귀족의 품위
엠퓨테이션 평야.
이전에 발생한 영지전에서 쌓은 토성이 현재는 완전히 다른 모습으로 변했다.
커다란 돌을 벽돌 형태로 다듬고, 토성을 뼈대 삼아서 안팎에 쌓아 올린 까닭이다.
견고한 성벽은 어지간한 공성 병기라도 쉽게 무너뜨릴 수 없을 터였다.
커다란 벽돌로 쌓아 올린 성벽 내부가 흙으로 채워져 있어서, 충격을 흡수하는 구조로 되어 있으니까.
공사가 불과 두 달도 안 되는 사이에 끝날 수 있었던 것은, 시엔디 남작가에서 일만 명이 넘는 일꾼을 보냈기 때문이다.
공사 기간의 단축에 필요한 말과 수레도 아낌없이 지원했다.
이제는 정리작업만 남은 상황.
요새를 건설하는 작업에 관리 감독을 맡은 ‘로히튼 갈리무스’가 흐뭇한 얼굴로 요새의 성벽 위에 서 있었다.
오랫동안 이곳에서 임무를 수행해 왔기에, 요새를 감독하는데 가장 잘 어울릴 거로 판단한 미즈던 남작의 명령이었다.
그동안 혹시나 시엔디 남작가에서 수작을 부리지 않을까, 얼마나 신경을 곤두세웠는지 모른다.
무사히 공사가 끝나고 나니, 로히튼 천인장은 무거운 짐을 내려놓은 것처럼 후련했다.
‘이렇게 빨리 완성할 줄은 상상도 하지 못했어. 과연 시엔디 남작가라고 할까?’
완성된 요새의 성벽 위에서 그는 감동하고 있었다.
멀리까지 한눈에 보인다.
이제껏 시야를 가리던 건너편의 야트막한 언덕 너머까지 전부!
이만한 요새를 고작 두 달도 안 되는 시간에 완공할 줄은 꿈에도 생각지 못했다.
적어도 일 년 이상의 시간은 필요할 거로 생각했는데 말이다.
과연 돈이 썩어나는 시엔디 남작가답다고 해야 할까?
이런 대규모 공사를 막대한 인력과 자금으로 해결할 줄이야!
“여기 계셨군요.”
흐뭇한 표정으로 주변을 둘러보던 로히튼 천인장은 뒤에서 들리는 음성에 몸을 돌렸다.
“하하하! 워트 책임자님, 그동안 고생하셨습니다. 드디어 집으로 돌아가실 수 있으시겠군요.”
로히튼 천인장이 자신을 부른 사람을 반겼다.
이번 요새 공사를 지휘하는 인물로, 거친 일을 하는 사람답게 체구가 크고 힘이 남달랐다.
근 두 달에 이르는 시간 동안에, 매일 얼굴을 보며 지내온 사람이다.
심상치 않은 체격과 눈빛 때문에 한때는 의심했으나, 누구보다도 열과 성을 다해 공사에 참여했던 사람이다.
공사를 진행하면서 친구처럼 지내면서 그의 사람을 다루는 솜씨에 몇 번이나 감탄했는지 모른다.
이제 헤어져야 한다고 생각하니 서운한 마음까지 생겨난다.
“조금 더 시간이 필요할 것 같아서 집에 가는 건 조금 뒤로 미뤄야겠습니다.”
“으응? 공사는 다 끝났다고 하시지 않았습니까?”
“저런··· 아직 소식을 듣지 못하신 모양입니다.”
“무슨 소식 말입니까?”
워트의 얘기에 로히튼 천인장이 눈을 껌뻑였다.
“시엔디 남작가에서 미즈던에 영지전을 선포했다고 합니다. 벌써 국왕 폐하께서 내리신 서신이 미즈던 남작가에 전달되었다고 하던데요?”
“그게 정말입니까?”
로히튼 천인장이 깜짝 놀랐다.
“제가 없는 얘기를 지어낼 필요가 있겠습니까. 시엔디 남작가에서 온 친구들 얘기로는, 전쟁을 준비하느라 병사들을 준비시키고 있다고 합니다.”
워트가 심각해진 얼굴로 대답했다.
‘이러려고 시엔디 남작이 그토록 요새를 빨리 완성하게 한 것인가?’
로히튼 천인장의 얼굴은 워트보다 더 심각해졌다.
요새가 완공되는 시점에서 영지전을 선포하다니!
지난 영지전의 결과로 내건 조건이, 10만 골드의 배상금과 요새의 완공.
만약 워트의 얘기가 사실이라면, 시엔디 남작이 요새의 완공을 적극 지원한 것이 이해된다.
국왕에게 영지전의 신청 자격을 얻으려고 공사를 서둘렀다는 거니까.
미즈던 남작에 배상해야 할 요구 조건을 모두 완수했으니, 영지전을 선포하는 것에 격결 사유가 사라진 것이다.
다만,
“사람이 많았다고 해도, 내가 전령을 놓쳤을 리가 없는데, 어떻게 이런 일이···.”
로히튼 천인장이 이마에 손을 짚으며 말끝을 흐렸다.
아무리 기억을 더듬어도 이쪽으로 전령이 지나간 걸 보지 못했기 때문이다.
“당연하지요.”
“네?”
“전령은 여기 엠퓨테이션 요새에서 보냈으니까요.”
“그게 무슨···?”
워트의 얘기에 로히튼 천인장은 혼란스럽다는 듯 말끝을 흐렸다.
뭐가 어떻게 된 얘기인지 도저히 이해할 수가 없다.
“아! 혹시 내가 누군지 모르셨습니까?”
“네?”
로히튼 천인장은 점점 더 알 수 없는 얘기를 해대는 워트를 이상한 눈으로 쳐다보았다.
“쥬크워트 롤렌드, 그게 내 이름입니다.”
“···쥬크워트? 헉! 설마 그 쥬크워트 롤렌드?”
의아해하던 로히튼 천인장이 튀어나올 듯 눈을 크게 떴다.
지난 엠퓨테이션 평야의 전쟁에서 패배하고 물러난 기사단장의 이름이었기 때문이었다.
항시 투구를 쓰고 다니는 바람에 얼굴을 확인할 수 없었던 인물.
눈앞의 사내가 누군지 깨닫는 순간, 로히튼 천인장이 허리춤의 롱소드를 서둘러 잡았다.
하지만,
“늦었어, 인마.”
쥬크워트가 손바닥을 로히튼 천인장의 가슴에 대었다.
손바닥이 그의 가슴에 닿는 순간, 포스의 기운이 일어나 폭발을 일으켰다.
퍼엉!
“으아아아!”
포스의 기운에 떠밀린 로히튼 천인장이 구슬픈 비명을 흘리면서 요새의 성벽 아래로 떨어졌다.
사람들의 시선이 쏠린 것은 당연한 일.
쥬크워트는 목걸이의 펜던트에 손을 얹고는 성벽 가장자리에 섰다.
촤르르륵!
포스의 기운을 받아들인 목걸이가 갑옷으로 변화하고, 흉갑에는 방패에 붉은 장미가 그려진 문양이 또렷하게 드러났다.
“시엔디의 기사들이여! 병사들이여! 요새를 함락하라!”
포스를 담아 크게 소리쳤다.
―훠어! 훠우우!
그러자 이제껏 일꾼인 줄 알았던 사내들이 함성을 내질렀고, 짐이 실린 줄 알았던 마차의 천이 벗겨지면서 무장한 기사와 병사들이 튀어나왔다.
그들은 당황하는 미즈던 남작의 병사들에게 덤벼들었다.
일꾼으로 위장했던 병사들은 요새 근처에 숨겨 두었던 창을 꼬나쥐고 덤벼들었다.
공사가 끝났다는 생각에 마음을 놓고 있던 미즈던의 병사들은, 속수무책으로 시엔디의 병사들에게 당해 쓰러지기 바빴다.
일방적인 살육의 현장을 내려다보던 쥬크워트가, 미즈던 영지가 있는 방향으로 몸을 돌리고는 으스스하게 웃었다.
“미즈던 남작, 이번에야말로 쓴맛을 보여줄 것이야. 특히 내 어깨에 구멍을 뚫어 놓은 후계자 놈. 각오해야 할 거다.”
***
제드는 저마다 떠들어 대는 얘기를 들으면서 머릿속이 복잡하게 돌아갔다.
‘시엔디 남작이 벌써 트로치 자작가를 흡수한 후유증을 극복했다고? 조금 있으면 겨울이 올 텐데··· 하긴··· 별 상관은 없겠어. 거리가 가까우니 보급과 병력 교환이 어려운 건 아닐 테니까.’
겨울에는 전쟁을 하지 않는 법이라고 했지만, 시엔디 남작에게는 의미가 없다는 걸 새삼 깨닫는다.
거리가 가까워서 언제든 문제를 바로바로 해결할 수 있을 테니 말이다.
“요새에 주둔 중인 로히튼 천인장을 불러들이고, 농성전으로 가야 합니다. 머지않아 국왕 폐하께서 몬스터 토벌령을 발동하실 겁니다. 그때까지 버티기만 하면 됩니다.”
계속해서 요격을 반대하던 잭슨 단장이 농성전으로 가야 하는 이유를 밝혔다.
하지만 헤이미 단장은 전혀 동의하는 기색이 없었다.
“통상 11월 말, 혹은 12월 초에 몬스터 토벌령이 내려와요. 그렇다면 최소 한 달 이상을 농성전으로 버텨야 한다는 얘기죠. 지난번 트로치 자작과 벌인 농성전에서, 우리 성이 반나절 만에 뚫렸다고 하지 않았나요?”
“당시에는 준비가 미흡했습니다. 하지만 지금은 농성 병기를 확충하고 성벽을 대대적으로 증축하지 않았습니까.”
“시엔디 남작은 트로치 자작가를 흡수하고서 병력을 확충했어요. 그뿐인가요? 릴레아 단장이 복귀했다는 소식도 들었죠? 기사단의 전력도 강화되었을 거예요.”
“말씀 잘하셨습니다. 요격에 나섰다가 기사단이 돌진해 오면 릴레아 단장은 누가 상대할 겁니까?”
“제가요.”
벌게진 얼굴로 잭슨 단장이 지적하자, 헤이미가 본인의 가슴을 손가락으로 톡톡 두드리면서 말했다.
말다툼을 벌이는 두 사람의 기분이 상했다는 건, 딱딱하게 굳어진 얼굴만 봐도 답이 나온다.
그들의 분위기가 과열될수록, 일반병을 지휘하는 군단장들이 입을 꾹 다물었다.
‘귀족이 되면 좋을 줄 알았는데, 꼭 좋은 것만은 아니야.’
험악한 분위기로 말싸움을 벌이는 두 기사단장을 바라보는 제드가 가볍게 한숨을 내쉬었다.
귀족의 신분을 얻었으나, 그다지 달라진 건 없었다.
유일하게 위안 삼을 만한 거라곤, 꼴 보기 싫은 훼데커가 이 자리에 참석하지 못했다는 정도?
똑같은 부단장의 위치에 있으나, 제드는 후계자의 신분이었기에 회의에 참석할 수 있었던 거다.
그다지 기쁘다고 말할 수 없는 차별이긴 했지만 말이다.
오히려 이 골치 아픈 회의에 참석하지 않은 휘데커가 부럽다고 해야 할까?
‘하긴 미즈던 남작이 저렇게 고민하는 걸 보면, 귀족이 마냥 좋은 것도 아니긴 하지. 젠장! 욕심을 조금만 버리면 이런 일은 없었을 건데.’
입맛이 쓰다.
영지전의 이유가 엠퓨테이션 평야의 소유권 때문이다.
미즈던 남작이나 시엔디 남작 중 하나가 소유권을 포기하면 깔끔하게 해결될 일이다.
어차피 엠퓨테이션 평야는 소유권 문제로 싸우느라 농사를 짓지 못한 지 오래되었으니까.
‘미즈던 남작이 양보해도 결국은 시엔디 남작이 더 욕심을 내겠지. 이제는 거의 자존심 싸움이 되어버렸어. 단순히 귀족의 신분을 얻는 것으론 의미가 없어. 강한 힘이 필요한 거야.’
힘.
결국은 힘이 있어야 귀족의 신분도 의미가 있다.
만약 미즈던 남작에게 강력한 힘이 있었다면, 지금처럼 두 명의 기사단장이 방어 문제로 이렇게 다투진 않았을 터다.
물론 힘이 있었다면 시엔디 남작령을 공격하는 문제로 다퉜을 테지만.
제드가 씁쓸해하는 동안에도 헤이미 단장과 잭슨 단장의 대화는 계속 이어졌다.
“현실적으로 생각하십시오. 릴레아 단장은 한계를 뛰어넘느라 이제껏 전쟁에 참가하지 않았을 뿐이오. 그녀가 모습을 드러냈다는 건 익스퍼트 중급의 경지를 개척했다는 의미입니다. 그런데도 상대할 자신이 있습니까?”
“물론이에요.”
“근거를 말씀해 주십시오.”
“현재 우리 기사단 전력은 200명이 넘어요. 시엔디 측은 우리보다 숫자가 적거나 비슷하거나 그렇겠죠?”
“그거야 뭐···.”
탐탁지는 않았으나 인정할 수밖에 없는 잭슨 단장이었다.
시엔디 남작의 기사단은 렐레아 단장과 그리고 세 명의 강자가 존재한다.
각각 쥬크워트 롤렌드와 비스비 트리드, 그리고 레임 호프만.
이렇게 세 명의 기사는 서부에서 각각 단장급 실력을 지녔다고 평가받는다.
실제로도 지난번 전투에서, 잭슨 단장이 얼굴조차 알려지지 않았던 쥬크워트를 상대로 고전했다.
아니, 고전이라기보다는 버티는 게 고작이었고, 죽임을 당하기 직전에 제드의 도움으로 살아남을 수 있었다.
나머지 두 명의 기사도 쥬크워트와 막상막하의 실력을 지녔다는 걸 알고 있다.
다만,
그들 외에는 눈에 띌 만큼의 실력자가 없다.
시엔디 기사단에 포스를 깨우친 기사들이 많을 수는 있겠지만, 미즈던 기사단도 그에 못지않은 실력자들을 보유한 상황.
릴레아 단장을 상대할 수만 있다면, 기사단 전투에서 형편없이 깨지진 않을 터다.
“트로치 기사단이 했다는 전술을 우리가 사용하면 돼요.”
“······.”
헤이미가 자신만만하게 대답했다.
어이없어하는 잭슨 단장이 뭐라고 하기도 전에, 그녀가 덧붙여 말을 이었다.
“저와 휘데커, 그리고 제드 부단장이 릴레아를 합공하면 문제는 해결돼요. 나머지 세 명은 피닉스 기사단이 자존심만 조금 버리면 상대할 수 있을 테고요.”
“으음···.”
잭슨 단장은 신음을 흘리면서 머릿속으로 상황을 그렸다.
가능은 할 것 같았다.
이전부터 실력을 인정받았던 오베로 트로폰, 와이드 카마라, 안토니오 베라스··· 등등.
그들과 잭슨 단장의 실력은 그날의 컨디션에 따라 결과가 달라질 정도로 수준이 엇비슷하다.
‘지담 더글라스 경과 톤즈 베리핀 경이 보조로 돕는다면, 놈들을 상대하는 게 불가능하지는 않을 것도 같군.’
확실하게 승리할 수 있다고 장담할 순 없지만, 상대하는 정도는 가능할 것도 같았다.
지담과 톤즈의 실력이 근래에 무서운 속도로 늘어가는 중이라서 기대되기도 하고.
게다가,
‘제드 부단장, 저 친구의 실력이 헤이미 단장을 넘어선 것도 같고···.’
잭슨 단장이 무표정하게 앉아 있는 제드를 슬쩍 바라보았다.
헤이미와 대련을 벌일 때, 두 사람은 비등비등한 수준의 공방을 펼친다.
뒤로 갈수록 제드가 밀리는 형태로 대결이 끝나곤 하지만, 잭슨 단장은 두 사람이 대결할 때마다 고개를 갸웃거리곤 한다.
승리한 헤이미가 오히려 훨씬 더 지쳐 보이는 광경을 여러 번 목격했으니까.
“?”
자신을 바라보는 잭슨 단장의 모습에 제드가 의아해했다.
도와 달라는 듯한 눈빛이었으니까.
하지만 그래서는 곤란하다고 생각했다.
잭슨의 편을 든다면, 헤이미 단장을 몰아붙이는 분위기가 될 테니까.
그러니 두 사람의 얘기에 끼어들기가 뭐해서 잠자코 있는 중이다.
농성할 것인지 요격할 것인지, 그것을 먼저 결정한 뒤에 의견을 내도 될 문제니까.
생각 같아선, ‘썅! 주둥이 털 시간에 빨리 결정하고 대응 방침부터 세웁시다!’라면서 소리치고 싶은 마음이 굴뚝이다.
벌써 한 시간이 넘도록 대책 회의가 지지부진하게 늘어지고 있으니까.
‘귀족의 품위를 지켜달라는 약속도 있었으니 참아야지.’
제드가 한차례 혀로 이를 닦으며 미즈던 남작을 슬쩍 쳐다보았다.
후계자로 공표하고서 미즈던 남작이 당부한 내용이 귀족의 품위를 지켜달라는 거였다.
그런 제드의 모습에 잭슨 단장은 안도할 수 있었다.
전쟁을 앞두고서도 전혀 긴장한 듯한 모습이 아니었으니까.
‘릴레아가 아무리 한계를 넘어섰다고 해도 제드 부단장과 헤이미 단장이 함께 싸운다면··· 거기에 휘데커 부단장까지 가세한다면?’
이길 수도 있다!
잭슨 단장은 머릿속이 맑아지는 기분이었다.
막 헤이미 단장의 얘기를 지지하려던 그때였다.
쾅쾅쾅!
집무실의 문을 부술 듯이 두드리는 노크 소리.
대답을 기다릴 생각은 처음부터 없었던 것처럼 집무실의 문이 활짝 열렸다.
하얗게 질린 얼굴의 영지 전속 마법사 드숀이었다.
“영주님! 엠퓨테이션 요새가 시엔디 남작에게 함락되었다고 합니다!”
““!!””
뜻밖의 소식에 대책 회의를 진행하던 수뇌부가 찢어질 듯 눈을 부릅떴다.
“젓 됐네, 시발?”
제드가 바람이 빠지는 듯한 음성으로 중얼거렸다.
상황이 이 지랄인데, 귀족의 품위는 개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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