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19 혁명(2)
4월 19일 오전 10시 경무대에서는 이송만 대통령과 각료들이 긴급회의를 하고 있었다.
이송만이 답답하다는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자네들도 보고를 받아서 알겠지만, 학생들이 거리로 뛰쳐나왔어. 큰일 났어. 어떻게 할 거야?”
내무부 장관이 대답하였다.
“어제 고려대생 1000명이 시위를 벌였고 오늘은 몇 개 대학이 나온 것뿐입니다.”
“뭐가 몇 개야? 내가 보고 받기에는 서울 시내 많은 대학과 고등학생까지 뛰쳐나왔다고 하던데.
그냥 놔두었다가는 젊고 혈기 왕성한 학생들이 흥분하여 이성을 잃고 때려 부수고 날뛰면 큰일 아닌가? 대책은 있는 거야?”
“어제 고려대생들이 315 부정 선거를 규탄하면서 재선거를 요구했지만, 평화적으로 시위가 마무리되었습니다.
크게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단순히 선거 부정뿐만 아니라 다른 요구들이 더 있는 건 아니고?”
이번에는 체신부 장관이 대답하였다.
“아무래도 학생들이 공산주의자들의 선동에 놀아나고 있는 것 같습니다.
지금이야 학생들이 사리 분별하지 못하고 흥분한 상태이지만 정부에서 지속적으로 설득하면 학생들도 이성을 찾고 자기들이 공산주의자들 선동에 놀아났다는 것을 알게 될 겁니다.
그럼 다시 학교로 돌아갈 겁니다.”
내무부 장관이 다시 입을 열었다.
“제가 생각하기에는 선거에 관련된 각료 일부와 자유당 인사 일부를 교체하면 민심을 수습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그거로 무마될까? 내가 생각하기에는 부족해.”
“그렇다고 요구대로 선거를 다시 할 수는 없습니다. 표 차이가 작으면 몰라도 무려 600만 표 이상이 나기에 재선거는 의미가 없다고 봅니다.
시간과 재정만 낭비하는 꼴이지 결과는 바뀌지 않습니다.”
짜증내며 물었다.
“그래서 대책은 뭐야? 잠잠해질 때까지 가만히 있자는 거야? 이래서 어떻게 자네들과 국정을 운영해 나갈 수 있겠어?
다른 의견 좀 내 봐.”
“민주당의 협조를 받는 것은 어떻겠습니까? 제가 민주당 구파와 협상을 했었는데 재선거 아니면 개헌을 하자고 합니다.”
“신파도 그렇게 하겠대? 개헌 논의는 국정이 더 혼란하고 시끄러워질 수 있어.”
“민주당도 민주당이지만 자유당도 내부적으로 문제가 있습니다.
혁신파라고 불리는 국회의원들이 이번 선거를 책임지고 당무 의원들을 물러나라고 합니다.
또 당무 의원들은 국회 의장 자리를 놓고 의견이 사분 오분 분열되어 자유당이 한목소리로 힘을 내기가 어려운 상황입니다.
이 문제부터 해결해야 합니다.”
이송만이 답답하다는 표정을 한 채 짜증스럽게 내뱉었다.
“지금 이 자리는 거리로 나온 학생들 문제를 해결하라고 마련한 자리야. 왜들 동문서답만 하고 있어.
해결책을 내놓으란 말이야.
이래서야 내가 자네들을 믿고 정사를 할 수 있겠어? 난 갈 테니 좋은 해결 방안을 강구하란 말이야.”
말을 마친 이송만이 자리에서 일어나 회의장을 나갔다.
이송만이 나가자 공보실장이 큰소리쳤다.
“지금 뭐하자는 겁니까? 각하의 심기를 헤아리지 못하고 왜 어지럽힙니까?
선거가 끝난 지 한 달이 넘었는데 그동안 국무 위원들은 뭐 하고 있었습니까? 놀고만 있었습니까?
처음 시위가 발생했을 때 국민들이 납득할 만한 대책을 내놓았다면 전국적으로 시위가 발생하지도 않았을 테고 지금 이 시간 서울 시내에 성난 시위 군중들이 몰려있지도 않았을 겁니다.
이런 사태를 만든 것은 바로 여러분들이고 이러고서도 나라를 이끄는 국무 위원의 자격이 있단 말입니까?
창피한 줄 아십시오.”
“그럼 최 실장이라도 나서지 그랬습니까?”
“내가 담당 장관입니까? 내가 그럴 권한이 있습니까? 내가 주무 장관이었다면 벌써 그렇게 했습니다.
정신들 차리세요. 이건 여러분들 일이란 말입니다.”
***
오늘부터 시작되는 419 혁명은 특정 주도 세력 없이 학생과 시민들의 민주주의 열망, 부정 선거, 부패한 권력에 자발적으로 봉기한 대한민국 역사에서 큰 획을 짓는 역사적인 국민 저항 운동이었다.
하지만 사무실에 앉아 있는 나는 아무것도 할 수가 없었고 아무 생각 없이 그냥 멍하니 있었다.
‘똑똑’
노크 소리가 들리고 부관 김태승 중령이 들어왔다.
“각하! 방금 황도일 중위에게 보고가 들어왔습니다.”
“상황이 어떻대?”
“보고에 따르면 현재 시내에는 서울대생을 비롯하여 고려대, 동국대, 연세대, 성균관대, 건국대, 중앙대 등 서울 소재 여러 대학생과 대광고, 용문고, 양정고 등 고등학생들, 시민들 수만 명이 모여 ‘현실을 직시하라.’, ‘데모가 이적이냐? 폭정이 이적이냐?’, ‘민주주의 바로잡아 공산주의 타도하자.’라는 구호를 외치고 노래를 부르며 시위를 지속하고 있다고 합니다.
그리고 조금 전에 의사당 앞에 모여 있던 시위대 중 누군가가 경무대로 가자는 말에 시위대가 둘로 나뉘어 경무대와 서대문 이규봉 집으로 향하고 있다고 합니다.”
결국은 경무대로 향하는구나. 그곳에서 발포가 이루어져 많은 희생자가 나올 텐데.
민주주의는 피를 먹고 자란다고 하지만 이기적이고 포악한 기득권 세력에 왜 죄 없는 국민들이 희생되어야 하는지 너무나 안타까웠다.
419 혁명으로 주권은 국민에게 있고 정부는 국민을 위한 정치를 해야 하며 국민의 지지와 신뢰를 받지 못하는 정권은 존립할 수 없음을 알았다.
또한, 허약하고 무능한 정부, 경제, 사회적 기반이 취약한 국가는 민주 발전이 어렵다는 것도 419를 통해 알 수 있었다.
광복과 더불어 받아들인 서구 민주주의는 모방과 이식으로만 정착될 수 없고 사회에 깊게 뿌리 내리기 위해서는 많은 희생과 고통이 따른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
하지만 역사는 수레바퀴처럼 돌 듯이 기득권자들은 역사의 교훈을 잊고 잘못과 실수를 반복하며 현대까지 이어지고 있었다.
인간의 욕심이 모든 일에 원인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지방은 어떤가?”
“지방에서 올라온 보고에 따르면 지방도 마찬가지랍니다.
각 지방 소재 대학과 고등학생들이 거리로 뛰쳐나와 전국적으로 시위가 벌어지고 있다고 합니다.”
“알았어. 계속 시위대 동향 보고하라고 해.”
“알겠습니다.”
김태승 중령이 나가자 또다시 멍한 상태가 되었다.
얼마나 시간이 지났는지도 모른 채 멍하니 있던 중 갑자기 문이 열리며 김태승 중령이 뛰어 들어왔다.
“각하! 큰일 났습니다.”
뭔지 알 수가 있었다.
“경무대 앞에서 경찰들이 시위대를 향해 무차별 실탄 발포를 하여 사상자가 수십 명이라고 합니다.
사상자는 계속 늘어날 것 같다고 합니다.
지금 경무대 앞은 피로 범벅이고 아수라장이 펼쳐지고 있다고 합니다. 어떻게 학생과 시민들을 향해 실탄을 발포할 수 있단 말입니까?
경찰이 제정신입니까? 어느 나라 경찰입니까? 31운동 때 일본 순사들의 모습을 보는 것 같습니다.”
김태승 중령도 황당하고 화가 나는지 얼굴이 벌게진 채 목소리 높여 나에게 항변하고 있었지만 난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다만 눈을 질끈 감을 뿐이었다.
***
경무대에 모여 대책 회의를 하던 각료들은 갑자기 울리는 총소리에 회의를 멈췄다.
“이거 총소리 아닙니까?”
“맞는 것 같습니다. 최루탄 소리는 아닌 것 같습니다.”
“그럼 공포탄 소리입니까?”
국방부 장관이 대답하였다.
“공포탄은 아닌 것 같습니다. 카빈총은 공포탄이 없습니다.”
국방장관 대답에 각료들이 모두 경악한 표정을 지었다.
“그럼 시위대를 향해 실탄을 발포한 겁니까? 경찰이 미친 거 아닙니까? 지금 불난 집에 기름 붓는 겁니까?”
각료들의 시선이 모두 내무부 장관에게 쏠리자 곤란한 표정을 한 채 입을 여는 내무부 장관이었다.
“시위대를 향한 것이 아닐 수도 있습니다. 경고 사격일 수도 있으니 섣부른 판단보다는 확인이 먼저입니다.”
그때 문이 열리며 한 남자 들어왔다.
“장관님들 큰일 났습니다.
제4 방어선인 경무대 앞 언덕에서 시위대에 의해 방어선이 무너질 위기에 처하자 경찰이 시위대를 향해 실탄을 발포하여 수십 명의 사상자가 발생했습니다.”
“제정신들이야?”
“뭐라고? 이런 미친!”
“누가 발포를 명령한 거야?”
“그건 잘 모르겠습니다. 현장 지휘관의 명령이 아니면 우발적인 발포일 수도 있습니다.”
“큰일이네.”
눈치를 보던 내무부 장관이 옆에 앉아 있는 국방부 장관에게 작은 목소리로 말하였다.
“일은 이미 벌어졌고 이제는 수습해야 할 때입니다.”
“어떻게 말입니까? 사상자가 발생했다는데.”
“계엄을 선포해야만 합니다.”
놀란 눈을 하며 되물었다.
“뭐라고요? 지금 계엄을 선포하자고요?”
“네. 그렇습니다. 피를 본 시위대가 앞으로 어떻게 나올지 모릅니다. 이제 경찰로는 막기가 불가능해졌습니다. 도와주십시오.”
“군 병력 동원은 마음대로 할 수 없습니다. 신중히 할 수밖에 없습니다.”
“계엄이 아니면 이 소요 사태를 해결할 수가 없습니다. 더 큰 폭동으로 번지기 전에 시급히 잠재워야만 합니다.”
“병력 동원은 유엔 사령관의 허락을 받아야 합니다. 근데 사령관이 지금 미국에 가 있어 부재중입니다.”
“부사령관이 있지 않습니까? 사령관 부재 시에는 부사령관이 사령관을 대신하지 않습니까?”
“제가 걱정하는 것은 계엄을 선포했을 때 더 큰 불상사가 일어날 것 같아서입니다.
군인이나 학생이나 한창 혈기가 왕성한 시기인데 피를 본 시위대로 인해 서로 감정이 격해지다 보면 우발적으로 어떤 일이 발생할지 모릅니다.
더 큰 유혈 사태가 일어날 수도 있습니다.”
‘탕, 탕, 타당탕.’
총소리가 연신 울리자 내무부 장관과 국방 장관의 표정이 순식간에 굳어졌다.
“일은 점점 커지고 있습니다. 지체할 시간이 없습니다.”
잠시 고민하던 국방 장관이 입을 열었다.
“알겠습니다. 해보죠.”
“감사합니다. 그리고 하나 더 부탁 좀 하겠습니다.”
“부탁이 뭡니까?”
“계엄 발표를 하게 되면 계엄 발령 시간을 오후 1시로 해주었으면 합니다.”
“이 사태를 만들고 경찰은 책임을 회피하겠다는 겁니까?”
“회피하겠다는 게 아닙니다. 소요 사태를 조금이나마 진정시키려는 조치입니다. 꼭 필요합니다.
발포가 계엄 상황 때 이루어지는 것이 조금이나마 정당성을 확보할 수 있습니다. 작은 소소한 부분이라도 괜히 시위대를 자극할 필요가 없습니다.”
“알겠습니다.”
“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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