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쟁, 그리고 또 전쟁.(2)
영지 분위기가 좋지 않았지만, 그래도 큰 공을 세웠기에 보상을 기대하고 온 제드다.
하지만 시엔디 남작이 대뜸 전쟁을 준비한다는 얘기부터 꺼낸다.
그가 기대했던 얘기가 아닌 것을 넘어서, 무언가 어려운 부탁을 하려는 듯한 미즈던 남작의 표정.
‘이건 좀 아닌 거 같은데?’
제드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살아남겠다는 일념으로 기울어가는 전투를 끝끝내 승전으로 이끈 그다.
미즈던 남작의 표정을 보니 다시 끔찍한 전투를 치러야 할 것 같은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이번 전투로 이천 명가량의 병사가 목숨을 잃었다네, 알겠지만, 기사단에도 절반이 넘는 피해가 발생했지.”
“안타까운 일입니다.”
제드가 무겁게 입을 열었다.
생각 같아서는 ‘널 지키던 놈들을 투입했으면, 그렇게까지는 안 당했어!’라고 말해 주고 싶었다.
기사 전력의 부족으로 발리 단장이 죽은 건 뼈아픈 손실이었으므로.
차라리 전투 시작과 동시에 영주가 물러났다면, 기사단 전력이 분산되지 않았을 것이다.
그랬다면 발리 단장도 죽지 않았을 테고.
“성의 보수는 물론 주변 정리를 할 시간이 필요해. 여기 잉그램 경이 고위 클래스의 마법사를 초빙하기로 해서 한시름 덜었지만, 이곳에 도착하는 건 3일 후에나 가능하다고 하는군. 거리가 멀어서 영지에 도착할 때까지는 시간이 필요하다는군.”
“제가 해야 할 일은 무엇입니까.”
제드는 직접적으로 물었다.
빙빙 말을 돌리는 건 의미가 없다고 보았다.
귀족의 언어라는 건 멀미가 날 정도로 서두가 너무 길다.
지루하게 밑밥을 깔아 놓는 게 많아서, 듣고만 있다가는 속이 터질지도 모른다.
특히 지금처럼 다른 사람이 있는 자리에서는 사족이 길어도 너무나 길다.
그럴 바에는, 깔끔하게 결론만 듣는 게 나았다.
“마법사와 용병이 도착할 때까지 자네가 2군단 일만의 병사와 기사단을 이끌고 엠퓨테이션 평야에서 시엔디 영지군을 잠시만 막아주게.”
“······.”
차마 흔쾌히 대답할 수 없는 제드였다.
얘기를 들은 지담과 톤즈의 얼굴도 딱딱하게 굳었다.
치열하게 싸운 것이 불과 어제의 일이다.
또다시 전투를 치러야 한다는 부담감이 묵직하게 가슴을 짓누른다.
“적의 규모는 파악되었는지요.”
제드가 차마 떨어지지 않는 입을 열어 말했다.
이미 답은 정해져 있고, 미즈던 남작이 얘기를 번복할 생각도 없어 보인다.
“병사 이만 명이 출정을 준비하고 있으며, 7~80명의 기사가 준비하고 있다는 보고였네. 이유는 모르겠지만 다행스럽게도 릴레아 단장은 모습을 드러내지 않고 있다는 소식이야.”
“···그렇군요.”
가장 강력한 기사가 빠졌다는 건 그다지 위로가 되지 못했다.
두 배의 병력 차이에, 기사단의 숫자에서도 밀린다.
단지 기사의 숫자에서만 밀릴까?
질적으로도 문제가 있다.
두 번의 전투에서 살아남은 기존 기사의 숫자는 잘 쳐줘야 40명 내외.
나머지 기사는 병사들 사이에서 차출한 급조된 전력일 뿐이다.
하지만,
‘단순히 시간만 끄는 것뿐이라면?’
가능할 것도 같았다.
“이번 일만 해낸다면, 자네가 원하는 걸 들어 주도록 하지. 후계자의 자리를 원한다면 그것도 가능하네. 귀족의 신분을 얻은 뒤에 분가하는 형식으로도 귀족의 신분은 유지할 수 있으니.”
미즈던 남작이 큰 결심을 했다.
현재 그가 할 수 있는 최대한의 협상 조건이기도 하다.
제드를 양자로 들여 후계자로 만들 수 있다.
정식 후계가 없기에 가능한 일이었고, 뒤에 후계자의 자리에서 물러나도 귀족의 신분은 유지할 수 있다.
물론 후계자에서 물러나면 작위를 물려받을 수는 없지만, 일단 귀족의 신분을 얻은 뒤에는 작위를 얻기가 쉬워진다.
“영주님, 당장 출발하겠습니다.”
제드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귀족의 신분을 주겠다고 한 것도 이유지만, 이번 전투는 시간이 생명이라고 판단했다.
“그, 그런가? 여기 명령서일세. 가져가게.”
“감사합니다. 하루, 하루는 어떻게든 막아 낼 수 있도록 해보겠습니다.”
제드가 비장한 얼굴로 군례를 올렸다.
그 뒤를 따라 지담과 톤즈가 얼떨떨한 얼굴을 하고서 쫓아갔다.
세 사람은 영주관을 완전히 빠져나올 때까지 한 마디도 하지 않았다.
“미안하게 되었다. 하지만 시간이 급해서 어쩔 수 없었어.”
“이 미친 자식아! 귀족이 되고 싶어서 머리가 돌아버린 건 아니고?”
지담이 와락 인상을 쓰고서 대답했다.
“형님, 이번엔 너무 성급하셨습니다.”
톤즈 또한 눈살을 찌푸리면서 곤란한 표정으로 제드와 시선을 맞췄다.
“영주님의 명령 거부할 수 있어? 너희가 나였다면 그럴 수 있겠어?”
““······.””
지담과 톤즈가 입을 꾹 다물었다.
불가능하다.
부탁이라는 형식을 취하고 있었지만, 미즈던 남작은 명령을 내린 것이다.
거부권 따위는 없다.
만약 명령을 거부하기 위해서 기사의 직을 내놓는다면···
귀족을 모욕한 죄가 성립될 터였다.
차라리 미즈던 남작의 명령을 듣기 전에, 기사직을 내놓았다면 또 모르겠지만.
“최대한 빨리 병사와 기사를 이끌고 엠퓨테이션 평야로 가야만 한다. 아직 놈들은 출발하지 않았으니, 우리가 먼저 도착한다면 시간을 벌어 주는 것 정도는 가능해.”
“함정을 만들자는 거냐?”
“그러려고. 놈들을 붙들고만 있으면 되는 거니까.”
“쉽지는 않을 거다. 최악의 경우에는 맞서 싸워야 할 거야.”
지담의 얼굴이 조금은 펴졌다가 다시금 어두워졌다.
빠듯한 시간을 활용해 함정을 얼마나 만들 수 있을지, 알 수 없기 때문이다.
“당장 출발해야 해! 생각은 가면서 하자고.”
지담은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애초에 거부할 수 없는 명령이다. 지금은 고민할 시간조차 아껴야 할 때였다.
“좋아! 어떻게든 이번에도 살아남는 거다!”
제드가 몸을 돌렸다.
***
제드가 엠퓨테이션 평야 도착한 것은, 미즈던 남작의 명령을 받고서 반나절만이었다.
하루거리 꼬박 강행군해야 할 거리를 반나절에 주파할 수 있었던 것은, 미즈던 영지의 말과 수레를 총동원한 까닭이다.
전시 상황이라서 모든 전쟁 물자가 총동원된 상태였기에 가능했던 일이기도 하다.
병력을 이동하는 데 사용한 700여 대의 수레는 토성을 쌓는 기초로 사용했다.
1,500마리의 짐말들은, 보병을 기마대로 둔갑시켰고.
적을 기만하기 위해서는 뭐든 해야만 하는 상황이다.
전투가 시작되면, 짐말들은 일제히 시엔디 남작군을 향해 달리게 할 계획이다.
적의 대열을 흩트리는 용도로만 활용할 수 있어도 제 역할은 다하는 거니까.
엠퓨테이션 평야에서 미즈던 남작성으로 향하는 언덕 아래에 오천여 명의 병사들이 토성을 구축하는 중이다.
거창하게 높이 쌓을 계획은 없었다.
그저 시간 벌이를 위해서 길을 막는 용도의 토성에 불과하다.
아마도 다음 날 이른 오후쯤에나 토성을 완성할 수 있을 것으로 예상된다.
병사들이 타고 온 수레로 기초를 다지는 데 투입했기에 가능할 수 있는 미친 짓.
그리고 나머지 오천 명의 병사는 토성 앞마당에 함정을 만드는 중이다.
“사령관 각하.”
“그리널리 군단장님, 부담스럽습니다. 콜버트 경이라고 불러 주십시오.”
제드가 민망한 표정으로 말했다.
이전에 시엔디 남작군과 함께 싸웠던 ‘그리널리 스웨이지’의 2군단은 이번에도 엠퓨테이션 평야에 출정한 것이다.
당시의 제드는 기사단에 갓 입단한 신입 기사에 불과했었다.
사령관이라는 직함을 감당하기엔 부담스러운 제드였다.
하지만,
기사단의 전투를 현장에서 직접 보았던 그리널리 단장은, 제드를 단순히 어린 기사로만 보지 않았다.
제드의 활약이 없었다면 당시 병사를 이끌고 곧장 진격할 엄두도 내지 못했을 터였다.
이번 전쟁에서 보여준 활약도 엄청났고.
“무슨 말씀을 그렇게 하십니까. 사령관 각하가 아니었다면 우리 미즈던은 이틀 전의 전투에서 끝장났을 겁니다.”
그리널리 군단장이 가볍게 고개를 흔들었다.
눈앞의 제드는 그가 보았던 기사 중에서 가장 기사다운 인물로 평가했다.
트로치 자작이 약속을 어기고 공성전을 벌였을 때,
뛰어난 판단력과 기사로서는 수치일 수 있는 파격적인 공격으로 전세를 뒤집었다.
이런 사람이라면 나이가 많고 적음을 떠나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사령관 각하의 부족한 경험을 내가 채워 준다면, 이번 전투도 어떻게든 임무를 마칠 수 있을 것이야.’
그리널리 군단장이 굳은 각오를 드러내는 가운데, 입가에 한 가닥 옅은 미소가 떠올랐다.
병사들의 목숨을 도외시하는 보통의 기사와는 달랐다.
병사들의 체력을 보존할 방법에 대해서 가장 먼저 논의해 왔고, 그리널리 단장은 짐말과 수레를 이용하자고 답을 주었다.
토성과 함정을 이용해 싸우자는 의견에도 흔쾌히 동의하는 모습은, 그리널리 군단장이 생각했던 보통의 기사와는 궤를 달리했다.
‘어쩌면 이번 전쟁이 끝난 후에는 기사단장의 자리에 앉을 수도 있겠어. 그렇게 되면 최연소 기사단장이 탄생하는 건가? 아니, 영주님께서 후계자로 삼겠다고 약속하셨다는 얘기도 있으니···’
망상에 불과할 수도 있지만, 단순히 망상으로 끝나지만은 않을 거로 생각하는 그리널리 단장이었다.
기사들이 제드에게 보내는 눈빛에서 신뢰 이상의 무언가를 발견한 것도 그런 판단을 부추긴 원인이기도 하다.
일반 병사들조차 제드를 보는 눈에 존경과 선명의 감정을 내비치는 중이다.
미즈던 남작이 아이를 낳지 못한다면, 차기 영주는 제드가 될 확률이 높았다.
“그리널리 군단장님 같은 분께서 몸을 아끼지 않고 싸워주신 덕분입니다. 저는 그저 기사로서 해야 할 일을 했을 뿐입니다.”
제드가 고개를 흔들었다.
지금은 상대의 칭찬에 헤실거릴 때가 아니다.
시엔디에서 출발한 병력은 아군의 두 배이며, 기사단의 숫자도 아군이 열세에 있다.
최대한 전장을 아군에게 유리하게 만들어야, 미즈던 남작이 내린 명령을 완수하게 될 터였다.
“겸손한 모습이 보기 좋습니다. 하지만 사령관의 위치에서는 조금 더 강인한 모습을 보여 주십시오. 우리의 병사들은 강합니다. 병사들에게는 부탁이 아닌 명령이 필요합니다.”
“···알겠습니다. 조언 감사합니다.”
제드가 고개를 끄덕거렸다.
‘맞아, 지금은 전시 상황이지. 그리널리 군단장의 말처럼 지금 상황에서는 강압적인 명령이 필요해.’
정말 크게 배웠다.
이틀 전의 농성전에서 싸울 당시에도 기사들이 자신에게 원했던 것은 ‘명령’이었다.
이번 임무는 자신은 물론, 기사들과 병사들에게 힘겨운 임무가 될 터였다.
온화한 명령은 그들을 약하게 만든다.
강인한 기사와 병사에겐 강인한 명령만이 그들을 더욱 강하게 해줄 것이다.
“별말씀을··· 그보다 말씀드리고 싶은 것이 있어서 찾아와 놓고는, 흰소리만 늘어놓고 있었습니다.”
“말씀하십시오. 그리널리 군단장님. 새겨듣도록 하겠습니다.”
“저기 양옆으로 참호를 파고서 몸이 날랜 병사들을 궁수로 배치하고 싶습니다. 놈들의 수가 많은 만큼, 그리하면 상당한 전과를 올릴 수 있을 듯합니다.”
그리널리 군단장이 토성을 쌓는 곳에서부터 400미터가량 떨어진 지점의 좌우를 가리키면서 말했다.
미즈던 병사들이 보유한 복합궁의 위력이 가장 위력을 발휘하는 거리.
“좋은 의견입니다. 다만 퇴로가 확보되지 못하니, 그게 걱정입니다.”
“그거야 병사들이 감수해야 할 문제입니다. 이번 작전은 시간 끌기가 목적인 만큼, 각자 10발의 화살을 발사 후 곧장 영지로 복귀하라 명령하면 그뿐입니다. 오히려 궁병 녀석들은 좋아할 것입니다.”
그리널리 군단장이 어깨를 으쓱했다.
화살 몇 번 쏴주고서 알아서 퇴각하라고 한다면, 기꺼이 임무에 자원할 녀석들이 수두룩하다.
토성을 방패 삼아 싸운다고 해도, 두 배에 달하는 적을 상대로 벌일 전투보다는 위험부담이 훨씬 적으니까.
“군단장님께서 그렇게 말씀하시니 부담감이 줄어드는군요. 몇 명이나 배치하는 게 좋겠습니까.”
“좌우 합쳐서 500명 정도가 적당하겠습니다. 시엔디 놈들에게 혼란을 주는 게 목적이니까요.”
“알겠습니다. 조치 부탁합니다.”
제드가 고개를 살짝 숙이면서 허락해 주었다.
“감사합니다.”
그리널리 군단장이 가슴에 주먹을 올렸다 내리고는 그대로 돌아섰다.
뒤돌아서서 멀어져 가는 그의 뒷모습을 지켜보던 제드가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시발, 젓나게 부담스럽네.”
이제껏 포커페이스를 유지하던 그의 입에서 앓는 소리가 흘러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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