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9
" ..어떻게 깨운거지? "
" 어? "
카리아의 시선이 고정되어 있어서 뭘 말하는지 알것 같았다.
" 그냥 별거 없었어. 그냥 품에 넣어뒀더니 깨어나더라..한 1주일 쯤 걸렸나? "
" ...디아나의 에로스.. 만월의 교접.."
내 대답을 바라고 한 질문 같지 않았다.
카리아는 뭔가 홀로 생각에 잠겨 깊이 몰두하며 중얼거렸다.
도둑이 제발 저린 달까?
그야말로 화들짝 놀랄 내용!
' 에..에로스?..교접..?! '
혹시 교접은 커녕 홀로! 단신으로! 짝 없이도 해낸 내가 대단했었던 걸까?
카리아가 혹여나 뭐라도 눈치라도 챌까봐 내심 조마조마한 마음을 억눌러야했다.
' 그냥..꾸..꿈이었다고. 꿈...뭐, 그럴 수 있는거 아냐? '
시선이 손목에서 펄떡거리는 지랄이에게 닿았다.
지랄이의 잡아채 억지로 손목에서 떼어냈다.
더 이상 이 지랄을 막지 않으면 뭔가 상황이 악화될 것 같은 안좋은 예감 때문이었다.
심혈을 기울여 열정을 폭발하고 있던 녀석이 앙칼지게 손가락을 앙 깨물었지만, 신경쓰지 않고 놈을 기어코 손목에서 떼어냈다.
" 뀍! 뀍!! "
소중한 뭔가를 억울하게 뺏기기라도 한듯 사정없이 바동거리는 녀석을 나도 모르게 슬쩍 등뒤로 감췄다.
멍하니 한 곳을 응시하던 카리아가 천천히 눈을 돌렸다.
나도 모르게 카리아의 시선을 쫒아 창밖으로 시선을 향했다.
창밖에는 어둠과 그 속에 고고히 떠 있는 보름달이 보였다.
여러모로 어두운 이 세상을 홀로 밝히고자 그저 혼신을 다하는 중일 뿐인 달.
크게 다른 것도 없었다.
막 시선을 카리아에게 다시 돌리려는 찰나.
퍼억!
...
**
눈을 떴다.
정신이 들자마자 황급히 몸을 내려다 보았다.
흐트러짐조차 없는 몸 상태.
' ..또...꿈인가? '
휘황청 밝은 달빛 아래 그 몽환적이었던..
...
" 에효..이 미친 놈.."
뒤통수를 벅벅 긁었다.
기억을 더듬었다.
그런데, 왜 내가 또 의식을 잃었지?
-똑똑.
" ...일어났으면 잠깐 이야기 좀 하지. "
카리아의 목소리였다.
왠지 지금 그녀와 마주하기가 조금 민망했지만, 그렇다고 둘러댈 핑계거리가 없었다.
" 잠..잠깐만.."
허둥지둥 침대에서 일어나며 대답했다.
잠시 후 밖으로 나가니 카리아가 익숙한 모습으로 소파에 앉아 있었다.
나도 모르게 머뭇거리며 그 앞 소파에 조신하게 앉았다.
왠지 부끄러운데 왜 그런지 이유를 알수가 없다.
그런 나를 잠시 나를 바라보던 카리아가 입을 열었다.
" 앞으로 여기서 지내도록 해. "
내 의사 따위는 조금도 상관없다는 듯 칼같이 단호한 태도였다.
고압적이라는 생각마저 들 정도다.
머리 속이, 가슴이 차갑게 식었다.
" ..뭐라고? "
" 회사에는 내가 미리 손을 써뒀으니까, 너는 앞으로 내 로드 매니저로 움직이면 될거야. "
" ..뭐? 매니저? "
이번에도 조금의 의사를 묻는 법이 없다.
자기가 시키면 당연히 그렇게 따라야 한다는 듯.
묵혀뒀던 감정이 다시 고개를 쳐들었다.
카리아는 이야기가 끝났다는 듯 소파에서 일어나려 했다.
기분이 확 상한다.
매번 이런 방식, 태도가 언짢고 불쾌했다.
" ..싫은데? "
일어서려던 카리아가 우뚝 멈춰섰다.
더는 이렇게 끌려다니고 싶지 않았다.
이해도, 의향도 묻지 않고 지 맘대로 하는데에 이제는 정말 분통이 터진다.
보호한다는 명목으로 그저 멍청히 납득하는 것은 이제 끝이었다.
그 잘난 보호도 이 모양이라면 더 이상 의탁할 생각도 없었다.
" 너, 뭔가 착각하는 것 같은데.."
조용히 다시 소파에 앉아서 뭔가를 이야기를 하려는 카리아의 말을 내가 끊었다.
" 착각은 내가 아니라 넌 것 같은데? 내가 왜 네 시키는대로 해야하지? 뭣 때문에? 그 잘난 보호? 한 달간 질리도록 경험했고 이제는 싫어. 뒈지던 뭐 하든 이제 내가 알아서 할꺼니까 필요없어!"
" ...홀로 어떻게 할건데? "
" 네가 왜 신경을 쓰는 거지? "
" ..."
카리아의 눈빛이 가라앉았다.
시선을 마주하고 같이 서로를 노려보았다.
잠깐의 정적.
카리아가 작은 한숨과 함께 먼저 입을 뗐다.
" 계약금 10억. "
카리아가 나를 응시하며 말했다.
" ?? "
뜬금없는 소리에 내가 의문을 표할 때..
" 일라이를 편하게 해준 것에 대한 보답은 네 말대로 한 달간의 보호로 나 역시 이미 넘치도록 했다고 생각해. 아니, 이서까지 붙인 것은 사실 과하다고 생각이 들 정도였다. 그런데도, 왜 그랬는지 알아? "
" ..."
" 네게 느껴지는 이 유대감..그와 같은 경험을 내가 과거에 느껴본 적이 있어서였다. 그리고 그 경험은 내게 아주 소중한 것이다. 부족에서 너를 찾으려고 하는 것을 애써 막아낸 것도 그래서였지. 그동안 계속 고민했고.. 그래서.. "
다음 말이 살짝 궁금해졌다.
" 너에게 내 독단으로 선대 상타(성녀)에게서 계승 받은 '열려버린 피토스'를 주었다. 무의미하고 헛된 망상일 뿐일 지라도, 나는 해보고 싶었다. 그런데, 열려버린 피토스에서 진정으로 그 존재가 깨어나 버릴 줄은 사실 예상치 못했어. "
카리아의 말을 전부 이해할 수는 없었지만, 대강 문맥 상 열려버린 피토스의 의미가 지랄이가 들어있었던 보석인 듯 싶었고, 그 존재가 지랄인 것 같았다.
' 근데 지랄이가 뭐라고?? '
앞니를 아무대나 갈아대는 말썽쟁이에 나름 귀엽다는 것 말고는 아무짝에..
아, 눈알을 파먹고 날 구해주기는 했었구나..
" 그 존재는 지금의 우리에게 유일한 희망이나 다름이 없다. 그리고, 그 존재가 너를 따르고 있다는 이야기를 이서에게서 전해들었다. 그래서 네게 제안을 하는 것이다. "
" 너를 정말 제대로 안전하게 보호하기 위해서는 나와 같이 있는 편이 가장 좋고, 나는 앞으로 네가 하는 일들을 자세히 확인해야 할 필요가 있다. 그러니, 계약을 맺자. 앞서 말한대로, 계약금 조로 내가 10억을 챙겨주겠다.
물론, 회사측에서 받는 월급과는 별개로 내가 주는 것이고, 만약.."
' 만약? '
" 네가 성공한다면, 계약금의 10배를 성과급으로 주겠다. 은빛 달을 걸고 맹세하겠다. 어때? "
10배?
그럼..100억?
..요즘 가장 잘 나가는 월드 스타이니 그 정도의 돈도 없이 사기치는 것 같지는 않았다.
게다가 은빛 달까지 건다고 하니, 제안은 진짜인 듯 한데..
" 근데, 뭘 성공해야한다는 거지? "
" 그건 지금 말해줄 수 없어. 승낙한다면 말해주지. 계약을 하겠나? "
계약..
먼저 떠오르는 것은 10억이라는 금액보다, 더 이상 그녀와 수직적인 관계가 아닌 대등한 입장에서 관계가 형성될 수 있다는 점이었다.
괜한것에 고집을 부리는 것 같기는 했지만, 그것만으로 왠지 반 이상 혹하는 제안이기도 했다.
잠시 생각을 정리하며 이것저것을 따져본 뒤 내가 물었다.
" ..내가 네 옆에서 알짱거리면 지금 날 노리는 녀석들이 그 사실을 모를 리가 없을텐데.. 내가 안전하다는 보장은? "
" 그들이 너의 존재를 알게 되더라도 못 건들게 만들 수단이 있어. 그러니 그것은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 "
아~ 그래요? 하면서 카리아의 말만 덜컥 믿고 걱정하지 않을 만큼 순진하지는 않다.
" 그러니까 그 수단이 뭐냐고? "
" 너를 내 소달리스라고 할 생각이다. "
" 소달리스가 뭔데? "
" 배우자. 종족 번식을 위한 짝이다. "
" 버..번식..? 뭐!? "
" 너를 내 소달리스로 하겠다고 선포하면, 부족장은 분명히 반대할 것이다. 부족 내 나의 직책은 상타(성녀)이고, 상타의 소달리스 선택은 내게 주어진 중요한 의무이자 귄리이다. 또한, 상타의 소달리스는 상타의 명맥을 잇게 하기 위해 매우 중요한 자리이므로, 부족장은 분명 부족 대회의를 통해서 거부권을 행사할 것이고, 그 때문에 소요되는 기간은 적어도 6개월 이상. 그 정도의 시간이라면 다음 계획을 위한 준비는 충분히 할 수 있을 것이다."
순간 얼이 빠져서 멍하니 카리아를 바라보고 있었다.
번식..
번식이라니?
나도 모르게 연상되는 이런저런 생각이 꼬리에 꼬리를 물 무렵..
" 뀍뀍! "
지랄이가 어느새 나타나, 내 발목에 매달려 허리를 흔들어대기 시작했다.
그 능수능란함에 혀가 내두를 정도다..
불쾌감이 머리 속의 므흣한 상상들을 한 번에 날려버렸다.
- 테이밍 대상 『 지랄이 』 와의 친화도가 1 증가 합니다.
들려오는 알림은 신경도 쓰이지 않았다.
" 너, 이 씨!!.."
뭔가 반응이 이상했는지 지랄이가 올려다보다가 내 눈과 딱 마주쳤다.
- 테이밍 대상이 당신의 태도에 의아함을 품습니다.
그때.
언제 움직였는지 내 발 앞에 카리아가 쭈그려 앉았다.
그녀의 시선이 또 지랄이에게 꽂혀 떠날 줄 몰랐다.
상황이 되게 묘해졌다.
발에 붙은 지랄이를 떨쳐내고 싶은데, 너무 진지한 카리아의 태도 때문에 또 뭔가 가만히 있어야 하는건가 싶기도 하고..
' 계속 이대로 있어야 하나? 이건 또 갑자기 뭔 상황이냐고..'
투덜거리며 카리아에게 시선을 두던 나는 속으로 헛숨을 들이켰다.
' 헙!!!..'
얼른 고개를 급히 틀었다.
' 얼굴 붉히면 안돼. 자연스럽게. 아무일 없이!! '
다짐과 달리 스물거리며 올라오는 내심.
...D?
무조건 한이서보다는 더 대단했다.
'이런..흠..흠!..내..내가 일부러 그런게..'
어디둬야할지 모를 시선을 거실 이곳저곳으로 돌렸다.
" 뀍~뀍!! "
지랄이의 현란한 움직임이 더욱 격렬해졌다.
- 테이밍 대상 『 지랄이 』 와의 친화도가 1 증가 합니다.
- 테이밍 대상 『 지랄이 』 와의 친화도가 1 증가 합니다.
...
잠..잠깐!
지금 이럴 때가 아니다. 약간 위험해.
내가 이렇게 발정난 미친 놈이었나?!
뭔가 화제의 전환! 분위기의 환기가 필요한 시점이었다!
" ..그건 너무 안일한 생각같은데? 소달리스니까 나를 가만히 나둘 것이라고 어떻게 보장하지? 그리고 나는 그런 어그로를 끌고 싶은 마음이 없어! "
" ..."
카리아는 내말에는 아랑곳없이 지랄이의 지랄만을 바라보고 있었다.
" 야! "
빽 지른 소리에 그제서야 눈을 떼고 자리에서 일어나 나를 마주보았다.
지랄이는 오직 율동에 몰두하고 있는 터라 신경도 쓰지 않았다.
그 지랄이를 다시 한번 내려다 본 카리아가 내게 말했다.
" 부족장의 수완이 내 예상보다 훨씬 대단했어. 사실 나도 그가 헌터들을 끌어들일 수 있을 정도라고는 생각하지 못했을 정도로. 그리고, 이미 네 위치는 부족장의 귀에 들어갔고, 네가 기절해 있는 동안 이미 너를 요구해온 상황이야. "
" ..."
" 현재 다른 방법은 없어. 지금 네가 무사한 것은 내가 이미 소달리스라고 부족장에게 공표를 한 덕분이야. 그리고 난, 계속 이곳에서 머무를 수도 없지. 어떡할래? "
제안처럼 말하더니 이미 벌어진 상황이었다.
' 이런 씨..'
**
" 다시 말해봐. "
" 상타께서 그 자를 소달리스로 하겠다고 합니다. "
테나키스의 얼굴 근육이 꿈틀했다.
" 죽여라. 특급 전사들을 보내서 그 놈을 죽여라. "
".. 부족장님, 그 자에게 이미 '카스티타스'의 낙인이... 넘어갔다고 합니다. "
콰직.
테나키스가 앉은 의자의 손잡이가 그의 손길에 박살이 났다.
" ..."
방안에서는 오직 잔뜩 숨 죽인 호흡소리만이 냉랭하게 흘렀다.
" ..카리아를 감시하던 전사들을 불러라. 그리고, 제루나스를 보내라. 그에게 지금까지의 사실을 알려주고 한 마디만 전해라. 믿고 기다리겠다고. "
" 예. 부족장님. "
" 그리고, 전령을 보내 장로들에게 부족회의의 개최하겠다고 전달해라. 안건은.."
" ..."
명을 기다리던 은빛 부족 엘프의 목울대가 움직이며, 힘겹게 침을 삼켜냈다.
" 상타의 처분. "
" 예? "
대답을 했던 엘프 사내가 황급히 머리를 땅에 박았다.
" 용서해주십시요. 부족장님! "
서늘한 테나키스의 시선이 그의 뒷목에 닿았다.
그 서늘한 시선이 점점 번들거려갔다.
엎드린 사내는 느껴지는 그 농도짙은 살기에 그저 몸을 떨 뿐이었다.
잠시 후 테나키스의 입이 무겁게 열렸다.
" 더 이상의 상타는 필요없다. 이미 그 직책의 구실도 의미도 사라진 지금.. 더구나 상타는 고작 벌레와 붙어먹고 부족의 명예를 시궁창에 처박았다. 분명하게 장로들에게 내 뜻을 전해라. "
" 예! 부족장님! "
엘프 사내는 황급히 인사를 하고, 방을 벗어났다.
그의 뒷모습을 보며 테나키스는 의자 깊숙히 몸을 묻었다.
마치 시간이 정지된 듯, 그렇게 그는 조금도 움직일 생각이 없었다.
한참의 시간이 흐른 후.
" 움브라.."
테나키스의 뒷편의 벽면의 그림자가 일렁거리더니 한 인영이 서서히 모습을 드러냈다.
" 그들에게 전해라. 장로 딜리겐스를 처리하라고. 가급적 잔인하게. "
"..."
그림자는 모습을 드러냈던 것처럼 서서히 벽면으로 사라져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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