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아름다운 일주일

무료웹소설 > 자유연재 > 일반소설

공모전참가작 새글

zenithrone
작품등록일 :
2024.05.08 23:08
최근연재일 :
2024.09.20 18:00
연재수 :
52 회
조회수 :
533
추천수 :
0
글자수 :
390,044

작성
24.06.12 23:43
조회
8
추천
0
글자
26쪽

수요일

DUMMY

“헐?”

“대박!”

“와, 우리 천 대리님!!”

이것들은 뒤이어 터져 나온 우리 여직원들의 함성.

“그래에~ 저 녀석 들어온지 얼마 안됐는데, 열씸히 여기저기 쑤시고 다니더니 처음으로 큰 거 하나 해왔어~!”

아 이 싸람이! 그거 당신이 꽂아준 거잖아! 갑자기 이렇게 깜박이도 켜지 않고 들어오면 어떡해?! 난 아무 준비도 안 되어 있는데!

그러자 옆 자리에 앉아 있던 민혁이가 또 지네 작은 아버지를 거들고 나선다.

“와! 천 대리님, 형! 언제 그런 걸 또! 벌써! 이거 안 되는데, 내가 더 큰 거 물고 와야 하는데!”

이쯤 되니 곳곳에서 들려오는 이 되도 않는 찬송질이 창피하고 쑥스럽기가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라 어디 내 큰 몸 하나 숨길 수 있는 쥐구멍 있다면 잽싸게 들어가고 싶은 맘만 미친 듯 요동칠 따름이다.

그러나 사장님은 여기서 그치지 않았다. 어느 사이 성큼성큼 이쪽으로 와서는 내 옆에 있는 자기 조카 어깨를 예의 그 솥뚜껑만한 주먹으로 치며

“똑바로 안해이 씨?”

하고 다그치는 것 아닌가?

“아! 아, 왜요오!”

불시에 기습을 당한 민혁인 억울하다는 듯이 삼촌을 올려다봤지만, 거기엔 한껏 표정을 일그러뜨리고 있는 무서운 얼굴만이 사천왕상의 험상궂은 그것처럼 부라림 거리고 있을 뿐이었다.

이내 고개를 숙인 민혁이. 그러면서도 한쪽 얼굴을 내 쪽으로 향하며 킥킥거리는 웃음을 흘려보낸다. 거기다가 손을 조그맣게 들어 엄지척까지. 참으로 재미있는 관계의 족하와 숙부가 아닐 수 없었다. 어떻게 보면 좀 부럽기도 하고.

“아, 저 사장님. 아직 그거”

난 어떻게든 이 사태를 무마해보려고 애썼지만, 여기까지 흘러온 이상 수습은··· 안 될 거야 아마···.

“그래에, 우리 천 대리도 천 대리고, 또 봄이고 하니 오늘은 그 거추장스럽게 거래처 사람들 끼는 거 말고 우리끼리 함 즐겁게 마셔보자는 거지~.”

당연히 내 말은 귓등으로 흘리는구나. 포기다. 이제 그냥 묻어가는 도리만이 있겠다.

“괜찮지~?”

“네.”

“그래요 사장님~.”

“사장님이 쏘시는 거죠?”

대답들의 마지막에 누군가가 던진 한마디로 좌중에서 웃음이 파도처럼 널뛰었다.

“이씨~ 언제는 내가 안 쐈어?”

역시 언제든 어디서든 누구에게든 절대로 질 분이 아니다. 우리 사장님은.

“정현아.”

“네~.”

“거기 있잖아, 요 앞에 한우 집.”

“아~ 네네!”

“거기 전화해 놔라. 우리 인원이 많으니까 자리 좀 미리 준비해 달라고.”

“아 네~ 알겠습니다~. 야~ 소고기 먹는 다~ 야~!”

이렇게 졸속하게 잡힌 회식. 그리고 졸지에 주인공이 되어버린 나.

진짜 몸 둘 바를 모르겠다. 다들 맨날 맨날 수도 없이 팀을 내보내고, 바로 곁 책상에 근엄한 표정으로 앉아있는 부장은 한 번 나갔다 올 때마다 기본 몇 백 명을 달고 들어오는데 고작 백 수십여 명 정도를, 그것도 고작 한 번 물고 왔을 뿐인 내게 이렇게까지 과분한 처사라니. 모두들 겉으로는 축하한다는 얼굴을 하고 있지만 속으로는 혹시나 비웃고 있지는 않을까? 참으로 고맙지만, 다른 한 편으론 사람 참 곤란하게 만들어 놓았음이다. 혹시 이런 걸 즐기는 악취미가 있는 분인가, 우리 사장님은?

이제 막 어리바리 치던 걸 가까스로 수습하고 있는 내게 이미 조금 전부터 가까이에 와 계시던 그분이 능글스러운 얼굴을 띄어 보내온다. 어딘가 모르게 짓궂어 보이는 미소와 질문도 함께 섞어서.

“너 뭔 짓 했냐? 도대체 뭔 소릴 했길래 걔가 너 꼭 이번에 데리고 가겠다고 난리야?”

“예? 어···.”

한국사람 삼 세 번이라고 난 이번에도 제대로 말을 끄집어내지 못함으로써 간신히 우리나라 규격표준을 맞추었다. 음··· 그 후한 관용의 기회를 다 까먹었으니 이제부턴 똑바로 해야 이후 아무 탈이 없겠지. 네 번째부터는 정신 확실히 차리는 거다.

“그래, 이번에 암튼 잘 해봐~.”

“예 감사합니다.”

해냈다!

“너 나가서 실수하면 죽여 버린다?!”

“하하~ 네엡! 명심하겠습니다!!”

또 해냈다. 그래! 이래야 나지!

“어서 끝내고 술 먹으러 갈 준비나해.”

“예 알겠습니다.”

오늘의 업무는 이렇게 끝을 맺었다.


또 술자리다. 하여간 이놈의 회사 아주 하루걸러 하루 회식이다 그냥. 지난주에도 두 번을 마셨는데. 아니다, 금요일에 선약이 있다며 도망쳤던 것까지 포함하면 정확히는 세 번이네. ··· 음··· 요즘 시대가 시대이니 만큼 우리 역시 주 5일제 근무를 당연히 따르고 있으니 과경에 내뱉은 ‘하루걸러 하루’라는 말보다 더욱 적절한 표현은 찾기 힘들겠구나.

사장님의 성화에 평소보다 10분 일찍 과업을 종료한 우리는 한껍에 발을 옮겨 아기 걸음으로도 채 5분이 안 걸릴 거리에 자리 잡고 있는 한 모둠한우집으로 우르르 몰려갔다. 내가 이 회사 오기 전에부터 워낙 모습들을 자주 비췄는지 그곳 문간에선 아예 아주머니 한 분이 나와 서서 우리 두목과 예하 일당들을 한 아름 웃음 가득한 얼굴로 맞이해주었다.

“아이고 오셨어요~.”

“네 이모~.” “저희 또 왔어요~.” “오늘도 잘 해주세요~.”

들어가면서 그냥 지나칠 수 없다는 듯 죄다 한마디씩을 던지는데 또 그걸 그 「이모」라는 분은 일일이 다 대답해주신다.

“아이고, 예 그러믄요~.” “으메 더 이뻐졌네~.” “예예~ 오늘도 잘 해드릴께예~.”

등등거리면서 말이다.

이렇게 부산들을 떨며 식당을 점거한 우리는 숯불은 물론 물 잔과 수저 심지어는 밑반찬까지 모조리 준비되어 있는 정중앙의 널찍한 자리에 아무 거침없이 바지춤과 치마춤들을 붙여나갔다. 덕분에 나와 민혁이 같은 막내축이 분주히 돌아다니며 숟가락과 젓가락을 놓고 그 밑에 휴지를 한 장 깐다거나 인원 수 대로 물을 잔에 따라 돌리는 등의 여러 번거로움을 건너 뛸 수 있어 좋았고, 주문과 거의 동시에 나온 고기들을 아무 대기시간 없이 바로바로 불판 위에 올릴 수 있어 더욱 좋았다.

이 모든 광경을 최상석에 앉아 그윽한 눈길로 바라보던 사장님. 마침내 상위의 잔이 하나도 빠짐없이 순도 83%의 맑은 물로 가득 차있는 것을 확인하자 드디어 자신의 옥상玉觴을 허공으로 치켜들었다. 이 자리에 있는 모두들 역시 그런 그의 손길을 따랐다.

“자, 다들 잔 채웠지?”

시작이로구나.

“사장니임~ 한 말씀 하셔야죠~?”

순간 어느 여직원 하나가 코맹맹이 소리를 냈다. 그러자 사장님은 그 콧소리를 나름 흉내 내며 잔망스럽기 그지없게 다그쳤다.

“시끄러어~! 조용히 해~.”

“네엡.”

이 일로 살짝 시끌거리던 밥상 위에 야트막한 정적이 나부꼈다.

평소 길게 말하기 전 크흠 흠~ 하는 헛기침을 하는 버릇이 있는 사장님이 이번에도 예외 없이 자신의 장기로 포문을 열었다.

“크흠 흠~, 제가 할 말은 뭐, 항상 똑같죠 뭐. 자, 오늘 하루도 수고 많았구요, 제가 먼저 선창하겠습니다.”

말을 마친 사장님은 잔을 더욱 높이 들었다.

“우리 인차투어를,”

한 박자 쉬고,

“위하여!”

“위하여~~!!”

전 직원의 굵은 후창이 아직은 손님이 오기에 이른 시간이라 거의 비어있는 것과 다름없는 음식점 안을 크게 뒤흔들었다. 그 짧은 외침이 지나간 자리는 당연 잔 부딪혀대는 소리로 메워졌고 마지막으로 여기저기서 들려오는 크~ 하는 후렴구와 함께 각자의 손에 들어 올려진 젓가락 혹은 숟가락들이 상 위에서 춤추기 시작하는 것으로 오늘의 성대한 개식사는 그 퇴장의 시를 알렸다.

“자자~ 많이들 먹고, 갈 사람은 빨리 많이 먹고 가~.”

뭔 소리야 이건? 어쨌든 많이 먹으라는 건가?

역시 우리 사장님, 그 큰 덩치만큼이나 배포와 인심에 넉살이 넘친다. 마치 옛날 옛적 도교의 선인들이 말씀하시던 「창고가 가득해야 예절을 안다.」의 무항산 무항심처럼. 사람 저리 넘치는 인심이 여유에서 비롯된 것일까, 아니면 여유가 찼기에 인심을 베푸는 것일까. 그 인과의 관계를 미처 1년여도 함께 해보지 못한 내가 섣불리 단언할 순 없겠지만, 암튼 지금 확실한 건 저 넓은 성정으로 인해 앞으로 더욱더 많은 넉넉함을 거두어들이게 되리란 게 소생 같은 범인의 눈으로도 어렵잖게 볼 수 있음이라.

그나저나 오늘 이 잔칫상을 이끌어낸 사람은 난데 다들 제 술 들이붓기만 바쁠 뿐 아무도 이 몸에게는 술판에 같이 참석한 천 대리 그 이상 그 이하도 아닌 관심밖에 보이질 않는다. 주인공은 개뿔, 다 그때뿐이구나. 근데 오히려 난 이게 더 좋다. 정말 이 자리에 있는 누구나 상시 해오던 일을, 내 드디어 처음으로 겨우 한 사람 구실의 첫 발을 떼게 되었음이 다인데 그걸 갖고 여기서까지 띄워주고 난리치면 아마 그 창피함에 계속 화장실로 숨어 다니기 바빴을 거다. 그래그래 다~들 나 같은 거 신경 쓰지 말고 맛있게들 먹고 기분 좋게들 들이켜 거라.

이렇게 술자리는 무르익어가고 왕왕작작대는 소리를 양념삼아 슬슬 흥이 돋아오를 무렵이었다.

바지춤에서 웅~ 하는 진동음이 전해져왔다. 난 매우 의당히 ‘누구지?’하는 생각을 떠올리며 전화기를 꺼내들었다.

···

영근이 형이었다.

···아 진짜··· 사람 짜증나게 하네!

이제는 귀찮음 따위론 상대가 안 될 정도다. 당연 나를 좋게 보아줌인 까닭이고, 또 재홍이 얼굴을 생각해서라도 내 이런 생각을 갖아서는 안 되는 거겠지만 이건 정말 해도 해도 너무하는 것 아닌가!

난 애써 무시하며 행여나 단추 하나, 화면 한 번 잘못 건드릴까 조심스럽게 주머니 속으로 다시 밀어 넣었다.

근데 우리 회사 사람들 이걸 놓칠 분들이 아니다.

“어? 천 대리 왜 안 받어?”

마침 이 광경을 본 차 차장님이 가만있질 않네.

“아, 예? 아~ 하하 별거 아니네요. 여기가 좀 시끄러워서요.”

“그래~? 그럼 나가서 받지···.”

“아, 마침 끊어져서요. 급하면 다시 걸겠죠 뭐.”

“그래에. 그런 거지 뭐. 자 마셔마셔. 오늘 이거 천 대리 때문에 먹는 거야.”

“아 옙. 알겠습니다. 차장님께서도 많이 드세요!”

“그래. 한 잔하자~ 수고했어.”

“예. 감사합니다.”

시끄러운 와중에 이렇게 짤막한 대화와 술잔을 나눈 직후였다. 나의 아랫도리부근에서 또다시 진동음이 느껴졌다.

후우~ 역시 단박에 포기할 작자가 아니지. 그래도 혹시? 하는 마음으로 전화기를 확인했지만, 짐작한대로 예상한 바대로.

이쯤 되니 나도 오기가 발동한다. 두 번째 전화도 좀 속된말로 씹어 넘겼다.

그러나 세 번째를 넘어서 네 번째에 이르자 더 이상은 안 되겠다는 생각이 굳게 다져진 오기덩어리들 사이에 아주 자그마한 틈새를 만들어내었다. 만약 이걸 안 받으면 받을 때까지 울어댈 게 확실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 영근이라는 형은 충분히 그러고도 남을 사람이었다.

급기야 받을까 말까 받을까 말까 하는 고민이 턱밑까지 차올랐는데, 그 사이 네 번째 왔었던 전화가 다행히 잠시 진동을 멈춰주었다. 그러나 미처 숨을 고르기도 전에 같잖은 여유 주지 않겠다는양 다음 파도가 삽시로 짓쳐들어왔으니···. 이건 방법이 없겠다. 받는 수밖에. 하지만 여기까지 온 거 그냥 순순히 상대방의 의도에 말릴 수는 없는 노릇. 난 일부러 밖으로 나가지 아니하고 거의 난장에 가까운 가게 안에서 서슴없이 전화기를 개방해버렸다.

“여보세요.”

“너 왜 전활 안 받냐?!”

엄청난 짜증이 섞인 목소리가 들입다 귓속으로 튀어 들어왔다. 하지만 이미 만반의 대비를 하고 있던 몸. 전혀 당황스럽지 않다. 오히려 저 급한 성미에 역정 대신 나긋한 말소리가 흘러 나왔으면 차라리 더 당황했을 걸?

“아 영근이형?”

“그래 인마!”

“아 예, 죄송합니다. 지금 회사 회식 중이라.”

“아 그래에?”

“네.”

“그럼 잠깐 나가서 받아봐.”

“지금요?”

“그래에~.”

하이고··· 그냥 회식이라 대충 둘러대고는 끊으려했는데, 이것까진 계산만큼 따라주지 않누나. 아직 난 멀었나보다. 역사에 이름을 올린 수많은 책사들이 세상을 쥐락펴락했던 것에 비하면···. 도대체 그 치들은 얼마나 머리가 좋았길래 사람을, 나라를, 시대를 자기 마음대로 농락했을까. 그건 과연 공부와 노력으로 따라잡을 수 있는 범주에 있기나 한 세계일까? 천준호라는 일개 범인은 고작 최영근이라는 사람 하나 제대로 다루지 못해 결국은 그의 뜻에 따라 조용한 곳으로 나가 전화를 받는 신세가 되어버릴 뿐인데···.

“예 형님. 지금 나왔습니다.”

“그래 좀 났네.”

“예.”

“지금 통화 가능하지?”

??? 장난해? 순간 살얼음처럼 얇은 분노가 울걱거렸다. 자기 전화 받으라고 억지로 끌어내더니 뭐? 지금 와서 가능하냐고?

아···, 안 된다 그럴까?

“예 형. 말씀하세요.”

···

후우···.

갓얼음은 역시 금방 녹아내리기 마련이구나···.

“그래. 내가 그 형님하고 통화를 했거든?”

“예.”

“준호야. 좀 아쉽겠지만, 잘 안 된 것 같다.”

예에 형. 저도 자알 알고 있어요. 나이가 몇 갠데 그거 하나 제대로 모르겠어요?

“예. 근데요?”

“그, 걔···, 승미가 말야 사람이 좀 무능해보인데.”

아이고··· 이건 또 무슨 「개 뼉다귀 같은 소리냐」는 말조차 갖다 붙이기 민망할 정도의 개소리냐?

“뭐가요?”

“너 부모님하고 같이 산다 그랬대메?”

“그건 형한테도 얘기했잖아요.”

“야 근데 그게, 그···, 사람이 그 나이 먹고 독립하지 않고 부모님 밑에서 지낸다고 하니 좀 한심해 보인다는 거야.”

씨발, 돌차간 욕이 울대에서 컬럭거렸다. 차마 형이고, 또 친분이 그다지 깊지 않아 가까스로 짓누를 수 있었지만, 친한 동년배나 그 이하사람이었다면 대번에 내 쌍욕지꺼리를 듣느라 편시 잠자코 있어야했을 게다.

“그럼 걔는 요? 걔도 부모님하고 산다드만!”

“야 여자랑 남자랑 같냐. 그거 어떻게 잘 좀 포장해서 얘기하지 그랬어.”

이건 또 무슨 해괴한 논리임? 나는 괜찮지만 남은, 특히나 남자는 안 된다? 아··· 점점 언성이 높아져가는 것을 막을 길이 없겠구나···.

“틀린 건 또 뭔데요? 자기는 같이 살면서 안 무능하고, 난 같이 사니까 무능하다? 뭐 그런 애가 다 있어? 그게 포장할 껀덕지나 됩니까 그게? 뭐, 뭘, 어떻게 포장할까요, 부모님하고 사는 걸. 형도 부모님하고 살잖아요?! 형은 어떻게 얘기 하실래요??”

“아 그게··· 암튼··· 야 그리고 또,”

“또 뭐요.”

“자긴 영업하는 사람이 싫단다.”

“하아···.”

난 더 이상 대꾸하기도 싫어 큰 숨 한 번을 전화기로 내뱉었다. 형 역시 격앙되어진 나의 말소리에 굳이 대답을 기대하는 것 같진 않았다.

“사지 멀쩡해 보이는 사람이 왜 영업하러 다니냐고. 이것저것 좀 그렇데.”

잘 됐네. 그런 정신 나간 여자 밥 한 끼 값으로 멀리 쫓아냈으니. 행여나 서로 끌림이 있어 추후 몇 번 더 만나고 만약 사귀기까지 했더라면 세월 한참 지나 내 투자한 시간과 돈이 아까워 땅을 치고 후회 할 뻔했다. 비록 그 몇 만원 안 아깝다면 거짓말이겠으나 핵폐기물 급 쓰레기 치운 대가치고는 비교적 싸게 멕힌 셈이니 내겐 큰 행운이라고 봐야겠지.

“야 근데, 준호야. 사람이 처음 봐서는 서로 그럴 수도 있거든? 근데 얘 진짜 괜찮은 애야. 요즘 애 같지 않고 이백 오십을 벌어오면 이백 삼십을 저축할 애야 얘가. 내가 다시 한 번 형님 잘 설득해 볼 테니, 다시 한 번만 만나봐라. 진짜 아까워서 그래.”

그놈의 250! 그놈의 이백 오십!! 지겹다 지겨워. 도대체 이 양반은 뭐가 그리 250이 아쉬워 계속 그 소리만 주저리주저리 떠들어대고 앉았는 거냐!

“형 됐어요! 저도. 부모님이랑 같이 사는 거, 저 영업하는 거 당분간 바꿀 생각 없거든요? 아마 병원 다니면서 의사랑 그 주변에 돈 많은 것들만 봐와서 멍청스리 눈만 높였나본데, 지 주제를 좀 알라 그러세요. 뭐 특출 나게 이쁜 것도 아니고, 지도 부모님 집에 얹혀사는 주제에 어디 감히 사람을 그렇게 무능하다 어떻다 평가질해? 지가 우리 집에 와 봤어?”

“야 준호야. 그래도 그렇게 말하면 안 되지.”

아 됐거등요? 그렇게 괜찮으면 당신이 데리고 살든가!

“왜요? 그 년은 지 형부한테 그렇게 말하는 데, 저는 형한테 이렇게 말하면 안 되나요? 됐구요, 저두 그렇게 골빈년 관심 없어요. 말씀 드렸잖아요. 저 당분간 사람 만나고 싶은 생각 없다고.”

“야 준호야. 걔 정말 아까운데.”

아 이사람, 귓속에 초소형 블랙홀이 사건의 지평선을 펼쳐다놨나 말귀 디게 못 알아먹네?!

“아 됐구요, 형. 그렇게 지가 잘났으면 잘난 사람 만나 잘 살라 그러세요. 저랑은 더 이상 엮지 마세요. 솔직히 불쾌해요. 저 나름 열심히 산 사람이에요. 그리고 주변 평가도 나쁘지 않아요. 그렇게 대가리 거미줄 친 년한테 한심하다 소리 들을 정도의 사람 아녜요. 더 얘기하지 마세요. 설사 그쪽에서 생각이 바뀐다 해도 제 쪽에서 거부합니다. 그러니 형, 더 이상 용쓰지 마세요. 어쨌든 감사합니다.”

“··· 그래··· 알겠다.”

“예 형. 암튼 그래요.”

“그 으래··· 그래. 조만간 소주나 한잔 하자.”

“예. 저 그리고 이제 들어가 봐야 되요.”

“그래 준호야. 그럼 또 통화하자.”

“예 형. 안녕히 계세요.”

통화를 마친 나는 다시 식당 안으로 들어가며 가급적 짜증 바짝 차 올라있는 심통머리를 밖에 놔두고 온다 했으나 녀석은 그런 내 생각 아랑곳하지 않고 술상머리까지 살그머니 따라 들어와서는 계속 주위를 어슬렁거리려한다.

하~ 참, 오늘 기분 진짜 들쭉날쭉 이다. 큰 수학여행 건이 매기단하여 콧바람이 올랐다가 영근이 형 때문에 흥이 깨지고, 친구 만나서 좋아졌다가 녀석의 기운 빠진 모습에 맞울림 당하고, 김창욱 부장님한테 받은 칭찬과 이어 열린 회식으로 인해 다시 회복했다 싶더니 결국 거듭 영근이 형한테 온 전화로 완전히 기의가 박살나버렸네. 하루 동안 심정이 이렇게 오르락내리락 하기도 힘들겠다. 근데 씨발 생각해보니 나쁜 쪽 원인은 세 번 중 두 번이 그 백승미라는 지지배하고 최영근이라는 사람 때문이구나! 아우! 그냥 그때 끝까지 거절할 걸! 괜히 궁금해서 한번 나갔다가 긁어 부스럼 지대로 만들었어.

어쩐지, 좀 전에 형 말을 듣고 나서야 모든 퍼즐이 맞춰져갔다. 그래, 그런 이유들 때문에 어제 그렇게 처음 봤을 때와는 달리 계속 고자세로 변해간 거였구나! 그래, 그런 거였어. 하하! 별 관심도 없는 수수께끼였지만, 암튼 의도치 않게 그 내막을 모두 알고 나니 그저 허탈한 웃음만 실없이 터져 나와 주는구나. 하하핫.


고기 집에서 가졌던 1차는 이렇게 감정이 매우 몹시 많이 가라앉은 상태로 마무리 되었다. 아 당근 나 혼자서만. 다른 사람들, 특히나 우리 사장님은 늘 그렇듯 오늘도 흥에 겨워 주체를 못하고 있는 중이었으니까. 이러한 분위기에 누가 되지 않도록 난 최대한 속사정을 숨기며 나의 암운이 주변으로 새 나가지 않도록 각별히 신경을 썼다.

두 번째로 자리를 옮긴 곳은 실내 포장마차였다. 이 또한 근방에 있던지라 그리 걷지 않아도 되었고, 응당 단골집이었음은 마땅하고 지당한 이치. 다들 배불리 고기를 먹고 나와서 이번엔 간단히 마시자는 취지로 찾아 온 집이었으나 정작 시켜대는 안주들을 보니 이 양반들 과연 아까 위장 속으로 밀어 넣은 한우 부속들 다 어디로 갔는지 심히 궁금하도다. 인원도 거의 그대로였는데 퇴근 전 약속이 있다고 투덜거리던 분위기치고는 생각보다 빠져나간 사람이 적었다. 한 서넛 될까? 서울 본사 직원이 정확히 열 네 명이니 누가 도망갔는지 태도 나지 않는다. 가끔 술 얼근히 오른 사장형님이 ‘어, 야 근데 혜미는 어디 갔어?’ 라고 물어보면 누군가가, ‘걔 아까 약속 있다고 갔는데요.’하고 대답하는 통에 그들의 부재를 알게 될 뿐.

그리고 그 뒤로 이어지는 대화.

‘아··· 그래? 아이씨 누가 가래.’

‘사장님이요. 2차 안 갈 거면 어서 꺼지라고···.’

‘아··· 내가?’

‘네.’

이렇게 일단락을 맺었다가 또 잠시 후,

‘어? 유경이! 유경이는 또 어디 갔어. 안 보이네?’

‘걔도 아까 갔는데요. 혜미랑 같이.’

‘아이씨~ 왜 자꾸 가고들 난리야아~.’

‘사장님이 보내셨어요. 오늘 일찍 가는 것들은 내일부터 회사 나오지 말라고 하시면서.’

‘뭐? 내가?’

‘네.’

‘그랬더니 뭐래.’

‘알겠다고 그동안 감사했다고 하며 가던데요?’

‘그래에~? 이것들이!!’

하는 식으로.

이 본새는 상당히 자주 되풀이되는 편이다. 아무래도 회식이라는 게 첫자리에서부터 막자리에 이르기까지 그 몇 번의 장소를 걸쳐가는 동안 단 한 명의 이탈자 없이 무사히 마무리 되기란 사실상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고, 또 사장님은 이 부분에서 멀쩡히 인사 받고 고이 보내주는 대범함을 보여준다. 아 그런데, 이 양반 취기가 오를 대로 올라 눈이 풀린다 치면 애써 동공에 힘줘가며 엄한 없는 직원 찾아보는 재미있는 버릇이 발동하는 때문이다. 그리고 그 물음의 반대편에는 십중팔구 내가 있게 된다. 입사초기 크게 한 번 데인일로 인해 비교적 끝물까지 맨 정신을 유지하고 있는 사람이 서기 이 몸 하나 정도 밖에 되지 않기에···.

그러나 지금의 난 평상시와 달리 조금 술기가 돈 상태였다. 그도 그럴 것이 한우집에서 영근이 형과 통화를 한 후 고약한 계집의 속내를 알게 된 분이 좀처럼 풀리지 않아 연거푸 소주잔을 비워댄 연유에서다. 여기선 다시 한 박자 늦춰가며 속을 다스리고 있지만 고 괘씸한 것이 내 삼십 넘게 열심으로 살아온 생을 무능함과 한심함으로만 치부했다는 사실에 약이 계속 빠작거렸다.

정말 내가 살아온 그동안의 삶은, 내막을 알고 있어 주관적인 시선으로 견지 가능한 주위의 인물들을 제외한 지극히 객관적인 그것을 갖고 있는 이들에게는 걍 무능하고 한심하게만 비춰지는 것일까?

··· 젠장.

이 부분에 대해 잠깐 생각을 해보니 갑자기 대변할 말이 없어져 옴을 부인하기가 힘들어진다. 일단 지금 내 현재지표만 놓고 보자면··· 나이는 내가 이미 몇 번이나 밝혔듯 삼십 대 중반. 집··· 이것도 미리 말했듯이 없음. 연봉··· 자세히 밝히고 싶진 않지만 일단 삼천은 확실히 안 됨. 모아놓은 돈······ 그래도 이 직장 잡은 뒤 열심히 저축했으니··· 한 오백?

···

······

무능하고 한심한 거 맞구나···.

이래서 내가 소개팅을 안 나가려고 그리 버틴 거였는데···.

정말 이게 거추장스런 사족을 모두 떼어낸 나의 대외적이고 사회적인 모습이요, 적나라한 현 주소였다.

이쯤 되고 보니 이제는 차가운 시각으로 날 가늠한 여자에 대한 괘씸함보다는 사나이 방울 두 개 달고 태어나 삼십년 넘게 살아오면서 일궈놓은 게 고작 이것 밖에 되지 않는다는, 애써 잊은 채로 지내려했던 고놈의 자괴감이 또 다시 고개를 빳빳이 들고 보내오는 노골적인 조롱의 미소에 어찌하지 못하고 섰는 어리보기 내 자신한테 더욱 짜증이 치밀어 오른다.

이미 내 귀엔 눈 마주하고 앉아는 있지만 만취의 기운에 온 몸과 마음을 침잠당한 사장님의 혀 꼬부라진 소리나, 아직 사장님정도는 아니지만 그래도 들어라 부어라 마셔버린 통에 거나하게 취기 오른 여타 직원들의 왁자지껄한 어성 따윈 들어오지 않았다.

그저, ‘내가 어쩌다 이지경이 되어버렸을까’ 하는 자조 섞인 물음이 공허한 마음속에 이리저리 메아리쳐 다니는 모습만 멍히 바라보고 있을 따름이다.

‘후우~.’

순간 속으로 큰 한숨이 밀려왔다. 까딱 잘못했으면 고스란히 밖으로 나왔을 수도 있었기에 저 혼자 퍼뜩 놀라는 것으로 서둘러, 그러나 조심스럽게 수습 지었고 다행히 나의 이런 행동은 어느 누구의 주의도 끌지 않았다. 심지어 바로 앞에 있는 사장님까지도! 그분은 어느새 이성의 끈을 모두 놓아버리고는 본능의 영역 하로 도피해 버린 터라 주변에서 일어나는 어떠한 일에도 간여하지 않고 그냥 자기 하고 싶은 대로만 하고 있었다. 그의 마지막 술버릇이 마침내 가장 기본적인 욕구의 형태로 발현되어 당신의 거대한 육신 사이를 비집고 나온 것이다. 그것은 바로 폭풍흡입! 드디어 시작된 그 모습은 마치 「세계의 서술」에서 마르코 폴로 형이 입버릇처럼 되뇌이던 ‘그것을 직접 보지 않고서는 도저히 믿기 힘들 것이다.’라는 표현처럼 정말 직접보지 않고서는 도저히 믿기 힘들 그런 모습으로 사위 널려있는 안주들을 입 안으로 쓸어 담다 못해 아예 들이 붓는 어마어마함을 과시하기 시작했다. 그렇게 거친 방법으로 술상 위를 지배해나가는 사장님의 풍모가 나에게는 지중해의 바닷물을 수틀릴 때마다 집어삼키는 카리브디스의 그것과 겹쳐 보일 정도였다. 맞아 그녀도 가끔 과음했을 때 술 깨려고 물을 그리 들이켰던 거였구나 하며 말이다. 그러나 다들 ‘아이고 사장님 진짜 취하셨네~.’ 하는 몇 마디 말만 던져 놓을 뿐 더 이상은 신경 쓰지 않고 다시 지들 이야기를 이어나가기만 한다. 그리고 덕분에 난 나대로 술잔을 부딪히는 등의 방해 없이 이 난장의 와중에 혼자 조용히 있을 수 있는 자유로움을 누리게 되었다. 이렇게 잠시의 망중한이 허용되자 나의 마음은 다시금 비참하기 그지없는 지금의 현실과 그래도 그에 굴하지 않고 열심히 살아왔다 자부하는 과거와의 틈바구니에 끼어 자라고 있던 달고도 쓴 과실을 향해 혀를 디밀어보았다.


이 작품은 어때요?

< >

Comment ' 0


댓글쓰기
0 / 3000
회원가입

나의 아름다운 일주일 연재란
제목날짜 조회 추천 글자수
52 금요일 NEW 8시간 전 3 0 23쪽
51 금요일 24.09.11 2 0 24쪽
50 금요일 24.09.07 4 0 24쪽
49 금요일 24.08.30 8 0 22쪽
48 금요일 24.08.22 10 0 27쪽
47 금요일 24.08.16 8 0 20쪽
46 목요일 24.08.08 8 0 22쪽
45 목요일 24.08.03 9 0 18쪽
44 목요일 24.07.27 8 0 18쪽
43 목요일 24.07.18 9 0 20쪽
42 목요일 24.07.12 6 0 20쪽
41 목요일 24.07.05 8 0 22쪽
40 목요일 24.06.28 8 0 12쪽
39 목요일 24.06.20 10 0 22쪽
38 목요일 24.06.15 14 0 26쪽
37 수요일 24.06.13 10 0 24쪽
» 수요일 24.06.12 9 0 26쪽
35 수요일 24.06.11 8 0 23쪽
34 수요일 24.06.11 9 0 24쪽
33 수요일 24.06.09 7 0 13쪽
32 수요일 24.06.09 8 0 13쪽
31 수요일 24.06.07 11 0 15쪽
30 화요일 24.06.06 8 0 14쪽
29 화요일 24.06.05 10 0 14쪽
28 화요일 24.06.04 8 0 15쪽
27 화요일 24.06.03 6 0 14쪽
26 화요일 24.06.02 8 0 13쪽
25 화요일 24.06.01 5 0 18쪽
24 화요일 24.05.31 12 0 13쪽
23 화요일 24.05.30 8 0 15쪽

구독자 통계

신고 사유를 선택하세요.
장난 또는 허위 신고시 불이익을 받을 수 있으며,
작품 신고의 경우 저작권자에게 익명으로 신고 내용이
전달될 수 있습니다.

신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