용 찢는 북부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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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7.14 13: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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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9.03 2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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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4

DUMMY

“정말 끔찍한 소리를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하는구나.”


제리얀이 질렸다는 듯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너도 만만치 않아, 제리얀. 궁금해서 묻는데, 혹시 조상 중에 북부인은 없나? 그게 아니고서야 말이 안 되는데.”


이젠 조상 욕까지 하다니? 제리얀이 얼굴을 찡그렸다.


“우리 가문은 남부 출신이야.”


“남부 출신이라면 혹시 알브레임?”


도시 이름을 들은 제리얀이 몸을 움찔했다.


“···알브레임을 알아?”


“알다마다. 애초에 요정들 대부분이 거기 출신이잖아. 그도 그럴 게 요정공의 영지가 알브레임이니까.”


“거기 가본 적도 있고?”


“살기 괜찮은 곳이지. 아무래도 남부다 보니까 따뜻하거든. 토지도 비옥해서 요즘 시대엔 드물게도 식량 사정이 괜찮은 걸로 아는데.”


제리얀이 알브레임의 모습을 머릿속에 떠올렸다. 샬릭의 말대로 살기 괜찮은 곳이다. 자신이 요정이라서 그런 게 아니라 객관적으로 봐도 요즘 시대에 그만큼 살기 괜찮은 곳은 드물다.


“언젠가 거기도 들려야지.”


“거긴 또 왜?”


“왜긴? 가서 요정공도 죽여야 할 것 아니야.”


그 양반은 또 왜 죽인대? 제리얀이 기겁하며 말했다.


“요정공은 용이 아니야. 굳이 왜 죽여?”


“아까 그 반인반룡 놈이 말하는 걸 들어보니 내가 안 죽여도 결국 백룡공 손에 죽게 돼 있어. 이러나저러나 죽을 운명이면 내 손에 죽는 게 낫지.”


그게 대체 뭔 말도 안 되는 논리일까. 제리얀은 샬릭의 말이 이해가 되질 않는다는 사실에 안도했다. 저 말이 이해가 안 된다는 건 아직 자신이 멀쩡하다는 뜻이었으므로.


“요정공뿐만이 아니야. 흑암공이나 그 외의 다른 제국공도 죽여야지. 결국엔 백룡공도 죽여야 할 거고.”


제리얀은 역시나 정신 나간 소리를 지껄이고 있는 샬릭을 보다 문득 물었다.


“그럼 불사공은?”


“그 친구는 왜?”


“안 죽여? 제국공은 다 죽이겠다며?”


“테레모는 내 친구인데 왜 죽여? 북부인도 그런 소리는 안 해.”


내가 왜 저딴 소리를 진짜배기 북부인한테 듣고 있어야 하지. 제리얀은 기분이 나빠졌다.


샬릭이 말을 이었다.


“그리고 다 죽이면 황제는 누가 해?”


아무래도 불사공을 황제로 만들겠다는 소리는 농담이 아니었던 모양이다. 제리얀이 한숨을 내뱉은 뒤에 말했다.


“그 이야기는 나중에 하고. 일단 우리도 떠나야 하는 것 아니야? 무적공의 부하들이 찾아오면 일이 귀찮아질 텐데.”


“그래. 일단 출발하자.”


샬릭과 제리얀은 서둘러 길을 떠났다. 무적공은 그럴 의도가 아니었겠지만, 어쨌건 그의 초대 덕분에 대신전까지 가는 거리를 상당히 단축할 수 있었다.


샬릭이 알기로 여기서 대신전까지는 걸어서 이틀이면 도착할 수 있었다. 방향만 제대로 잡으면 되는데 그것도 크게 문제는 되지 않았다.


“대로로군.”


제국이 건재하던 시절, 길을 잃었다면 대로를 찾기만 하면 됐다. 대로는 제도는 물론이고 제국 각지의 모든 도시와 연결돼 있었으므로 일단 대로를 따라 걷기만 하면 도시에 도착할 수 있었다.


이대로 대로를 따라 쭉 걷기만 하면 대신전이 나올 터였다. 샬릭과 제리얀은 부지런히 걷고 또 걸었다.


대신전까지 가는 길이 순탄하기만 하진 않았다. 언제나처럼 대로를 따라 떠도는 강도들은 물론이고 사람을 잡아먹기 위해 나타난 괴물들도 있었다.


물론 그들이 얼마나 강력하든 샬릭과 제리얀의 상대가 되진 않았다. 제리얀은 샬릭의 강함에 묻혀서 그럴 뿐, 본래부터 강력한 마법사였고 샬릭은 원래부터 강한데 무적공을 이기고 나서 더욱 강해졌다.


“확실히 전보다 몸이 더 가볍군. 힘도 더 세진 것 같고.”


맨손으로 늑대 괴물의 반으로 찢어버린 샬릭이 주먹을 쥐락펴락했다. 제리얀이 보기에 샬릭은 전보다 훨씬 더 강해졌다.


확실히 전에는 괴물을 반으로 찢어버리는 건 못 했던 것 같은데. 반으로 접어버리는 건 가능했던가? 이젠 반으로 접었다가 다시 찢어버리는 것도 가능할지 모르겠다.


어쨌든 이젠 진짜 괴물보다 더 괴물 같은 힘을 얻게 된 셈이다.


“사, 살려주세요!”


괴물조차 샬릭의 상대가 되지 못하는데 강도 따윈 말할 것도 없었다. 그들은 샬릭이 손으로 칼을 부러트리는 걸 보고서 곧장 전의를 상실했다.


현명한 일이었다. 본래 강도 중에는 그래봤자 우리 숫자가 더 많다며 꾸역꾸역 칼 들고 덤비는 멍청이들이 많았으므로.


“살려주는 거야 어렵지 않지. 돈 좀 있나?”


샬릭의 말에 강도들이 반색했다. 그들은 지금까지 열심히 빼앗아온 재물이며 먹을 것 따위를 바쳤다.


흡족하게 공물을 받아든 샬릭이 자리를 떠났을 때였다. 제리얀이 빙긋 웃더니 그들 모두를 태워버렸다.


“왜, 왜······?”


타죽던 중에 강도 하나가 이해할 수 없다는 얼굴을 했다. 제리얀이 얼굴을 찡그리며 답해주었다.


“난 살려주겠다고 한 적 없어.”


“이런 씨······.”


말을 끝까지 잇지도 못하고 강도의 몸이 스러졌다. 샬릭이 휘유 소리를 냈다.


“역할 분담이 확실하군. 우리도 전업 강도 할까?”


전업 강도는 뭘까. 제리얀이 쯧 하고 혀를 차더니 불에 타죽은 강도들을 향해 말했다.


“하여튼 가증스러운 놈들이라니까. 자기들한테 당한 사람들도 제발 살려달라고 빌었을 텐데 기어코 죽였을 테지. 역으로 당하니까 억울하다는 듯 욕을 해.”


“사람이라는 생물이 원래 그래. 자기 당한 것만 생각하고 남한테 한 짓은 기억도 못 하지.”


제리얀이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내일이면 도착하겠는데. 얼른 가자.”


두 사람은 다시 대로를 따라 걸었다. 이 속도로 가면 내일 오후쯤엔 대신전에 도착할 것 같았다.


“확실히 대신전까지 얼마 남지 않은 모양이야. 순례자들이 이토록 많은 걸 보니.”


샬릭이 주변을 둘러봤다. 어제까지만 해도 대로 위에는 두 사람뿐이었지만 지금은 어디서 온 건지 모를 사람들로 가득했다.


그들은 순례자로서 칼록의 성지인 대신전으로 가는 중이었다. 대륙 각지에 흩어져 있는 칼록 신자들이 일생에 한 번 대신전으로 순례를 떠나는 건 유명한 이야기였다.


제국이 건재하던 시절에도 순례는 쉽지 않은 일이었다. 제국의 영토는 광활했고 멀고 먼 길을 걸어 대신전까지 오는 건 몹시 고된 여정이었다.


치안이 안정됐던 그 시절에도 그랬는데 제국이 무너진 지금, 순례는 말 그대로 목숨을 걸고 하는 일이었다.


대로 주변에 널리고 널린 게 강도와 괴물들이다. 또한 같은 순례자 중에서도 사기와 살인이 빈번하게 일어났는데 그만큼 순례길이 고된 탓이다


그런데도 순례 행렬은 매년 끊이질 않았다. 칼록을 믿지 않는 사람의 입장에선 신기하다 못해 이상하다고 여겨질 만한 집착이었다.


“내 고향에서도 순례길에 오르는 요정들이 제법 있었지. 그때도 그랬지만 지금도 왜 저러나 이해가 안 가.”


제리얀은 칼록 신자가 아니다. 당연히 저들의 고행이 이해가 가지 않았다. 그리고 그건 북부인인 샬릭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러니까 말이야. 저토록 열렬히 칼록을 신앙해봤자 그 양반은 신경도 안 쓸 텐데. 날 봐. 난 칼록 믿지도 않는데 오히려 나한테 관심을 가지잖아.”


제리얀이 문득 주머니 속에 있는 발라트의 반지를 만지작거렸다. 생각해보니 이 반지 때문에 여기 온 거였지.


대체 칼록은 뭔 생각으로 샬릭에게 관심을 보이는 걸까? 설마 살인청부라도 하려는 걸까? 그게 아니고서야 말이 안 되는데.


“나도 그 말엔 동의하지만 목소리를 좀 낮추는 게 낫겠어. 요즘 시대에 순례길에 오르는 놈들은 보통 광신도가 아닐 테니까.”


“그 말에 동의해. 그럼 조용히 가자고.”


두 사람은 이제 입을 다물고 순례자들 사이를 지나쳤다. 한참 걷다가 밤이 되자 순례자들은 자연스럽게 서로 뭉치기 시작했다.


이런 곳에선 서로 뭉쳐서 자는 게 훨씬 더 안전하다는 걸 본능적으로 알기 때문이다. 그러나 샬릭과 제리얀은 순레자들과 떨어진 곳에 자리를 잡았다.


애초에 칼록 신자도 아닌데 저들과 한데 뭉쳐 있기가 껄끄러웠기 때문이다.


“괜히 칼록을 믿으라는 둥 그딴 소리 하면 귀찮아져.”


“문득 든 생각인데 북부에는 칼록 신자가 없어?”


샬릭이 나뭇가지로 모닥불을 들쑤시며 말했다.


“북부에서 칼록을 믿은 사람은 다 얼어죽었지만 칼을 믿은 사람은 살았지. 북부에서 믿어야 할 건 날카로운 칼과 뛰어난 칼 솜씨야.”


이건 무신론적인 걸 넘어서 무언가인데. 제리얀이 고개를 끄덕였다.


“내 고향에서는 칼록보다는 에일림을 주로 믿었는데. 알지, 에일림? 무지개의 여신.”


“난 무지개 싫어해.”


정말 되는대로 말하는군. 제리얀이 한숨을 내뱉었다. 두 사람은 그대로 시시한 잡담을 나누다가 잠에 빠져들었다.


잠에 빠졌던 그들은 주변에서 떠드는 소리에 자연스레 눈을 떴다. 아직 날이 밝지도 않았건만 순례자들은 벌써 길을 떠나려는 모양이었다.


두 사람도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나 출발 준비를 끝마쳤다. 이제 대신전이 얼마 남지 않았다.


분명 순례자들이 먼저 출발했건만 샬릭과 제리얀은 그들을 금세 따라잡았다. 신체 능력의 차이도 있을 테지만 지금까지 걸어온 거리의 차이도 있었다.


두 사람은 순례자들을 너끈히 따돌리고서 저 멀리 있는 대신전을 향해 걸었다.


칼록의 대신전은 따로 이름이 없었는데 그 이유는 이름이 필요하지 않기 때문이었다. 대신전은 그저 대신전이었다.


왜 그런가 하면 그 압도적인 위용 덕분이다. 대신전은 거대하다. 이름 그대로 거대하다. 그곳을 한 번 눈에 담는 순간 이곳이 어째서 다른 이름 없이 그저 대신전이라고 불리는지 곧장 깨닫게 된다.


대신전은 신의 집이요, 또한 성전(聖殿)이다. 이곳에 온 자, 정의로울지니.


“어째 전보다 더 커진 것 같은데. 원래 이 정도였나?”


다만 샬릭은 대신전에 대한 경외심 따윈 없었다. 그저 이만큼 크면 청소가 힘들지 않나 생각했을 뿐.


“전에 와봤어?”


“난 안 가본 곳보다 가본 곳이 더 많을걸. 방랑자니까 말이야.”


“그런가. 그래서 우린 어디로 가면 되지? 정말 칼록이 신탁을 내렸을지 아닐지는 모르겠다만.”


“반지 가지고 있지? 줘봐.”


제리얀이 주머니를 뒤적거려 반지를 꺼내는 사이, 샬릭이 지나가던 젊은 사제를 붙잡았다.


“이봐, 하나 물어볼 게 있는데.”


“물어볼 것?”


젊은 사제가 의구심 어린 눈으로 쳐다보자 샬릭이 손에 반지를 쥐었다. 그러자 줄곧 얌전하던 반지에서 환한 빛이 뿜어져 나오기 시작했다.


지나가던 사람들이 전부 쳐다보는 가운데, 젊은 사제의 두 눈이 커졌다.


“다, 당신은? 설마 신탁에 나왔던?”


정말로 신탁이 있었어? 제리얀이 당황하는 사이에 젊은 사제가 말했다.


“큰 키, 딱 벌어진 어깨, 피 묻은 갑옷, 허리춤에 찬 칼······. 신탁에서 봤던 그 모습과 똑같아······.”


“오, 신탁에 내 모습이 나왔나? 그래, 잘은 모르겠지만 내가 바로 그 사람이다. 내 이름은 샬······.”


“멸망의 인도자다! 미친 살육자가 왔다!”


샬릭이 입을 다물었다. 그게 누군데?


작가의말

사자는 좋겠다. 백수의 왕이라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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