용 찢는 북부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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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7.14 13: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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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9.08 2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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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9

DUMMY

“어르신, 또 이러신다. 첫 왕은 이제 없어요. 그분이 언제 사람인데······.”


고드릭이 부드러운 말씨로 타이르자 대장장이가 발작했다.


“첫 왕께서는 살아 계시다! 첫 왕께서는 살아 계시다!”


“원래는 이 정도가 아니었는데 오늘따라 더 심하시네. 어르신, 방으로 모셔드릴게요.”


“첫 왕께서는······.”


고드릭이 대장장이를 데리고 방을 나섰다. 졸지에 샬릭과 둘만 남게 된 제리얀이 크흠 하고 헛기침을 내뱉었다.


“첫 왕이라면 분명 처음으로 북부를 통일했던 그 사람을 말하는 거지? 내가 알기로 그 사람은 옛날 인물일 텐데 설마 지금까지 살아있을 리는 없을 거고······.”


샬릭은 대답하는 대신 다른 이야기를 꺼냈다.


“대장장이 저 친구, 확실히 나이가 들긴 했나 봐. 전에 봤을 땐 아직 정신이 멀쩡했었는데.”


그냥 흘려듣고 넘길 수도 있는 이야기지만 제리얀은 뭔가 걸리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샬릭이 말하는 옛날은 대체 얼마나 옛날일까.


“죄송합니다, 어르신은 재우고 왔어요. 그럼 하던 이야기를 마저 합시다.”


돌아온 고드릭이 미안하다며 고개를 숙였다. 샬릭이 괜찮다는 듯 가볍게 손을 흔들었다.


“그래서 어디까지 했더라······.”


“북부의 왕이 대장장이를 노린다는 이야기까지.”


“아, 맞습니다. 놈은 아이들은 물론이고 대장장이도 원하고 있어요. 가당치도 않은 소리지요. 북부의 아이들은 언젠가 전사가 됩니다. 위대한 싸움을 위해 떠돌다 비참한 죽음을 맞을 수도 있겠지요. 그게 북부인의 운명이니 불쌍하다고 여길 생각은 없습니다. 다만 그런 건 좀 더 크고 나서 해도 되잖아요?”


고드릭이 이어 말했다.


“아이들은 아직 어립니다. 좀 더 뛰어놀고, 좀 더 많은 걸 배우고, 좀 더 자란 뒤에 전장에 나서도 충분해요. 지금은 때가 아니지요. 그런데 북부의 왕인지 뭔지 하는 놈은 이 불쌍한 아이들을 전장으로 내보내려 하고 있습니다. 그래선 안 돼요. 안 되고 말고요.”


험상궂은 인상과 다르게 고드릭은 진정으로 아이들을 아끼고 있었다. 제리얀은 그 마음씨에 감동했다.


“그래, 네 말이 맞다. 죽고 죽이는 거야 커서도 할 수 있는 일이지. 그때가 되면 질리도록 해야 할 거야. 지금부터 할 필요는 없어.”


샬릭도 동의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가 칼자루 위에 손을 올린 채로 말했다.


“그래서 그 북부의 왕이라는 놈 얼굴 좀 봐야겠군. 놈은 어디에 있나? 아, 대충 알 것 같군. 왕 노릇을 하려면 딱 적당한 곳이 있지.”


고드릭이 고개를 끄덕였다.


“강철 왕좌 말이지요. 첫 왕이 죽고 난 이후로 줄곧 비어 있던 바로 그곳.”


“괘씸한 놈, 주제도 모르고 감히 거길 차지해? 용이라도 한 마리 잡았으면 봐주려고 했는데 그것도 아니라니 더 참아주기 어렵군. 그럼 당장 갈까.”


“그래 주시면 너무 감사하지요. 저도 같이 가겠습니다. 강철 왕좌에는 놈의 부하가 쫙 깔렸을 겁니다. 혼자서 위험할 테지요.”


“아니, 너는 아이들을 돌봐야지. 그리고 대장장이 그 친구도 상태가 영 나쁘잖아? 너는 여기 있어. 그리고 제리얀?”


제리얀이 어 소리를 냈다.


“너도 여기 남아라.”


“나도? 아니, 왜? 나까지 빠지면 정말 너 혼자 가야 하는데 괜찮겠어?”


“이건 북부인의 일이야. 넌 명예 북부인이지만 진짜배기 북부인은 아니잖아? 그러니 여기 있어야지. 아이들이나 돌봐주고 있어. 아마 아이 중에 마법에 소질이 있는 친구가 몇 있을 거다. 그 친구들 좀 봐줘.”


고드릭이 반색했다.


“만약 그래 주면 너무나 감사하겠군요. 북부는 전통적으로 칼을 숭상하는 분위기인지라 마법에 대한 지식이 부족합니다. 그래서 마법의 재능을 타고나도 그걸 활용하지 못하는 아이들이 많지요. 하지만 실력 있는 마법사가 도와주신다면 분명 큰 도움이 될 겁니다.”


실력 있는 마법사? 그 말에 제리얀이 허허 소리를 냈다.


“그런 거라면야 내가 도움이 될 수 있겠군요. 그런데 샬릭 혼자 보내려니 마음이 영······.”


“괜찮으니까 여기서 아이들이나 가르치고 있어. 그럼 난 다녀오마. 얼마 안 걸릴 거야.”


샬릭이 방을 나서자 고드릭과 제리얀이 조심히 다녀오라고 말했다.


“그럼 강철 왕좌로 가볼까······.”


샬릭은 고아원을 나와 다시 설산을 내려가기 시작했다. 눈보라는 더욱 심해졌고 그 탓에 시야가 불분명해져서 바로 발 아래도 보이지 않을 정도였다.


그러나 샬릭은 성큼성큼 걸어갔다. 살을 에는 듯한 추위가 느껴지지 않는다는 듯 거침없는 발걸음이었다.


한참 걷다 보니 눈보라는 약해지긴커녕 더욱 기세가 강해졌다. 샬릭 정도 되는 인물이 설산에서 길을 잃는다고 얼어 죽지야 않겠지만 이래서는 쓸데없이 시간이나 낭비하게 될 것 같았다.


샬릭은 잠깐 고민하다가 몸속의 힘을 끌어올렸다. 뜨거운 열기가 사방으로 흘러갔고 세차게 불어오던 눈보라는 그 힘과 마주하자 기세가 약해졌다.


온통 흰 것뿐인 설산 위에서 황금색 빛이 반짝이기 시작했다. 넘쳐흐르는 용의 힘이 주변의 눈을 녹이기 시작했고 그와 동시에 날씨도 변하기 시작했다.


북부에서는 보기 드문, 일 년 중에 몇 번 있을까 말까 한 따스한 날씨였다. 하늘에선 햇살이 내려왔고 불어오는 바람은 아직 차갑긴 해도 그럭저럭 견딜 만한 수준이었다.


눈보라가 멈추자 시야가 깨끗해졌다. 눈도 제법 녹아 걷는 속도를 올릴 수도 있었고. 샬릭은 만족스럽게 고개를 끄덕이며 다시 걷기 시작했다.


“그러니까 이쪽이었나······.”


가물가물한 기억을 토대로 방향을 잡아 걷다 보니 저 멀리 골짜기가 보였다. 샬릭이 알기로 저곳은 북부에서 가장 큰 도시가 있는 곳이었다. 그 이름은 갈리엘라다.


사실 도시라고 하지만 그보다는 요새에 가까운 곳이었는데 북부의 험준한 환경과 지형 탓에 단 한 번도 함락된 적이 없었다.


“아니다, 한 번 함락된 적 있었나? 그때가 아마 첫 왕이 북부를 통일할 때였던 것 같은데.”


샬릭은 갈리엘라를 향해 걸었다. 날씨가 갠 덕분에 도시의 전경이 잘 보였다. 성벽 위에 선 병사들, 바쁘게 성문을 드나들고 있는 사람들, 사냥감을 옮기는 수레 등등······.


그 모든 모습은 샬릭이 기억하던 것과 똑같았다. 그러나 하나 다른 점이 있다면 도시의 분위기다.


‘딱딱하군. 당장이라도 전쟁이 일어날 것 같은······.’


성문에서 따로 검문은 없었다. 애초에 외지인은 여기까지 오지도 못할 것이며 설령 오더라도 갑옷 입고 돌아다니진 않을 테니까.


성문을 통과해 들어온 샬릭은 경직된 도시의 분위기에 미간을 찡그렸다. 갈리엘라는 북부의 심장이고 온갖 북부인이 모여든 탓에 항상 시끌벅적했다. 그러나 지금은 여기 있는 모두가 전쟁 준비에 몰두하고 있었다.


고드릭의 말대로 북부의 왕인가 하는 놈은 전쟁을 일으켜 아래로 내려갈 모양이었다.


물론 그게 나쁘다고 말할 생각은 없다. 북부인은 원래부터 먹을 게 부족하면 아래쪽으로 내려가 약탈을 하곤 했으니까.


그러나 지금까지 단 한 번도 대규모 전쟁을 일으킨 적은 없다. 샬릭이 알기로 모든 북부인은 전사인데, 그 많은 숫자가 아래로 내려가면?


‘바로 밑은 제국공의 영토일 텐데. 아마 그놈이 혈석공(血石公)이라고 했던가······.’


혈석공은 난쟁이 대전사다. 그는 수십 년 동안 난쟁이들의 군주로서 군림해왔으며 북부인들의 남하를 매번 성공적으로 저지해왔다.


북부인에게 있어서 혈석공은 넘을 수 없는 벽과 같았다. 그럴 만한 일이었다. 모든 북부인이 전사라 한들 그건 난쟁이 역시 마찬가지였으며 무엇보다 북부인에겐 왕이 없지만 난쟁이에겐 혈석공이 있었다.


제국공을 제압할 수 있는 건 같은 제국공뿐이다. 북부에는 왕은 물론이고 제국공조차 없었으니 혈석공을 이길 수 있을 리가 없었다.


‘그런데 이젠 이길 자신이 있다 이거지. 북부의 왕이 돌아왔으니 혈석공도 충분히 상대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건가?’


샬릭은 점점 더 북부의 왕에 대해 궁금해졌다. 대체 뭔 자신감으로 혈석공과 싸우려는 걸까? 그리고 그 정도로 강한 놈이 용은 또 왜 안 죽였고?


의문이 점차 늘어간다. 샬릭은 그 의문을 해결하기 위해 도시 중심부로 향했다. 그곳에는 원형의 거대한 건물이 있었다. 북부의 열악한 환경을 생각하면 대체 뭔 수로 지은 건지 의아해지는 바로 그 건물이.


저 건물의 이름은 겨울궁이다. 또한 저 안에는 강철 왕좌가 있다. 첫 왕이 사라지고 난 뒤부터 줄곧 공석이었던.


샬릭은 성큼성큼 걸어 겨울궁 안으로 들어갔다. 안에는 갑옷으로 무장한 북부인들이 바쁘게 돌아다니고 있었다. 전쟁이 멀지 않았다는 게 실감 났다.


“이봐, 넌 어느 가문의 누구냐? 왜 멋대로 근무지를 이탈해서 돌아다니고 있지?”


겨울궁 안까지 들어온 건 수월했는데 그 뒤가 문제였다. 아무리 그래도 북부의 왕이 있는 곳인데 아무나 돌아다니게 하진 않는군.


샬릭이 자신을 붙잡은 북부인을 보고서 말했다.


“북부의 왕인가 하는 놈은 저 안에 있나? 강철 왕좌에?”


“내가 먼저 물었잖아. 어느 가문의 누구냐고. 대답해.”


“아, 내가 누구냐면······.”


쾅! 샬릭이 내지른 주먹에 북부인이 쓰러졌다. 쓰러지면서 갑옷이 바닥에 부딪혀 요란한 소리가 났다. 아마 그 소리를 듣고서 다른 놈들이 찾아올 테지만 그리 신경 쓰진 않았다.


애초에 자신은 북부의 왕인가 하는 놈을 손봐주러 온 게 아닌가. 일단 싸움이 시작하면 다들 모여들 텐데 구태여 조심할 필요는 없다.


“이게 무슨 소란이냐?”


“웬 놈이 겨울궁 안에 들어왔다! 붙잡아!”


“싸움이야? 나도 끼어야지!”


“싸움! 싸움!”


자기 직무에 충실하려는 놈도 있었고 그냥 싸움이 났다니까 신나서 뛰어나오는 놈도 있었다. 샬릭은 자신을 잡기 위해 몰려온 북부인들을 보며 껄껄 웃었다.


“옛날 생각나는군. 그때도 이런 식으로 싸웠지.”


샬릭이 자세를 낮추고 주먹을 쥐었다. 동족을 상대로 칼까지 꺼낼 수는 없지. 그가 바닥을 박차고 뛰었다.


사람이 달려가는 게 아니라 거의 포탄이 날아가는 듯한 모양새였다. 순식간에 거리를 좁힌 샬릭이 주먹을 휘두르자 북부인이 한 방에 나가떨어지는 것만 봐도 그랬다.


몰려온 북부인들은 제대로 무기를 휘둘러보기도 전에 샬릭에게 두들겨 맞고 나가떨어졌다. 그리고 그 요란한 소리 때문에 더 많은 북부인이 몰려왔다.


그러나 샬릭은 신경 쓰지 않았다. 그는 착실하게 도전자들을 쓰러트리며 나아가고 또 나아갔다.


그런 식으로 쓰러트린 북부인의 숫자가 벌써 오십 명. 그리고 오십 한 명째 되는 적을 쓰러트렸을 때, 그는 이미 강철 왕좌에 도착해 있었다.


저 멀리 강철 왕좌가 보였다. 강철 왕자라는 이름 그대로 오로지 철로만 만들어진 무기질적인 장소.


주인 없이 방치됐어야 할 장소에 누군가 있었다. 검은색 갑옷을 입었고 갈색 망토를 두른 남자. 그의 투구 속에서 서늘한 안광이 뿜어져 나오고 있었다.


그 도발적인 모습에 샬릭이 껄껄 웃었다.


“네가 북부의 왕인가 하는 놈이냐?”


샬릭이 목덜미를 붙잡고 있던 북부인을 강철 왕자를 향해 내던졌다. 텅텅 소리가 나며 갑옷이 데굴데굴 굴렀다.


“웬 놈이냐!”


“여기가 어디인 줄 알고 감히!”


주변에 있는 건 대가문의 가주들이었다. 본래 다섯일 텐데 넷뿐인 건 북부의 왕한테 한 명이 죽었기 때문이리라.


그들이 삿대질하며 소리치자 샬릭이 웃으며 말했다.


“영감들 아직 관에 안 들어가셨네? 나 누구인지 몰라? 손가락 분질러줘?”


그 말에 가주들이 주춤했다. 가주 중 한 명이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네놈은 설마······?”


샬릭이 고개를 끄덕였다.


“영감이 생각하는 그거 맞아.”


순간 곳곳에서 새된 비명이 울렸다. 처음 입을 열었던 가주가 허탈한 목소리로 말했다.


“샬릭이라고? 젠장, 우린 다 죽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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