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
딱한 마음이 들었다.
지젤의 성질머리로 볼 때 이 녀석은 오늘부로 짤리거나, 억지로 버틴다고해도 앞으로의 직장 생활이 순탄치만은 않을 것이었다.
그 썅년한테 배정된 순간부터 녀석의 불행은 이미 시작된 것과 다름없었겠지만..
억세게 재수없는 이 놈은 시킨대로 하다가 하필 또, 임자를 잘못 만나 버려서 이 꼴이다.
" 어쩔껀데? "
" 예? "
" 지젤 그 년이 널 가만히 냅두겠냐? "
" ..."
" 아니면, 또 덤벼볼래? "
" 아니요.."
덩치에 어울리지 않게 놈이 처량하게 대답했다.
짠해졌다.
' 하..씨..'
그냥 쌩까고 무시하면 그 뿐이었다.
먼저 싸우자고 한 것도 놈이었고, 난 그저 싸워준 것 뿐.
내코가 석잔데 남의 일까지 배놔라 감놔라 할 만큼 내 오지랍이 넓은 것도 아니었다.
근데, 왠지 계속 신경이 쓰인다.
아무래도 지젤 그년의 진면목을 봐버려서 그런 것 같기도 했다.
그리고 녀석의 삭은 얼굴이 한 몫을 한 것 같기도 하고..
' 가만..'
누가 뭐래도 내 본업을 테이머였다.
지금이야 이래저래 상황에 얽혀서 카리아를 따라 다녀야하지만, 앞으로 계속 그럴 것은 아니었다.
내 기반은 미리미리 준비해놔야했다.
더구나 원래 내 사무실을 지금 한 달이나 비운 상태.
월세가 계좌에서 알아서 빠져나가고 있으니 그냥 임대비만 계속 주고 있는 실정이었다.
은빛 부족의 정보망에 걸린 이상 그곳을 처분할 필요도 있었다.
처분이야 사람을 시켜서 하면 되겠지만..
내 새로운 사무실을 마련하고 그것을 관리해줄 누군가도 필요해보였다.
지금까지 나와의 접점이 전무한 이 녀석이라면..
은빛 부족의 정보력이 아무리 훌륭하다고 해도 이 녀석과 나의 연결점을 알아내기는 쉽지 않을 것이었다.
" 너, 이름이 뭐냐? "
" 김봉..입니다."
허참..이름도 봉이다.
" 너, 혹시 동물 키워본 적 있냐? "
" 예? "
" 고양이, 개, 닭, 소! 뭐, 그런 거 키워본적 있냐고? "
" ...고양이 두 마리를 키우고 있기는 한데..그걸 왜.."
흠..
나쁘지 않다.
" 너도 알다시피 너 여기 더 못 다녀. 알잖아? "
" 네.."
" 지젤 년 비위맞추면서 계속 여기서 일할거야? "
"..."
" 너, 한달에 얼마 받는데? "
" 280이요.."
" 너 일한지는 얼마나 됐는데? "
" 다음 달이면 이년이요.."
'씨발..2년을 일했는데 그것 밖에 안돼?'
물론, 월급 때문에 여기온 것은 아니지만, 짜도 너무 짰다.
놈이나 나나 받는 것은 비슷할 테니..
그 돈 받고, 지젤한테 조리돌림 당하느니 차라리 내 업장을 관리하는 것이 백번 나을 듯 싶었다.
24시간 대기상태인 매니저 생활보다야 훨씬 널널 할테고..
당장은 그냥 사업체 유지만 할 생각이니 더욱 그럴 것이었고 말이다.
" 내가 한달에 350씩 줄께. 하는 일은 그냥 사무실 관리, 동물 관리 정도 밖에 없으니 훨씬 편할꺼고. 어때? "
" 예? 그게 무슨 말씀인지..? "
" 나 원래 마수 길들이고, 교배시켜서 파는 일 했었거든. 디그나 이브라 같은 것들 말이야. 그것들 들어는 봤지? "
" 예."
놈의 반응이 생각보다는 괜찮았다.
특히 이브라를 언급했을 때 놈의 반응이 상당히 긍정적이었다.
" 지금은 사정상 이러고 있긴 한데, 계속 할 건 아니라서.. 내 사업장 관리랑 잡일만 해주면 되는데, 너 안할래? "
" 저..정말요? "
" 야, 내가 뭐하러 너 붙잡고 헛소리하고 있겠냐? 진짜라니까. 다만, 사정 상 4대 보험 같은건 나중에 되는 조건이다. "
" ..."
놈이 눈알을 굴리는 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다.
그럴테지.
그래도 번듯한 직장을 때려치우는 건데, 내 말만 믿고 덜컥 저지르기에는 마음에 걸리는 것이 당연했다.
그 정도로 사리분별을 못할 정도면 아예 내 쪽에서 먼저 사양이고.
" 저..4대 보험 미가입은 불법인데요? "
" 어, 괜찮아. 당분간 네가 사장할꺼니까. 물론 바지 사장이지만."
" 예? "
" 사업장은 네 이름으로 만들거야. "
" ...??"
" 현재 마수 브리더는 자격증이 필요하지만, 일반 동물 브리더는 자격증이 필요없어. 넌, 그냥 내가 지원하는 돈으로 펫샵을 오픈하고, 후에 내가 참여할 때, 인수하는 형식이나 고용되는 형식으로 들어가면 되는 거니까."
펫샵은 원래부터 내 계획의 일부였다.
이브라를 포획하고, 테이밍해서 내 전용 펫샵을 통해 판매할 생각이었으니.
지금같은 성장세라면 나중에는 이브라가 아니라 다른 더 매력적인 마수들도 테이밍 가능할 듯 하니 내 사업은 충분한 가능성이 있었다.
" 저..절 어떻게 믿고.."
뭘 믿어, 믿기는..
녀석은 지금 그럴싸한 펫샵을 꿈꾸고 있는 모양인데, 전혀 아니었다.
그저 예전처럼 작은 사무실 구하고, 그곳을 사업장으로 등록하고 펫 샵이라고 그저 오픈만 할 뿐 다른 지원은 계획에 전혀 없다.
" 야, 너 너무 나가는 것 같은데? 내가 참여하기 전까지 이름만 펫 샵이지 제대로 된 장사를 하는 것도 아니거든? 그냥 사무실 지키고, 뭐..할일 이라면, 사육용 먹이쥐 같은거 키운거? 그게 다야. "
" 그..그게 아니라, 350씩 준다고 하셨고...제 이름으로 가게 오픈도 하겠다고 하시고., 뭐 때문에 그렇게 좋은 조건으로 채용을 해주신다는 건지..그냥 궁금해서요. "
' 아..그말이었나? '
" 지젤 그 미친년 밑에서 2년간 일한 것만 봐도 딱 알지. 나 같으면 일주일, 아니 하루도 버겁거든.. "
"..."
이건 진짜 진심이었다.
하나를 보면 열을 안다고, 좀 심기 거슬린다고 지 매니저 시켜서 주먹다짐 시키게 만드는 년이 결코 정상 일리가 없었다.
" 어때? 계약서 쓸까? "
" ...감사합니다..형님.."
덩치 큰 녀석이 눈물을 뚝뚝 떨군다.
곰같은 녀석이 마음은 생각했었던 것 보다 더 여린 모양.
이런 녀석이 이 년 동안이나 그 독사같은 년 밑에서 악착같이 버텨왔을 것을 생각하니 더 짠해져 왔다.
놈이 삭은 게 그냥 태생이 그런 것이 아닐 수도 있을 것 같아서..
' 에효..'
슬쩍 다가가 닭똥같은 눈물을 뚝뚝 흘리는 놈의 어깨를 어색하게 토닥 거려주었다.
참..이게 뭔 지랄인지..
" 으..흐흐흑..."
김봉이 더 서글프게 몸을 들썩이며 눈물을 쏟아냈다.
김봉을 보내고 대기실에 돌아오니, 한이서가 앉아있었다.
" 어딜 그리 싸돌아다녀요? 지리도 잘 모르면서. "
말투는 살짝 삐딱했지만, 그 속에 담긴 걱정에 미소를 지어보이며 대답했다.
" 화장실요. 근데, 이서씨는 어디 갔다가 온 거예요? "
" 뭐, 어딜 가겠어요? 팀장님한테 끌려갔다가 이제 풀려났죠. 뭐.."
한이서의 얼굴에 어두운 빛이 나타났다가 순식간에 사라졌다.
맹하긴 하지만 한 번도 항상 밝고, 씩씩하던 그녀에게서 처음보는 모습이라 놓칠 리가 없었다.
" 왜요? "
나의 조심스러운 물음에 한이서는 살짝 주저하더니 결국 푸념하듯 말했다.
" 에효..뭐, 언니가 팀장님한테 메이크업이랑, 스타일링 안받고 나 한테만 받겠다고 하니까 그렇죠 뭐..팀장 그 여자는 배알이 꼴리니까 죽어라 나만 갈구는 거고요. 뭐, 어쩔 수 있겠어요? "
' 참..'
한이서의 상황이 딱하기는 하지만 그 팀장이라는 여자가 이해가 안되는 바는 아니었다.
회사에서 제일 잘나가는 연예인을 더 예쁘게, 더 화려하게 꾸미는 것이 그 팀장의 일이고, 그가 관리하는 부서의 일인데, 그게 고작 한이서 혼자서 담당하게 되어 버리니 오죽 답답할까..
물론, 자존심도 상하기도 하겠고.
' 하여튼..그냥 좀 두루뭉실하게 하면 오죽 좋아? 별 나기는 그냥.. '
이건 뭐라해도 명백히 카리아의 잘못이다.
그녀의 고집이 같이 고생하며 일하는 한이서를 힘들게 만드는 것.
카리아가 한이서 만을 믿고, 의지한다는 것이 마냥 한이서의 입장에서 좋을 수만은 없는 것이었다.
" 화장실 갔다가 온게 아니라, 다른 매니저한테 끌려갔다왔죠? "
훅 들어오는 물음.
" 얼굴은 상한 것 같지 않고..다른데 맞았어요? "
" 저, 안맞았는데요. "
말하는 것으로 보니, 한 두번 이런 일이 생겼던 것이 아니었던 것 같았다.
'여긴 도대체 뭐하는 데야?'
" 이그, 나한테까지 그렇게 자존심 안세워도 돼요. 보아하니, 완전 싸움도 못하는 것 같더만.."
내가 싸우는 걸 언제 보기나 했었나?
지하 창고에서 탈출할 때 한이서가 사내들과 싸우던 것 비교하면.. 뭐 딱히 할말이 없기는 했지만..
어쨌든 한덩치하는 김봉이를 때려 눕혔지 않은가?
그렇다고 그 사실을 자랑스럽게 떠벌려 대기도 유치하고, 쌈 잘한다고 대우를 더 받는 것도 아니니 그냥 조용히 입을 다물었다.
" 힘들어도 좀 참아요. 언니..., 사실 제일 많이 힘든데 참고 있는거예여. "
마치 누나같은 눈으로 나를 바라보며 한이서가 말했다.
우쭈우쭈해준다고 할까?
24인 카리아를 언니라고 부르니까, 나보다 적어도 일곱살은 어린 그녀한테서 이런 식으로 우쭈우쭈 받으니 기분이 묘하기는 했다.
" 그럼, 그냥 때려치우면 안되는거예요? 솔로로 활동하거나, 뭐, 그럼 안돼나? 계약이 걸려있어서 그런거예요? "
" 그게 말처럼 쉽나요.. 계약도 계약이고.. 뭐, 따지자면..결국, 다 돈 때문이죠. 아, 몰라! 이 더러운 세상! 에라이! 퉤퉤!! "
한이서는 뭔가 말하려는 듯하다 말을 아꼈다.
화제를 바꾸려는지 행동도 과장스러웠다.
뭔가 사연이 있기는 한 것 같았다.
나 역시 궁금하지 않은 것은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굳이 파고들려고 하지 않았다.
내가 안다고 달라질 것도 없었고, 더군다나 카리아에게 이미 나는 십억이나 받았다.
뿐인가?
앞으로 그 열배를 더 받아내려고 이 자리에 있는 나 인데, 딱히 더 알아서 내 입장만 난처해질 뿐이었다.
한이서에게도 미안해질지 모르고.
' 내코가 석자인데, 내가 카리아 걱정을 하는 것도 우습지..뭐..'
그냥 신경질적으로 머리를 벅벅 긁고 말았다.
그때, 한이서의 전화기가 울렸다.
채 두번이 울리기도 전에 전화를 받은 그녀가 벌떡 일어나며 말했다.
" 예, 지금 갈께요. "
전화를 끊은 한이서가 내게 말해주었다.
" 언니, 끝났데요. 어서 가요. 기다리게 하면 안되요. 얼른요. "
말과 동시에 잡아끄는 통에 황망하게 끌려 대기실을 벗어나야 했다.
**
시그니엘 서울, 로얄 스위트 룸.
지난번과 다른 객실에 묵게 되었다.
일단 전망 하나는 기똥찼다.
일박에 이천만원이 넘는다는데, 그 돈 값에 비하자면 이정도의 야경은 수수하다 할 것 같기도 했다.
거실에 비치된 넓은 소파에 앉은 카리아가 말했다.
" 당분간 이서도 나와 함께 지내는 것으로 하자. 다음 주 부터, 신곡 녹음이랑 연습 때문에 바쁠 것 같아. 그러니, 처리해야 할 일 있으면 미리 해두고. "
" 네. 언니. "
카리아의 시선이 내게 잠깐 머물렀다가 멀어졌다.
그 말을 끝으로 카리아가 소파에서 일어나 자신의 방으로 사라졌다.
" 전, 잠깐 나갔다 와야되니까, 언니 거슬리게 하지말고, 저기 비서관 전용객실이 있던데 거기서 꼼짝말고 있어요. 알겠어요? "
" 예.."
한이서는 뭔가 바쁜 일이라도 있는 모양인지 그 길로 객실을 벗어났다.
나는 한이서가 시킨 대로 비서 전용 객실에 들어가 침대에 앉았다.
비서관용이라는데 왠만한 호텔 스위트 룸과 다를 바가 없을 것 같았다.
' 참..팔자에 이런대도 다 와보고..뭐, 나쁘지는 않네..'
그대로 벌렁 몸을 침대에 뉘였다.
푹신푹신한 것이 아주 편안했다.
" 뀍.."
그때 이제까지 완전히 존재감을 잊고 있던 지랄이 녀석이 품에서 기어나왔다.
이제 막 잠에서 깼는지 털이 이리저리 짓눌려 부스스한 모습이 상당히 귀여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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