분하게 누더기를 뒤집어쓴 모양이었지만, 상관없었다.
이 성만 통과하면 되기 때문이다.
“간다!”
방패를 치켜든 코르삭이 맨 앞에서 달리기 시작했다.
“이랴!”
“하!”
말과 마차들이 그 뒤를 줄줄이 따라왔다.
성 위에서 화살이 빗발처럼 쏟아지기 시작했다.
툭!
투툭!
푹!
푸푸푹!
방패와 누비 옷 위로 화살이 소름끼치는 소리를 내며 박혔다.
그래도 멈출 수 없었다.
여기서 달아나는 것은 불가능했다.
뒤쪽은 아마도 다시 후작군의 수중에 떨어졌을 가능성이 높았다.
오로지 앞으로만 달려야 했다.
달려서 후작을 잡아 담판을 지어야 했다.
그것이 강을 건넌 그가 택할 수 있는 유일한 활로였다.
“야아!”
푹푹 박히는 화살 소리를 들으며 코르삭은 힘차게 소리를 질렀다.
- 작가의말
부산김아재 님, 후원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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