용 찢는 북부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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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7.14 13: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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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UMMY

“다 늙어서 그런 식으로 행동하면 안 부끄럽나?”


샬릭의 지적에 가주들이 당당히 대답했다.


“전혀? 부끄러움이 뭐 어쨌다고? 그게 목숨을 살려주나? 북부에는 두 가지 원칙이 있지. 첫 번째 원칙, 죽지 말 것. 두 번째 원칙, 첫 번째 원칙을 반드시 지킬 것.”


하여튼 말은······. 샬릭이 쯧 하고 혀를 찼다.


“원래 같아선 옷을 싹 벗겨서 내쫓아야 하는데 당장 급한 일이 있으니 일단은 봐주지. 그래서 내 묻겠는데, 대체 뭔 생각으로 이런 일을 벌인 거요? 자기 목숨을 그토록 소중하게 생각하는 양반들이 대체 뭔 생각으로 이놈한테 붙었냐고.”


가주들은 얼른 대답하지 못하고 크흠 소리를 냈다. 그걸 본 샬릭이 슬쩍 칼날을 흔들자 가주 한 명이 다급히 말했다.


“우린 그저 협박을 당한 것뿐이오. 저놈 봐서 알잖소? 무식하게 칼 들고 협박하는데 다 늙어빠진 노인네가 어쩔 수 있나······.”


물론 거짓말이다. 아무리 늙었다 한들 북부인은 북부인이다. 가주들 역시 각기 자신의 가문을 이끌 만한 실력이 있는 자들이니 단순히 협박을 당해서 데반에게 붙었을 리는 없다.


샬릭이 말했다.


“그래, 협박을 당해서 그랬다는 말이지. 그런데 이상하군. 그럼 저놈이 무서워서 그랬다는 말인데 나한테 왜 그러지? 내가 저놈보다 더 끔찍하며 훨씬 무시무시하다는 걸 모르나?”


샬릭이 허공에 칼을 휘둘러 핏물을 털어냈다. 촥 소리를 내며 바닥에 떨어진 핏방울을 보며 가주들이 침을 꿀꺽 삼켰다.


샬릭의 말대로다. 그는 데반보다 훨씬 더 끔찍한 존재다. 데반은 고작해야 칼 들고 협박했지만 저놈은 그보다 더한 짓을 할지도 모른다.


가주 중 한 명이 큼 소리를 내며 입을 열었다.


“우리보다는 데반한테 직접 설명을 듣는 게 더 나을 것 같소만······. 설명하기 싫다는 게 아니오. 그냥 그게 더 나을 것 같다는 소리지.”


샬릭이 어깨를 으쓱이더니 휙 하고 칼을 휘둘렀다. 깜짝 놀란 가주들이 새된 비명을 질렀으나 다행스럽도 죽은 사람은 없었다.


샬릭의 칼은 그저 바닥을 그었을 뿐이었다. 바닥에 길게 남은 선을 보고서 샬릭이 고개를 까딱거렸다.


“그 선 넘어서 도망치면 댁들은 나한테 죽소.”


가주들이 열렬히 고개를 끄덕였다. 샬릭이 고개를 돌려 데반을 쳐다보았다. 당장 죽어도 이상하지 않은 모습이지만 다행스럽게도 아직 숨이 붙어 있었다.


“많이 힘들어 보이는군. 죽을 만큼 고통스럽겠지만 참아. 북부인이잖나?”


바닥에 쓰러질 때의 충격으로 데반의 투구가 벗겨져 있었다. 피를 너무 많이 흘려 창백하다 못해 시체 같은 얼굴이 된 데반이 억지로 웃었다.


“······괜찮다. 아래쪽에 감각이 없어서 그럭저럭 견딜 만해.”


허세를 부리는 건지, 아니면 농담을 하는 건지 모르겠다. 어느 쪽이든 북부인답다. 샬릭이 껄껄 웃더니 말했다.


“어차피 다 죽어가는 마당에 의리를 지키겠답시고 입 다물고 있진 않으리라 믿겠다. 그래봐야 남는 게 뭐냐? 그냥 시원하게 다 털어놓고 가. 그래야 홀가분하게 천상에 가지.”


데반이 입술을 우물거렸다. 그는 힘겹게 목소리를 뱉어냈다.


“내가······ 천상에 갈 수 있을까?”


“물론이지. 위대한 싸움이었고 전사다운 죽음이었다. 내가 보증하지. 넌 천상에 갈 자격이 있다.”


그 말에 데반의 얼굴이 한결 편안해졌다. 그는 무언가를 응시하는 듯 멀리 쳐다보다가 곧 희미하게 미소를 지었다.


“그런 거라면야······.”


데반이 잠깐 침묵했다. 설마 이대로 죽어버리진 않겠지. 샬릭이 약간 걱정하는데 다행스럽게도 데반이 입을 열었다.


“내 갑옷과 칼을 보면 알겠지만 이건 북부의 것이 아니다. 나에게 이걸 선물한 자가 있었지. 본래 한미한 가문 출신이었던 내가 대가문의 가주를 죽이고 북부의 왕 자리에 오를 수 있었던 건 전부 그 덕분이었다.”


갑옷과 칼에 숨겨진 힘, 그리고 데반 본인의 실력을 생각하면 가주를 쓰러트리고 북부의 왕 자리에 오르는 건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었을 것이다.


그럼 데반을 도와줬던 자는 대체 무슨 생각으로 그런 짓을 했을까. 세상에 이유 없는 선의는 없다. 분명히 뭔가 원하는 게 있었을 텐데.


샬릭은 자신의 추측이 맞을지 궁금해졌다. 정황상 데반을 도와줄 만한 자는 한 명 외엔 없었다.


“그래서 널 도와줬던 자가 누구지? 놈은 무슨 생각으로 널 도와줬던 거냐?”


데반이 희미하게 웃었다.


“너도 대강이나마 짐작하고 있지 않나? 혈석공이다. 난쟁이 군주이자 또한 위대한 대전사.”


역시나 그랬나. 샬릭은 자신의 추측이 맞았다는 사실에 기뻐할 수 없었다. 혈석공이 데반의 후원자였다면 그의 목적 역시 뻔했으니까.


“혈석공이 널 지원한 이유도 대충 알겠군. 놈은 북부의 군대를 원했던 거야.”


모든 북부인은 전사다. 만약 북부인으로 이루어진 군대를 부하로서 부릴 수 있다면 혈석공의 전력은 크게 상승할 것이다.


“그래. 하지만 그것 때문만은 아니지. 놈이 진정으로 원한 건 흑철 광산과 대장장이니까.”


흑철은 북부에서만 나는 귀한 광물이다. 흑철로 칼을 만들면 용의 비늘조차 자를 수 있고 갑옷을 만들면 창칼로는 감히 뚫을 수 없으니 혈석공 입장에선 몹시 탐이 났을 터다.


만약 흑철로 만든 무구로 군대를 무장시킬 수 있다면 어지간한 적들은 손쉽게 분쇄해버릴 수 있으리라.


“어째서 흑철을 원하는지야 다 알 테고, 중요한 건 대장장이다. 북부에서 그만큼 흑철을 잘 다루는 자는 없으니까. 광산에서 흑철을 캐내더라도 그걸 다룰 줄 모르면 아무 소용이 없지. 혈석공은 대장장이에게 흑철을 다루는 법을 캐내려 했다.”


흑철을 캐내더라도 그걸 제련할 줄 모르면 아무 쓸모가 없다. 그러니 혈석공은 대장장이에게 난쟁이 장인들을 가르치게 할 생각이었을 것이다.


북부의 부족한 생산력으로는 군대를 무장시킬 만큼 많은 양을 감당하지 못할 테니까. 북부에서 흑철을 캐내면 자신의 영지로 옮겨 난쟁이 장인들에게 하루에 몇십 개씩 찍어내도록 할 생각이었겠지.


“놈의 목적은 뭐냐? 물론 목적이야 하나뿐이겠지만······. 내가 궁금한 건 지금껏 조용히 있다가 갑자기 왜 그러냐는 거야.”


군대를 무장시키는 이유야 뻔하지 않나. 전쟁 때문이다. 혈석공은 본격적으로 제위 경쟁에 나설 생각인 것이다.


흑철로 무장한 군대와 북부의 도움이 있으면 충분히 해볼 만한 싸움이라 여긴 것일까.


“무적공이 죽었다는 사실을 알고 있나?”


샬릭이 잠깐 몸을 움찔했다. 그는 짐짓 아무것도 모르는 척 말했다.


“놈이 죽었나?”


“죽었지. 웬 괴한한테 당해서 죽었다고 하던데. 무적공을 죽인 게 북부인이라는 소문도 있어. 아, 물론 이건 그리 중요한 게 아니고······.”


데반이 커흑 하고 기침을 했다.


“중요한 건 놈이 죽었다는 사실이다. 지금껏 서로 눈치만 보고 있던 제국공들이 무적공의 죽음을 기점으로 행동에 나서기 시작했다. 다들 애써 모른 척하고 있던 사실을 직시하게 된 거지. 언제까지고 미루고 있을 수만은 없다는 것을.”


제국공들은 알고 있다. 제위에 오를 수 있는 건 오직 한 명뿐이며 언제까지고 황제를 정하기 위한 싸움을 피할 수만은 없다는 걸.


그런 와중에 무적공이 죽었다. 누구에게 죽었는지는 모르겠지만 어쨌건 죽었다. 무적공이 죽었다는 소식을 들은 제국공들은 모두 똑같이 생각했을 것이다.


누군가 침묵을 깼으니 이제는 움직여야 할 때라고.


“혈석공은 황제가 되겠노라 천명했지. 그리고 내가 북부의 왕으로서 자신을 도우면 제국공 자리를 내리겠다고 하더군. 북부에는 제국공이 없으니 말이야······.”


북부의 왕에서 제국공이 되면 오히려 강등 아닌가? 왕에서 공작이 되는 셈이니까······. 샬릭이 쓸데없는 생각을 하고 있는 사이에 데반이 힘겹게 목소리를 짜냈다.


“지금쯤 혈석공은 일이 틀어졌다는 걸 알았을 거다······. 원래는 나를 하수인 삼아 북부를 통치할 셈이었겠지만 이젠 직접적으로 행동에 나서겠지. 그러니 부탁이 있다, 샬릭.”


“놈을 죽여달라고?”


샬릭이 웃으며 말했다.


“그건 내가 제일 잘하는 일이야.”


호탕한 웃음 소리를 들으며 데반이 만족한 듯 눈을 감았다.




* * *




“데반이 죽었군요. 아무래도 일이 잘못된 모양입니다.”


황금으로 화려하게 장식된 방 안에서 난쟁이 전사 하나가 면목 없다는 듯 고개를 숙였다. 황금과 보석으로 꾸며진 옥좌 위에서 갑옷으로 무장한 난쟁이 무뚝뚝하게 음 소리를 냈다.


그는 갈색 수염을 덥수룩하게 길렀고 얼굴에는 칼자국이 즐비했다. 청색으로 빛나는 두 눈에는 군주로서의 현명함과 전사로서의 노련함이 함께 담겨 있었다.


그는 난쟁이 군주이자 대전사이며 또한 일곱 제국공 중 한 명인 혈석공이었다.


“전하, 놈이 죽었으니 충돌 없이 북부를 집어삼키긴 어렵게 됐군요. 억지로 북부를 복종시키려면 제법 피해가 있을 텐데, 어쩌시겠습니까?”


혈석공이 천천히 고개를 돌려 난쟁이 전사를 쳐다봤다. 그 서늘한 시선에 난쟁이 전사는 저도 모르게 목을 움츠렸다.


“답은 정해져 있지 않으냐.”


혈석공의 목소리는 묵직했다. 그가 황금 옥좌 옆에 세워져 있던 전투 망치를 손에 들었다. 일반적인 근력으로는 감히 들 수조차 없을 만큼 묵직한 무기였다.


“군대를 소집해라. 북부로 간다.”


난쟁이 전사는 공손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혈석공의 결정을 감히 의심하지 않았다.


지금까지 혈석공이 북부를 점령하지 않았던 건 그들이 무서워서가 아니라 언제든 할 수 있는 일이기 때문이다.


다만 지금까지 그럴 필요가 없었기 때문에 하지 않았을 뿐, 하고자 한다면 언제든 할 수 있었다.


그리고 지금이 바로 그 ‘해야 할 때’ 였다. 반항하는 북부인을 모두 죽여버리고 흑철 광산을 점령한다. 또한 대장장이의 신변을 확보해 흑철 무구 생산에 박차를 가한다.


그리하여 충분한 숫자가 흑철 무구로 무장하고 나면 난쟁이 군대는 제도를 향해 달려갈 것이다.


혹자는 제국공 중 가장 강한 존재로 백룡공이나 불사공을 꼽는다. 그러나 난쟁이들의 생각은 다르다. 그들은 혈석공이 백룡공이나 불사공 못지않게 강하다고 믿는다. 그리고 혈석공이야 말로 새로운 제국의 황제로서 가장 적합한 인물이라 여긴다.


혈석공 본인 역시 그리 믿는다. 그는 자신의 강함을 믿고, 난쟁이 군대의 충직함을 믿는다. 그러니 그들은 모든 제국공을 죽여버리고 결국엔 새롭게 제국을 일으킬 것이다.


“내가 황제가 되는 건 정해진 운명이다. 그 누구도 바꿀 수 없어.”


“분명 그럴 것입니다.”


“다만 하나 신경 쓰이는 게 있다면······.”


혈석공이 종이 한 장을 가볍게 흔들었다. 거기엔 이렇게 쓰여 있었다.


이 편지는 아크툴에서 최초로 시작되어······.


“무적공은 불사공에게 이 편지를 받고 죽었지. 그리고 무적공은 죽기 전에 나에게 이 편지를 보냈고. 이게 대체 뭔 의미인 것 같나······? 일종의 저주인가? 아니면 불사공이 나에게 보낸 선전포고일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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