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19 혁명(7)
출근하여 소파에 앉아 커피를 마시고 있는데 전화벨이 울렸다.
(참모장 진민재입니다.)
(안녕하십니까? 실버입니다.)
(아침부터 웬일입니까?)
(소식 들으셨습니까?)
(무슨 소식 말입니까?)
(오늘 새벽 5시부터 시민들이 의사당 앞으로 모이더니 지금은 광화문 거리를 꽉 채울 정도로 수만 명의 학생, 시민들이 모였습니다.
어제저녁 시위대의 파괴, 방화 사건이 발생했는데 오늘은 새벽부터 모이는 등 분위기가 심상치 않습니다.
큰일이 벌어질 것 같은 예감입니다.)
아침부터 전화하고 급했나 보네. 목소리를 들어보니 꽤 걱정하는 것 같았다.
걱정도 팔자네. 오늘 오전에 이송만이 하야 발표를 하기에 걱정할 필요는 없었다.
근데 나에게 전화한 것을 보니 이제는 날 완전히 신임하는 건가? 그게 아니라면 굳이 나한테 전화할 필요가 없을 테니까.
(잘 아시지 않습니까? 이 사태를 해결한 모범답안을요. 이젠 시간이 없습니다. 교수들까지 나선 마당에 더는 지체하면 안 됩니다.)
(우리도 이송만 대통령에게 우리의 뜻을 직접적으로 간접적으로 전달하는 등 노력을 했었습니다.
조금 후에 저와 대사, 유엔 사령관 매그루더 장군과 함께 이송만 대통령을 만나 마지막으로 강하게 결단을 촉구할 겁니다.
문제는 이송만 대통령이 결단을 내려야 하는데 고집을 부릴까 염려됩니다.)
(이송만 대통령도 보고를 받았을 겁니다. 더는 버티지 못하고 결단을 내릴 겁니다.)
(진 소장은 이송만 대통령이 결단을 내릴 거라는 말입니까?)
(네. 이제 막다른 골목에 다다랐습니다. 더는 갈 길이 없다는 겁니다. 그러니 두 손을 들 수밖에 없습니다.)
(제발 그랬으면 좋겠습니다.)
(그렇게 될 겁니다.)
전화를 끊고 김태승 중령을 불렀다.
“부르셨습니까? 각하!”
“황 중위 시내에 나갔지?”
“네. 그렇습니다. 오늘 출근하지 않고 바로 시내로 나갔습니다.”
“보고 들어왔어?”
“아직입니다.”
“연락 오면 바로 나한테 보고하도록.”
“알겠습니다.”
몸을 소파에 기대고 눈을 감고 있는데 문 열리는 소리가 들리더니 김태승 중령이 급하게 뛰어들어왔다.
“각하!”
목소리에서 중대함과 다급함을 느꼈다. 드디어....
“왜 이송만 대통령이 하야라도 한데?”
놀란 눈을 하였다.
“네? 어떻게 아셨습니까?”
“그게 유일한 해답이니까. 순리대로 흐르는 거지.”
김 중령 손에 라디오가 들려있었다.
“들고 왔으면 틀어봐.”
“네.”
멍하니 나를 바라보던 김 중령이 얼른 라디오를 테이블에 내려놓고 틀었다.
틀자마자 바로 이송만의 하야 성명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나는 해방 후 본국에 돌아와서 우리 여러 애국 애족하는 동포들과 더불어 잘 지내왔으며 이제는 세상을 떠나도 한이 없으나............. 내가 사랑하는 남녀 애국 동포에게 간곡히 부탁하는 바이다.)
하야 성명이 끝이 났다.
이로써 수백 명의 피를 흘린 419 혁명이 막을 내렸다.
***
사식은 삼촌은 소파에 앉아 심각한 표정으로 생각에 잠기고 있었다.
이송만 대통령이 하야하고 허종 과도 내각이 출범한 후로 자신의 뒷배를 봐주던 전 내무부 장관과 자유당 인사들이 부정 선거로 체포되고 정치 폭력배들이 검거되었다.
자신도 부정 선거에 관련이 되기는 했지만 큰 역할이 아니라서 검거 열풍에서는 벗어났다.
하지만 자신은 이제 끈 떨어진 연 신세가 되어 자신의 운명이 어디로 날아갈지 한 치 앞도 모르는 풍전등화의 신세가 되었다.
이럴 줄 알았으면 민주당 인사들과도 친밀한 관계를 맺어둘 걸 하는 후회가 들었다. 자신은 자유당이 영원할 줄 알았다.
하늘이 무너져도 솟아날 구멍이 있다고 자신이 아는 정치계, 경제계, 군부, 인사들이 많아 희망을 버릴 정도는 아니었다.
하지만 문제는 대부분이 자유당과 정부에 관계된 인물들이라 세상이 뒤집힌 지금은 큰 기대를 할 수 없어 새로운 든든한 뒷배가 필요하였다.
순간 찻집에서 본 진민재 소장이 생각났다.
자신은 어렸을 때부터 살기 위해 별의별 짓을 하다 보며 살다 보니 남들보다 감이 뛰어났다.
지금은 존재감이 없고 이름 없는 자이지만 앞으로 크게 될 자라는 감이 처음 봤을 때 강하게 느꼈다.
소리를 질렀다.
“장 비서.”
40대 중반의 남자가 다가왔다.
“네.”
“내가 진민재 소장 알아보라는 건 알아봤어?”
“네. 그렇지 않아도 보고드릴 예정이었습니다. 보고서 가져오겠습니다.”
비서가 자기 책상에서 보고서를 가지고 왔다.
“조사 내용입니다.”
보고서를 받아 보다가 생각보다 별 내용이 없자 미간을 찡그렸다.
“뭐야 이게 다야?”
“네. 그렇습니다. 조사해보니 나오는 게 없었습니다. 군을 통해 확인했는데도 별거는 없습니다.
보시는 바와 같이 특별한 점은 없고 죽은 듯이 조용히 자기 할 일만 하며 지내온 인물입니다.
다만 특이한 점은 5월 2일부로 중장 진급과 동시에 1군 사령관으로 영전된다는 것이 전부입니다.”
자신이 원하는 건 진민재 소장을 파고 들어갈 틈이었다. 하지만 그 틈이 보고서에는 없었다.
남자라면 더구나 군 장성인데 돈, 권력, 명예 같은 야망이 있을 텐데 그런 것에 전혀 관심이 없고 샌님처럼 문학을 좋아한다니?
심지어 여자관계도 깨끗하였고 부정도 저지르지 않은 청렴한 자였다.
순간 자신의 감이 틀렸나 하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고개를 저었다. 아니지. 중장에 1군 사령관만 해도 어마어마한 힘이 있지. 뒷배로는 충분하였다.
앞으로 진민재와 민주당 인사들과 연을 맺으면 다시 일어날 길이 보일 것 같았다.
“진민재 소장에 대해 다시 한번 자세히 알아봐. 특히 사생활 쪽으로.”
“알겠습니다.”
“그리고 민주당 유력 인사들에 대해서도 자세히 알아보고.”
“알겠습니다.”
***
조금 전에 진급식을 끝내고 진급식에 참석한 인사들과 축하 인사를 나누고 지금 참모총장 사무실 문 앞에 서 있었다.
안으로 들어가려다가 어깨에 별 3개가 달려서인지 어제보다 어깨가 더 무겁다는 생각이 들었다.
실제 2개에서 3개가 되었으니 무게상으로는 더 무거워진 것은 사실이지만 체감상으로 느낄만한 무게는 아니었다.
기분 탓인가?
안으로 들어가자 송유찬이 안절부절못하고 씩씩거리며 사무실을 왔다 갔다 하고 있었다.
그 모습이 마치 잔뜩 성난 멧돼지를 연상시켰다.
“무슨 일인데 그래?”
“열불이 터져서.”
“진정하고 앉지.”
소파에 앉았다.
“자네 박종회 소장 아는가?”
“알기는 알지.”
“나 참 어이가 없어서.”
혀를 차며 송유찬이 테이블에 있는 편지를 들어 나에게 건넸다.
“읽어 보게나.”
편지를 받아 읽어 보았다.
박종회가 송유찬에게 보낸 편지로 부정 선거에 책임을 지고 물러나라는 내용이었다. 그래서 화가 잔뜩 난 거네.
“이 괘씸한 놈 어떻게 했으면 좋겠어? 감히 부하가 상관에게 물러나라고 해? 이건 하극상이야.”
꽤 화가 나 있었다.
원 역사에서는 송유찬은 석두 장군이라는 별명답게 이 문제의 처신을 잘못하여 박종회의 위상만 높여주고 스스로 얼굴에 먹칠만 하였다.
이런 일이 있으면 박종회를 불러 따로 조용히 이야기하던가 아니면 비밀리에 보복하든가 해야 하는 데 온 동네방네 소문을 내는 바람에 모르는 이가 없게 된다.
뭐라고 대답할까? 이 일로 군 내부에서 박종회의 위상이 올라가는데 원 역사대로 가만히 흘러가게 만들어야 하나?
아니면 박종회의 위상이 올라가는 것을 막아야 하나?
가만! 조만간에 박종회가 조총련계 자금 지원설에 휘말리게 되는데. 고민이었다.
이번 기회에 박종회를 날려버리는 게 좋을까? 아니면 원 역사대로 흘러가는 게 좋을까? 고민이었다.
내가 직접 쿠데타를 일으키는 것보다는 박종회의 쿠데타를 내가 진압하고 군정을 실시하는 그림이 더 좋으니 원 역사대로 흘러가는 것이 더 좋다.
다만 진압의 정당성을 확보하고 군 내부의 분열을 막기 위해서는 박종회의 위상이 올라가는 것은 막는 편이 더 나을 것 같았다.
“흥분하지 말고 냉철하게 판단하게.”
“어떻게 냉철하게 판단해? 내가 그놈에게 봐준 편의가 얼마인데 배은망덕하게 감히 뒤통수를 쳐?
은혜를 원수로 갚다니 씹어 먹어도 부족한 놈이야.”
“자네 심정이 어떤지 잘 아네. 그렇다고 흥분한다고 해결되는 것은 아니야.”
“내가 어떻게 했으면 좋겠는가?”
“자네는 어떻게 했으면 좋겠는데?”
“.........”
대답이 없었다. 화가 났지만, 막상 어떻게 할지는 생각이 없겠지.
당연하지. 할 수 있는 게 없으니 나한테 물어보는 거지.
민주주의를 원하는 419가 끝난 지 며칠 안 되었는데 참모총장이라도 죄가 없는 장성을 어떻게 하겠어?
“그냥 없던 일로 하게.”
“뭐?”
갑자기 주먹으로 탁자를 치며 벌떡 일어섰다.
“부하에게 조롱을 당했는데 없던 일로 하라고? 자네 일이 아니라고 너무 무심하게 말하는 거 아닌가?”
진짜 화가 많이 났나 보네.
“흥분하지 말고 앉아 보게.”
다시 소파에 앉았다.
“공자가 길을 가다가 길 가운데서 똥을 누는 사람을 보고는 아무 말 없이 피해갔지만 길 가장자리에 똥을 누는 사람에게는 꾸짖었다는 것을 아는가?”
“아네.”
“공자가 왜 그랬을까? 생각해보게. 똥 묻은 개가 짖는다고 대꾸하면 자신도 똥 묻은 개가 되는 거네.
공자처럼 무시하는 게 좋네.”
“무슨 말인지 알지만 생각할수록 괘씸해서 가만히 있을 수가 없네.”
“박종회가 왜 이런 편지를 보냈다고 생각하나? 그 의도를 생각해보게. 박종회는 지금 자네가 멧돼지처럼 날뛰기를 원하고 있을 걸세.”
“그게 무슨 말인가?”
“자네는 성질이 급해. 앞뒤 생각하지 않고 제멋대로 행동하지.
자네가 이 일을 가지고 동네방네 소문을 내면 자네 얼굴에 침 뱉는 꼴이고 박종회는 영웅이 된다는 거네.
부정부패에 학생과 시민이 들고일어난 것처럼 상관의 부정에 용기를 내어 직언했다는 것을 젊은 장교들이 알아보게.
졸지에 박종회는 그들에게 영웅이 되고 자넨 부정한 상관이 되는 걸세. 사실 자넨 부정 선거를 지시했기에 그 책임에서 벗어날 수가 없네.
그러니 부정 선거라는 말이 거론되지 않고 묻히는 것이 좋다네.”
내 말을 듣고 잠시 생각하다가 입을 열었다.
“자네 말을 들어보니 내가 큰 실수를 할뻔했네. 여우 같은 놈이야. 내가 그놈 의도대로 놀아날 수는 없지.”
“잘 생각했네. 기분이 나쁘고 화가 나겠지만 감정적 보다는 냉철하게 현명하게 처신해야만 하네.”
편지를 들어 갈기갈기 찢었다.
“이제 이 편지는 기억에서 깨끗이 지워버리게.”
“알겠네. 내가 반응이 없으면 그놈이 또 편지를 보내지 않을까?”
“보낼 수도 있고 보내지 않을 수도 있네. 또 보내면 아예 읽지도 말고 그냥 찢어버리게. 그게 마음이 더 편할 걸세.”
“알겠네. 오늘 자네 진급이라 축하를 해주어야 하는데 미안하네.”
“난 괜찮네.”
“원주는 언제 내려갈 건가?”
“내일 아침 일찍 갈 걸세.”
“진급 축하하네.”
“다 자네 덕분이야.”
역사책으로만 보던 송유찬이었는데 실제 보니 단순한 인물이었다.
이런 자가 어떻게 419 혁명 때 국민 편에 섰을까? 지금도 이해 불가였다.
만약 송유찬이 이송만에 자유당에 충실하여 발포하는 등 강하게 시위를 진압했다면 419 혁명은 실패하고 큰 유혈 사태가 벌어졌을 것은 당연한 사실이었다.
어쩌면 송유찬이 419 혁명의 숨은 공로자일 것이다.
Comment ' 11